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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한시로 읽는 역사 - 세평(世評), 실제와 거짓 사이 

이규보의 촌철살인, 포장하고 부풀려서 자신을 드러내는 세상사람들을 꾸짖는 듯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광주문화재단은 ‘성산계류탁열도’를 재현하는 행사를 해마다 연다. 선비들이 전남 담양의 환벽당 인근에서 더위를 씻고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양한 평가를 내린다. 대부분의 평가가 그러하겠지만, 그 평가는 사회적 환경과 평가를 받는 대상의 영향력 혹은 행적을 통해서 구성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누가 어떤 관점에서 평가를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회적 명성이나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명성을 원한다고 해서 늘 명성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고, 악평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악평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의도치 않게 명성이나 악평이 발생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희비(喜悲)가 엇갈리기도 한다.

맹자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뜻하지 않게 얻는 명예도 있고,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일을 하다가 오히려 비방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有不虞之譽有求全之毁·유불우지예 유구전지훼)

진심이야 어찌됐든 간에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란 어렵다. 어쩌면 인간의 마음을 언어로 전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에 담긴 진심도 전하기 어려운 판에, 우리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혹은 대중에게 어떻게 해석 될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진심을 다해서 사람을 대하고 정성을 다해서 우리에게 닥친 일들을 수행하는 것이다.

서진(西晉) 시기를 전후로 해서 활동했던 인물들 중에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완적(阮籍), 혜강(嵇康), 산도(山濤), 향수(向秀.상수라고도 읽는다),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이다. 이들은 위진시대 유행했던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시와 술과 음악으로 한 세상을 고고하게 보내려 했던 인물이다.

이들에 관한 비교적 초기의 기록은 <세설신어(世說新語)>일 것이다. 이 책에는 죽림칠현에 속한 몇몇 인물에 대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해당 인물의 괴팍함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후세에 그들이 어지러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생각을 지키면서 죽림 속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살아갔다는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 예를들면 이런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시와 술과 음악으로 살려 했던 죽림칠현


중국 난징(南京)의 옛 무덤에서 발견된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 벽화. 왼쪽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던 혜강, 가운데가 그를 아꼈던 완적이다.
왕융이 스무 살 무렵 완적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유공영(劉公榮)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왕융이 찾아온 것을 본 완적은 마침 좋은 술이 있으니 한잔 마셔야겠노라며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그 술을 왕융과는 마실 수 있지만 유공영은 마실 수 없다면서 주지 않는 것이었다. 술을 모두 마셔버릴 때까지 유공영은 한 잔도 마시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신정권 때 중용됐던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 이규보의 영정.
그러나 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담소를 나누며 그 자리를 즐겼다. 나중에 누군가가 그 일을 듣고 왜 유공영에게 술을 주지 않았느냐고 묻자 완적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유공영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함께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고, 유공영보다 못한 사람이면 술을 마셔주지 않을 수 없지. 다만 유공영만은 함께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단 말이야.”

완적의 대답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 유공영만은 술을 같이 마시지 않을 수 있는지 그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게다가 술자리를 함께하면서도 술 한 잔 주지 않은 완적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자리를 뜨지 않고 담소를 나눴던 유공영도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보통의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왕융과 완적 사이에 전혀 다른 성격의 일화도 전한다. 완적이 혜강, 유령과 함께 죽림에 모여서 술을 한창 마시고 있었다. 뒤늦게 왕융이 그 자리에 오자 완적이 이렇게 말한다. “속물이 뒤늦게 와서 흥을 깨는군.”

그러자 왕융이 이렇게 대꾸했다. “그대들의 흥취가 깨질 만한 것이겠소?” 늦게 온 왕융을 완적이 비난하자 왕융은 이 정도로 흥취가 깨지겠느냐며 눙치는 분위기로 이야기를 한 것이리라. 사정이야 어떻든 일곱 사람 사이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역사에 기록된 이들의 행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여럿이고 처했던 역사적 환경이나 입장도 달랐으며 나이 편차도 심했다.

그러니 이들을 묶어서 죽림칠현이라는 이름으로 개념화시킨 것은 후대 문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 어지러운 시대를 벗어나 죽림 속에서 고고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며 인생과 예술을 즐겼던 인물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죽림칠현은 일찍이 우리나라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행적을 모방해 자연 속에 은거하며 고고한 모습으로 살아갔던 사람도 있었고, 그들의 삶을 자신의 삶과 비교하면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죽림칠현과 아주 흡사한 모임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고려 후기 무신란 시기에 형성됐던 이른바 ‘해동(海東)의 죽림고회(竹林高會, 해좌칠현이라고도 한다)’일 것이다. 그 구성원은 이인로(李仁老),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沆),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이렇게 일곱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죽림칠현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들의 모습이 동시대 혹은 후대 사람들에게 죽림칠현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들이 함께 활동했던 12세기 후반은 고려 의종24년(1170) 무신들의 난이 일어난 뒤이다. 오랜 세월동안 문신들의 푸대접과 무시를 받아왔던 무신들은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다.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인 김돈중(金敦中)이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아무리 벼슬이 높아도 무인들은 문인들의 세력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이 고려의 분위기였다.

수많은 멸시가 쌓이고 쌓여 그것이 폭발하자 문신들은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다. 무신들이 개경을 장악한 뒤 ‘문신의 관(冠)을 쓴 자라면 모두 죽이라’는 구호를 걸고 거리를 활보했다. 문신이라고 판단되면 그것이 누구든 간에 죽음을 당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당시의 지식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연속으로 숨어들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인로만 하더라도 공주 부근에 있는 절에 숨어서 스님 행세를 했을 정도다.

