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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자기 치유의 인문학’ | 나를 ‘나답게’ 만드는 선택 - 당신의 젊음을 꺾어버리는 적들은 누구인가 

강요된 선택의 늪에 빠진 현대인… 편리와 출세의 환상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배해야 


▎애초부터 정해진 길이란 없었다. 곧장 가든, 돌아가든, 꺾이든 그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가장 올바른 선택은 ‘스스로’ 만들어진다.
얼마 전 강의에서 가슴 아픈 질문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우리 삶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열변을 토했는데, 이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학생은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선생님 말씀이 참 좋지만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취직도 해야 하고,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자립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데, 그렇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으신 것 같은데, 저는 꼭 그런 꿈을 찾아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꿈을 꼭 찾아야 되나요? 그냥 주어진 일들을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바쁜데요?” 그 질문은 여러 가지 서글픈 울림과 항변을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서 아주 복잡하게 얽힌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첫째, 그 학생은 인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특강을 일부러 찾아와서 들을 정도로 이 방면에 관심은 있지만,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내면화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 학생의 머릿속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취직하는 일’과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책도 읽고 타인의 삶에도 관심을 갖는 일’이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갈등의 세계에 서로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셋째, 그 학생은 ‘꿈을 찾아 사는 삶’과 ‘책임을 다하는 삶’을 두부 자르듯 싹둑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탁월함인가, 무엇이 위대함인가

꿈을 찾아 사는 이들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걸까요. 책임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은 꿈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쓸데 없는 일’과 ‘쓸모 있는 일’을 나누고, ‘꿈을 찾는 삶’과 ‘책임을 다하는 삶’을 나누며, ‘나만 잘사는 것’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삶’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더욱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게다가 그 학생이 전제하고 있는 가치관의 밑바닥에는 ‘실현될지도 알 수 없는 막연한 꿈에 인생을 걸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제 마음을 아프게 찔렀습니다. 그 두려움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오직 그 두려움을 느끼는 장본인 스스로 이겨나가야 할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요새 아이들은 우리 세대의 어린 시절과 달리 위인전을 잘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위인전 대신 어린이들이 열광하며 읽는 책들은 오바마, 반기문, 김연아 등 ‘지금 이 시대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셀러브리티’로 불리는 유명인의 성공과 출세를 담은 이야기들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위인에는 관심 없고 스타와 유명인에 관심을 가지도록 교육받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 즉 ‘위인(偉人)’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어린이들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인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갖고 있는 생각이 아니라 어른들의 뒤바뀐 가치관이 어린이들에게 주입된 결과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들, 세속의 가치에 굴복하지 않는 초인적인 탁월함에 대한 경외감을, ‘유명해져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자기 암시로 가득 찬 세속적 가치가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물론 위인전을 읽으며 자랐던 저는 ‘위인’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색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는 스토리가 많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위인전’을 통해 어린 시절의 제가 느낀 감동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읽고 또 읽었던 위인전은 베토벤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빛바랜 갱지에 인쇄된 베토벤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누구도 자신의 꿈을 지원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청력을 상실해버린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하는 한 사람의 투쟁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매질을 참아내며, 짝사랑의 연속으로 점철된 참담한 인연의 슬픔을 견뎌내며, 나중에는 청력 손실로 인한 사람들의 비웃음까지 감내하며, 그렇게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음악의 우주를 힘겹게 한 곡 한 곡 빚어냅니다. 저에게 위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는 베토벤이었습니다.

누군가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는 그 수많은 위인 중에서 ‘제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초등학생에게도 ‘타인을 감동시키는 인간의 탁월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감수성이 길러질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저를 내버려두었던 시간, 무엇을 하든 ‘그저 알아서 잘하겠지’하고 혼자 두었던 시간의 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고독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훌륭한지, 무엇이 탁월한지’에 대해 어른들은 정답을 제시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연아처럼 성공해라’, ‘반기문처럼 열심히 공부해라’, ‘오바마처럼 연설을 잘 해야지’하고 윽박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무원처럼 착실하게 살아라’,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삶의 장애물을 뛰어 넘는 탁월함인지, 무엇이 세속적인 성공에 찌든 사람들의 색안경조차 벗게 만드는 인간의 순수한 아름다움인지,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롤모델이다’, ‘이 사람의 성공비결을 따라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젊은이들의 젊음을 꺾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삶의 통제자가 돼야


