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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국의 始原 | 옌안대장정의 길⑥ - 마오얼가이 습지에서 치명적인 적(敵)을 만나다 

장정을 떠난 지 239일 만에 제4방면군과 만난 중앙홍군… 기쁨도 잠시, 누울 수도 없는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악마의 행군 

글·사진 윤태옥 다큐멘터리 작가·제작자
역사의 물줄기는 단답형이 아니다. 달은 차면 기울고, 희열의 정점에서 고통이 시작되는 법이다. 마오쩌둥과 장궈타오는 만나기 전에는 합치자고 열렬히 부르짖다가 만나서는 싸늘하게 갈라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량허커우 장정 기념관에 있는 장궈타오의 흉상. 장궈타오는 마오쩌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훗날 국민당으로 도망쳤다.
1935년 6월 3일 홍군은 루딩교를 건너 북상하다가 눈물 나도록 반가운 전문을 받았다.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중앙 홍군을 영접하기 위해 25사단이 샤오진(小金)으로 가고 있고, 선두는 이미 자진산(夹金山) 북쪽 기슭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제 자진산을 북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장정의 목표인 제4방면군과의 회사(會師)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6월 12일 중앙 홍군은 바오싱의 차오치(磽磧)에서 자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선발대가 목봉을 하나씩 집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오르자 눈밭이 나왔다. 당시 홍군의 상당수는 장시성 출신으로 눈을 처음 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신기해했다. 발이 푹푹 빠져 들어갔다. 눈으로 가려진 위험한 절벽도 있었다. 한여름이었지만 날씨가 급변하면서 우박이 쏟아지기도 했다. 정상 부근에서는 벌벌 떨어야 했다. 그래도 선발대는 한 명의 희생자 없이 하산했고 자진산 북록의 다웨이(達维)에서 드디어 제4방면군 선발대와 만났다.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장정을 떠난 지 239일 만에 만리 행군을 거쳐 제4방면군을 만난 것이었다!

제4방면군 선발대를 무사히 만났다는 보고를 받은 중앙 홍군은 본대 전사들의 설산 행군을 준비했다. 옷을 최대한 껴입게 하고, 짚신 안의 맨발을 보호하기 위해 발싸개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추와 생강 끓인 물을 수통에 담아주는 게 고작이었다. 6월 14∼15일 이틀에 걸쳐 중앙 홍군 본대가 산을 넘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타던 말을 부상병에게 내주고 온 힘을 다해 걸었지만 젊은 경호원들의 부축을 수시로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중앙 홍군은 첫 번째 설산을 건넜다. 여름이었기에 그래도 피해가 덜했다.

필자의 답사 여정이 자진산에 가까워지자 과연 계곡은 깊고 절벽은 가팔라졌다. 바오싱(寶興) 시내 홍군광장에는 ‘홍군장정 반월(飜越) 자진산 기념관’이 있었으나 수리 중이라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념관 앞에는 목봉을 짚은 홍군 전사들의 모습을 새긴 기념탑이 있었다.

거대한 산록과 끝없는 능선의 장관


자진산을 오르는 중간에 세워져 있는 기념탑에는 설산을 넘는 홍군 전사들의 투지와 결의가 생생히 묘사돼 있다.
답사 일행은 바오싱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아침 긴장된 마음으로 자진산을 향해 출발했다. 자동차로, 바오싱의 숙소에서 자진산 북록의 다웨이까지 135㎞, 홍군이 출발한 차오치부터는 80㎞의 거리였다. 홍군의 행군노선으로는 30㎞가 넘었을 것이다.

자진산 산허리의 저수지에 ‘홍군장정 반월 자진산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은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비기(碑記)에는 홍군이 자진산을 세 차례 넘은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중앙 홍군이 1935년 6월에 넘었다. 두 번째는 마오쩌둥과 갈라선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이 청두를 공격하기 위해 그해 10월 북에서 남으로 넘은 것이다. 장궈타오의 홍군은 이 전투에서 실패했고 1936년 2월 다시 자진산을 남에서 북으로 넘었다. 세 번째 북으로 넘은 것은 패배 뒤의 철군이었고 겨울철이라서 가장 힘들고 희생도 많이 치렀다.

