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동북아 포커스] 아베 총리 9월 퇴진설과 ‘포스트 아베’ 시나리오 

자민당 좌파 집권 유력, 한일관계·동북아 정세 급변 가능성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간사장 다니가키 정권 탄생하면, 한일 관계 극적 개선 가능성 커… 9월 안보법제 성립시킨 직후 건강 이상 아베 거취에 주목

▎자신이 제출한 ‘안보법안’의 국회 통과를 강행하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본 국민 대다수는 이 법안을 ‘전쟁법안’으로 부르며 반대한다.
2007년 9월 1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제168회 국회 개원 시정연설을 통해 이렇게 자신의 소신소명을 소리 높여 피력했다.

“인구감소와 글로벌 경쟁의 심화, 학교와 가정의 교육력 저하, 일본을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의 변화, 이러한 시대의 큰 변화에게 직면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풍요로운 국민 생활과 밝은 미래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전후(戰後) 레짐(regime, 정권)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어린이들을 위해서, 이 개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저는 이러한 각오로 계속 싸울 것을 결의 했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싸운다는 ‘각오’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국회 내에는 요란한 박수갈채가 울려퍼졌다. 나는 과거 26년 간 역대 내각 총리대신의 연설을 국회 기자석에 앉아서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2007년 9월의 아베 연설은 특별히 출중했다. 힘차고 희망에 가득 차 있어서 마치 반세기 전의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연설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인 9월 12일, 아베 총리는 총리관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총리의 자리를 떠날 것을 결의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오히려 이것으로 국면을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총리 밑에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는 유엔총회에도 새로운 총리가 가는 편이 오히려 국면을 바꾸기 위해 좋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했으며, 스스로의 거취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국면을 타개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전체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다시 한 번 두 개의 연설을 비교해보라. 이것은 당시 일본 최고 권력자가 겨우 이틀 사이에 피력한 전혀 다른 소신이다. 나는 이때부터 정치인 아베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2012년 12월 26일 아베는 보란 듯이 컴백하며 두 번째로 총리 자리에 취임했다. 경제 정책으로 아베노믹스를 시행했으며 도쿄올림픽 유치를 성공시켰고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베 총리에 대한 불신감이 앙금처럼 깊게 남아 있다. 아베 총리가 뭔가를 시작하는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이 정치인을 믿어서는 안 돼!”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아베 총리가 안전보장 관련 법안(이하 안보법안)을 제출했을 때도 그 ‘외침’이 들려왔다. 게다가 외침 소리는 지금까지보다 더 크게 울려왔다. “아베 총리를 믿지 마라, 믿지 마라! 믿지 마라!!”

안보법안은 일본 내에서 ‘전쟁 법안’이라는 야유 섞인 별칭으로 불린다. 1954년 창설된 이래 지금까지 61년간 단 한 번도 전투를 수행해본 경험이 없는 자위대가 이 법안으로 인해 앞으로는 해외 전쟁에 가담하는 것이 용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안보법안에는 일단 ①일본인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②그 외에는 방법이 없고, ③필요 최소한이라고 하는 ‘3조건’이 무력행사의 조건으로 붙어 있다. 그러나 총리대신이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주변국과 전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연립 여당을 구성하는 공명당의 요구에 의해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됐지만, 아베 총리와 자민당은 여기에 또다시 ‘긴급 시에는 사후 승인이라도 상관없다’는 문장을 추가했다.

“‘안보법안’은 명백한 헌법 위반”


▎무라야마 토미이치 전 일본 총리는 9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가 제안한 안보법안저지 캠페인에 앞장선다.
일본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화헌법’이 존재한다. 그 제9조에서는 무력을 보유하지 않는 것과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명기하고 있다. 때문에 자위대가 해외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 일본국 헌법 제9조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일본의 중학생들도 알고 있는 이론이다.

