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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시인 이근배의 당진(唐津) - 불교 도래지인 불국정토이자 서역 문물 받아들인 항구도시 

 

글 이근배 신성대학교 석좌교수, 사진 주기중 월간중앙 기자
신라 때 혜초와 의상, 최치원이 배를 탔던 곳, 서역 문물이 드나들던 큰 나루…소설가 심훈이 농투산이 체험을 하며 <상록수>를 집필한 고장



서역 뱃길 나루터로 번성하던 당진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서해안 시대의 개막과 맞물려 있다. 서해고속도로가 뚫릴 때 서해대교가 경기도 평택과 충남 당진을 가로질러 놓였는데 서해대교의 중앙 아치가 당진시의 관문이고, 왜목마을은 서해 일출로 새천년 아침부터 눈부시게 떠오른다.

나를 낳고 기른 땅, 내게 살과 피를 주고 햇빛과 바람, 흙과 물로 살찌우고 글 읽기와 생각을 익히게 한 온전한 고향 당진이 있어 나는 늘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나는 한글동이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옮기지 않는 호적이 당진시 송산면 삼월리 209번지에 1940년 3월 1일 생으로 적혀있으니 강점기에 태어났으나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그러니까 큰 임금 세종이 한글을 반포한지 꼭 500년이 되는 해 나는 송산국민학교에 입학해 ㄱ, ㄴ, ㄷ, ㄹ…… 한글로 국어수업을 했다. 이 나라 5천 년 역사에 최초의 정규 한글교육을 받은 모국어의 원년세대이며 한글동이다.

“너는 장학사의 외손자요 이학자의 손자라/ 머리 맡에 얘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 할머니 안동 김씨는/ 애비 에미 품에서 떼어다 키우는/ 똥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주셨다”


▎1940년생인 필자는 최초로 한글 정규교육을 받은 모국어의 원년세대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할아버지 품에서 천자문을 읽은, 한자세대의 막내이기도 했다.
졸시 ‘자화상’의 첫 구절처럼 당진읍내에서도 25리 떨어진 송산면 삼월리 한학이 깊으셨던 할아버지 품에서 나는 천자문을 읽었고 송산국민학교, 당진중학교, 당진고등학교를 꼬박 다니고 지금은 19년 전 이 고장에 세워진 신성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나는 당진의 순종이요 토종이다.

당진의 이름은 먼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의 서해 뱃길이 열릴 때 산둥성과 내포 지역이 가장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입지가 좋은 이 해안에 나루터가 생겼을 것인데 백제 때 벌수지현(伐首只縣) 또는 뱃재(船峴)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당진현(唐津縣)으로 바뀐다. 당진은 백제어로 ‘큰 나루’라는 뜻의 ‘카라쓰’인데 일본 지명에도 같은 ‘당진’이 있고 보면 당나라, 혹은 그 이전부터 오가던 큰 나루터였음을 이름이 증거하고 있다.

육로로는 고구려에 가로막혀 있던 시대 중국대륙을 거쳐 서역문물이 들고나던 대표적 항구였던 당진이니 통일신라시대에는 혜초·의상·최치원 등 승려 학자들이 천축국(인도) 또는 당나라를 가기 위해 이곳에서 배를 탔으리라는 추론도 믿음이 가는 대목이다.

우리 마을 바로 앞산이 봉화산인데 그 멧부리에 올라서 서쪽을 바라보면 맑은 날에는 산둥성이 희미하게 보인다 했고 바람이 고요한 날은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했다. 1991년 장보고가 지었다는 산둥성 석도 법화원을 찾아갔더니 그곳 스님도 “바다 건너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같은 말을 해주었다.

