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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화제] 한국의 ‘마쓰시타 정경숙’ 서울 북촌 ‘건명원’의 실험 - “여러분은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돼주십시오” 

오정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 100억원대의 재산 쾌척… 소수정예 청년유망주 선발해 인문·과학·예술 등 융합인재 육성 프로그램 개설 

글 전형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 사진 오상민 기자

▎지난 3월 문을 연 건명원은 청년 유망주들을 선발해 인문학과 예술, 과학을 가르쳐 미래형 융합인재를 양성하는 리더양성프로그램이다.
“노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거피취차(去彼取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다닥 다닥 붙어 있는 한옥들 사이로 떠들썩한 소리가 골목까지 흘러나온다. 소리를 따라가니 ‘ㄷ’자 모양의 아담한 한옥이 나타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初老)의 신사부터 앳된 모습의 청년까지 수십 명이 집안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다. 평일에는 한적한 북촌에서 좀체 보기 드문 풍경이다. 스승이 <도덕경>이 써진 시대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서른 명쯤 되는 청년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강론을 귀담아 듣고 있다. 쏟아지는 질문에 스승은 빙긋 웃고는 답을 내놓는다. 조선시대 서원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서울의 한복판 종로구 북촌로 67-3. 앞으로 이 한옥집에서는 이 모습이 익숙해질 것이다.

현대판 서원이라 할 이곳 대문 위에는 ‘건명원(建明苑)’이란 커다란 현판이 내걸렸다. ‘밝은 빛을 세운다’는 뜻을 담았다. 두 평짜리 단추공장으로 시작해 튼실한 기업을 일군 오정택(68)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이 교육사업을 위해 출연해 마련한 집이다. 건명원을 운영하기 위해 그는 100억 원대의 재산을 기부했다. 3월 4일 이곳에서 건명원의 출범을 알리는 개원식과 1기 입학식이 열렸다.

건명원의 설립 목적은 ‘창의적 리더와 인재 육성’이다. 만 20세에서 29세까지 청년 30명을 선발해 다양한 교과목을 가르친다. 동서양 철학을 비롯해 과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정규 교육제도에서 얻지 못한 깊은 지식을 닦게 한다. 교수진도 화려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건명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최 교수는 철학과 노장사상을 가르친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종교와 라틴어 고전을, 김개천 국민대 교수는 예술과 건축 분야를 가르친다. 다양한 대중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멘토로 활약 중인 김대식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전자과 교수는 뇌과학 강의를 맡았다. 정하웅 교수(카이스트 물리학과)는 복잡계 네트워크와 빅데이터에 대한 지식을 전수한다. 최근 과학계에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첨단 분야들이다. 여기에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의 근대 세계사와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서양 사상,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의 매체학 수업이 더해져 건명원의 커리큘럼이 완성된다.

각 분야 스타 교수 8인의 의기투합


▎개원식에 참석한 교수와 내빈들이 한옥 대문 위에 건명원 현판을 달고 있다.
오 이사장이 건명원 건립을 결심한 건 인문학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오 이사장은 20년 지기인 김개천 교수를 통해 배철현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이탈리아 기행을 함께 한 것을 계기로 건명원 건립 추진을 두 사람에게 맡겼다. 그렇게 각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교수 8명이 의기투합했다.

원생들은 매주 수요일 저녁 4시간 동안 북촌의 이곳 ‘서원’에서 교수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수업은 강연과 토론 중심이다. 매달 첫째 주, 셋째 주는 8명의 교수가 돌아가면서 강의하고 둘째 주, 넷째 주는 최진석 교수가 노자의 <도덕경>을, 배철현 교수가 라틴어 고전을 가르친다. 원생들은 도덕경과 키케로의 연설문 등 고전들을 한자와 라틴어로 암송해야 한다.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임을 감안하면 학업량이 결코 만만치 않다. 정규 강사 외에도 찰스 리 잭슨유전체연구소장이나 이시다 히데타카 도쿄대 교수 등 해외 석학의 초청강연도 준비 중이다. 수학 기간은 1년이다. 10개월 과정을 마치면 원생 전원에게 한 달간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모든 수업 경비와 해외연수비용은 무료다. 오 이사장의 후원금으로 운영비를 100% 충당한다.

