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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이사쿠 칼럼] 중국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庸)의 기개와 정의감 

일본은 왜 ‘소인배 나라’란 소리를 듣는가 

이케다 다이사쿠
일본은 중국의 보편성을 배워야 21세기에 살아남아… 그 ‘중국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진융 문학’의 본령

▎1996년 홍콩에서 만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오른쪽)과 진융(金庸).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진융의 작품은 전 세계 중국인의 공통어로 통한다.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고 하면 소설에 나오는 영웅 이야기 같지만 진융(金庸)이 걸어온 인생이 그랬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진융의 소설이 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대문호다. 동네 아저씨부터 대학 교수까지, 중학생부터 노인까지 모두 진융이 쓴 무협소설에 탐닉한다. 독자가 몇 억명이 되는지는 가늠할 수도 없다. 진융의 소설이 바로 중국인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한다.

소설 속에서 활약하는 인물들은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악인을 묵인하지 않고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민중 속 영웅이다. 예를 들어 권력을 등에 업은 부패 관리를 응징하고 ‘지명 수배자’가 되는 무사가 있다.

친구를 구하고자 대군(大軍)이 기다리는 사지로 뛰어드는 풍운아가 있다. 모략으로 오명을 쓰고 분노를 참지 못해 폭발하는 의인(義人)이 있다. 대의와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있다.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이 인생의 거센 파도에 단련되어 불기분방한 영웅호걸이 되는 성장 이야기가 있다. 한 청년이 유부녀를 사랑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적에게 붙잡히자 청년은 그녀를 위해 감연히 남편을 구출하러 가온몸이 불덩이가 될 때까지 싸운다.

진융은 신의가 두터운 ‘신념이 있는 남자’의 세계와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진정한 여성’을 그렸다. 모두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십인십색 같은 유형의 사람은 없다. 진융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쓰고 싶은 인물상은 어려운 환경도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견뎌내고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며 분투하는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 중국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융의 인생이기도 했다. 진융의 본명은 차량융이다. 1924년 저장성(浙江省)에서 태어났다. 선조도 의로운 분이었다. 진융이 가장 존경한 조부 차원칭은 청나라 말기에 현의 지사를 지냈다. 그때 단양에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가 침략을 꾀하는 서구열강의 앞잡이라며 불을 지르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주모자를 처형하려 하자 할아버지가 주모자를 도와 도망치게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모든 책임을 지고 지사직을 사임한다. ‘몸을 던져 백성을 구하겠다’는 기개였다. 이러한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기개’가 진융의 인생에도 흐른다. 학교 성적은 늘 일등이었지만 두 번 퇴학당한다.

열일곱 살 때는 권위적인 교사를 풍자한 글을 벽보에 실었다. 학생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는 학교에서 쫓겨난다. 또 한 번은 스무 살 무렵 외교관을 목표로 중칭의 중앙정치학교를 다닐 때다. 그곳에서도 수석이었지만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학생에게 분노를 느끼고 학교 당국에 처분을 요청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퇴학을 당하고 만다.

홍콩에서 신문 명보(明報)을 창간한 뒤에도 끊임없이 파랑을 불러일으켰다. 진융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때는 암살의 표적이 되어 목숨마저 위태로운 중압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비, 선악은 명확합니다. 저는 도리에 맞지 않는 압력에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위험이 닥쳐 공포를 느껴도 비겁하게 물러서면 안 된다. 내가 쓴 소설 속 영웅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대장부는 은인과 원수를 분명히 한다”


▎1997년 한국을 찾은 진융이 자신의 소설 <의천도룡>의 한국어 번역본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신념이 있는 남자’의 세계와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진정한 여성’을 그렸다.
진융의 말대로 ‘목숨을 건 남자는 일당백’이다. 그의 펜은 검이었다. 싸우기 위해 쓰고 또 쓰고 끝까지 썼다. 진융은 큰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조차도 사설을 썼다.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2년 중국의 대약진정책이 실패하자 홍콩으로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었다. 진융은 신문에 난민 구호를 부르짖고 직접 구호활동에 나섰다.

