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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 비트겐슈타인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세계를 언어로 명제화할 수 있다”며 치밀한 인공언어의 세계를 구축…‘정보이론’으로 출발해 ‘소통이론’으로 전환하는 현대적 발상 보여줘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언어로 명제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며 자신의 이론이 지닌 취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네덜란드 화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그림 <폭포(Waterfall)>(1961)는 매우 역설적인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분명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물레방아가 돌아가지만, 물레방아 밑으로 떨어진 물은 다시 물레방아 위로 올라가고 있다.

떨어지는 폭포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처음에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때문에 얼핏 보면 충분히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실상은, 비현실적이다. 중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적인 공간에서는 밑으로 떨어진 물이 다시 위로 올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비현실적인 사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에셔의 그림은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세계가 아니라 역설적인 사태, 즉 가상적인 논리적 사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크레타인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고, 한 크레타인은 말했다”는 문장이 그러하듯 에셔의 그림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논리적 법칙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명제가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진리’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논리학의 견지에서 볼 때 이렇게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떤 현실적 함의도 갖지 못하는 공허한 형식에 불과하다. 가령 ‘어떤 것은 P이거나 –P이다’라는 명제가 그러하다.


▎에셔의 석판화 <폭포>. 밑으로 떨어진 물이 다시 위로 올라가는 이 그림은 비현실적 이라기보다는 가상적인 논리적 사태를 묘사하고 있다.
‘철수는 사람이거나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항상 참일 수밖에 없다. 이 명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다. 그렇다면 이 형식이야말로 태고부터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던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명제는 현실에 대해서 아무 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는 사고의 법칙에 불과하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자신의 초기 저서인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 이하 <논고>로 약칭)에서 항상 진리인 이러한 명제를 ‘항진명제(Tautology)’라고 부른다. 이러한 항진명제는 인간이 추구해온 현실의 진리가 아닌 그저 인간 사고의 법칙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항상 참의 값이 나오는 항진명제란 현실의 구체적 진리가 아니라 논리적 사태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항진명제란 항상 진리가 될 수밖에 없는 사고의 법칙으로서 현실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항진명제는 하나의 인위적 법칙과 다름없다.

모순명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순명제란 항진명제와 반대로 항상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 명제다. ‘어떤 것은 P이면서 동시에 –P이다’라는 명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철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항진명제가 항상 참이듯이 모순명제는 항상 거짓이다.

여기서 철수 대신 어떤 것을 대입시켜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모순명제는 현실과 전혀 대응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아닌 것을 충족시키는 현실대상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명제는 하나의 인위적인 논리 형식 혹은 법칙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이러한 인위적 논리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흔히 말하는 ‘인공언어(artificial language)’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인공언어를 구축하고자 하는 데에는 뚜렷한 목적이 존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논리적 형식에 의해서 제약된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참된 경험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확실한 논리적 형식을 구축함으로써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참된 모습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물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그의 이런 생각이 결코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들, 가령 신과 영혼의 문제 혹은 아름다움을 다루는 예술의 세계나 도덕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논리적으로 완벽한 인공언어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데는 분명한 동기가 존재한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언어 혹은 논리적 형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한, 비록 인공적인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정확하게 현실의 세계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정확하게 세계와 대응한다는 사실을 세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이른바 그의 유명한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 등장한다. 세계는 하나의 그림이며, 이 그림은 정확하게 언어로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림과 언어의 구조는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묘사될 수 있다면 세계라는 그림의 가장 기본단위는 하나의 개별 사물들, 즉 대상일 것이다. 이는 언어의 단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상들은 하나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가령 책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대상들의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은 ‘사태(a state of affairs)’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태는 언어로 보자면 가장 단순한 명제, 즉 원자명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실세계의 그림은 하나의 사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태로 이뤄져 있다. 가령 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으며, 책상은 네 개의 다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다리는 대리석 바닥과 맞닿아 있으며, 책상 위의 책은 천장을 향해 펼쳐져 있는 등 무수히 많은 사태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사태들의 결합에 의해서 이뤄진 복합적인 실상을 ‘사실(fact)’이라고 부르는데, 사실이라는 그림에 대해서는 복합명제가 대응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마치 사실이 사태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듯이 복합명제는 단순명제(원자명제)들의 함수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화면의 한 장소에는 두 가지 색이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들라크루아는 녹색과 녹색의 보색인 보라색으로 잔디를 칠하는 등 한 장소에서 두 가지 색을 즐겨 사용했다. 사진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미학에 영향 끼친 ‘그림이론’

논지를 약간 벗어난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은 넬슨 굿맨(Nelson Goodman)이나 윌리엄 미첼(William Mitchell)과 같은 미학이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굿맨은 그림과 언어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미첼 또한 그림의 성격을 띠지 않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으며 역으로 언어의 성격을 띠지 않은 그림이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론은 모두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문을 닫아라”라는 명령을 받은 자는 문을 닫는 장면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문을 닫을 수 없다. ‘책상 위에 책이 있다’는 명제 또한 책상 위에 책이 있는 사태, 즉 그림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는 역(逆)으로도 마찬가지다. 책상 위에 책이 있다는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상과 책이라는 사물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야 하며 책이 책상 ‘위’에 있다는 논리적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어떠한 논리적 판단이나 언어적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망막에 어떤 상이 맺힌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파악할 수 없다.