3월 4일 건명원 개원식에는 50여 명이 인사들이 참여했다. 원생과 교수진 외에도 국회의원과 고위 공무원, 학자 등 각계 인사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자수성가한 기업가와 스타 교수들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이색 실험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도 컸다. 작은 마당이 온종일 북적댔다. 자신이 직접 쓴 건명원 편액을 거는 최진석 원장과 교수진 구성 등 건립 실무를 도맡다시피 한 배 교수는 행사 내내 감회에 젖은 표정이었다. 오 이사장은 교수들에게 “이 학생들을 이 시대의 반역자로 키워 달라”고 했다. “이 시대를 거역해야 다음 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요지였다. 학생들에게는 “30년 후 여러분의 시대가 왔을 때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답이 없을 것”이라며 “생각의 틀을 통째로 바꾸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건명원 내부는 하얀색 한지를 발라 단아하고 포근한 분위기다. 입학식과 간단한 연회가 끝나자 곧바로 첫 수업이 시작됐다. 첫 강의는 최진석 원장의 철학 강의였다. 최 원장은 ‘EBS 인문학특강’과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의로 인문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동양에서 철학이 학문으로 정립된 과정을 강의했다. 최 원장은 “한국은 여전히 철학적인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더 높고 깊은 단계인 철학적 관점으로 나아가야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과 사회를 관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강의가 끝나자 원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과 토론 시간이 강연시간만큼이나 길었다. 한 원생은 “이렇게 활발한 질문이 이어질지 몰랐다. 마치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업을 듣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질문은 언제나 백 퍼센트 옳다. 맞는 질문과 틀린 질문이라는 구분은 있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질문을 두려워한다. 앞으로도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원생들을 독려했다. 교수들의 강의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다른 7명의 교수도 동참한다. 각자 다른 전공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도 채우고 학제 간 연구 교류를 하자는 취지에서다.

“학생들을 ‘시대의 반역자’로 키워달라”


▎오정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은 “이 학생들을 이 시대의 ‘반역자’로 키워달라. 이 시대를 거역해야 다음 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교수들에게 주문했다.
수업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됐다. 최 원장이 원생들의 시선을 두 세기 전으로 이끌었다면, 이어진 김대식 교수는 뇌과학 강의를 통해 시선을 미래로 돌렸다. 생각을 읽는 기술인 ‘브레인 리딩(Brain reading)’과 머릿속에 특정 정보를 집어넣는 기술인 ‘브레인 라이팅(Brain writing)’의 실험 성공 사례를 소개했다. 과학 기술에 대한 강의인데도 이런 혁신적인 기술이 몰고 올 피상적 효과에 머무르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인간의 생각은 90%가 착시이고, 뇌 해석의 결과물”이라며 “인생이란 결국 뇌가 정보를 선택하고 편집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생물적으로 오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인지적으로 오래 살아야 한다”는 김 교수의 결론 역시 인문학적 통찰로 원생들을 이끌었다.

모든 강의가 끝나고 나서도 교수와 원생들의 대화가 한동안 이어졌다. 건명원 강의 방식에 대한 논의였다. 건명원의 수업을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 위해 촬영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견이 나왔다. “방송 카메라가 있으니 제대로 된 질문을 하기 힘들다”, “방송 장비와 스태프 때문에 수업에 집중이 방해된다.” 교수들도 각자 다른 의견이었으나 방송보다 현장 강의가 우선한다는 데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ㄷ’자 모양으로 지어진 한옥의 특성상 학생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자리가 배치돼 있다는 원생의 문제제기도 있었다. 교수들은 건명원의 수업은 참여와 토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서로 둘러앉아 수업에 참여하도록 배치하겠다고 공감을 나타냈다. 교수와 원생 모두 건명원은 기존의 대학 강연들과는 차별화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특별해지기 위해 스스로 질문하고 토론했다. 날이 밝을 때 시작한 건명원의 수업은 밤이 깊어서야 모두 끝났다. 수업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원생들의 표정은 한껏 들떠 있었다.

교수들과 원생 모두 바쁜 시간을 쪼개 매주 수요일 저녁에 만나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 대안으로 온라인을 활용한다고 했다. 배철현 교수는 원생들이 혼자서도 라틴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네이버 밴드’를 통해 온라인 강연을 하기도 한다. 원생들은 인터넷 공간을 만들어 강의시간에 못 다한 토론을 이어가기도 한다. 최진석 원장은 한 달에 한 번씩 등산을 하며 원생들과 만남을 갖기로 했다.