기념탑을 뒤로하고 자진산 산길을 계속 올랐다. 도로의 눈은 녹았고, 길 가의 나뭇가지에는 눈꽃이 피어 설산 드라이브로는 최고였다. 산길 정상을 앞두고 해발 4천m 가까운 곳에 조그만 관망대가 나타나 잠시 차를 세웠다. 머리 위로는 좌우로 심하게 꺾이면서 정상까지 오르는 찻길이 멀리 보였다. 그 사이에 걸어서 올라가는 소로도 보였다. 홍군이 자진산을 넘어갈 때에는 아마도 이런 소로를 걸었을 것이다. 거대한 산록과 끝이 안 보이는 능선의 장관을 보면서 잠시나마 소심한 가슴을 큰 시야로 넓혀 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가까운 곳에 돼지새끼들이 뛰어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고산에서 야크와 함께 돼지를 방목한다고 했다. 일곱 살 동섭 군이 귀여운 돼지를 보고는 말릴 틈도 없이 돼지를 쫓아 뛰어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터벅터벅 힘없이 돌아온 그는 “엄마 힘들어, 엄마 힘들어”를 연발했다. 움직이지 않아도 숨이 가쁜데 콩콩거리며 뛰었으니 고산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샤오진 성당의 연회장. 제4방면군이 중앙홍군을 위로하고 회사를 경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지금은 종교시설이 아니라 장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되어 있다.
자진산 산길의 정상에는 해발 4114m라는 푯말이 있었다. 전후 좌우로 넓게 퍼진 능선이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돼지와 뛰면서 놀다가 고산증세가 나타난 동섭 군은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드러누운채 앓는 소리를 냈다. 서둘러 하산했다. 고산증세가 나타나면 가장 좋은 대처법이 하산이다.

장궈타오, 마오쩌둥과 대립하다

두 시간 가까이 하산하니 계곡 옆으로 다웨이가 나왔다. 작은 물을 건너 드디어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이 만난 지점에 도착했다. ‘홍군장정 제1·4방면군 다웨이 회사 기념탑’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기념탑 아래로는 홍군들이 건너왔을 작은 다리도 보였다.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의 선발대가 만났을 때 서로가 살아 돌아온 형제를 만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리 본 적도 없지만 이념이 같았고 게다가 사선을 넘나드는 내전 중이었으니 피붙이들의 재회 같았을 것이다. 그때의 감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식사를 마친 뒤 샤오진 시내로 들어가 예약한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숙소는 샤오진의 홍군광장에 접해 있었다. 광장 옆에 천주교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홍군 마오궁(懋功, 샤오진의 당시 지명) 회의 구지’다. 장정 당시 제1·4방면군 회사 경축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마오쩌둥은 다웨이에서 제4방면군 선두인 25사단 사단장 한둥산(韓東山)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제4방면군에 대해 자세한 보고를 받았다. 장궈타오가 거느린 제4방면군의 총사령관은 쉬샹첸(徐向前)이었고 정치위원은 천창하오(陳昌浩)였다. 장궈타오 자신은 점령지역에 중화소비에트 서북 연방정부를 세워 주석에 취임했다. 이런 상황은 공산당 정치국 성원들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6월 18일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은 샤오진의 천주교 성당에서 경축연을 열었다. 제4방면군에서는 선두였던 25사단과 28사단이 합류했다. 제4방면군은 양식과 소금, 소고기와 양고기 그리고 군복 등을 중앙 홍군에 공급했다. 연회석상에서 위문품 리스트가 낭독됐다. 의복 500점, 짚신 1400켤레, 양말 500족, 담요 100장, 구두 170켤레…. 애연가인 마오쩌둥을 위해 고급 담배 두 갑이 따로 전해졌다. 연회는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중국 공산당은 중앙 홍군이 대장정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국부군의 포위와 추격을 따돌리고 설산을 넘어 드디어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합류했다. 전략적 전이가 대장정의 목표였으니 이 대목에서 중국 공산당은 통합의 시너지 효과에 탄력을 받아 그 힘으로 중국 대륙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까? 역사의 물줄기는 그런 단답형은 아니었다. 달은 차면 기울고, 희열의 정점에서 고통이 시작되는 법이었다. 마오쩌둥과 장궈타오는 만나기 전에는 합치자고 열렬히 부르짖다가 만나서는 싸늘하게 갈라섰다. 그리고 남북으로 각각 제 갈 길로 떠났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935년 6월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은 회사 경축연회까지 열었지만 실제 상층부에서는 이미 균열이 일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서북 연방정부의 수도인 마오현(茂縣)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홍군의 통합과 전체 홍군의 향후 전략에 대해서는 수장들이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전보만을 주고받았다. 의견도 정반대로 엇갈렸다. 장궈타오는 남쪽으로 내려가 쓰촨에 혁명근거지를 구축하자고 했고, 마오쩌둥 등 중앙 홍군 측은 북상하여 산시성(陝西省)과 간쑤성에 혁명근거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다웨이 회사 기념탑. 마오쩌둥의 중앙홍군과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이 험난한 장정 끝에 만난 곳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접촉이 화학적 결합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결국 내분이 일었다.