실제로 일본의 거의 대부분의 헌법학자가 “헌법에 완전히 위배된다”라는 인식을 표명하고 있다. 6월 4일에는 중의원의 헌법심사회에서 자민당이 추천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하세베 야스오(長谷部恭男) 교수조차도 “완전히 헌법에 위배된다”라고 단언했을 정도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합헌인가 위헌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헌법학자가 아니라 대법원이다”, “집단적 자위권은 헌법의 범위 내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일본 국민을 속이고 있다. 그리고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은 이 법안을 7월 16일 중의원에서 채결을 강행했다. 강행 채결이란 대부분의 야당이 결석한 채, 여당만으로 단독 채결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 직전까지 여야 의원들이 뒤섞여 싸우면서 마치 전쟁터처럼 혼란스러웠던 일본 국회의 말 할 수 없이 보기 흉한 모습이 전 세계에 전파를 통해 흘러나갔다. 이날은 마침 11호 태풍 낭카가 일본 열도에 상륙한 날로, 태풍과 같은 혼란을 일으키며 채결됐다고 하여 ‘태풍채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 국회에서는 중요 법안을 심의할 경우, 먼저 중의원에서 채결하고,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되면 참의원(상원)에 보내진다. 참의원에서도 과반수가 찬성하여 통과되면 이 법안은 ‘법률’로 정해진다. 만약 참의원에서 부결되거나, 60일이 지나도 채결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다시 한 번 중의원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이때에는 중의원에서 두 번째 채결을 통해 제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법률’로 정해진다. 현재의 참의원의 의석 배분에서는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을 합치면 과반수를 넘는다. 또 중의원의 의석 배분에서는 여당이 3분의 2를 넘는다. 때문에 법안성립은 충분히 가능하다.

일본 국민의 62%가 안보법안에 반대


▎1966년 9월 1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오른쪽)이 방한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조부이자 정치적 멘토인 기시는 아직도 사후(死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요즘엔 아베 총리에 대한 불신감이 일본 전 국민에게 퍼져 있다. 7월 19일 <마이니치 신문>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일본 국민의 62%가 안보법안에 반대하고 있으며 찬성은 27%에 불과하다. 또 7월 16일의 강행 채결에는 국민의 68%가 ‘문제 있다’고 대답했다. ‘문제 없다’라는 응답은 불과 24%다.

2년 전 필자가 아베 총리를 불신하고 그에 정책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을 때, 나는 소수파에 속했다. 오히려 아베노믹스에 환상을 품고 있었던 일본인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아베노믹스를 입에 담지 않게 됐다. 그리고 안보법제를 저지하고자 많은 젊은이가 매일 국회 앞에서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나는 매주 토요일에 ‘도쿄(東京) 6대(大) 대학’ 중의 하나인 메이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내 강의에 출석하는 50여 명의 학생 중 대부분이 이 법안을 반대하고 있다. 노인 세대도, 예를 들면 70대인 필자의 부모 등은 “전후의 빈곤한 시대를 알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이 법안에 반대하고 있다.

7월 29일에는 무라야마 토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도쿄·유라쿠초(有樂町)의 일본 외신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는 회견장에서 그의 노익장에 감탄했는데, 만 91세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바이탈리티를 지닌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저는 91세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목청을 높여 외치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안보법안이 통과되면 아시아에서 군비확장 경쟁이 일어납니다. 군비확장 경쟁에 돌입하면 어디에선가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곧 전쟁이 됩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어느 누구도 이웃나라와의 전쟁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안보법안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아베 정권에 대해 ‘노!’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전쟁 법안’을 저지해야 합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전후 70년을 맞이하여 곧 발표될 ‘아베 담화’에 대해서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5년 제가 총리일 때에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전후 50주년을 계기로 하여 일본을 아시아에서 신뢰받는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당시의 자민당도 찬성한 것입니다. 저는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무라야마 담화’는 전 세계에서 높이 평가 받았으며,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도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후의 모든 내각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아베 담화’를 낸다고 합니다. 이는 곧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고, 수정하고 싶기 때문에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우리들은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7월 27일부터 참의원에서 안보법안에 대한 심의가 시작됐다. 아베 총리는 중의원에서의 심의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 법안은 불가결하다”, “더 이상 단 일국으로는 일본을 방위할 수 없다” 등의 주장을 계속 펴고 있다.

왜 아베 총리는 이렇게까지 안보법안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취재를 해오면서 결국 만나는 존재가 20세기의 대 정치가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다. 아베 총리에게는 유소년기에 크게 영향을 받은 외조부다. ‘쇼와(昭和)의 요괴’라는 별명을 지닌 기시 노부스케는 전후의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자가 되었지만, 3년 반 동안 구류된 후 석방됐다. 1957년 2월 총리에 취임했으며, 많은 국민이 반대한 일미 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강행 처리한 후, 1960년 7월에 사임했다. 미국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국 헌법의 개정이 정치가로서 그의 비원이었다.

