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박찬일 셰프의 낭만적 음식기행 | ‘ 깊이 있는 맛’ 노포(老鋪)의 추억 

 

박찬일 이태원 ‘인스턴트 펑크’의 주방장
혼란스런 역사와 사회 급변이 오래된 점포를 하나둘 사라지게 해… ‘대물려’ 영업하는 일본인의 노동정서가 100년 넘은 노포 1만5천 개 유지케 한 비결

▎노포는 맛뿐만 아니라 역사가 숨쉬는 공간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포들은 급격한 시대변화로 자생력을 잃었다. 과거의 종로거리(왼쪽). 왼쪽에 상점가인 육의전, 오른쪽에 종각이 보인다. 사진 오른쪽은 서울의 대표적인 노포인 청진옥의 선지해장국.



요즘 한국 식당가의 유행이 있다. 가게 간판에 ‘since 0000년’이라고 쓰는 것이다. 가게의 역사를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조금 서글프지만 1990년대는 물론이고 2007·2008년까지도 등장한다. 10년 남짓 되는 것도 역사가 되는 한국의 현실이 드러난다. 그만큼 오래된 가게가 드물다는 뜻이다. 우리 상업시장의 역사에서 운종가의 육의전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그때부터 장사해온 집이 없다는 것은 중언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피륙집이나 방물집이라도 구한말 정도부터 영업하던 집이 있어야 할 텐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노포(老鋪:대대로 물려오는 점포)가 한국에 드문 것은 역사적·사회적 이유가 있다. 우선 정치적으로 대혼란을 겪느라 노포가 버틸 방법이 없었다. 구한 말의 개화기, 일제강점기, 해방 정국, 한국전쟁, 산업화 등 하루가 다를 정도로 격변기를 거치면서 안정감없는 사회를 살아왔다. 노포란 안정적 영업 환경에서 태동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한국전쟁 기간 중 수복과 피탈을 거듭하면서 장사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지속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제성장도 노포의 성장을 막는 요인이었다. 필자는 1990년대 경제호황기를 거치면서 식당의 변천사를 눈으로 확인한 세대인데, 하나의 뚜렷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식당 장사가 불이 붙듯 일어나면 우선 주방에서 일하던 주인이 카운터로 나와 앉는다. 그 다음에는 카운터도 아내나 직원에게 물려주고 고급차를 빼서 밖으로 떠돈다. 오직 40~50년을 한 자리에서 자신의 손으로 요리를 주무르는 노포의 기본조건이 성숙될 틈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장사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손님들이 밀어닥치고, 무엇보다 주방에서 구정물에 손 넣어가며 요리하는 것보다 고급차를 타고 다니며 새로 돈 될 거리를 알아보는 편이 훨씬 타산에 맞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손맛에 적당한 노하우로 가게만 열면 손님들이 구름처럼 늘어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에다 오랜 사농공상의 차별도 한몫했다. 요즘은 달라졌지만, 부모님이 식당 한다는 걸 자랑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러니, 한 10년 하면 주인이 바뀌고 노포의 자생력은 사라진다.

최근 그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많은 식당이 노포의 가치를 깨닫고 있다. 오래된 집이라는 수식어 하나로 영업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업력(業歷)에 대해 무관심하던 노포의 주인들도 마케팅에 자기 가게의 ‘주민등록번호’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언제 처음 문을 열었느냐는 것이 곧 명예와 돈이 되는 것을 감지하게 됐다. 스스로 노포의 ‘자의식’이 없던 오래된 집들이 새로 간판을 내걸거나, 기존 간판에 ‘since’를 부각해 써넣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 1937년 문을 연 청진옥은 피맛골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하고 있다가 2008년 도심재개발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960년대 청진옥의 모습(왼쪽)과 종로 피맛골 옛터인 르메이에르 빌딩 상가.
급격한 변화가 노포의 자생력 잃게 해

노포에 대한 자료 검색을 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1980~90년대에 오래된 식당을 조사해서 발표하는 기록들이 신문에 남아 있는데, 최근의 자료들과 차이가 꽤 난다. 그 시절에 노포로 등록됐던 식당들이 현재 자료에는 없는 것이다. 가게가 없어진 경우도 있지만, 성업하고 있는데 리스트에만 빠진 것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부실 조사가 한몫한다.

식당 업주의 말만 듣고 노포로 기록했지만 근거가 없어 빠지게 된 것이 꽤 많다. 이런 식이다. “우리 당숙이 저쪽 재래시장에서 원래 순대를 6·25 이후부터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고모한테 물려주고, 지금 제가 시작한 게 한 30년 되지요. 지금 가게는 대여섯 번 정도 옮겼지요, 아마.”

