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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지도 안’에서 새 길 찾는 ‘청춘들의 멘토’ 한비야 - “아버지가 물려주신 ‘산 ’과 ‘지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을 뿐” 

오지여행가, 긴급구호활동가에 더해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한 ‘제3의 도전’ 시민의식 고양하는 세계시민학교도 운영 중 

글 박지현 월간중앙 기자 / 사진 지미연 기자

▎젊은이들 사이에 큰 인기를 누렸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발간된 지 10년. 한비야 씨는 ‘지도 밖’ 현장에서 차츰 ‘지도 안’ 전문가로의 새 길을 모색하고 있다.
정확히 10년 전이었다. 강연자로 나선 그를 처음 만난 건. 활짝 웃는 얼굴에 도드라진 광대뼈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20대 청년들을 앞에 두고 그는 메모가 불가능할 정도로 속사포 같은 말솜씨로 열정적인 강의를 했다. 전 세계의 오지에서 경험한 에피소드에서부터 국제구호활동까지 생생한 이야기가 더해졌다. 청년들에게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고 외친 40대 후반 나이의 월드비전 국제구호팀장 한비야(58) 씨였다. 그는 희로애락의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거침없는 직설화법으로 강의장의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멘토 부재시대라고 불리던 시절, ‘가장 닮고 싶은 여성리더’, ‘차세대 지도자’등의 수식이 그에게 붙여졌다. 2009년 MBC예능프로그램〈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많은 시청자를 열광시켰지만, 그는 돌연 공부를 하겠다며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로부터 6년여의 시간이 흘러 그가 다시 공개적인 활동에 나선 듯하다.

그의 삶을 뜯어보면 한번도 멈춰선 적이 없다. 늦깎이 유학생, 유엔자문위원, 세계시민학교 교장,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등등.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과거에는 ‘지도 밖’ 활동가로 세계 긴급구호현장을 누비던 그는 점점 ‘지도 안’으로 들어와 전문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번 학기부터는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4월 2일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작은 체구에 빠른 발걸음이 멀리서 봐도 그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년 전에 비해 실금 같은 주름이 눈가에 생긴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는 기자와 마주하자마자 다짜고짜 “날씨 정말 좋다. 그죠? 우리 빨리 끝내고 산책해요!”라며 광대뼈가 한껏 도드라지게 웃음을 지었다. 마치 어제 만난 친한 후배를 대하듯. 예의 빠른 말투도 바뀌지 않은 터라, 그의 말을 받아 적길 일찌감치 포기하고 녹음기를 틀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유학가신 후로 소식이 뜸했던 거 같아요.

“2009년 미국 터프츠(Tufts)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인도적 지원학’ 석사학위를 마쳤어요. 그리고 2011년부터는 3년간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CERF) 자문위원으로 유엔 정책 자문을 했어요. 2012년부터는 1년 중 절반은 이화여대에서 국제구호 강의를 하고 나머지 반은 아프리카·필리핀 등 재난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죠. 아, 중간에는 백두대간을 50구간으로 나눠 2년 만에 완주했어요. 올 초에는 책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책이 나오는 동시에 바로 새 학기가 시작됐고요. 이번 학기 박사과정도 시작했어요. 세계시민학교 교장으로도 일하고, 칼럼도 기고하고 있고요. 주말마다 등산가고, 2주에 한번은 야영하고요. 정말 많죠?”(웃음)

와, 역시 바쁘시네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이번 학기에는 박사과정도 시작하셨다고요?

“네. 원래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구호와 개발협력’이라는 과목을 가르쳐요. 전국에서는 유일한 강의라고 하네요. 학생들의 열정이 남달라요. 수업을 듣고 전과하거나 연계전공을 한다고 말할 때는 굉장한 보람을 느끼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젊은 친구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이번 학기부터 시작한 박사과정에서는 ‘개발협력’ 수업을 듣고 있어요.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도 만나니까 반갑고 모범을 보이고 싶어져요.”