장궈타오가 장악한 군사지휘권

수십 통의 전보만 오가는 지루한 전보회의는 시간만 잡아먹었고, 장제스는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국부군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홍군은 그 틈을 뚫고 달려왔었다. 그런데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이 만나 대장정의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시간을 죽이는 쪽이 뒤바뀐 것이다. 답보상태에 빠진 중국 공산당 중앙은 1935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샤오진에서 70㎞ 북쪽에 있는 량허커우(两河口)에서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면서 장궈타오에게 직접 회의에 참석하라고 요구했다.

6월 25일, 장대비가 내렸지만 중앙 홍군 수뇌부가 직접 나와 장궈타오에게 환영대회를 열어주었다. 훗날 오토 브라운은 “몸집도 큰 장궈타오는 주인이 손님 대하듯 우리를 대했고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등은 안색도 초췌하고 기운 옷을 입은 행색에 행동거지도 겸손하기만 했다. 양측은 선명한 대조를 보였다”고 회고했다.

다음날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저우언라이의 보고로 시작됐다. 저우언라이는 북상하여 간쑤·쓰촨·산시 세 성에 걸쳐 혁명근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지역은 고산 협곡이 없어 대부대가 이동하기에도 좋았고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해 병력을 보충하고 군수를 조달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아직 국부군의 전력이 취약한 쑹판(松潘)을 공격해 진로를 연 다음 계속해서 북상한다는 쑹판 공격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장궈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회의 말미에 의미심장한 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열혈분자 왕자샹과 펑카이 등이 장궈타오가 후베이-허난-안후이(鄂豫晥) 소비에트와 쓰촨-산시(川陝: 사천과 섬서성을 이름)에 세웠던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자링강(嘉陵江)을 넘어온 것과 서북 연방정부를 세운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판을 가했다. 장궈타오는 정치국의 다수 의견에 눌려 반박의견을 내지는 않았으나 속이 뒤틀렸다. 전체 홍군의 주도권을 놓고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불을 붙인 셈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각자는 숙영지로 돌아갔다. 정치국 회의에서 나눠준 숙제는 북상을 위한 쑹판 공격이었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7월이 되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7월 16일 중앙 홍군에 전보를 보내 본격적으로 정치노선과 군사지휘권 문제를 제기했다. 또 한 통의 전보가 공산당 쓰촨-산시성 위원회 명의로 날아들었다. 군사위원회 주석에 주더 대신에 장궈타오를 새로 임명하라는 요구였다. 공산당 당 중앙에 대해 하급 단위인 지역 위원회가 인사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장궈타오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층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당 중앙을 비판하겠다는 의도였다.

중앙 홍군 수뇌부는 고민에 휩싸였다. 다시 정치국 회의를 열고, 장궈타오를 홍군 총정치위원으로 선출하고 제4방면군 지휘부를 홍군 총부로 하여 쉬샹첸을 총사령관으로, 천창하오를 정치위원으로, 예젠잉을 참모장으로 개편했다. 장궈타오가 요구한 군사지휘권을 넘긴 것이었다.

