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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포커스 |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비밀 - 1500년 잠에서 깨어난 백제인의 숨결 

문화재청과 고대사 연구자들 “백제 왕실이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 수장에게 보낸 선물” 주장… 마한의 가야·신라와의 교류, 백제와의 관계 등 고대사 퍼즐 풀어낼 사료로 평가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계 금동신발이 전남 나주의 정촌고분에서 발굴됐다. 이 금동신발의 발견으로 마한 54개국 중 영산강 유역의 정치세력은 6세기까지도 백제에 복속되지 않고 존속했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게 됐다.




나주 정촌고분 1호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계 작품으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 작은 사진은 백제계 금동신발 가운데 파격적인 디자인을 보인 용머리 장식.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들이 금동신발을 처음 발굴한 날은 하늘이 유난히 맑았던 10월 8일이었다. 오동선(35) 씨 등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소속 학예연구사들이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丁村古墳, 나주시향토문화유산 제13호) 무덤 중 1호 석실의 내부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조사팀이 작업하고 있던 1호 석실 발굴은 시작 단계부터 난항이었다. 남쪽으로 난 무덤 입구에 문주석(문기둥)과 문지방석(문턱)이 설치된 형태여서 네모나고 큰 돌들이 잔뜩 쌓여져 있었던 것이다. 거석들을 치우고 조사하는 데만 2개월이 넘게 걸렸다. 무덤의 규모도 상당했다. 길이 485㎝, 너비 360㎝, 높이가 310㎝로 지금까지 백제·마한권에서 발견된 고분 석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발굴팀은 그때부터 뭔가 큰 것(?)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고 했다. 무덤 형태는 옆으로 통로가 나 있는 전형적인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로 확인됐다. 특이한 것은 석실 바닥 부분에서 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게 돌로 차곡차곡 쌓아놓았는데,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는지 시신을 안치하는 방과 시신을 넣는 통로인 연도(무덤길)까지 모두 돌덩이로 막아놓았다고 했다.

마한 수장의 무덤 열리다


1호석실에서 금동신발의 최초 출토상황. 돌무더기 사이에서 흙덩어리를 걷어내자 온전한 형태의 신발 한 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출토된 신발의 바로 옆에서 또 다른 한 짝의 신발이 나왔다.
오동선 학예연구사가 김민선·노형신 연구원 등과 함께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폐쇄석들을 걷어내자 내부 공간이 헐거워지면서 그동안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던 돌방무덤의 내부가 눈앞에 드러났다. 아무리 돌덩이로 견고하게 축조했어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벽을 떠받치고 있던 돌 몇 개가 무덤 안쪽에 흙더미와 함께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석실(돌방무덤)의 내부가 그렇게 뒤틀려 있는 채로 벽체가 무너지지 않고 그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돌방무덤 안에는 세 사람의 시신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뚜렷했다. 목관(木棺) 아래를 떠받치던 돌들을 조심스럽게 옮기자 한순간 돌 무더기 사이의 흙 속에서 반짝거리는 물체가 노출됐다. 조심조심 흙더미를 걷어내자 온전한 형태의 신발 한 짝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출토된 신발의 바로 옆에 묻혀있던 또 다른 한 짝이 발견됐다.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확연한 신발 한 켤레, 황금색으로 빛나는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의 금동(金銅) 신발이었다. 무려 1500년간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고 무덤 주인의 발치에서 잠자고 있던 국보급 유물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발굴을 맡은 조사팀에 따르면, 금동신발을 찾아내기 전부터 정촌고분에서 가장 큰 돌방무덤인 1호석실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우선 정촌고분은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잠애산(해발 112m)의 서쪽 경사면에 축조돼 평지나 낮은 구릉에 조성된 복암리 3호분 등 영산강 유역의 다른 고분과 달리 탁월한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우월한 입지는 정촌고분이 왕에 버금가는 고위층의 무덤일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다행스럽게도 무덤 위에는 그 고장의 유림이 지은 정자 하나가 오랫동안 세워져 있어서 도굴 위험도 피할 수 있었다. 실제 지난해 고분을 덮고 있던 나무를 다 베어내고 보니 정촌고분은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규모가 컸다. 네모진 고분의 한 변의 길이가 40m, 높이는 11m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 최대 규모의 방대형(方臺形, 네모진 평면에 봉분 윗면이 평평한 형태) 고분이었다.

발굴조사팀이 고분의 표토(表土)를 걷어내자 백제계 무덤양식으로 보이는 돌방무덤 3기가 나왔고, 돌덧널무덤(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직사각형의 덧널을 짠 무덤), 옹관묘(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항아리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나타났다. 조성 시기는 5~6세기로 추정됐고, 매장시설만 총 9기가 확인돼 인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과 같은 ‘아파트형’ 고분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봉분의 겉에는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 장식 효과를 내기 위해 깐 시설인 즙석(葺石)과 봉분 둘레를 돌아가는 석축 시설인 호석(護石), 그리고 이런 석축 시설들을 지지하는 긴 네모꼴 돌인 장대석(長大石)을 쓴 것도 확인됐다.