그는 늘 도전의 아이콘이었다. 행동에 거침이 없다. 2009년 쉰이 넘은 나이에도 ‘겁 없이’ 학생으로 돌아갔다.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터프츠 대학원에서 ‘인도지원학’을 공부하는 ‘최고령’ 대학원생이 됐다. 그는 늦깎이 대학원생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고백한다. 2010년 일기엔 논문지도교수에 대한 ‘귀여운’ 원망이 담겨 있다. ‘대니얼이 새로 쓴 5장을 또 불바다로 만들어서 돌려주었다. 이 사람이 미쳤나 보다. 뭘 더 해오라는 말인가? 이건 논문 지도가 아니라 학대다. 학계 아동 학대. 하여간 잘못 걸렸다. 눈물이 난다.’

현장서 느낀 연구 갈증, 지금에서야 해소 중


▎1. 2009년 쉰 살이 넘은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그는 미국 보스턴의 터프츠대학교에서 ‘인도적 지원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 2. 한씨는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활동하며 세계 곳곳의 현장을 누볐다. 그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서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난민촌에서도 구호활동을 벌였다. / 3. 한비야 씨는 “구호현장 요원들은 난민들의 꿈과 눈물과 고통의 냄새가 진동해야 한다”며 지금도 현장이 그립다고 말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궁금해요.

“오랫동안 구호현장에 있다 보니까 연구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더라고요. 정책이 현지 상황과 안 맞는 경우도 많았고요. 학계에 있는 사람은 현장자료가 없다고 하고, 현장에서는 정책으로 연결되지 않는 시행착오가 자꾸 생겨나니 안타까웠어요. 누군가는 이걸 연결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내가 직접 정책공부를 해보자!’ 하고 유학길에 오른 거예요.”

늦깎이 공부 어렵지 않았나요?

“어휴, 정말 쉽지 않았죠. 오십이 넘으니 집중력이며 암기력, 정보 수집력이 다 떨어지잖아요.(웃음) 믿을 건 진짜 엉덩이 뿐이었다니까요. 첫 수업 8시15분부터 도서관 문 닫는 새벽한 시까지 껌딱지처럼 엉덩이를 1년 내내 붙이고 살았어요.”

아무래도 이론과 현장은 많이 다르겠죠?

“다르지만 다 연결돼요. 제 직함이 ‘국제구호활동가’에서 최근 ‘국제활동전문가’로 변했어요. 국제구호에는 삼박자가 있어요. 현장, 연구, 그리고 정책. 구호는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경감시키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존엄성을 잃지 않게 하는 일이에요. 생명구호 분야는 물, 식량, 보건의료, 피난처로 구분돼요. 여기에서 객관적인 데이터와 이론을 통해 좋은 정책으로 이어져야 하는 거예요. 예컨대 겨울에 시리아 난민이 국경을 넘어갔다면 이들이 겨울나기를 하기 위해 피난처와 사람의 온도가 어떻게 유지돼야 하는지를 정확한 근거자료를 통해 활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15년 정도 현장에 있었으니까 알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아, 이게 그런 말이었구나’, ‘아하!’하는 순간들이 더 많았어요. 구슬들이 이제야 좀 꿰어지는 기분이라 할까요?”

요즘 IS(이슬람 국가)가 장악하는 이라크 북부 모술에도 머물렀죠? 뉴스를 보면 기분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그럼요. 10여 년 전 그곳 초등학생들에게 물을 공급하면서 굉장히 고생도 많이 하고 보람도 많이 느꼈는데 말이에요. 깨끗한 물을 먹으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정말 안타깝고 가슴이 미어지는 거 같아요. 제가 그때 만난 아이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 IS에 가담했거나 가담하지 않아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그럴 거 아니에요?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뉴스를 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한비야는 세간에 알려진 대로 역마살이 타고난 듯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바람의 딸’이라는 멋진 닉네임이 붙어 있다. 수많은 직함만큼 다양한 활동반경을 자랑하는 그는 약간의 ‘조증’이 있음을 시인한 적이 있었다. 목소리가 크고, 말이 빠르고 분주하고 들떠 있는 상태 때문이다. 이틀에 한 번씩 잠을 자도, 하루 네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아도 크게 지장이 없는 ‘쇼트 슬리퍼(short sleeper)’로, 전 세계 인구 가운데 1~3%가 이런 DNA를 타고난다고 한다.