건명원은 지난 1월 말부터 서류 접수를 받았다. 첫 기수이고 홍보도 많이 하지 않았는데도 900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30대 1의 경쟁률이었다. 건명원은 모집요강에서 “학력, 국적, 성별, 종교 등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으며 오직 열정과 창의성을 기준으로 수강생을 선발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서류전형의 에세이 주제는 ‘30년 후 대한민국과 자신의 모습’이었다. 에세이와 자기를 소개하는 포트폴리오만으로 지원자 중 120명을 간추려냈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이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 외국인, 북한이탈 주민도 끼어 있었다. 그중에는 걸그룹으로 활동하는 아이돌 가수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배철현 교수는 “건명원은 예수와 에라스무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나오길 원한다”고 말했다. 8명의 교수가 조를 나눠 각자 정한 주제로 토론 면접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김대식 교수는 ‘인간과 로봇의 사랑이 가능할까’라는 주제를 내놓았다. 이어진 논술시험을 거쳐 30명이 건명원 1기생으로 선발됐다. 건명원의 선발 기준에 대해 최 원장은 “탁월한 사람을 뽑았다. 다른 것 없이 수월성이라는 기준만 적용했다. 현재의 탁월한 조건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선발된 인원들을 칭찬했다.

학벌, 스펙 안보고 가능성만으로 학생 선발


▎1. 3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건명원 1기 30명이 3월 4일 입학식을 가졌다. / 2. 한옥에서 <도덕경>과 라틴어를 배우는 모습은 조선시대의 서원을 떠올리게 한다. / 3. 건명원의 교수들도 학생들과 함께 다른 교수의 수업을 듣는다.
선발 전형이 진행되기 전부터 건명원의 교수들에게 많은 청탁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지원 대상이 아닌 30대들의 문의도 쇄도했다. 한 교수는 “평소 아끼는 제자가 건명원에 들어오고 싶어 해서 꽤 마음이 흔들렸지만 공적인 기관이라 생각해 그 제자의 선발전형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입학식에 참석한 한 전직 국회의원은 “내 아들도 지원했지만 떨어졌다”고 아쉬워했다.

건명원의 출범은 인문학에 대한 한국 사회의 특이한 경향과 무관치 않다.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무색할 만큼 지금 한국 사회는 ‘인문학 과잉’ 시대를 맞고 있다. 스타 강사들이 각종 방송 프로그램의 단골 게스트로 출연하는가 하면, 대중강연과 교양강좌가 강의실과 공연장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인문학 전공자의 취업시장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점점 깊어지는 것이다. 건명원도 이러한 유행 중 하나에 불과할까? 건명원을 세운 오정택 이사장은 “건명원은 잘 다듬어진 교양인이나 인문학으로 치장된 지식인, 교수의 아바타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원생들이 교수의 가르침을 따르되 자신만의 생각을 갖길 바란다”며 “인문학이 소비재가 되거나 학문을 위한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생산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진석 원장은 “철학과 예술, 과학이라는 이질적인 분야의 지식을 한 사람에게 모두 전수하는 특색 있는 시도”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이질적인 학문이 내면에서 일으키는 충돌로 학생들이 흔들리고 갈등을 빚으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다방면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건명원 이전의 인문학 교육기관으로는 2012년 설립된 ‘아산서원’이 있다. 아산서원은 현재 5기까지 배출했다. 최진석 원장은 “다른 것에 영향받지 않고 우리만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기관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수별로 뽑아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은 한국에서는 이제 시작단계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반화된 방식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과정이나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이 대표적이다. 옥스퍼드 대학은 90여 년 전 대영제국을 운영할 리더를 키우기 위해 PPE 과정을 만들었다. 마쓰시타 정경숙은 파나소닉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국가 리더 양성을 위해 만든 사설 교육기관이다. 각각 90년과 30년의 역사를 거치며 많은 정치인과 각 계의 리더를 배출했다. 옥스퍼드대학의 PPE과정을 졸업하고 건명원 1기생으로 들어온 강신우(29)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일하게 되니 공부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건명원을 지원했다”며 “건명원이 PPE보다 좀 더 고전 쪽에 집중해서 커리큘럼이 짜인 것 같다. PPE과정은 건명원처럼 학제 간 융합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명원의 실험은 이제 첫 걸음마를 뗐다. 틀이 잡히지 않은 건 자유로운 실험과 도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하웅 교수는 입학식에서 “원생들과 우리 교수들 모두 실험대상이다”라고 말했다. 건명원이 옥스퍼드 PPE나 마쓰시타 정경숙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인재 양성기관으로 자리 잡을지, 장식적인 인문학 열풍의 하나로 그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방향타는 건명원 구성원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

- 글 전형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 사진 오상민 기자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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