배가 와 닿는 채운벌은 벼농사가 잘되는 곡창지대였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나루터 객줏집 딸이 채운이였단다. 쌀밥을 맛있게 지어줄 뿐 아니라 얼굴도 곱고 중국 상인들에게 친절하게 해줘서 채운 아가씨에 대한 고마움으로 나룻배로 건너는 강에 쌀을 거두어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한다. 곡식·비단 등 생필품만이 아니라 불교와 서역·중국의 문화와 사람의 교류가 이 나루터에서 이루어졌으리라. 백제 불교는 고구려보다 12년 늦은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을 거쳐 백제에 와서 불법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영파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영랑사 대웅전. 신라 진흥왕 2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안국사지 석불입상과 5층석탑은 고려 불교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채운교와 불국정토

채운벌에서 3㎞쯤 떨어진 고대면 진관리 영파산(影波山) 기슭에 자리 잡은 영랑사(影浪寺)는 신라 진흥왕 25년(564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초창하였고 뒤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현재 절에 있는 동종(銅鐘)에는 ‘건륭 24년(영조 35년 1759년) 기묘 춘 당진 영랑사 금종(唐津 影浪寺 金鐘)’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조선 후기까지도 큰 사찰이었음을 알게 한다.

아미산은 당진의 진산(鎭山)인데 그 줄기인 상왕산 연화봉에 영탑사(靈塔寺)가 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후기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건하였는데 이 고장에서는 풍광도 아름답고 옛적의 모습을 고루 갖춘 명찰(名刹)이다. 법당의 유리광전 안에 마애석불 약사여래상을 모셨는데 고려시대 마애불상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이 절에는 보물 제 409호인 ‘금동 비로자나불 삼존좌상’이 있는데 1975년 도난당했다가 1976년 12월 14일 일본으로 밀반출 되기 직전에 다시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보조국사가 경내에 5층 영탑(影塔)을 세워서 이름을 영탑사로 지었다고 한다.

영탑사 범종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9호로 영조 3년(1760년) 가야사 법당의 금종을 녹여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내포 지방의 명산 가야산은 천하명당 자리로 이름이 나서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힐 꿈이 있던 대원군이 경기도 연천의 아버지 묘소를 이전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설이 있고 그때 가야사에 있던 동종이 영탑사로 옮겨져 새로 주조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도래지이기도 한 당진은 불국정토였다. 현재 영랑사·영탑사 외에 신암사·관음사·흥국사·보덕사 등 27개의 사찰이 불자들의 기도처로 연등을 밝히고 있으니 안국사지 등 소실된 절터는 또 얼마이랴! 그 가운데도 정미면 수당리 산102-1의 원당골 서쪽 안국산 중턱 안쪽에 있는 안국사지(安國寺址)는 1천여 평의 터가 남아 있고 11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5m 높이의 석불입상은 고려 불교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게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백제 말엽으로 보이며 전성기에는 수백 명의 승려가 수행하던 대 도량이었다.

석불입상이 1963년 보물 제 100호에 지정되면서 경내의 5층 석탑이 보물 101호로 지정되어 안국사에 대한 재발견과 문화유적으로서의 조명을 새롭게 받게 하였다. 이렇듯 중국을 통한 불교의 도래와 사찰의 창건은 당진을 중심으로 서산·예산·홍성 등 내포지방 전역에 퍼져 나갔으니 백제의 미소로 이름 난 운산의 ‘마애삼존불’도 바로 당진과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음이다.


▎입한재(立限齋)는 율곡 이이가 “스승은 될지언정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학문이 높았던 구봉 송익필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유학의 높은 봉우리

한국 사상사의 맨 윗자리에 올라있는 신라 고승이며 선각인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은 처음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입국하려다 제지당하고 배를 타기 위해 당진으로 왔다고 한다. 원효는 직산에서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 수행을 접었다 하나 의상은 이곳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간 것이 문무왕 1년(661년) 이었고 10년 만인 671년 귀국할 때도 이 뱃길을 이용했으리라. 신라·고려·조선을 거치는 1천여년 동안 절을 짓고 중수하고 불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수한 고승들의 발자취를 여기에 다 적지 못한다. 그 불국융성의 뒤를 이어 고려, 조선조의 거유(巨儒)들의 학풍과 유적이 사당, 신도비, 묘소로 널리 퍼져 있다.

고려 건국의 1등 공신이며 면천 복씨의 시조인 복지겸(卜智謙)의 생몰연대는 밝혀있지 않으나 918년 신숭겸·배현경·홍유 등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였고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성종 13년(994년) 태사(太師)에 추증되고 태조 왕건의 사당에 배광된다. 그의 딸이 심었다는 면천은행나무가 있고 민속주 두견주와 꽃샘(花井)이 그가 이곳 태생임을 말해주고 순성면 양유리에 제단이 있다.