‘긴급구호활동가’로 불러주길 바랬는데


▎한씨가 10년 전 출간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와 올해 초 출간한 에세이 <1g의 용기>.
누구보다 바쁜 삶을 견디는 그의 원동력은 등산이다. 한비야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주말마다 산을 찾고, 2주에 한 번은 꼭 야영을 한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자산을 ‘산’과 ‘지도’라고 말하는 그는 무릎의 관절이 성하지 않을 정도로 등산에 미쳐 사는 ‘산쟁이’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결행한 것도 백두대간 종주였다. 2010년 9월부터 2012년 7월까지 한반도의 등뼈를 따라 700여 km에 이르는 남한의 백두대간을 50구간으로 나눠 2년 만에 완주했다.

한비야에게 등산은 어떤 의미인가요?

“자연을 만나면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에요. 야트막한 능선도 좋고, 험한 바위 능선도 좋아해요. 자연이 주는 엄청난 감동이 있거든요. 무릎이 좋지 않아 정형외과 의사도 다니지 말라고 충고하는데, 산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음, 그때 해야만 하는 생각? 요즘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죠. 휴학을 안 하고 현장을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요. 등산을 하면서 천천히 생각의 뿌리를 찾아갈 수 있어요. 검색이 아닌 사색을 하는 것. 저한텐 그게 참 중요해요.”

그럼 산에 못 갈 때는 어떤 때죠?

“(등산) 안 가면 절대 안 돼요. 그러면 수요일쯤 되면 눈썹이 쫙 올라가요. 화가 나서.(웃음) 체력단련이다, 자기관리다 이렇게 보시는 분들도 있지만 전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해서 다니는 거예요.”

지난날들을 나눠보니 30대에는 세계일주라는 꿈을 이뤘고, 40대에는 세계긴급구호현장에 있었어요. 50대에는 다시 공부도 하고, 강의도 하고 있고요. 뭐든 이렇게 계획대로 되는 편인가요?

“세계일주를 제외하고는 미리 계획해본 적은 없어요.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죠.”

세계일주를 꿈꾸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한비야 씨는 서른셋에 떠났죠. 어디서 그런 결단을 했나요?

“결단 아니에요. 아주 자연스럽게 된 일이죠.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이 있어요.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어릴 때부터 세계지도를 보며 사니까 지구가 작아 보였어요. ‘저거 한바퀴 도는 게 아무 일도 아닌 거’라고 생각했죠. 땅은 붙어 있으니까 다리에 힘만 있으면 가는 거 아닌가 생각했던 거죠. 회사도 딱 3년만 다닐 생각이었으니까요. 망설임 없이 사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세계일주를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한 칼럼에서 ‘오지여행가’ 한비야는 잊어달라고 하신 이유를 알고 싶어요.

“오지여행가로 알려지면서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으로만 알고 계신 분이 너무 많아서예요.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랜 직업은 긴급구호활동가였잖아요. 오지여행을 했던 것은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건이지만, 지하공사 끝나고 건물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하 기초공사 이야기만 해달라고 하니까. 여행 이야기, 지겨워죽겠어.(웃음) 20년 내내 했다니까요. 심지어 어디가 자꾸 제일 재미있었느냐고 묻고, 어디가 제일 위험한지 물어요. 목숨은 긴급구호현장이 더 위험해요. 또 가끔 ‘좋은 곳으로 여행 다니지 왜 힘든 곳을 가?’라고 묻는 분도 계세요. 현장은 놀러 다니는 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여행가로 6년을 보냈다면 15년간 일했던 긴급구호현장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서운하기도 해요.”