지금의 아베 총리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외조부인 키시 노부스케에게 심취해 있다. 그는 1993년에 첫 당선했을 때, 정치가가 된 포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헌법개정을 하고 싶습니다. 헌법개정을 하기 위해서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외조부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아베는 과연 ‘안보 꽃길’을 걸을 것인가?


▎2012년 12월 26일 아베 신조 총리(가운데)가 아소 다로 당시 부총리 겸 재무상(왼쪽), 다니가키 사다카즈 법무상(오른쪽)과 함께 사진촬영을 했다. 두 사람 모두 포스트 아베의 유력한 총리 후보로 꼽힌다.
아베 총리가 올해 가장 밝은 미소를 보인 날은 5월 20일이었다. 이날은 수상 재임 기간이 키시 노부스케의 1241일을 넘어서, 1242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위대한 외조부’를 처음으로 앞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개정의 길에는 두 개의 높은 허들이 가로 막고 있었다. 첫째로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국민 투표에 부쳐 국민의 과반수 찬성을 얻는 것이다. 이 허들이 대단히 높다는 것은, 1947년에 시행된 후 지금까지 68년이 지나는 동안 헌법의 단 한 글자도 바뀌지 않은 것이 명확히 증명한다. 헌법 초안을 만든 미국 점령군(GHQ)이 일본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고의로 수정이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아베 총리의 비원인 헌법개정이 어렵게 되면서 그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외조부와 같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키시 노부스케의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1960년의 일미안보조약의 개정이다.

1951년에 성립한 구 일미안보조약은 10년의 기간을 한정해 놓았으며, 당시 일본인의 반미 감정은 피크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키시 노부스케 총리는 “일본의 발전에는 일미 안보조약이 꼭 필요하다”는 일념으로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조약기간을 연장하는 개정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 대신, 개정의 조인과 동시에 그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런 키시 노부스케의 모습이, 지금의 안보법제를 앞에 둔 아베 총리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추측이긴 하지만, 어쩌면 아베 총리는 9월에 안보법제를 성립시키는 것과 동시에 총리직을 사임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위 ‘안보 꽃길(花道, 하나미치)론’이다. ‘꽃길(花道)’이란, 스모 용어로 씨름판에서 스모를 끝낸 역사(力士)가 퇴장하면서 걷게 되는 무대 길을 말한다.

만약 아베 총리가 안보법안의 성립과 동시에 사임한다면, 그는 ‘안보법안을 성립시킨 정치가’로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키시 노부스케의 유산이 일미안보의 개정이었던 것 같이, 아베 신조의 유산이 안보법안의 성립이 되는 셈이다. 즉 아베 총리에게 있어서, 이번 일로 또 한번 ‘위대한 외조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안보 꽃길론’을 떠올린 또 하나의 근거는 아베 총리의 건강 악화다. 아베 총리는 어려서부터 궤양성대장염이라는 대장 질환을 앓고 있다. 이 병은 후생노동성이 난치병으로 지정한 심각한 질병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2007년 9월에 있었던 돌연한 사임도, 사실은 이 궤양성대장염의 악화에 의한 것이었다.

포스트 아베 후보는 4인이 각축


▎2014년 10월 28일 서대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왼쪽)이 납치 일본인 문제 재조사를 위해 방북한 이하라 준이치 일본 외무성 국장을 만났다.
전문의에게 물어본 결과, 궤양성대장염은 결코 완치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완치는커녕, 육체적 부담(과로), 정신적 스트레스, 음주나 향신료의 섭취 등의 세 가지가 병을 악화시키는 ‘3악(惡)’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평일은 물론, 늦은 밤의 회식이나 주말 스케줄까지 잔뜩 밀려 있다. 게다가 약 2년 반 동안 50개국을 넘는 외국을 순방하고 있으니, 육체적 부담은 보통이 아니다. 또 연일 국회에서 야당의 공격을 받고, 지지율이 저하되는 데 따르는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때문에 와인을 다량으로 마시고 있다. 즉 의사가 말하는 ‘3악’을 모두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는 지병이 악화되지 않을 까닭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의 몸 상태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베 총리는 9월에 안보법안만 성립되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 몸을 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이번 국회는 9월 27일까지 열리는데, 자민당 총재의 임기 역시 9월 말까지다. 아베 총리가 사임하기 위해서는, 이때가 적기다. 그 반대로 만약 그 적기를 놓치게 된다면, 내각 지지율은 더 내려갈 뿐이고, 몸 상태도 더욱 악화될 것이다. 덧붙이자면 일본 정계에서는, 내각 지지율이 30%을 밑돌면 대개는 반년 이내에 내각해산을 맞이한다.