해동공자로 추앙된 최충(崔沖, 988~1068)은 1005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승승장구해 벼슬이 수태사 겸 문하시중(守太師 兼 門下侍中)에 올랐으며 벼슬을 내려놓은 뒤에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고 이 영향으로 큰 선비들이 11개 사립학교를 설립하니 그의 사숙과 함께 12공도(公徒)로 불렸다. 이 유학의 전통이 안향(安珦, 1243~1306)으로 이어지고 조선으로 학맥이 뻗어간다. 송산면 무수리에 그의 사당인 해동영당(海東影堂)이 세워진 것을 미루어보면 이미 당진의 유교 숭상은 고려 때부터 인 것을 알 수 있다.

황희와 더불어 조선 건국을 도왔고 세종 때에 명재상으로 이름난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면천 지군사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그의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친 바가 커서 누대를 두고 칭송한다는 기록이 <신동국여지승람>에 있다. 내가 늘 오르내리던 앞산 봉화산 너머에 능안(송산면 삼월리)이 있다. 왕릉을 보지 못했던 어린 날 그렇게 우람하고 잘 조성된 묘역을 뛰놀면서도 어느 때 누구의 산소인 것을 몰랐었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왕릉의 묏자리를 찾아다니던 어떤 고관대작이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마을의 이장을 불러 화재를 만나거든 한양의 아무 대감을 찾아오라고 일렀단다.

몇 해 뒤 그 이 마을에 화재가 나서 찾아갔더니 금 한 주머니를 주어 이주를 시키고 그곳에 자기네 산소를 모셨다는 것이다. 바로 연산군 때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낸 덕수 이씨 이의무(李宜茂, 1449~1507)와 그 아들 이행(李荇, 1478~1534)의 묘소였는데 ‘능안’이라는 지명부터가 왕릉에 견줄 만 하다는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행은 연산군 1년(1495)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여러 직책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는데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고 저서로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그가 심은 회화나무가 삼월리 옛 집터에 천연기념물 317호로 아직도 청청하게 하늘을 떠받치고 있고 나는 어린 날 아름으로 나무 둥치를 재보곤 했었다.

덕수 이씨 문중의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1599년(선조32)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해 예조판서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선조 때 권필과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 이백(李白)에 비유되기도 했으며 글씨 또한 뛰어났다.

송산면 명산리에 동악서원(東岳書院)이 있고 정미면 사관리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어 동악 이안눌이 조선 중기 이 지역의 학문 융성에 크게기여한 것을 알 수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아산만 특히 한진항(漢津港) 주변의 조석간만(潮汐干滿)의 차이를 시간대로 정확히 측정하는 공식을 만드는 등 의약·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에 공부가 깊었으며 많은 기행(奇行)의 일화가 전해온다.


▎당진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빛내림. 당진은 내게 살과 피를 주고 햇빛과 바람, 흙과 물로 살찌웠다.
또한 같은 시대에 신평현(新平縣) 망객산 아래 김복선(金福善)이 살았는데, 그가 은둔하고 있으나 학문이 높고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음을 알고 율곡 이이와 토정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세상일을 의논하다가 토정과 율곡이 임진왜란을 걱정하니 김복선이 두 사람을 보며 “인신년(寅申年) 상사(喪事)에 왜 임진년 걱정을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두 손님이 멀리 떠나는 것을 산에 올라 전별했다 해서 산 이름이 망객산(望客山)이라 불리었다하며 토정은 무인년(戊寅年)에 율곡은 갑신년(甲申年)에 각각 작고하였으므로 임진왜란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이 죽는 해를 정확히 맞추었다고 해서 이인(異人)으로 알려졌다.

토정 이지함 이야기

남이흥(南以興, 1576~1627)은 아버지 유(瑜)가 1598년 정유재란 때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충격을 받아 학문을 접고 궁술과 기마(騎馬)에 전념해 1602년(선조25) 무과에 급제했다.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후금의 군대와 맞서 싸우다 무기가 떨어져 “조정이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강하게 만들 수도 없는데 강력한 적을 만났으니 죽는 것은 내 할 바이나 다만 마음껏 싸우지 못함이 한이다” 하고 오랑캐를 성안으로 끌어들여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폭사하였다.