악성댓글 논란, 네티즌 자정능력 믿고 싶어


▎한비야 씨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DNA는 모두 다르고 서로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며 ”제2의 한비야가 아닌 제1의 누구, 그 이상이 돼라”고 조언한다.
아직도 <바람의 딸, 지구 세바퀴 반>은 어린이책으로까지 출간돼 여행 분야에서 스테디셀러로 팔린다면서요?

“저도 신기해요. 20년 된 책인데 말이죠. 그래서 그걸 읽고 여행을 가면 안 돼요.(웃음) 여행정보의 기능은 전혀 없거든요. 단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느낀 걸 적은 책이었어요.”

시대의 멘토로 자리매김하면서 그에게는 한 차례 고비가 찾아왔다. 첫 번째 출간한 서적인 <바람의 딸, 지구 세바퀴 반>의 내용과 그의 이름까지 진위여부에 대한 악성댓글이 인터넷을 도배질한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하다 이번 에세이에 솔직한 소회를 밝혔다. ‘사기꾼이라니, 거짓말쟁이라니, 내 세계 여행기가 거짓과 과장으로 가득 차 있고, (…) 전국민을 상대로 사기 모금을 했고, 내 이름이 본명이 아니고, (…) 너무나 놀라서 손발이 덜덜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귀에 들릴 만큼 쿵쿵 튀고 숨이 턱까지 막혔다.’ 한편 논란에 대해서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겠다고 일축했다.

왜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으셨어요?

“누구를 위해 해명을 하는 거죠? 물론 궁금하긴 했지요. 제 이메일을 찾으려면 그렇게 쉬운데, 왜 직접 묻는 사람은 없었을까? 가끔 주변에서 저한테 물어요. ‘기분이 어떠니?’ 비유를 하자면 그렇죠. 밤길을 지나가다 몰매를 맞은 기분이랄까…. 그런데 결국 누구의 말을 믿느냐가 중요해요. 저를 믿지 않기로한 사람들이잖아요.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런 에너지를 쏟아요? 제 이름이 본명이 아니다? 그럼 주민등록증을 찍어서 보내줘야 하나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잖아요. 네티즌의 자정능력을 믿고 싶을 뿐이죠.”

많이 힘드셨겠어요.

“괴롭죠. 아니었으면 좋겠죠. 절 좋아해주는 사람들에게 죄송스러웠고요. 더 조심하게는 되더라고요. 과장된 얘기를 하지 않아야겠다, 자기검열을 하고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잖아요. 그걸 인정하면 돼요. 이런 고통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치유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사람관계로 어려움이나 억울함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말해줘요. ‘나는 안 그런 줄 알아? 나도 똑같아’. (그 일로) 오히려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SNS 활동은 안 하시지요?

“전혀 하지 않아요. 사실 그럴 여유가 없는 게 먼저고요. 소통 때문이라면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강의와 책을 통해서요. 당장 오늘 한 일을 SNS에 올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메일을 통해 묻는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으니까요. 아날로그적이고, 고전적이지만 저한테 맞는 방법인 것 같아요.”

“잘 견디고 버티는 힘은 근육과도 같아요”

그만의 소통의 방법으로 오랜만에 한비야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 쏟아냈다. 올해 2월에 발간한 에세이 <1g의 용기>다. <그건 사랑이었네(2009)> 이후 6년 만에 출판가에 돌아온 그는 속내가 담긴 일기 원문들을 발췌하는 등 더 풍부하고 깊어진 이야기를 담았다.

책 발간은 6년 만이죠? 그간 공백이 너무 길지 않았나요?

“공백? 그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전업작가가 아니잖아요. 글 쓰고 싶을 때, 아니 써질 때 써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책은 영원히 남는 거니까 정말 ‘엑기스’가 나올 때만 가능해요. 카트리지에 잉크가 꽉 차면 그것을 써야 하듯이 머릿속에 뭔가가 꽉 차야 쏟아내고 싶어지거든요. 어떤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고요.”