8월 상순 현재 아베 총리가 사직하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베 정권이 반영구적으로 계속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더 첫머리의 아베 총리의 두 개의 스피치를 읽어보면 좋겠다. 아베 신조라고 하는 정치가는 불과 이틀 만에 사임을 결정하고 발표하는 사람이다.

만약 아베 총리가 9월 말로 전격 사임한다면, 그 후계자는 다음의 네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70) 자민당 간사장, 이시바 시게루(石破茂·58) 지방창생(地方創生: 지역활성화, 부흥을 담당하는 정부부처) 담당대신, 아소 타로(麻生太郎·74) 부총리 겸 재무대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66) 관방장관이다.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여당인 자민당의 총재 경선에서 승리해야 하며, 자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자민당 국회의원 2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20명의 서명’이 의외로 어렵다. 거의 모든 의원이 각료(장관)나 부각료, 정무관 등의 요직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뻔히 질 것 같은 후보자에게 서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이들 4인 정도밖에 후보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 중에서 아베 총리는 2년 반 이상 자신의 아내처럼 충실히 내조해 준 스가(菅) 관방장관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 단 지지 조건으로는 ‘아베 총리가 사랑하고 있다’고까지 소문난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56) 자민당 정무조사 회장을 요직에게 앉힌다는 확약을 스가 씨에게서 얻어내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퇴임 후 컴백할 것이 예상되는 자민당 내의 호소다(細田)파는 95명으로 당내 최대파벌이다. 그러나 호소다파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아베파와 진배없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과연 누구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인지가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총리의 차남으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리는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34) 내각부정무관의 동향이다. 지금으로서는 고이즈미 정무관이 이시바 시게루 후보를 추천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일본 매스컴이 일제히 이시바·고이즈미 콤비에게 주목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이시바 후보가 상당히 유리해진다.

아베가 납치 문제 서두르는 이유


▎1. 북한군 행사장에 나타나 환호에 응하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아베 일본 총리는 납치문제에 진전이 있으면 언제라도 평양으로 달려가 김정은을 만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 2. 북한에 납치됐다가 2002년 10월 15일 일본으로 돌아온 오쿠도 유키코(왼쪽)와 하스이케 가오루. 이들은 다른 피랍 생존자 3명과 함께 귀국해 일본 열도를 흥분시켰다.
실제로 이시바 장관은 중의원에서 안보법안 채결이 행해진 전날인 7월 14일, 갑자기 아베 비판을 시작했다. “안보법제를 둘러싸고 국민적 이해가 진전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여론조사를 보면 알 수 있는 일로, 아직 (국민적 이해가) 진행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발언에 아베 총리는 몹시 놀랐다. 이시바 장관은 어쩌면 9월 아베 총리의 퇴진을 예측해서 이런 발언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다니가키(谷垣) 간사장이다. 자민당에는 오랜 세월, ‘진자(振り子)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원리가 작용해왔다. 우파 다음은 좌파, 좌파 다음은 우파가 총리가 된다는 원리다. 그렇게 밸런스를 잡으면서, 자민당이 장기간 안정정권을 쌓아온 것이다.

이 원리에 의하면 우파인 아베 총리 다음은, 좌파인 다니가키 간사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다니가키 정권이 탄생하면, 한일 관계 및 일중 관계는 극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 내 좌파의 좌장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총무회장으로, 올 5월에는 3천 명을 인솔하여 중국을 방문, 아베 총리의 친서를 시진핑(習近平) 주석에게 전달했다. 니카이파는 현재 33명이지만, 자민당 내 좌파는 이보다 더 많기 때문에, 그들이 다니가키 간사장에게 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민당 총재경선에서는 국회의원 표에 지방표를 더해 1차 투표를 해서, 과반수를 얻는 후보자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는 상위 두 명에 의한 결선 투표가 진행된다. 그 경우 3위, 4위로 떨어진 후보자와 그 지지자들이 어느 후보자를 추천할 것인가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2012년 9월의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는 이 결선 투표에 의해 2위이었던 아베가 1위이었던 이시바를 누르고 승리했다.