이렇게 두 홍군이 만난 이후 한 달여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쑹판에는 국부군 20개 사단이 집결함으로써 홍군의 북상 통로는 이미 봉쇄됐다. 홍군은 쑹판 공격을 포기하고 습지를 통과해 북상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 홍군을 좌로군으로, 제4방면군을 우로군으로 편제하되, 중앙 홍군의 일부 간부를 제4방면군으로 배속시키고, 제4방면군의 쉬샹첸·천창하오 등 홍군 일부를 중앙 홍군에 합류시켰다.


마오얼가이 회의 회지(會地). 마오얼가이는 쓰촨에서도 오지 중 오지였다. 처음에는 쑹판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까지 진군했으나 쑹판 공격이 철회되면서 습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됐다. 지금은 오지의 고요한 짱족 마을이다.
그리고 제4방면군을 좌로군으로 하여 습지의 서쪽으로 돌아 북상하고, 중앙 홍군을 우로군으로 편성하여 습지를 관통하여 북상키로 했다.

샤오진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답사여정도 긴박하게 대장정 노선을 따라갔다. 엄문희 님과 일곱 살짜리 동섭 군은 23일간의 동반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두 모자를 청두공항 행 택시에 태워 보내고 중앙 홍군의 여정을 따라 량허커우로 출발했다. 량허커우에는 홍군열사 기념탑이 있었고 정치국 회의를 열었던 회지가 기념관으로 조성돼 있었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동상 하나가 ‘홍군 북상’이란 네 글자를 이름표처럼 달고 있었다. 장궈타오의 남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느낌이었다.

량허커우를 지나서 홍군과 마찬가지로 답사 일행도 멍비산(夢筆山)을 넘어 317번 국도에 합류하니 줘커지(卓克基)의 시쒀(西索)라는 짱족(藏族) 마을이 나타났다. 줘커지에는 또 하나의 홍군교가 있었다. 멍비산을 넘은 홍군은 이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직선거리 70㎞ 정도에 있는 루화(藘花, 지금의 헤이수이黑水)와 사워(沙窩)를 거쳐 마오얼가이(毛兒盖)로 진군한 것이다. 우리는 해가 저물어 마 얼캉(馬爾康)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심한용님이 자오무쭈(脚木足)라는 곳에 홍군 유적지가 있으니 그곳을 들러서 가자고 했다. 쿤밍 이후의 답사여행 후반에는 심한용님이 왕성한 에너지로 줄곧 앞장서왔고, 이날 여정에서도 헤이수이에 도착하면 일정상으로는 다른 문제가 없었던 터라 두말없이 그리로 향했다. 마얼캉에서 서쪽으로 25㎞ 정도를 가다가 북쪽으로 계곡을 타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자오무쭈의 바이사촌(白沙村)이란 곳에 도착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홍군 유적지에 대해 물어봤지만 아는 이가 없고 단지 높은 조루 하나를 가리키며 장궈타오가 이곳에 주둔했었다고만 얘기해줬다.

그냥저냥 마을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중년 사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와서 자신의 부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에 따르면 대장정 당시 장궈타오 홍군이 이곳에 꽤 오래 주둔했었다. 1935년 8월 말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 일부로 구성된 우로군이 습지를 건널 때 좌로군 즉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 주력부대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후 제4방면군은 이곳에서 남하하여 청두 평원에서 국부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해서 1936년 봄 다시 이곳으로 퇴각하여 다시 주둔했었다.

특히 두 번째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문제가 심각했다.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은 식량이 부족했다. 짱족 주민들은 이들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 제4방면군은 별 수 없이 현지인들의 밭에 들어가 임의로 농작물을 거둬가는 등 민폐가 심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홍군은 짱족과는 관계가 나빴다. 이곳에서 특히 나빴던 것 같다. 이곳이 바로 장궈타오가 몰락해가던 곳이었다.

홍군의 핵심장교는 20대 중후반

이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헤이수이현에 도착했다. 헤이수이는 장정 당시 지명이 루화였고 장궈타오와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던 정치국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당시 정치국 회의가 열렸던 민가에는 조그만 입간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을 뿐 다른 설명은 없었다.