<1g의 용기>. 출판사에서 원래 0.1g이란 제목을 1g으로 바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원래는 0.1g밖에 안 됐어요.(웃음) 상징적인 의미인데, 사람들은 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잖아요. ‘할까, 말까’. 이 중에서 하고 싶은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절반씩 가진 사람들에게 딱 한 발짝, 탁! 하고 결정할 수 있는 용기를 보태주고 싶었다는 말이에요. 퍼부어주는 것이 아니라 ‘살짝 보태준다’의 의미죠. 그런데 출판사에서 0.1g은 너무 심하다며 잴 수도 없으니 1g이 낫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웃음)

예전에 나온 책에 비하면 열정이 넘치고 씩씩한 한비야가 훨씬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을 들게 해요. 신앙심도 깊어진 것 같고요.

“그렇죠? 나도 내가 부드러워진 것 같아, 어쩜 좋아.(웃음) 사실 나이가 들면서 무엇이 본질인가 생각하게 돼요. 일기장 맨 앞장에도 써놓긴 했지만(그가 보여준 일기장 맨 앞장엔 ‘무엇이 나를 자유케 하는가’는 문구가 쓰여 있다), 나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거예요. 그 밑바닥에는 신앙이 받쳐주고 있더라고요. 책이 세상과 나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생각을 아낌없이 쏟아내야 했어요. 신앙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죠.”

‘힐링’ 에세이 같기도 해요.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 치유와 희망은 사치라고 하더군요.

“제 일기가 이 책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6년간 제가 어떤 용기를 내왔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힐링이라면 위로나 격려 등 이런 것이 먼저 떠오르는데, 저는 용기에 대한 얘기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너무 단단해지는 연습을 덜했어요. 견디고 버티는 힘이 약해요.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은 근육과 같아서 어느 날 갑자기 되지 않거든요. 평소 습관을 들여야 해요. 저도 매번 잘 견디고 잘 버틴 건 아니에요.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으며 용기를 낸 것뿐이거든요.”

20대 시절에 어두운 청춘을 겪었다고 들었어요. 6년간 백수나 다름없이 지냈다고 하던데.

“깜깜한 시절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의 제가 좀 기특했어요. 그땐 정말.(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잘 견뎠어요. 그때 제 모습이 참 맘에 들어요. 언젠가는 돌파구가 생길 거라 믿었던 제 자신이 대견한 거예요.”(그는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의 무릎을 다독였다)

청년들의 멘토로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던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저는 한국 젊은이들의 꿈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담론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꼰대’는 무엇을 해라, 꿈을 꿔라, 어떤 인간이 되어라 등을 말하는데, 저는 그런 말을 할 권리나 의무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멘토, 차세대 지도자, 선생님 등의 수식어가 싫어요. 자신의 DNA는 모두 다르고 서로 다른 열매를 맺을 뿌리가 있는 거예요. 제2의 한비야를 꿈꾸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1의 누구, 혹은 그 이상이 돼야죠.”

혹시 본인의 롤모델이 있으세요?

“없어요. 각 분야마다 훌륭한 분은 있죠. 저는 만델라 대통령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인생의 롤모델은 아니에요. 자신의 성공을 모두의 성공으로 만드는 그의 노력이 좋아요. 나이가 들수록 지쳐 보이고 화난 얼굴이 되는 사람이 많은데 만델라는 더 멋있게 늙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의 얼굴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것 같아요.”

그가 제 3의 인생을 시작한 학교와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다. 학생이자 교수인 한비야는 한 학교의 초대 교장이기도 하다. 2007년 광고 출연료 1억원으로 월드비전과 함께 세계 시민학교를 세웠다. 2014년 한 해에만 650명의 강사가 ‘찾아가는 수업’을 통해 50만 명의 학생을 만났다.

세계시민학교는 어떤 학교인 거죠?

“쉽게 말해서 찾아가는 학교에요. 650명 정도 되는 강사가 학교나 단체에 직접 가서 강의를 해요. 나부터 우리, 서울에서 대한민국, 전 세계로 확장해나가는 것이 세계시민 교육의 핵심이에요. 커피를 마실 때 커피콩 따는 소녀를 생각하고, 월드컵을 즐기다가도 축구공 만드는 소녀를 생각하는 것,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다 보면 70억 인구를 모두 품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떤 마음가짐을 가르치나요?