조사팀은 정촌고분 발굴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영산강 지역 마한국의 대외관계와 세력 동향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지난 1996년부터 5차례에 걸쳐 발굴된 인근 복암리 고분군에서도 금동신발, 은제 관식, 고리칼 등 무려 1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고고학계를 떠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이 맞아 떨어지기라도 하듯 백제의 찬란한 장식문화를 보여주는 진귀한 금동신발이 그날 그렇게 선물처럼 우연히 발굴된 것이다.

그동안 무령왕릉을 비롯해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흥 길두리 안동 고분 등 13개 유적지에서 모두 16점의 백제계 금동신발이 수습되긴 했지만 대부분 원형이 절반 이상 손상되거나 부식이 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발목 부분이 약간 찌그러지고, 신발 앞부분에 붙어 있는 용머리 장식이 탈착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존 상태가 완벽했다. 이렇게 화려한 금동신발을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덤의 주인은 마한(馬韓)의 여러 소국 가운데 한 세력의 수장으로 추정됐다. 1호석실에서는 금동신발뿐만 아니라 금제 귀걸이, 금제 장신구, 마구(馬具), 고리칼 등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조사팀은 흥분했고, 전남·북과 제주도를 관할 지역으로 하고 있는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도 바빠졌다. 오동선 학예연구사는 “현대 금속세공업자들도 제작하기 어려운 금동신발이었다. 5세기 말에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게 신기 했다”며 발굴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마침내 10월 23일, 나주문화재연구소는 백제계 금동 신발을 비롯해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수습해 언론에 공개했다.

장례용품 신발 금동식리(金銅飾履)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의 X레이 사진(왼쪽)과 금동신발 문양도안. 연꽃문양과 용(또는 도깨비) 형상으로 추정된다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금동신발이었다. 금동신발은 한반도와 일본 규슈지방에서 보이는 독특한 매장 유물로 백제계 유물을 대표한다. 출토된 금동신발은 길이가 32㎝, 높이는 9㎝, 너비는 9.5㎝였다. 일상생활에서 어른이 신었던 신발이라고 보기엔 큰 편이어서 장례에 쓰는 장식용 신발인 금동식리(金銅飾履)로 추정됐다.

신발의 형태는 2009년 고창 봉덕리 1호분 4호석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5세기 중반)과 기본 형태나 문양이 비슷했다. 발목 부분에 금동판으로 된 덮개를 부착한 것도 같았다. 특징적인 것은 발등 앞부분에 용 모양의 장식이 달린 파격적인 디자인이 사용됐다는 점이다. 대롱처럼 연결돼 발끝에서 치켜 올라가 앞으로 구부러진 용 장식은 탈·부착이 가능하도록돼 있었다. 발굴조사팀에 따르면, 원래 왼쪽 신발도 용 장식이 10㎝ 아래에 떨어져 있는 게 발견돼 수습후 원형에 맞게 부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른쪽 신발의 용 장식은 아쉽게도 찾아내지 못했다.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구리판을 뚫어 문양을 새긴 뒤 금을 입히는 방법으로 제작됐다. 흥미로운 것은,신발의 바닥에도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을 했다는 것이다. X레이 촬영을 해보니 신발 바닥의 중앙에는 꽃잎이 8개인 육각형의 연꽃무늬를 삼중으로 배치 했고, 연꽃의 중앙에는 꽃술을 새겼다. 연꽃의 위아래는 독특하게도 용(또는 도깨비)으로 보이는 문양이 장식돼 있었다. 용 문양은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형상화한 몸체 등이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2개가 묘사됐는데, 연꽃과 용 문양은 투조(透彫: 금속의 재료를 도려내어서 모양을 나타내는 조각 기법)와 선각(線刻: 선처럼 파서 새긴 무늬)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나주문화재연구소는 정촌 금동신발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 연꽃과 용 문양이 가치가 있다고 보고 특허청에 등록까지 마쳤다.