▎현대인의 삶은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선택을 강요하는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선택은 미디어에 의해 더 많은 가능성을 놓치는 ‘제한된 선택’일 뿐이다.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인간관계의 각종 억압 속에서 매일 짓누르는 우리 자신의 ‘자기다움’을 찾는 길을 모색합니다. 그는 부모라는 이유로, 학교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회사 상사라는 이유로, 국민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따라야만 한다’고 교육받는 모든 가치를 의심합니다. 그의 말투는 다소 과격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일관된 논리는 바로 누구도 우리 삶의 통제자로 군림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작 <나는 길들지 않는다>(김남주 옮김, 바다출판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가 있기에 나도 있다는 발상은 국가가 있기에 국민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직결되는 최대 악이다.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맹독이다.” “오로지 자식을 어엿한 성인으로 키우는 것만이 목적인 부모는 너무도 적다. 더 나아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아가라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네 인생에만 집중하라고 충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는 더욱 적다. 부모의 희생물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자식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튼 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집을 나가야 한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 2의 탄생을 뜻한다.”

부모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고 있는 모든 가치의 뿌리를 남김없이 의심하라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주문이겠지요. 하지만 바로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아픈 자문자답의 과정을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남 탓만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엄마 탓이야, 아버지 탓이야, 친구들 탓이야, 선생님 탓이야, 이 어처구니없는 나라에 태어난 탓이야… 이렇게 말입니다.

자신 속에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싫고 좋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발견하는 생의 목적과 직결되는 위대한 행위이며, 젊었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름 아닌 그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나는 길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가 나답게 생각하는 그토록 간단한 길’을 가로막는지 살펴볼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나요? 도시에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대부분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아마도 ‘휴대폰 확인하기’ 아닐까요. 현대인들은 시계로 쓰고, 알람으로도 쓰고, 스케줄표나 다이어리로도 쓰는 휴대폰을 통해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지금 휴대폰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 자체를 ‘로그온’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휴대폰을 열고 시간과 메일과 뉴스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에 직면합니다. 어떤 뉴스를 먼저 클릭해서 볼까. 어떤 메일을 먼저 열어볼까. 이렇게 미디어가 강요하는 선택지에 둘러싸여 아침을 시작해야 합니다. 일어나자마자 텔레비전을 켜는 사람도 많지요. 텔레비전 역시 눈을 뜨자마자 선택을 강요합니다. 어떤 채널부터 볼까. 어떤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까. 어, 처음 보는 광고가 보이네. 휴대폰 광고잖아? 어, 새로 나온 휴대폰이 멋진걸. 내 휴대폰도 바꿔볼까. 아직 기계 할부금도 다 갚지 못했는데, 벌써 새 휴대폰을 갖고 싶다니. 이런 수많은 ‘선택을 강요하는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우리의 아침은 벌써 시끌벅적해집니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10분 내로 이렇게 많은 선택의 가능성에 노출되어버립니다. 아침부터 맑은 머리로 시작하기가 참 어려워진 것이지요. 선택은 희열보다는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어떤게 더 현명한 선택인지, 어떤 선택이 더 밝은 미래를 가져올 것인지, 너무 많은 고민에 둘러싸여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어떤 선택에 따라 장밋빛으로도, 잿빛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환상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누구와 데이트를 하는지, 어떤 인테리어 소품을 사는지, 어느 날에 이사를 가는지, 어떤 사람을 상사로 두는지에 따라 우리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선택은 다음 선택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이 과연 ‘우리 자신의 선택’일까요. 예컨대 마트에서 요구르트 하나를 선택할 때도 우리는 머리를 쥐어짜게 되지요. 어떤 요구르트가 더 좋은 유산균을 함유하고 있는지, 어떤 요구르트가 더 매력적인 할인판매를 하는지, 어떤 요구르트가 더 적은 지방을 함유하고 있는지, 저마다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요구르트 하나를 고르는 데도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은 과연 ‘나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결국 우리는 저번에 먹어보았던 요구르트, 가장 많이 광고에서 노출된 요구르트, 가장 많은 사람들이 먹는 요구르트로 결정하곤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결국은 ‘자본의 선택’일 수 있지요. 더 많은 자본을 투여해서 더 많은 광고를 유치하는 기업, 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최고의 요구르트’로 각인된 제품을 고른다면 우리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의 선택에 따르고 있는 셈이 아닐까요?