홍군이 대장정에서 이곳을 통과할 때 창더설산(昌德雪山)과 다구빙산(達古氷山) 두 개의 설산을 넘어 마오얼가이로 향했다. 다구빙산은 정상이 해발 4720m인데 지금은 해발 4680m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다. 계곡에는 홍군이 숙영하던 호숫가도 있고 홍군교도 있다고 한다. 여름이라면 트레킹으로 오르내려도 좋을 만한 계곡이었다. 계곡 초입에 당시 홍군이 숙영지로 이용한 홍군호가 있었다. 그위로 자연부락의 입구에 홍군교가 있다. 이 지역 토호와 전투를 해서 토지혁명을 하고 지나갔다고 기록돼 있다.

한참을 더 올라가니 케이블카 터미널이 나타났다.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4680m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케이블카의 하차지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다. 케이블카에 타기도 전에 이미 고산증세가 서서히 느껴졌다. 깊고 거대한 계곡을 20분 정도 올라가는 동안 얼어버린 폭포 몇 개가 스카이 블루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곤 설산 턱밑에서 하차했다. 거대하다고 느껴지던 산들이 발 아래에 펼쳐져 있고, 까마득하게만 보이던 산봉우리들이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높이 오르면 생기는 것이 호연지기일까 아니면 순간적인 오만일까.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마음껏 빠졌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동반했던 티베트인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태어난 친구들이라 애당초 고산증세가 없어 보였다. 점프 샷으로 사진을 찍어도 멀쩡했다. 어딜 가나 젊음은 생동감이 넘치고 에너지가 충만한 법이다. 대장정 당시 홍군의 핵심적인 장교 대부분은 이들과 같이 20대 중후반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의 20대 중반은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거나 취직도 못하는 애송이들이다. 그러나 대장정을 들여다보면 중국 현대사, 나아가 세계사를 뒤흔든 것은 중국의 20∼30대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우리는 20대 젊은이들을 자식이란 명패를 채워 새장에 가둬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라의 핵심이 거의 대부분 노인에 의해 장악되고, 반면 젊은이들은 사회 하부구조에 머문 채 상승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상실하고 있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마오얼가이를 다녀오기로 했다. 중앙 홍군과 제4방면군은 쑹판을 공격하기로 했다가장궈타오와 마오쩌둥의 노선 갈등으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공격계획을 포기했다. 그래서 쑹판을 서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중앙 홍군이 진주해 있던 마오얼가이는 진로를 북으로 바꾸면서 습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돼버렸다.

마오얼가이까지는 지도상의 찻길로는 편도 125㎞ 거리지만 4시간 넘게 가야 하는 오지의 산길이었다. 마오얼가이강을 따라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필자도 중국의 오지를 적게 다닌 편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먼 느낌은 드물었다. 그렇게 네 시간 넘게 가서야 마오얼가이의 상바자이향(上八寨鄕)에 도착했다. 마을 뒷산에 있는 마오얼가이 홍군 장정 유적지 표지석을 찾아냈다. 마오얼가이 회의를 했던 곳인데 현재는 수리 중이다. 내부는 완전히 뜯겨져 있고 문밖에는 목재를 쌓아놓고 있었다. 공사 인부라도 있었으면 뭔가 들어볼 것도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낯선 외지인이 올 것을 알고는 일부러 모두 자리를 피한 것만 같았다.

짐 싣는 야크와 말까지도살해 식량으로

1935년 8월 21일 우로군, 즉 중앙 홍군의 선두가 습지로 발을 들여놓았다. 길고 긴 내부 논쟁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북상을 시작한 것이었다. 마오얼가이의 북부는 해발 3천m를 넘나드는 고원의 습지다. 초원이라 강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물이 축축하게 고이는 습지였다. 이곳은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연기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현지인들은 죽음이 다스린다고 표현했지만, 이 말로도 오히려 부족했다. 마오얼가이는 악마의 아가리였고, 습지는 악마의 뱃속이었다.