금동신발의 바닥에는 스파이크처럼 뾰족한 징이 24개나 달려 있었는데, 신발을 꾸민 장식과 징은 무덤에 묻힌 주인공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화려한 금속공예품을 무덤의 부장품으로 넣는 것은 현세의 권력을 내세에도 누리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마한소국의 왕에 준하는 고위층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금동신발을 육안으로 살펴본 전문가들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 백제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국내에서 백제계 장식공예품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신발 덮개의 문양은 물론 바닥의 연꽃과 용 문양에 쓰인 작은 점을 연결한 선은 현미경으로 보아도 정교한 기법이 사용됐다”며 “한성 백제시대 디자인과 공예기술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신발 바닥의 문양에 대해서도 “도깨비가 아니라 용이 확실하다. 뿔과 귀 등 용이 가진 특징을 잘 드러내는 데다 용 모양 장식물이 신발의 발등에 있기 때문에 도깨비보다 용 문양으로 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백제왕실의 하사품으로 추정


1호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들. 고리칼, 등자와 재갈 등 마구는 남원·함양· 김해·경주 등 가야나 신라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토록 정교하고 화려한 유물이 어떻게 1500년 동안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을까? 발굴 작업을 지휘한 이상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정촌고분이 고지대에 위치해 도굴이나 습기로부터의 피해를 어느 정도 막아주었기 때문에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금동신발을 직접 발굴한 오동선 학예연구사는 “돌방무덤의 무너진 벽석 틈에 다행히 신발이 끼어있어서 부서지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학계에서는 금동신발이 발견된 후 두 가지 견해가 대두됐다. 백제에서 토착세력을 회유하고 포섭하려는 목적으로 마한세력에게 금동신발을 하사했다는 주장과 영산강 유역의 강한 토착세력이 직접 제작해서 사용했다는 설이다. 이 가운데 백제의 지방 지배와 관련된 하사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문화재청도 “5세기 말,한성백제 시대의 중앙 왕실에서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마한의 수장에게 전달한 하사품이자 백제의 위세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정촌고분 금동신발 같은 높은 수준의 금공예품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노하우가 축적된 장인집단이나 공방이 있어야 한다”며 “금동신발에서 백제적인 특징을 보이는 조형기법이 다수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중앙에서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마한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백제학회’ 회장인 임영진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도 백제의 중앙에서 만들어서 보급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 동의했다. 임 교수는 “제조기법이나 문양, 특징들이 백제양식과 같기 때문에 마한지역 토착세력이 별도로 만들었다고 하기는 어렵다”며 백제계 유물로 판단했다.

국보급 유물의 공개는 단순한 고고학적 발견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백제와 마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번 정촌고분 유물이 고대사의 빈틈을 메우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5세기 후반~6세기 백제와 토착세력인 마한의 정치적 관계나 미술사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기대다. 관련 유물들이 백제의 초기 역사는 물론 삼한시대를 지나 삼국시대까지 존속된 마한의 실체, 마한세력의 가야·신라와의 교류, 고분의 주인공과 백제의 호족·왕족 간 관계까지 고대사의 퍼즐을 풀어내는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영산강 유역 토착 정치세력의 존재를 둘러싼 고대사 연구는 그동안 부족한 사료와 간간히 발굴되는 유물들 때문에 역사학계에서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역사학계의 기존 입장은 <삼국사기>기록에 근거해 AD 1세기인 온조왕 18년에 마한세력이 백제에 복속됐다는 입장을 유지했지만 몇몇 전남지역 학자들과 재야사학자들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독자적인 토착세력으로 6~7세기까지도 존재 했다고 주장해 괴리가 심했다. 특히 마한세력이 백제에 복속된 시기에 관한 문제가 주요 논란이 됐다. 백제의 정복군주인 제 13대 근초고왕은 서기 346년에 즉위하는데, 즉위 21년에 영산강과 낙동강 일대 소국 정벌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서기>에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 탁순국, 안라 등 가야연맹 7개 소국을 쳤으며 남쪽으로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찌르고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伴古) 등 4읍을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그 근거다. 이른바 4세기 중반 ‘근초고왕의 남정(南征)’설이다.

일본의 학계는 이를 왜국(倭國)의 왕인 신공왕후가 삼한을 정벌한 것으로 주장하면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주요한 근거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을 왜곡한 것이라는 게 국내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백제가 이미 4세기에 마한 지역을 정복해 그 위세가 한반도 남해안에까지 미쳤고, 왜국과도 국교를 맺어 사신의 내왕이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금까지 다수설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도 여러 곳에서 출토됐다. 가장 최근인 올해 1월에는 가야, 신라권으로 알려진 경남 남해에서 백제 귀족의 무덤이 발굴됐는데, 백제의 나솔(6품) 이상의 고위관리가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꽂는 은화관식(銀花冠飾)이 출토됐다. 학자들은 이 은화관식이 남해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가야의 토착세력이 백제의 관등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경남 남해가 7세기경에도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됐다.