마트에서 상품을 고르는 것처럼, 우리의 직업, 사랑, 출산, 양육의 문제까지 모두 ‘개인의 선택’에서 좌우된다는 믿음.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이것을 ‘선택의 폭정(tyranny of choice)’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를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고 단정하는 사람들, 거꾸로 ‘선택을 잘하면 어떤 위험이나 불안 요소도 줄일 수 있다’는 믿음들,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의 결과’로 몰아붙이는 사회 분위기. 이것이 모두 선택의 폭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리스크를 피하는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 배웁니다.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 배우지요. 내 마음이 원하는 것보다는 안정된 노후를 보장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내가 많이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조언도 받지요. 불확실성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그것이 좋은 선택이라 학습 받는 것입니다.

‘제한된 선택’의 함정에 빠진 현대인


▎선택의 문제에 직면할 때 스스로 나설 수 있는 용기는 우리의 삶을 당당하게 만든다. 공동체가 나의 운명을 바꿔주길 기다리기보다 내 선택이 공동체의 운명을 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레나타 살레츨은 자신의 책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에서 ‘선택의 폭정’에 길들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누구나 현명한 선택을 하면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확신, 자기계발을 통해 자신의 성격까지 개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혹한 ‘선택의 전쟁터’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안나 쿠르니코바와 마리아 샤라포바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로 발돋움 한 후 러시아 전역의 시골 마을에는 우후죽순처럼 테니스 코트가 생겼다고 합니다. 가난한 부모들은 ‘샤라포바처럼’, ‘쿠르니코바처럼’ 자신의 딸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엄청난 시간과 돈을 자식들의 훈련에 투자합니다. 하지만 러시아보다 훨씬 체계적인 스포츠 시스템이 갖추어진 미국에서 조차 아동 1만 명 당 한 명만이 대학에서 체육 특기자 장학금을 받고, 1만 명 중 6명만이 프로 선수가 될 기회를 얻는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성공하면 그 길로 우르르 몰려가 아이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력한 트레이닝과 투자를 일삼는 부모들의 ‘선택’은 과연 합리적인 의사결정 과정일까요?

레나타 살레츨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한 아름다운 여성은 자신이 ‘선택’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드레스 한 벌을 고르는 데도 한달이나 걸렸고, 하룻밤 머물고 싶은 호텔을 찾는 데도 몇 주가 걸렸다고요. 그리고 지금은 정자 기증자를 고르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살레츨은 깜짝 놀라 ‘무엇이 그리 급하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올해 말이면 마흔이 되는데, 지금까지 매번 남자 선택에 정말 재주가 없었다고요.” 그녀에게는 남자를 선택하는 것도 일종의 ‘합리적 선택’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매번 온갖 판단력을 동원해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던 그녀는 ‘왜 나는 그토록 열심히 선택을 해왔는데, 결과는 이토록 참담한가’라는 절망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를 고르는 ‘골치아픈 선택’을 건너뛰고, 차라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정자를 ‘선택’하여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과연 이렇듯 기업을 경영하듯이 합리적인 선택, 최고의 선택의 결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일까요? 삶은 과연 판단과 판단의 연속체일까요? 우리가 지금 갖가지 고민에 시달리는 것은 과연 ‘과거의 잘못된 판단’의 결과물일까요? ‘최고의 선택이 최고의 인생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이야말로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고 모든 책임을 ‘개인의 선택’에 떠넘기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역설이 아닐까요? 우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고 자부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그다지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주와 타로점에 귀를 기울일 때도 있고, ‘합리성’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주관적인 조언’에 따라 행동할 때도 많습니다. 또 ‘내가 진정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하느라 진짜로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합리성’만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나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쾌락이나 효율, 안정이나 행복을 위해서만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선택이라는 차원으로 보면, 알프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설명할 수 없지요.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또 자신을 괴롭히는 타입의 남자를 선택하는 여성의 미묘한 심리도 설명할 수 없지요. 많은 음식점들 중에서 ‘왠지 마음에 끌려서’ 들어가는 순간의 알 수 없는 희열이나 기시감을 설명할 수도 없지요.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선택이 미래를 만든다’는 단순한 합리성이 아니라, 우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에만 매몰되어 ‘사회적인 선택’, ‘공동체의 선택’, ‘나만 생각하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할 시간과 여유를 잃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진실로 원하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대세나 유행이 아닌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순간’의 공통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또한 상품의 선택을 통한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을 넘어서서, 당신과 내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하게 만드는 ‘공동체의 선택’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을 고용함으로써 당신을 길들이는 사람들