습지는 무릎까지 빠지는 곳이 많았다. 봄에 났던 약간의 풀은 여름엔 물에 젖어 함께 썩어 들어갔다. 곳곳에 보이지 않는 진흙 웅덩이가 숨어 있었다.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었다. 나오려고 버둥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사방을 둘러봐도 마른 땅 한 뼘을 찾기 힘들었다. 취사할 공간도 연료도 없었고, 야영을 해도 누울 자리가 거의 없었다. 이런 습지를 직선거리로 100㎞ 정도를 통과해야 했다. 홍군은 습지 통과를 위해 마른 식량을 개인별로 나눠줬다. 하지만 4일째 되는 날 식량이 거의 소진됐다. 짐을 싣고 가던야크와 말을 도살해서 먹었다. 풀잎에 풀뿌리도 먹었고 심지어 가죽 허리띠를 삶아서 먹기도 했다.


반유열사 기념탑. 이 기념탑은 말 그대로 습지에서 굶고 지쳐서 죽은 홍군의 시체더미를 직설적으로 묘사했다. 습지를 통과할 때 홍군 전사들의 고난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홍군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했다. 진흙 구덩이에 빠져 죽기도 했다. 쉬기 위해 앉았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전사도 있었다. 오수로 인해 병에 걸린 전사들도 죽음이었다. 휴대한 장비가 무거운 병사도 행군에서 낙오되면 죽음의 신이 어딘가로 끌고 갔다. 노약자는 더욱 위험했다. 누울 수도 없는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악마의 행군이었다. 적군의 총성도 없었다.

악마의 괴성도 없었고 죽는 자의 비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곳저곳에서 하나씩 둘씩 또는 무더기로 고요히 죽어나갔다. 소리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게 7일이 지나고 8일이 지나서야 멀리 인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습지의 출구 반유였다.

답사 49일째, 습지를 멀리 돌아서 습지의 출구인 반유향에 도착했다. 반유를 지나는 213번 국도변에 ‘중국 공농홍군 반유 열사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분홍빛이 도는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탑 하단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위대하고 장렬하고… 또는 혁명이니 희생이니 하는 상투적인 문구는 없었다. 훗날 인민해방군 상장까지 진급했던 왕핑(王平)의 회고록 한 대목만이 인용되어 있었다.

“우리 11연대는 초원의 습지를 7일 밤낮을 걸어 반유에 도착했다. 그때 팽더화이 장군이, 반유하 저 건너편에 수백 명의 홍군이 건너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한 중대를 이끌고 되돌아가 반유하 건너편을 살폈다. 700~800명의 홍군 전사가 앉아 있었다. 나는 통신원과 정찰원을 데리고 강을 건너 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누구 한 사람도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이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동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닥에 눕혔다.

마지막으로 어린 전사 하나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것을 발견했다. 정찰원이 그를 둘러업고는 다시 반유하를 건넜다. 그러나 강을 건너서 보니 그마저 이미 숨져 있었다.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모자를 벗어 그들에게 애도를 표하고는 본대로 돌아왔다.

반전의 대승바오쭤대첩(包座大捷)

기념탑에 묘사된 인물들은 반유하를 다시 건너간 왕핑과 두 전사 이외에는 전부 죽은 홍군들이었으니 시체더미였던 것이다. 이것을 기념탑이라고 부르자니 당혹스럽고 민망했다. 1935년 8월 28일 선두가 습지로 들어간 지 8일째 되는 날 중앙 홍군은 습지라는 악마의 손길을 벗어났다. 죽음의 기아와 극단의 피로에 빠진 홍군을 기다리는 것은 달콤한 휴식이 아니었다. 간쑤성 남부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후쭝난(胡宗南)이 지휘하는 국부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29일 황혼부터 31일까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홍군은 취사병에 마필관리원까지, 예비대에서 중앙기관 간부까지 총동원되었다. 결과는 반전의 대승이었다. 5천여 명의 국부군을 사살하고 8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역사에서는 바오쭤대첩이라고 부른다. 홍군은 상당량의 무기와 군수품까지 노획했다. 설중송탄(雪中送炭), 눈 속에 갇힌 홍군에 숯을한 가마 안겨준 셈이었다. 국부군은 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홍군의 이동식 군수창고였다.

승전에 포식까지, 홍군 전사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부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습지를 서쪽으로 멀리 우회하기로 한 좌로군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9월 7일, 마침내 장궈타오로부터 무선이 날아왔다. 우로군의 총사령인 쉬샹첸은 전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로군에 습지를 되돌아 남하하라는 명령이었다.