6세기에도 독자세력 유지한 마한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 연구소는 유물 발굴과 수습을 마친 뒤에 내년 1월에 최종 발굴성과를 발표하고 고분 방문객을 위한 공개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영산강 유역인 나주와 남해안인 고흥 등의 몇몇 마한소국은 백제에 정복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실질적으로 복속시킨 것은 서기 538년 사비(부여) 천도 이후의 일로 서기 6세기까지도 영산강 지역은 백제의 영향력에 있으면서도 독자성을 보장받는 정치체제를 유지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번에 출토된 금동신발은 바로 그러한 시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마한사 연구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이에 대해 “백제권에서 마한세력에게 금동신발을 선물했다는 것은 이 지역이 5세기말~6세기초까지도 완전히 백제에 복속된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백제 왕실이 일본의 유력 호족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외교적 상징물인 금동신발을 보냈던 것처럼 정촌고분 금동신발도 백제왕실이 마한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고 말했다. 백제가 근초고왕(5세기 중후반)때 강성했다가 개로왕(475년)때 고구려에 밀리던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서는 거대한 고분에 옹관을 사용하는 마한의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백제는 이 세력을 무력으로 복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금동관을 선물해 회유했다는 주장이다.

임 교수는 또 “금동신발을 제작한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와 금동신발이 의미하는 지배·피지배 관계는 전혀 성격이 다른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의 남부 규슈지역의 백제계 석실고분인 에도후 다야마 고분이나 반즈카 고분, 구마모토 고분 등 5개 지역에서도 금동신발이 발견된 바 있는데, 백제계통의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출토됐다고 해서 고대 일본의 규슈 지역이 백제 땅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리인 것처럼 마한 수장의 무덤에서 백제계 유물이 나왔다고 해서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복속시켜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의 규슈 지역이 고대 백제 땅이었다기보다는 백제의 금속 공예품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됐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는 주장이다.

임 교수는 이에 따라 “마한제국은 경기·충청·전라 지역에 54개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북쪽에서부터 백제에 병합되어가는데, 전남지역에 있던 13개 소국이 가장 늦게 복속됐다”며 “5세기 말~6세기의 정촌고분과 복암리 고분 유물들은 고대국가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세력이었던 전남지역 마한국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정촌고분에서 이번에 출토된 유물들은 고고학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나 신라와도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근거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정촌고분에서 금동신발 외에도 금제귀걸이, 금제 장신구, 고리칼, 등자와 재갈 등 마구가 쏟아져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남원·함양·김해·경주 등 가야나 신라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마한의 지배자로 추정되는 정촌고분의 무덤 주인공이 6세기 초까지도 신라나 왜와 교류하면서 존속했다는 주장이다. 실제 복암리 고분과 정초고분이 위치한 다시면 일대는 고대 나주의 회진(會津)으로 예로부터 영산강을 따라 중국이나 일본으로 드나들었던 내륙 수운(水運)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같은 추정이 설득력을 갖는다.

마한세력과 일본과의 교류를 짐작케 하는 근거도 있다. 정촌고분 돌방무덤 입구를 쌓은 방식, 즉 나무틀로 가구를 짜듯이 문주석을 쌓고 벽석을 큰 돌을밑에 놓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순서대로 올리는 석실의 구조는 영산강 유역과 남해안, 일본 큐슈와 오사카 등에서 보이는 독특한 ‘영산강식 묘제’라고 한다. 이처럼 정촌고분을 만든 마한 세력은 백제와 가야,왜 등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은 강성한 정치체제였다는 것이 이번 정촌고분을 발굴해 조사한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고대 문화재의 보물창고 나주

정촌고분이 위치한 나주지역은 고대 영산강 유역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지로 문화재의 보고다. 금동관이 출토된 반남 신촌리 고분군, 금동신발과 은제관식이 출토된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 금동신발이 출토된 정촌고분이 그 증거다. 특히 1917년 반남 신촌리 고분에서 금동관(국보 295호)이 출토된 이래 거의 100년만에 정촌고분에서 국보급 금동신발이 출토되면서 다시 영산강 유역 고대 문화의 ‘보물창고’로 재조명받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시기적으로는 정촌고분(5세기 말)이 가장 앞서고 그 뒤를 복암리 고분군(6세기초), 신촌리 고분군(6세기 전반)이 잇고 있다. 이는 백제문화의 가장 화려한 시기로 꼽히는 무녕왕릉의 유물(서기 521년)로 이어진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정촌고분 금동신발을 전격 공개한 데 이어 현재 돌방무덤 구조와 축조 방법등을 파악하기 위한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유물 발굴과 수습을 마친 뒤 늦어도 내년 1월에는 최종 발굴성과를 발표하고 고분 방문객을 위한 공개설명회와 함께 학술세미나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열성을 가진 연구자들에 의해 정촌고분의 주인공에 대한 수수께끼가 하나하나 풀려갈수록 한반도 고대사의 빈 공간도 차곡차곡 채워질 것임이 분명하다. 그 전에 현대의 금속공예 장인들도 재현하기 힘들다는 1500년 전 백제의 찬란한 예술품을 시간 을 내서라도 감상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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