나라에서는 좌의정에 추증하고 충장(忠壯) 시호와 충신정려를 내렸다. 대호지면 도이리 1구에 사당인 충장사(忠壯祠)와 유물관인 모충관(慕忠館),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유물은 중요민속자료 제 21호로 지정 되었으며 ‘충장공 남이흥 장군 숭모제’가 해마다 이곳 충장사에서 거행된다.

유학자였던 나의 조부 이각현(李覺鉉) 공은 일제강점기 전국의 유생들과 대도연구회(大道硏究會)라는 도의 실천을 강령으로 사회개조운동을 주도하는 등 지도력이 있었다. 당진군 유도회(儒道會) 회장으로 향교의 제향 및 당진시 원당리에 있는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산소에 제사를 지내러 가시는 것을 어려서 뵈었다. 구봉 선생의 산소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도 어떤 분인데 할아버지가 정성으로 제향을 올렸을까를 생각하면서도 정작 생애와 학문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구봉의 할머니가 양반댁 여종의 딸로 신분이 비천하다는 것과 신분이 비천하여 벼슬을 못했으나 조선조의 거유 율곡 이이가 “스승은 될 지언정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師可不可友)”고 할 만큼 학문이 높은 태학(太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율곡이 23세에 장원급제했을 때 썼다는 <천도책(天道策)>을 누가 배우고자 하자 “구봉에게 물어보라” 하였다니 그 온축(蘊蓄)을 미뤄 짐작하겠고 토정도 “구봉 같은 이를 스승으로 삼았으면 성현에 가까울 것”이라고 높였다.

당대 고학으로 널리 회자되자 김장생·김집·정홍명 등 이름 높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문하에 모여들었다. 최경창·백광훈 등과 8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큰 선비들과의 교유가 깊었으나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송산면 매곡리 김진려(金進礪) 집에 기거하다 1599년(선조32) 66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김진려와 만나게 된 것은 김복선, 토정과 함께 찾았었다고 한다. 그의 묘소와 사당 입한재(立限齋)가 당진시 원당리에 있고 구봉송익필선생기념사업회가 학술발표회 등을 주관하고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 국문 소설로 더 이름이 알려진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면천군수로 부임한 것은 1797년 그의 나이 60세였다. 1780년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이용후생의 실학에 눈을 떴고 기행문 <열하일기>는 보수정객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정치·경제·군사·천문지리·문학 등 청나라의 새 문물을 소개하여 실학사상을 일깨웠다. 연암은 당진에 군수로 온 이듬해 정조의 명으로 농서(農書) 2권을 진찬하였으니 그의 짧은 관리 이력에 당진에서의 저술은 특기할 만하다.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합덕성당은 1948년 대전교구가 설립되기 전까지 충남의 각 공소를 관할하던 대성당이었다.
솔뫼성지와 합덕성당

지금 당진이 바쁘다.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이 솔뫼성지에 오신단다. 솔뫼성지는 김대건(1821~1846) 신부가 태어나고 생장한 곳으로 우강면 송산리에 있는데 19세기 한옥으로 고가를 원형대로 보존해오다가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의 생가는 천주교의 대표적 성지로 가톨릭 신도뿐 아니라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2005년 건립된 기념관과 성당, 2011년 건립된 아레나광장·김대건 신부 동상 등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는 15세 때인 1836년(헌종2) 프랑스 신부 모방(Mau Bant)에게 영세를 받고 역관 유길진에게서 중국어를 배우고 모방 신부의 도움으로 마카오 소재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한다.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를 공부하고 조선교구 2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5년 1월 서울에 들어와 교세확장을 하다가 상해로 건너가 금가 향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다.

그해 10월 귀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1846년 6월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1857년(철종8) 로마교황청에서 가경자(可敬子), 1925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출되고 1984년 다시 요한 바오로 2세 로부터 성인(聖人) 품위를 받는다. 솔뫼성지와 가까운 합덕읍에 합덕성당(충청남도기념물 제 146호)이 있다.

