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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휴머니즘이 보여준 기적 <마션> 

표류(漂流)에서 살아남는 법 

강유정 영화·문학평론가
낙담해서 주저앉기보다는 지평선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기 위해 발걸음을 나서려는 마음. 그 ‘낙관주의’가 인간 생존의 주요한 비결이 된다

▎영화 <마션>의 한 장면. 주인공 마크는 화성에 간 지 엿새 만에 수트가 고장 나는 불운을 겪는다. 졸지에 ‘화성 표류’를 하게 된 그는 과연 구출될 수 있을까?
많이 읽힌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화가 되는 일은 흔하다. 실패한 경우도 많지만 폭발적인 흥행을 한 사례가 적지 않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테크놀로지와 콘텐트의 다양한 변주가 이뤄진다.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한 장면. 주인공 척은 바위에 날짜를 새기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아무래도 X됐다.”

소설 <마션>의 첫 문장이다. 그럴 만도 하다. 인생 최고의 시간이 되리라 여겼던 화성탐사가 인생 최악의 시간을 마련해버렸다.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귀환을 서두를 즈음 마크만이 낙오되고 만다. 화성에 간 지 단 엿새 만에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우주의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수트가 고장 난 마크, 동료들은 그가 생존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륙한다. 이제 마크는 화성에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아마 화성에서 죽은 최초의 지구인이 될 것 같다. 그러니 X된 게 맞다. 완전히 엉망이 되고만 셈이다.

“왔노라, 표류했노라, 살아남았노라”


▎마크의 동료들은 화성 탈출 당시 마크를 포기했지만 이내 그를 구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마크 구출작전’은 큰 성원을 받으며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영화 <마션>은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을 원작으로 한다. 인터넷 개인 블로그에 연재된 이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출간에 이르렀고 출간 된 이후 무려 44주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과연 이 소설이 이토록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굳이 따지자면 영화 <마션>은 표류기라고 부를 수 있을 장르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명 표류기를 찾아보자. 먼저 이안 감독의 아름다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떠오른다.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227일간 홀로 태평양을 표류한 뒤 마침내 멕시코 만에 닿는데 성공한 소년 파이의 표류기를 그리고 있다. 홀로 표류한 지 오래된 나머지 배구공을 의인화한 ‘윌슨’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던 영화 <캐스트 어웨이>도 떠오른다. <캐스트 어웨이>의 원조 격이라고 할 만한 소설 <로빈슨 크루소>도 있고 그 유명한 <15소년 표류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가깝게 여겨지는 것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이다. 딸아이의 죽음을 견디기 힘들었던 라이언 박사는 사람을 피해 우주로 망명을 간다. 우주인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사실상 우주는 라이언 박사가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나 다름없다. 중력이 없어서 사람과 사람이 닿지 않는, 공기가 없어서 기계의 도움 없이는 이야기도 나눌 수 없는 곳, 바로 그런 곳이 라이언 박사가 원한 곳, ‘아무도 없는 곳’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래비티>의 라이언 박사는 정말 혼자가 되자 지구로 되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어떤 점에서 원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언 박사는 우주의 미아가 되자 생존하기 위해 애쓴다. 언제라도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된 것처럼 삶의 의지를 버렸던 라이언이지만 막상 죽음 앞에 닥치자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영화 <그래비티>는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쯤 꿈꾸기 마련인 절대고독의 공간을 매우 감각적으로 재현해냈다. 우주 먼지에 부딪혀 허블 망원경 부스러기와 함께 우주를 떠도는 라이언의 모습은 고독의 즐거움이 아닌 공포를 선사해주기 충분했다. 말하자면 혼자 있고 싶다는 호소는 사실 혼자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호소였던 셈이다.

생존의 필요조건 ‘긍정’과 ‘위험’


▎마크는 화성에서 낙오됐음에도 긍정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 화성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구출의 날을 고대한다.
영화 <그래비티>가 절대고독을 탐사하는 철학적인 질문으로 가득하다면 영화 <마션>은 생존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작품에 가깝다.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낙관성을 기준으로 지표로 만들었을 때 <그래비티>의 주인공 라이언과 정반대 지점에 놓일 인물이다. 라이언이 낙관성을 포기한 캐릭터라면 마크는 비관성이 없는 인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마크는 현실적이라기보다 거의 인공의 인물로 보일 정도다.