이 정도의 조사를 통해서 6·25전쟁 때부터 계산해 업력 60년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안정돼 있던 일본이나 유럽에 비해 기록을 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업력에 대한 자의식이 부족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불안한 사회 분위기에서 언제까지 ‘이 장사’를 계속할지 확신도 서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식당이 서비스업이며 일종의 ‘마이스터(meister)’라는 인식도 없었다.

생계를 위해 시작했으니, 굳이 식당이 아니라도 다른 생계거리가 있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었다. 필자의 모친도 한동안 식당을 운영했는데 필자의 기억으로 단 한순간도 어머니가 엄숙한 장인의 긍지 같은 걸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식구들 입에 밥을 넣어주기 위해서라는 사명감 하나로 버티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힘든 식당을 언제든지 때려치울 요량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인식이 그렇다 보니 업력 50년이라도 넘은 노포의 수는 전국을 헤아려도 손에 꼽을 지경이다. 2012년에 농림부가 발표한 ‘오래된 식당 100곳’의 리스트를 보자. 유명한 이문설농탕·용금옥 등을 합쳐봐야 일제시대에 문을 연 집은 서른 곳 남짓 된다. 1953년 개업해 서울에서도 손에 꼽히는 노포인 연남서식당(서서갈비)의 주인 이대현(72) 씨의 기억도 그렇다. 몇 번을 그만둘까 망설였는데 ‘떠밀려’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다고 술회한다. 지금 이 식당은 일본·중국의 관광객까지 줄을 서는 서울의 대표 명소다. 만약 그가 일찍이 가게를 접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은 노포의 원조 같은 곳이다. 100년 이상 된 가게만도 전국에 1만5천 개가 넘는다. 에도시대에 문을 연 가게도 많다. 에도시대는 빨라도 1867년 이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에 막부(幕府)를 열어 통치하기 시작해 나중에 이른바 천황에게 정권을 준 해가 1867년이기 때문이다. 대강 리스트를 훑어봐도 교토의 역사와 비슷한 천년 된 인절미 집 ‘이치와(一和)’,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밀국수(소바)집 ‘오와리야(尾張屋)’, 400년 된 요리집 ‘효테이(瓢亭)’에다가 400년 된 초밥집 ‘이요마타(伊豫又)’가 있다.

1789년에 창업한 빵집 ‘기무라야(木村屋)’도 빼놓을 수 없다. 기무라야는 우리가 즐겨 먹는 단팥빵의 시조 격에 드는 집이다. 최근 방문했는데, 긴자에 있는 본점에는 끝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맛도 맛이지만 역사가 이 집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군데군데 가게 역사를 자랑하는 사진과 기록들이 붙어 있다. 이미 도쿄 시민들은 빵보다는 이 집의 역사를 사서 먹고 있는 셈이라고 할까.

‘사라시나 호리이(更科堀井)’라는 도쿄의 소바집도 200년이 넘었다. 도쿄 시내인 아자부주방(麻布十番)이라는 곳에 있는데, 방문하면서 좀 놀랐다. 노포의 기세를 드러나는 느낌이 별로 없었고, 그저 동네의 전통 있는 소바집 정도의 기운을 풍겼다. 앞서 한국의 노포 역사가 짧은 이유 중에 ‘언제든 이 일을 그만둘 각오를 하고 있는 식당업주’의 분위기를 들었다. 일본의 노포 역사가 긴 이유는 일본 특유의 노동 정서와 국민성이 반영된 결과인데, 그중 하나가 ‘대를 물린다’는 점이다.

사라시나 호리이의 경우 현재 주방장이자 업주가 9대손 요리노리 호리이 씨다. 교토 최고의 식당(400년 역사)인 효테이는 15대째 대를 잇고 있다. 이 집은 필자도 못 가봤는데, 한 인터뷰에서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을 발견했다. 인터뷰어가 “어떤 정신으로 식당의 맛을 이어가고 있느냐”고 묻자 효테이의 15대손은 “아버지대와 똑같은 음식을 만들려고 늘 노력한다”고 대답했다. 필자는 이 말에서 좀 충격을 받았다. 보통 어떤 기술자나 생산자는 “늘 새롭게 내 영역을 일구고 새로운 맛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대답하게 마련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피맛골의 예전 식당가(왼쪽). 도심 재개발이 진행되기 전의 피맛골(오른쪽).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골목 주변으로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일본인의 정서 녹아든 수백 년 된 노포들