세계를 그림으로 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물론 언어와 이미지(그림)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의 핵심은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대응의 관계는 <논고>에서 증명의 대상이기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다시 논의로 되돌아오자.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언어로 명제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전제에서 그는 언어를 최대한 명확하게 다듬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가능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언어에 대한 논리적인 규명과 철저한 분석적 태도야말로 세계의 경험가능성에 대한 가장 확고한 기반을 놓는 셈이다.

사실 단어와 사물이 대응하고 사물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단순한 사태가 원자명제에 대응하며, 복합적인 사태로 이루어진 사실이 복합명제에 대응한다는 생각은 순진할 정도로 소박한 믿음에 기초한 듯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순진한 생각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도 있다. 만약 단어를 숫자 단위로 정보화하고, 단어들의 관계 역시 숫자 단위로 정보화하여 원자명제를 정보화하고, 나아가 원자명제들의 함수관계를 숫자 단위로 정보화한다면 복합명제까지 완벽하게 정보화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모니터상에 나타나는 색상이나 그림, 음성 등 모든 것이 명제와 명제의 함수관계로 처리된 결과가 바로 디지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의 그림이고 이 그림이 명제화될 수 있다는 전제가 바로 디지털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프레게와 튜링은 세계라는 그림을 명제화하는 수학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곧 세계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에 대해서 갖는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는 그의 모든 철학이 오로지 논리학에 집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저 대리석 조각의 색감이 매우 아름답다”는 미학적 판단이나, “인간은 자신의 부조리한 운명에 대해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상학적인 판단은 <논고>에 나타난 엄격한 논리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고>에서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 물음이나 예술의 차원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철학자들의 책을 읽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탐독한 책 중의 하나가 키에르케고르라는 사실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그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삶의 절대적 역설을 강조한 키에르케고르를 찬양하였다. 게다가 일생을 통틀어서 그가 일관되게 흥미를 가진 것은 음악이었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과 예술을 배격하였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공언어’의 취약점

그렇기 때문에 <논고>에서 그가 매우 치밀한 인공언어의 세계를 구축한 것은 이러한 세계만이 유일하게 참된 세계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는 <논고>를 통해 인간이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이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마치 아포리즘과도 같은 <논고>의 구절은 이 책이 의도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명제를 다듬고 언어를 분석하여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인공언어의 세계를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한계는 명확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논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미학적 세계나 도덕적·형이상학적 세계에 논리적 잣대를 댈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명제화할 수 없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즉 형이상학이나 예술에 대해서 그것을 명제화하려고 할 때 철학자의 오만함과 월권의 행위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인은 오로지 논리적인 것만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보는 편협한 사상가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면모가 결코 <논고>에 나타난 논리주의의 딜레마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앞서 본대로 그는 완전무결한 논리적 세계로서의 인공언어를 구축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논리적 세계는 그 자체로서 이미 이론적 균열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소 지엽적일 수도 있지만 ‘색(color)’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를 잘 드러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색에 관해 간헐적으로 언급하는데, 이들 언급에 나타난 핵심적인 주장 중의 하나는 ‘한 장소에서 두 가지의 색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사과가 여러 개의 색을 지니고 있을 수는 있지만, 어느 특정한 공간의 한 점에서는 반드시 하나의 색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가 여러 개의 색을 지니는 것은 한 점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색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색을 지닌 지점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장소에서 두 가지 색을 경험하는 것이 마치 ‘어떤 것이 P이면서 동시에 –P이다’라는 명제만큼이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생각이 현실적으로 맞는 것일까?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잔디의 색을 칠하기 위해서 녹색만이 아닌 녹색의 보색인 보라색을 칠하였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화면의 한 장소에는 녹색과 보라색이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잔디를 시각적으로 경험할 경우 그것은 분명 한 장소에서 녹색과 보라색의 중첩으로 경험된다.