장 퀴를리에(Jean Curlier) 신부가 120평의 대지를 구입해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세웠던 양촌성당을 옮겨온 것이다. 1929년 7대 주임 패랭(Perrin) 신부가 지금의 고딕식 벽돌 건물을 올렸고 대전교구가 설립되던 1948년까지 충청남도의 각 공소를 관할하던 대성당이었다.

합덕읍 대전리 21-1번지 공동묘지에는 46기의 무명 순교자의 무덤이 있다. 1972년 봄에 손자선 토마스 성인(1843~1866)의 산소가 있던 이곳을 과수원으로 개발하다가 발굴되었다. 이밖에 제 4대 교구장이던 성 안토니오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1819~1866) 주교의 유적지(충청남도 기념물 제 176호)가 합덕읍 신리 1길 43 일대에 있다. 서산 해미읍성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지도 당진의 천주교 교세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저 일제강점기에 광복을 염원하는 시 ‘그날이 오면’을 활화산처럼 터뜨린 심훈(沈熏, 1902~1936)은 1932년 송악면 부곡리에 있는 큰 조카 심재영(沈載英)의 집으로 내려온다. 서울 문화계의 기린아인 그가 산골마을로 낙향한 것은 오로지 농촌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작가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에 복원된 심훈 생가.
소설 <상록수>와 필경사(筆耕舍)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가는 농촌경제와 말과 글을 말살하는 폭압이 날로 극성을 부리자 농촌을 살리는 작품을 구상하고 그가 갖지 못한 농촌체험을 익히기 위해 당진에 온 것이다. 마침 조카 심재영이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과 ‘공동경작회’를 결성하여 농촌운동을 하고 있어 함께 농투산이 체험을 하며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다.

동아일보에 소설이 연재되면서 특히 전국의 농촌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된다. 심훈은 조카 심재영 집의 사랑채에서 기거하기보다는 집필을 하기 위해서 집을 한 채 짓겠다는 생각을 갖고 <영원의 미소> 인세로 땅을 매입하고 손수 설계해서 송악읍 상록수길 97(현재 지명)에 18평 정도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초가집을 짓는다.

“우리의 붓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장기요 연장이다” 심훈의 시 ‘필경(筆耕)’은 이렇게 시작된다. 옛 선비들이 “붓으로 밭을 간다(以筆爲耕)”는 뜻을 받은 것이다. 소설 <상록수> 출판을 위해 교정을 보러 한성도서에서 기거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1936년에 세상을 떠난다. 세계의 여러 곳에 작가의 생가, 기념관 등이 있지만 작가가 인세로 받은 돈으로 손수 설계 건축을 하고 대표작 한 편을 써낸 작가의 집은 오직 필경사뿐이 아닌가 싶다.

1997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 107호로 지정되고 심훈기념관이 세워졌으나 올해 9월 새로 큰 규모의 심훈기념관을 건립하고 개관준비가 한창이다. 매년 ‘상록문화제’가 열리고 있으며 심훈문학상도 공모하여 시상을 하고 있다. <상록수>는 심훈이 창작한 브랜드로 농촌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사)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가 해마다 ‘인간 상록수’를 선정하고 선양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서역 뱃길 나루터로 번성하던 당진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서해안 시대의 개막이었다. 서해고속도로가 뚫릴 때 서해대교가 경기도 평택과 충남 당진을 가로질러 놓였는데 서해대교의 중앙 아치가 당진시의 관문이다.

이미 관광명소로 발길이 잦은 삽교천(1979년 준공)과 서해일출로 새천년 아침부터 눈부시게 떠오른 왜목마을, 인천과 오가던 오도항, 평택으로 건너던 한진항, 맑은 모래사장 해수욕장 난지도가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인 ‘기지시 줄다리기’가 송악읍 기지시리에서 전 국민의 민속축제 한마당으로 열린다.

당진은 내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과 문학의 어머니 땅이다. 대하소설로도 다 쓰지 못할 내 고향 당진의 산과 물, 역사, 인물, 문화, 아름다운 경관, 유적 등을 이 좁은 지면에 다 못 밝히는 것이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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