우리 정서도 그렇다. 대를 물리는 집 자식이 “아버지랑 똑같이 하는 게 목표”라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효테이는 그런 예상을 깨고 있다. 선대랑 똑같이! 이 말에 노포가 대를 이어갈 수 있는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서 사라시나 소바집이나 기무라야 같은 업소도 개업 초기의 메뉴를 잘 지키고 있다. 새로운 메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력은 언제나 개업 초기 메뉴다. 기무라야에는 벚꽃을 절여 넣은 빵이 있는데, 이것 하나를 200년 넘게 만들고 있으며 가장 많이 팔린다. 진열되자마자 금세 동이 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은 수이지만 한국의 노포도 꾸준히 제 역사를 더해가고 있다. 한국 노포의 여러 가지 경향 중에는 역사적 사건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제시대는 한국의 근대 식당업을 변화시킨 주요 요인이었다. 현재 광화문네거리 동아일보 자리에 있던 전설적인 요릿집 명월관도 일제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다. 설립자 죽농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은 조선 궁중 최고의 주방장인 대령숙수였다고 하는데, 결국 조선조 몰락은 그가 명월관을 개업하게 만든 셈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의 역사가 만들어낸 부산의 대표 음식 돼지국밥.
앞서 서서갈비는 파란만장한 한국전쟁사를 증언하는 식당이기도 하다. 이대현 사장과 그 부친(작고)은 수복과 침탈을 반복하는 서울바닥에서 생존하기 위해 원래 거주하던 노고산 지역(현재의 신촌)에서 대폿집을 열었고, 당시 비교적 값이 쌌던 소갈비구이를 시작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그의 가게에는 여전히 드럼통(도라무통)에서 고기를 굽는데, 이 조리도구이자 테이블 역시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이다. 탁자는 언감생심이었던 당시, 미군이 버린 유류 드럼통은 아주 요긴한 테이블 대용이 되었던 것이다. 현재도 전국의 대폿집과 갈비집에서는 이 드럼통을 애용하고 있다.


▎1959년 창업한 부산 서면의 마라톤집은 피란민의 역사와 함께 박정희 시대의 유산과도 같은 곳이다.
한국전쟁은 피란민을 양산했다. 부산지역 노포 중에는 피란민의 역사가 만든 집이 많다. 부산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국밥은 물론이고 냉면집도 피란민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다. 1959년 창업한 마라톤집도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의 격변기와 떼놓을 수 없다.

원래 서면은 동래부(府) 소속의 시골지역이었다. 일제의 군수공장이 들어서면서 시설과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고 한국전쟁 기간에는 피난민과 노동자들이 많이 모이게 된다.

마라톤집은 업주가 바로 피란민이다. 황해도 해주사람 민병현·김원희 부부가 부산에 피란 와서 살다가 먹고 살기 위해 천막 하나로 시작한 집이 바로 현재의 마라톤집이다.

이 집은 피란민의 역사와 함께 박정희 시대의 유산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 집 상호인 마라톤이란 메뉴의 이름이기도 한데, 번철에 해물 등속을 넣고 부친 전이다.

당시 마라톤은 ‘느린 운동’이 아니라 ‘빠르고 꾸준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앞에서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라톤처럼 좀 빨리 먹고 일어나라”고 재촉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 집에는 ‘재건’이라는 메뉴가 있어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다. 재건이란 별다른 이름이 없던 메뉴에 손님들이 붙여준 것. 재건이란 일종의 채소해물볶음 요리다.

이 집의 주 메뉴 중의 하나인 ‘어묵탕’은 당연히 일제시대에 전래된 역사적 음식이기도 하다. 이 어묵이 부산에서 유명해진 것도 한국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피란민들이 몰려든 시장에서 비교적 값싸면서 영양이 많은 어묵을 많이 튀겨 팔았고, 이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 피란민이 많았다.

영도는 유명한 피란민 거주지역인데 여기서 어묵공장을 시작, 현재까지 성업하며 부산의 어묵을 유행시키고 있는 삼진어묵이 그 역사를 증언한다. 피란민 여인들이 자갈치 시장 쪽에서 거저 얻다시피 한 잡어 새끼들을 머리에 이고 영도에 가져와서 어묵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피란민과 일제의 요리문화가 뒤섞인 대단히 기념비적인 음식이 어묵인 셈이다.

한국은 탕 문화다. 그래서 노포 중에는 탕집이 많다. 추탕·설렁탕·해장국·육개장 같은 것들이다. 그중 앞의 세 가지 음식은 서울이 원조다. 해장국은 일제시대 인천에 미두취인소(쌀 선물거래소)가 생기면서 그 지역에서도 크게 성행하는데, 평양옥 같은 노포가 아직도 건재하다. 추탕은 용금옥과 형제추탕·황보추탕·곰보추탕 같은 전설적인 집들이 거론된다.


▎서울의 추탕 명소로 예부터 이름나 있는 용금옥의 과거와 현재.



한국은 시대정신 담아낸 노포 많아

청진옥만큼 서울 한복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노포도 드물다. 온갖 정치인과 언론인, 연예인들의 단골집이었다. 1937년 창업했다.