1963년 중국의 정치가가 ‘스포츠는 필요 없지만 핵무기는 필요하다’고 발언하자 ‘스포츠는 필요하지만 핵무기는 필요 없다’고 반론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그 본질은 ‘권력투쟁’이라고 간파하고 보도했다. 린뱌오의 실각을 예측하고 덩샤오핑의 복귀와 장칭의 말로도 진융이 사설에 쓴 대로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사설을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 진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독립의 원칙을 지키고 어떠한 유혹과 위압에도 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대장부’다.

“부귀도 그의 마음을 음탕하게 할 수 없다, 빈천도 그의 지조를 바꿀 수 없다, 권세와 무력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을 일러 대장부라고 말한다.”(맹자)

그 무엇으로도 대장부가 품은 뜻은 바꿀 수 없다. 그리고 진융의 소설 속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대장부는 은인과 원수를 분명히 한다.”(<서검은구록>)

중국의 ‘대장부’는 은혜를 입으면 어떻게든 은혜를 갚는다. 은인에게 해를 입히거나 악의를 품으면 상대를 영원히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인은 벗이 되려고 하고 악인도 섣불리 손댈 수 없다. 은혜와 원수를 참으로 쉽게 잊어버리는 일본인과는 대조적이다.

‘대용(大勇)’은 만용과는 다르다. 영웅은 영웅 행세를 하지 않는다. 진융은 어질고 후덕하며 도량이 크다. 만날 때마다 늘 친절하고 순박할 정도로 꾸밈이 없다. 깊은 산과 같은 심오한 학문도 진융의 입에서 나오면 뽐내지 않는 청류의 정취를 띤다.

“일본인은 다른 면에서는 뛰어나도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군요. 개인을 예로 든다면 학문도 출중하고 능력도 뛰어난데 인간관계는 서투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는 ‘나쁜 사람’으로 오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침략에 대해 성실히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두고 한 말이다.

“저희 집은 꽤 유복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전쟁통에 약도 부족하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동생도 죽었습니다.” 진융은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하는 편이 얼버무리는 것보다 타국의 신뢰를 받습니다”라고 말한다.

“소인(小人)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논어>)고 한다. 소인배는 잘못을 저질러도 말을 그럴듯하게 꾸며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잘못을 두 번 세 번 반복하고 세상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다. 아시아 사람들이, 아니 세계가 일본을 ‘소인배’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거기에 ‘의(義)’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의는 사람의 근본이다.”(<회남자>) 올바른 도리를 알기에 인간이다. 그것을 중국은 ‘문명’이라고 한다.

큰 인물은 미움과 박해 속에서 성장

‘태생’보다 ‘문명의 정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중국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본디 이민족에게도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다. 진융의 말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에 한족이 아닌데 재상에 오른 인물이 적어도 23명 있다고 한다. 태생이 어디냐가 아니라 중국에서 보아 ‘문명화’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의’라는 인간의 도를 공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구다.

이점에서는 선천적인 ‘피’로 하나가 된 일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본에서는 일본 민족과 다른 피를 가지고 있으면 영원히 외인(外人)인 ‘밖에 있는 사람’이다. 문명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간주의다. 거기에는 보편성이 있다. 피로 하나가 되려는 것은 섬나라 근성이다. 거기에서 배외주의가 생긴다.

역사가 토인비는 ‘중국을 배우라’고 유언했다. 앞으로 세계 일체화 시대를 맞아 유사 이래 하나의 문명권을 유지해온 중국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나라가 이웃인 일본이 아닐까. 일본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중국의 보편성을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한다면 과연 지나친 말일까. 그 ‘중국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진융 문학이다.

그 ‘마음’은 박해와 싸워 신념을 관철하고 몸을 바쳐 약속을 지키는 마음이다. 나와 진융도 그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처음 만남의 자리에서 진융은 방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 격언에 ‘박해를 받지 않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질투도 받지 않는 사람은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진융을 찬탄하는 뜻에서 오히려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케다 다이사쿠 - 1928년 1월 2일 도쿄 출생. 창가학회인터내셔널 회장. 창가대학·창가학원·민주음악협회·도쿄후지미술관·동양철학연구소 등 설립. 유엔평화상·한국화관문화훈장 외 23개국 28개훈장, 세계계관시인 등 수상 다수. 전 세계 대학으로부터 360개의 명예박사·명예교수 칭호 수여. 토인비 박사와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를 비롯한 저서 다수.

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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