목숨 부지하기 위해 자연 속으로 숨어들어

숨어 지낸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서 무신들의 위협이 예전보다 약해지자 이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무신들 입장에서도 통치를 위해서는 문신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을 터이다. 글을 모르는 무신들은 글의 필요성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문신들을 등용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이미 기존의 문인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무신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은 과거시험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인들을 등용해서 통치에 보탬이 되도록 하려 했던 무신들은 이규보와 같은 새로운 인물을 발탁한다. 이들은 유교적 사상의 토대 위에 스스로 한문을 읽고 짓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실무 처리 능력이 뛰어났고, 기존의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무신들이 보기에 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찾던 계층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급박하게 변화하는 시기이다 보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언제 어떻게 죽음을 당할지 몰라 불안해했고, 자신들의 뜻을 펴기엔 무신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차라리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과 희망을 접고 자연 속으로 숨어들어가 시와 술과 음악을 함께 즐기며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유유자적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일곱 사람으로 구성된 해동의 죽림고회라 할 수 있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고려 전기의 기득권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귀족적 문신들이 일거에 사라진 폐허 위에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바로 이규보와 같은 부류였다. 이규보는 빼어난 시문창작 능력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했지만, 한동안 발탁되지 못해서 벼슬 없이 떠돌거나 미관말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봤던 사람이 바로 최씨 정권의실세 최우(崔瑀)였다. 말하자면 무신정권과는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죽림고회의 주류를 이루던 과거의 문신 세력과는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이규보의 <칠현설(七賢說)–동국이상국집 권21>에 그려져 있다.

이규보에 의하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면서 자기 자신을 한 시대의 호준(豪俊)으로 생각하며 어울렸던 일곱 명의 ‘선배’가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스스로 ‘칠현’이라 자처했는데 이는 진나라 때의 죽림칠현을 사모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매일 모여서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는데, 자기들 외에는 그 실력과 수준을 따라올 자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세상사람들이 너무 빈정거리면서 비난하자 그 기세는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그들의 오만한 태도는 여전했다.

그 모 임에 첫 발을 들 여놓 은 것 은 이규보(1168~1241)의 나이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이규보는 죽림고회의 한 사람이었던 오세재(1133~?)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35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지내는 망년우(忘年友)였다. 오세재는 이규보를 죽림고회의 모임이 있을때 데려가서 소개했다. 그런 인연이 있던 차에 오세재가 경주로 떠난 뒤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생계에 위협을 받던 오세재는 미관말직이지만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찾아 그곳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 이후 오세재는 영영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소식이 끊어진 뒤 어느 날, 죽림고회에 참석한 이규보에게 이담지가 이렇게 말을 한다. “자네와 절친한 벗 오세재가 경주에 노닐러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자네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면 어떻겠는가?” 그말에 이규보는 이렇게 맞받아친다. “칠현이라는 게 조정의 벼슬자리라도 된답디까? 빠진 자리를 어째서 채운단 말입니까? 중국의 죽림칠현에도 혜강과 완적같은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 두 사람 자리를 이어서 채워 넣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

은거하는 삶도 한결같이 탈속적일 수는 없어

이 말에 좌중이 박장대소했음은 물론이다. 이 자리에서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이규보에게 시를 지으라고 하면서 운자를 불렀고 이규보는 즉시 한 편을 완성한다.

榮參竹下會(영참죽하회) 영광스럽게도 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해

快倒甕中春(쾌도옹중춘) 통쾌하게 술독 안의 술을 마신다.

未識七賢內(미식칠현내) 모르겠구나, 죽림칠현 중에서

誰爲鑽核人(수위찬핵인) 그 누가 오얏씨에 구멍 뚫은 사람이었던가?

이 작품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규보는 거만한 모습으로 거나하게 술에 취해 그 자리를 나왔다고 한다. 이상이 이규보의<칠현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얏씨에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인 왕융에게서 나왔다. 그의 집에는 아주 맛있는 오얏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의 씨앗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서 심을까 걱정을 한 나머지 모든 씨앗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버렸다고 한다.

속세를 벗어난 삶을 살았다고 알려진 왕융도 사실은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탐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규보가 영광스럽게도 죽림고회에 참여해 통쾌하게 술독의 술을 기울인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적이 세속의 탐욕에서 벗어나 맑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기에 왕융 고사를 빗대어 그들을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자연 속에 은거해 시와 술과 음악 같은 아름다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한결같이 탈속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표면적인 행적을 보고 자기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를 덧붙인다.

‘엽관(獵官)’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 벼슬을 내리면 마음속으로는 덥석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마치 세속적 명예에 초연한 듯이 거절한다. 그러면 임금은 그의 행위를 보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더 높은 벼슬자리로 그를 부르는 것이다. 속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하지만 더 높은 벼슬을 바라고 짐짓 초연한 척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벼슬사냥’ 즉 엽관의 전형이다.

요즘이라고 해서 이런 사람이 왜 없겠는가. 겉으로는 온갖 멋있는 말을 하면서 겸손을 떨지만, 그 속에는 추악한 욕망과 남을 멸시하고 얕잡아보는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요행으로 명성이나 낚으려 애를 쓰고, 작은 명성을 큰 것처럼 포장해서 실상보다 더 부풀려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허영의 거품이 세상을 덮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그 거품은 언젠가는 빠지게 되고, 보잘것없는 알맹이를 확인한 사람들에 의해 더욱 큰 비난에 직면하고 더욱 큰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내게는 어떤 거품이 덮여 있는지 늘 돌아봐야 한다.

김풍기(金豊起)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더불어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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