피맛골의 터줏대감으로 활약하다가 재개발로 현재의 자리로 조금 옮겨앉았다. 청진옥은 현재 3대째인 최준용(46) 씨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피맛골의 잃어버린 한을 안고 여전히 뚝배기에 불을 넣고 있다.

청진옥이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 역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다. 알다시피 피맛골 재개발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포크레인이 상징하는 도시개발은 우리 음식 문화사의 한 자락까지도 걷어버린 셈이다. 최씨는 필자와 만나 “지금도 이 일대를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러 원래 청진옥이 있던 청진동 89번지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한다.

도심 재개발로 얻은 것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나마 길지 않은 노포의 역사, 도시의 역사를 한꺼번에 매몰해버린 것은 아닐까. 1981년 청진옥이 둥지를 튼 피맛골 일대에 재개발 계획이 세워졌다. 피맛골이란 종로1~3가에 이르는 뒷길로,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에 고관들이 지나갈 때 민중이 그 행차를 피한다고 하여 속칭 피맛골로 명명된 역사적 지명이다. 이런 역사성 때문에 시민들의 반대로 연기되다가 기어이 2004년에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이 착공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씨는 일종의 트라우마를 호소한다. 고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살아 남은 자들에게는 멍에가 얹어진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청진동 89번지. 땅은 있지만, 그에게 89번지의 기억은 사라진 셈이다. “2008년 8월 3일 오후 5시. 청진옥이 본래의 자리에서 사라지던 순간이지요.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어요.”

노포가 사라지는 것은 역사를 잃는 것

설설 끓는 무쇠솥, 김이 허옇게 오르는 뚝배기, 그리고 한 그릇의 해장국. 우리 음식의 상징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음식이다. 해장국은 국물 요리 중심의 한국요리에서 고단한 세월을 드러내는 음식이기도 하다. 해장국은 뭐랄까, 노동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청진동은 서울 토박이는 물론이고, 강북의 도심에서 생활한 수많은 시민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땅이다. 주요 회사들이 이 동네를 거점으로 성장했고, 지금도 한국 역사 1번지에 기꺼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피맛골에는 빈대떡으로 유명한 열차집도 있다. 원래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무허가 공간에서 기다랗게 영업한다고 해서 ‘열차집’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현재 피맛골에서 물러나 인근의 공평동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필자가 인터뷰차 방문했더니 노구를 이끌고 윤해순·우제은 씨 부부가 일하고 있다. 현재는 아들 상건 씨에게 일을 맡겼지만, 1주일에 3일간은 저녁마다 나와 손님을 맞는다.

1954년에 문을 연 이 업소는 부부의 고모인 창업주에게서 1977년에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때 의사회관과 여관, 식당들이 늘어서 있던 광화문 골목의 역사를 그들은 기억하고 있다. 도시는 팽창하고 변화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 역사는 남겨서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명사회다. 그 역사의 방점에 노포가 있었다. 우리 선배들은 거기서 배를 채우고 회포를 풀고 고단함을 잊었다. 윤씨 부부는 광화문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발언을 했다.

“서울이 거기 있었지요. 서울 광화문이 서울 한복판이었잖아요. 육영수 여사 서거, 십이십이, 유월항쟁…. 그런 역사가 다 거기에 있었거든. 우리는 너무 역사를 우습게 보는 거요.”

노포가 사라지면 역사가 사라지는 것일 게다. 추탕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서울의 대표 음식 중의 하나다. 주로 밥집과 목로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 용금옥은 언론인들에게 아주 유명한 곳이다. 독립투사인 고(故) 이용상 씨의 저서 <용금옥시대>에는 수많은 역사적 일화가 등장한다. 오죽하면 책 제목이 용금옥시대이겠는가.

용금옥은 북한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이용상 씨가 일제시대때 중국에서 9개월간 동고동락했던 사람이 바로 김영주였다고 한다. 1953년 휴전회담이 한창일 때 북쪽 대표단 중의 한 명이 남쪽 대표부에게 “용금옥은 아직 잘 있습니까”하고 물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울에서 살다가 월북한 인물의 발언이었다. 이것이 신문에 크게 소개되면서 용금옥이 장안에서 입길에 올랐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화해 시기,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그가 이틀 연속으로 용금옥에 들러 추탕을 먹는 바람에 다시 한번 용금옥의 가치를 입증해준 적도 있다. 용금옥은 현재 형제간에 분가해 통인동과 다동 두 군데서 탕을 끓이고 있다.

이제 노포의 가치는 손님과 업주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과거처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까지 그대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역사와 시대를 증언하는 노포가 더 내용 있게 역사를 이어가기 바라는 이가 많다.

201408호 (2014.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