아베 총리는 외교문제에서도 결과를 조급하게 서두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에 의한 납치자 문제다. 일본에서 납치문제는 한국의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권의 최대 과제’이며 일본에는 납치문제를 전담하는 장관까지 존재한다.

아베의 ‘정치 스승’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2002년 9월 북한을 전격 방문하여 김정일 총서기와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정상회담 자리에도 동석한 경험이 있다. 당시는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가 13명이 있다고 일본정부가 인정하고 있었는데(현재는 17명), 북한은 이에 대해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고 일본 측에 통보했고, 5명에 대해서 일본에 일시 귀국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때 일본정부는 ‘5명의 귀국을 허락해준 북한을 높이 평가한다’고 하는 유화파와, ‘5명뿐만 아니라 생존자 전원을 귀국시킬 때까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경파가 나뉘어져 심한 논쟁이 일어났다. 당시 아베는 강경파의 선봉에 있었다. 이후 ‘납치의 아베’라는 닉네임이 정착되었으며, 아베는 고이즈미 총리의 후계자로 급성장했다.

이런 경위로 아베 총리는 납치 문제만은 자기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납치 문제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 씨의 연로한 부모님에게 ‘미소를 되찾아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하다.

아베 총리가 북한과의 교섭의 지렛대로 사용한 것은 일본과도 북한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 있는 몽골이었다. 작년 3월에는 몽골 정부의 중개로 요코타 메구미 씨의 부모님을 울란바토르로 보냈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요코타 메구미 씨의 딸인 김은경 씨(메구미 씨와 한국인 납치 피해자 김영남 씨의 딸)와 그녀의 남편이 한 살 된 손녀딸을 데리고 그곳으로 날아와, 처음으로 면회가 이루어졌다.

9월 정상회담설, “납치문제 진전되면 평양 가겠다”

올해 5월 중순, 아베 총리의 수석비서관인 이마이 다카야(今井尙哉)가 극비리에 울란바토르를 방문했다. 북한 측이 “김은경이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해서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를 평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김은경 일가의 방일을 요구했으나, 북한 측은 일본에 보내면 평양에 돌아오지 않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서 거부했다.

7월 4일 일본 국민들이 고대하던 날이 다가왔다. 1년 전 이날, 북한은 일본인 특별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납치 피해자의 재조사를 실시한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1년이 지난 이날에 무언가 ‘희소식’이 발표되지 않을까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발표가 없었다. 북한은 그 이틀 전인 7월 2일, 베이징의 일본 대사관에 “당분간 시간을 달라”고 통고해 온 것이 전부였다.

이때도 13년 전의 가을과 같이 대북 유화파와 강경파 사이에서 북한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경제제재를 강화하라”고 주장하는 강경파에 동조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아베 총리는 뜻밖에도 유화파를 지지했다. 그리고 총리 관저에서는 비밀리에 아베 총리의 의향이 하달됐다.

“9월까지 납치 문제, 특히 요코타 메구미 씨의 문제가 진전되길 바란다. 진전이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평양으로 날아갈 의향이 있다. 만약 제3국이 좋다면,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일조 정상회담을 베이징, 혹은 몽골에서 해도 상관없다.”

8월 6일 ARF(ASEAN지역 포럼)의 외무장관 회의에 출석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대신과 북한의 리수용 외무상이 일조 외무장관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기시다 외무대신은 다시 한번 아베 총리의 의향을 김정은 제1서기의 측근에게 전달했다.

기자가 다년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일본과 북한의 외무장관이 접촉하면 사태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2002년 7월에 가와구치 유리코(川口賴子) 외무대신과 백남순 외무상이 회담한 지 2개월 후에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북한 방문이 이루어졌다. 2004년 7월 양국의 외무장관이 재회담한 직후, 납치 피해자인 소가(曾我) 히토미 씨가 일본의 가족과 재회했다. 2013년 7월 기시다(岸田) 외무대신과 리수용 외무상이 ARF에서 접촉한 것이 계기가 되어, 몽골에서 요코타(橫田)씨 일가의 대면이 실현됐다. 지난해 8월 다시 양국의 외무장관이 접촉한 후 10월에는 일본정부대표단의 북한 방문이 실현됐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아베 메시지’가 ‘9월까지’라고 기간을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9월인가? 이 역시 아베 총리의 9월 퇴진설과 오버랩되는 것이다. 아무튼 9월은 순 일본말로 ‘나가츠키(長月)’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긴 싸움의 9월이 오고 있는 것이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201509호 (2015.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