“세계시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이죠. 자신이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본질을 일깨워요. ‘유일한 존재이자, 존엄이 있는 존재.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 나는 그 존재 자체’라는 것을 가르치죠. 자존감을 높여야 옆에 있는 사람의 자존감도 높아져요. 그때 ‘나’가 ‘우리’가 되는 것이에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배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학위를 따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외국어든, 단소든, 운동이든 매일 조금씩 느는 게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자기자신이 마음에 들거든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한 단계씩 나아지는 모습 때문에요. 방법을 찾아가는 거죠.”

58년 개띠시죠? 보통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표현이 좀 그렇지만 이제 편하게 누리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저한테는 현장으로 가는 것이 가장 큰 누림이에요. 구호현장요원들은 난민들의 땀과 눈물과 고통의 냄새가 진동해야 돼요. 당장 큰 불이 났는데, 불을 누가 꺼요? 보고서도 쓰고 제안서도 쓰고, 연구도 하고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요? 직접 제 돈 주고 명품이나 액세서리를 사보지 않았어요. 보면 아름답고 예쁘지만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자본주의 와는 참 안 어울리는 사람이죠?”(웃음)

한비야 씨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독자는 주로 어떤 사람이고, 어떤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요.

“중장년 남성분이 많아요. 여성독자들이 더 많을 것 같죠? 그런데 아니에요. 그분들이 20∼30대에 내 책을 읽었더라고요. 대부분 ‘너무 늦지 않았나? 꿈을 펼쳐도 될까?’ 그런 얘기들을 하세요. 사실 답도 없고 제가 지도 편달할 입장도 아니지만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너무 늦진 않을까?’란 고민에 대해 어떻게 답해주시나요?

“정말 그런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요. 재수없으면 100살까지 산다고 하잖아요.(웃음) 나이 50이면 겨우 절반 산 거에요. 직업적으로 은퇴한다고 해서 그게 전부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물론 50대의 한비야도 갑자기 발레리나가 될 수는 없겠죠. 하지만 피아노를 배워서 음악을 더 깊이 있게 들을 수는 있어요. 내 피를 끓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일뿐만이 아니거든요. 일이 아닌 경우가 더 많죠. 취미가 아니라 취미보다 더한 걸 찾아야 해요.”

미리 지은 묘비명 ‘몽땅 다 쓰고 가다’

미리 정해두셨다는 묘비명이 재미있어요. ‘몽땅 다 쓰고 가다’. 무엇을 그렇게 다 쓰고 가실 거예요?

“시간도 제 에너지도요. 남기면 아깝잖아요. 할 일이 아직 굉장히 많이 남았어요. 일일이 읊기가 어렵네요. ‘즐겁고, 자유롭게, 기왕이면 남 도와주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야 몽땅 다 쓰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120살까지 사신다면서요?

“그러니까요.(웃음) 그래야 다 쓰고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는 책 초판에 넣으려 했다가 막판에 뺐다는 자신의 인생 계획에 대한 원고를 기자에게 건넸다. 4천 자 분량의 원고에는 향후 20년간의 인생계획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현장에선 10년 이상 있을 생각이 없다. 65세가 넘으면 기동력과 추진력이 뚝 떨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물리적인 현상이 나라고 예외는 아닐 터. 국제구호활동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나면 그 후에는 네 가지 일에 뜨겁게 몰두할 계획이다.’

그가 에너지를 쏟을 일은 숲 해설가, 노숙자 호스피스 자원봉사, 신앙인, 전업작가다. ‘바람(Wind)의 딸’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을 앞으로 누군가의 바람(hope)에 보태가고 싶다는 그의 열정 온도는 아직 내려가지 않았다. 바람대로라면 120살까지 ‘몽땅 다 쓰고 갈’ 에너지는 아직 반도 채 쓰지 않은 셈이다.

- 글 박지현 월간중앙 기자 / 사진 지미연 기자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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