어떤 공간이든 다양한 파장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특정한 파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파장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잔디를 녹색이라는 파장의 특성만으로 이해할 경우 오히려 잔디는 현실과는 다른 잔디가 되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가 지닌 가장 취약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가 <논고>에서 구축한 논리적 세계는 인공언어의 세계이며 이는 애초에 현실과 다른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림이론은 현실과 언어의 대응을 전제로 하지만 이 그림이론은 <논고>에서 전제된 것이지 결코 증명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취약성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비트겐슈타인에 어떠한 감점의 요인으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자신의 이론이 지닌 취약점과 한계를 자각하였으며, 이를 겸허히 인정하고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정보이론으로부터 시작해 소통이론으로 이동했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언어는 게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가 <논고>라면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 suchungen, 1953, 이하 <탐구>로 약칭)이다. 두 저서를 관통하는 일관성은 두 저서 모두 언어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상반된다.

초기의 저서가 인공언어에 집중하고 있다면, <탐구>에서 고찰되는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언어가 지닌 규칙성에 대한 상반된 접근과 맞물려 있다. <논고>에서 언어의 규칙은 엄격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어떠한 오류도 용납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서 <탐구>에 나타난 언어의 규칙은 엄격한 법칙이라기보다는 게임의 규칙과도 같은 것이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언어활동을 게임으로 종종 비유하는데, 게임에서 규칙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닌 게임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유동적인 규칙에 불과하다. 가령 땅따먹기와 같은 게임의 규칙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땅따먹기라는 게임을 수행할 수 있고 그 게임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규칙이다. 이 규칙은 항진명제나 모순명제의 성격을 지니는 것도 아니며, 엄격한 함수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놀이를 수행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단어를 빌자면 게임의 규칙은 그것에 참가한 사람들이 게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인터페이스’에 불과하다. 이렇게 언어를 게임에 빗대어 설명한다는 것은 곧 언어가 그것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언어활동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는 것임을 전제한다.

언어의 의미나 규칙은 전적으로 언어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규칙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양식(forms of life)에 기반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개념은 후설의 ‘생활세계(Lebenswelt, forms of life)’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후설에게 모든 언술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 지층이 ‘생활세계’였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삶의 양식’이란 언어적 특성을 형성하는 기반을 의미한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규칙을 더 이상 보편인 법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모든 언어는 제각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맞물려 있으므로 다양한 특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삶의 양식이 지닌 다양성만큼이나 언어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언어는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기도 하다. 이러한 공통적 특성은 더 이상 논리적인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언어가 지닌 공통적 특성을 지칭하기 위해 ‘가족 유사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가령 외견상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해주는 엄격하고도 보편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한국인들은 어떤 외모적 유사성이 존재한다. 가족 간에도 매우 엄격하게 어떤 동질적 특성을 규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를 외모상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바로 이러한 유사성을 ‘가족 유사성’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언어는 서로 다르고 구분되지만 왠지 모를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논리적 보편성이 아닌 어떤 직관적이고도 모호한 유사성인 것이다.

정보이론에서 소통이론으로

비트겐슈타인 초기의 언어이론은 그림이론에서도 나타나듯이 세계와 언어와의 대응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탐구>에 나타난 언어이론은 게임의 개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언어의 활동과 소통에 맞춰져 있다. 이는 매우 급진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사상은 언어를 세계의 재현, 즉 정보로서의 활동에 주목하는 반면 후기의 사상은 단순한 정보이론이 아닌 소통이론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언어를 근본적으로 공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사적인 사용 혹은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적 언어란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의미한다.

가령 누군가가 공사장을 지나다가 못에 팔이 긁혀서 ‘아야’ 하고 비명을 질렀다고 치자. 이 ‘아야’라는 말은 단지 자신의 아픔에서 비롯된 결코 누군가를 겨냥하지 않은 사적인 언어일까?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아야’라는 비명은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는 발화활동이며, 이 발화활동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행위인 것이다. 옆에 누군가가 없다 하더라도 사태는 다르지 않다. 설혹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발화하는 순간 이미 잠재적인 누군가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감정(private feeling)’과 ‘사적 언어’를 구분한다. 그는 사적 감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누군가가 배가 콕콕 쑤실 경우 그 감정은 다른 어떤 사람과도 공유할 수 없는 사적인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배가 콕콕 쑤신다’고 표현할 경우 이 말은 이미 사적인 말이 아니다. 수신자의 공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활동이라는 것은 이미 사적인 활동이 아니라 공적인 활동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언어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정보이론’으로부터 소‘ 통이론’으로의 전환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드러내는 언어철학에서의 전환을 정보이론으로부터 소통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읽을 수 있다. 언어의 의미가 세계를 재현하는 정보라는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소통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소통이론은 매우 현대적인 발상이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매우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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