당 지도부는 대경실색을 했다. 이것은 장궈타오가 중앙 홍군과 결별하겠다는 것이었다. 남하와 북상의 논쟁이 논쟁 그 이상으로 비약했다. 9월 9일 장궈타오는 자신의 심복인 우로군의 천창하오에게 비밀전문을 보냈던 것이다. 핵심은 “만일 당 중앙이 남하에 동의하지 않으면 면밀하게 감시하고 당내투쟁을 철저하게 전개하라”는 것이었다. 무력을 동원해서 남하시키되 남하하지 않으면 사살하라는 비밀명령이었다.

마오쩌둥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결별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중앙 홍군의 핵심들과 긴급대책을 강구했다. 최악의 상황은 홍군끼리의 총질이었다. 이를 피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중앙 홍군이 위험지역을 벗어나 단독으로 북상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밤이 시작된 것이었다. 잠든 홍군을 하나하나 깨워서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 2시로 출발시간이 정해졌다.

장궈타오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양상쿤과 예젠잉은 장궈타오의 명령을 무시하고 마오쩌둥과 함께 가기로 했다. 양상쿤은 예젠잉에게 새벽 2시에 출발한다고 알렸고, 예젠잉은 작전실에서 10만 분의 1 작전지도를 꺼내 조용한 걸음으로 사령부를 빠져나왔다. 마오쩌둥은 이 두 사람이 도착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중앙종대를 조용히 출발시켰다. 대오는 어둠 속에서 침울하게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5년 후에 마오쩌둥은 에드가 스노우에게 “내 일생에서 가장 암흑과 같은 하루”라고 회고했다.

10만 홍군, 7천~8천여 병력으로 쪼그라들어

중앙 홍군이 조용히 떠나는 것은 곧 천창하오에게 보고됐다. 천창하오는 중대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아차리고 홍군 총부 총사령인 쉬샹첸에게 보고했다. 이때 예하 부대가 천창하오에게 중앙 홍군이 자신들에게 무장경계를 하면서 북상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대응하여 공격을 할 것인지를 물어왔다. 천창하오는 다시 쉬샹첸에게 어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쉬샹첸은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한참 후에 쉬샹첸이 내뱉었다. “세상 어디에도 홍군이 홍군에 총질하는 도리는 없다!” 천창하오는 맥 빠진 소리로 예하부대에게 명령했다. “공격하지 말고 명령을 기다려라!”

마음이 급해진 천창하오는 서둘러 펑더화이에게 편지를 썼다. 장궈타오의 명령에 따라 북상을 멈추고 돌아와 남하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서신을 충복인 리터에게 전달하게 했다. 리터는 말을 달려 이이미 10여㎞를 행군한 중앙 홍군을 따라잡았다. 펑더화이는 리터에게 간결하게 대답했다. “홍군은 중국 공산당에 복속하는 군대다. 당 중앙이 북상을 결정했으면 홍군은 북상한다.” 리터는 다시 마오쩌둥에게 가서 마오쩌둥 주변의 행군 대오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기회주의자를 좇아 북상하지 말라! 나와 함께 남하하자!”

분열의 꼬라지는 한심했다. 중앙 홍군은 샹강전투에서 3만여 명으로 폭삭한 이후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병력을 보충하면서 제4방면군과 합쳐 10만 홍군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고작 7천~8천여 병력으로 쪼그라든 채 밤길을 재촉하여 홍군으로부터 도망가는 홍군 신세가 된 것이었다.

답사일행은 반유 열사기념탑을 보고나서 비포장 흙길을 따라 몇 개의 언덕을 넘어 바시(巴西)로 갔다. 16㎞ 정도였지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이었다. 홍군끼리의 총질이 터질 뻔했던 곳이다. 장정 유적지는 바시라는 마을에서도 5㎞ 정도 더 들어가야 했다. 커다란 라마교 사원이 있고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형적인 짱족 마을이었다. 넓은 공터 한쪽에 바시회의 유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실제 바시회의가 열렸던 곳은 사원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고 무너진 흙담만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새로 조성한 전람관도 있었다.

홍군은 아군끼리의 총질 위기를 벗어나기는 했으나 대장정 출발 이후 가장 초췌한 모습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고난에 굽히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그들에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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