▎현대의 자본은 인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부가 아니라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돈을 쓰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소비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 도시인에게 현대화된 가난이란 극빈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쓰지 않고서는 아주 사소한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게 된 현대인들 모두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현대화된 가난’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자기다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드는 또 하나의 걸림돌입니다. 소비를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화된 가난이야말로, 또 하나의 더 큰 결핍, ‘꿈꿀 수 없는 젊음’을 낳는 것입니다. 즉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진정한 꿈을 꾸는 데 인색해져 버렸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매일매일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돈을 쓸것인가’를 선택하느라 빼앗겨버린 우리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기 안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고,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환경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겼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했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느린걸음, 2014)

우리는 초고속 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대신에 튼튼한 다리로 어디든 부지런히 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으며, 온갖 학위로 교육의 기회를 늘린 대신 자립할 수 있는 독학의 능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병을 고치는 의료행위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의료사고를 비롯한 각종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은 오히려 급격히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위험 상황에서도 119를 찾는 현대인들은 ‘위험에 스스로 대처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단꿈에 부풀어오르지만,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부자 되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오늘도 심각한 우울증을 겪으며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더 큰 이윤을 향해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자본은 끊임없이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내지만 그 새로운 필요를 선택하고 구입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일상화된 궁핍에 시달려야 합니다. 현대의 자본은 인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부(富)가 아니라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impoverishing wealth)’를 확대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바로 이 ‘가난한 부’야말로, 많은 사람이 함께 향유하며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 ‘희소한 부’이며,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서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 ‘파괴적인 부’임을 고발합니다.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전문가의 손’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점점 무력화하는 시대입니다. 내 삶을 내가 일구고, 가꾸고,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각종 전문가에 맡김으로써 사람들은 부를 과시하거나 혹은 자신의 처세술을 자랑하곤 합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주치의를 부를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대신에 늘 건강염려증에 시달리는 삶이 나을까요, 아니면 늘 부지런히 일상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며 좀처럼 병원의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는 건강한 삶이 나을까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얼마든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대신 늘 골치아픈 문제에 시달리는 삶이 나을까요, 아니면 법 없이도 살 사람임을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나을까요?

우리는 이제 개인의 선택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선택’이 있음을, ‘공동체의 선택’이 있음을 서로에게 일깨워줘야 합니다. 서로에게 ‘너 뭐 살거니?’, ‘이 옷 마음에 들어?’, ‘나 이거 잘 샀지?’라는 사소한 선택의 동의만 구할 것이 아니라 ‘너 이번 선거 때 누굴 뽑을 거니?’, ‘넌 방사능 오염물질에 어떻게 대처할 거니?’, ‘우리는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함께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내 아이의 성적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안녕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와 같은, ‘진정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질문’을 더 많이 생각해내야 합니다. ‘나’ 단위만이 아니라, ‘너와나’의 단위, 가족단위만이 아니라 이웃의 단위, 마을의 단위, 공동체의 단위로 사유할 수 있는 용기와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사뮤엘 존슨은 진정한 선택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멋진 문장으로 보여줍니다. “자기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것이 반드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라.” 우리에게는 아직 진정한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환상을 버릴 자유가 남아 있습니다. 기업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업의 운명을 바꾸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가 우리의 운명을 바꾸게 놔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국가의 운명을 바꾸도록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정여울- 1976년생.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및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침.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 저서로는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잘 있지 말아요> <마음의 서재> <시네필 다이어리>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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