사람이 어쩜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 <마션>을 보다 보면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능력이 바로 그 긍정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즉 긍정도 능력인 셈이다. 아무도 없는 우주, 공기도 중력도 없는 그곳에서 가장 먼저 고갈될 능력 역시도 긍정의 능력 아닐까? 바로 그 긍정의 능력이야말로 X 된 삶을 구원으로 이끄는 유일하고도 올바른 길이란 듯이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마크가 긍정성만으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나무에서 과일이 떨어지길 기다리듯이 우물에서 숭늉을 찾듯이 기다리는 게 긍정의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긍정의 태도는 영화 속에서 마크가 매일 화성의 지평선을 보기 위해 나가는 데서 비롯된다. 이유는 단 하나. 그저 할 수 있기 때문이다(Just because I can).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진정한 긍정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마크는 죽을 수도 있지만 꼭 죽으라는 법도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의 목록을 만들고 필요한 만큼의 칼로리를 계산하며 그러기 위해 만들어내야 할 것들을 찾아낸다. 가령 화성 표면 탐사기간은 3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급선들은 넉넉잡아 전 대원이 56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가져다 놓았다. 그러니 남은 식량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그리 짧은 편이 아니다라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 바로 이 차이다. 남은 식량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고작 얼마가 아니라 그리 짧지 않다고 여기는 것, 여기서 긍정은 시작되고 행동도 비롯된다.

이 정도의 태도이기에 그는 300일 분의 식량으로 400일까지 버틸 수 있다고 여긴다. 지구의 종말론이 유행할 때면 사이비 종교 지도자의 말에 현혹된 사람들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탕진한다. 마크의 태도가 긍정적이라는 것은 비록 내일이 마지막일지언정 그 다음날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300일 분의 식량은 재앙을 대비해 대충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고 철저히 소비함으로써 100일을 늘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늘려가는 것 그것이 생존법이라는 듯이 말이다.

마크의 생존법은 어떤 점에서 영화 <라이프 오브파이>의 주인공 파이의 생존법과 닮아 있다. 파이는 단 하나의 구명정에 호랑이와 단둘이 남겨진다. 배가 고픈 호랑이는 언제 파이를 먹이로 삼을지 모른다. 그래서 파이는 매일매일 호랑이를 굶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를 배곯게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사냥을 하고 덕분에 그 역시도 먹을 것을 구한다. 매일매일의 고민은 하루하루가 쌓여 227일간의 항해를 만들어낸다. 만일 파이 곁에 호랑이가 없었더라면 여정은 훨씬 더 고되었을 것이다. 그 기나긴 하루를 그저 구출에 대한 바람과 생존 가능성 여부에 대한 고민으로 채웠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

정말 지독한 곤경에 처했을 때는 앉아서 생각을 골똘히 하기보다 뭔가 움직이는 게 낫다. 마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하루하루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찾고 또 해결해간다. 우선은 배를 채우고 다음엔 통신 장치를 고치고, 그런 다음엔 식량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이 해결의 과정은 매우 그럴 듯하게 제시된다. 평방미터를 나눠 계산하고 대원들의 이분을 거름으로 쓰면서 그는 자신의 전공인 식물학을 맘껏 활용한다.

심지어 그는 가만히 앉아 구출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로버라는 이동장치를 타고 구출되기 적합한 곳을 찾아간다. 화성의 추위를 견디며 멀리 가기 위해서는 방사능 덩어리를 분출하는 로켓 연료를 태우면 된다. 비록 암에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살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진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다. 그러니 위험이란 삶의 방해요소가 아닌 필수요소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국 마크를 화성에서 구해주는 것은 바로 사람, 그를 버리고 갔지만 그를 구하려고 돌아온 동료들이다. 아무리 마크가 긍정적이며 똑똑해서 화성에서 잘 버텼다고 할지라도 그가 혼자 화성에서 벗어나 지구로 되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지구에서 그의 생존 메시지를 받아야만 하고 누군가 지구에서 그를 데리러 와야만 한다. 결국 사람은 사람의 도움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는 대개 인간의 이기심을 주목해왔다. <에이리언>이나 <토탈리콜>과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토탈리콜> 속의 화성은 지구보다 더 극심한 빈부 및 계층의 격차로 나뉜 공간으로 묘사된다. <에이리언> 속에서 우주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괴력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덧없는 욕심이 재앙의 시작이라고 말한 <프로메테우스> 역시 유사한 맥락 가운데에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2년 전 SF를 통해 묵시록적 세계관을 펼쳐 보였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이번엔 긍정과 귀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실이다. <프로메테우스>와 정반대에 놓인 <마션>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회의에서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 돌아서 있다. <인터스텔라>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마지막 열쇠가 사랑이었다면 <마션>의 열쇠는 희생과 긍정이다. 사람을 화성까지 데려다 놓는 것은 기술이지만 화성에서 지구로 데려오는 것은 희생과 긍정인 셈이다. 과학은 인간을 먼 곳에 데려다주지만 그럴수록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공부다.

삶은 곧잘 항해나 표류에 빗대어지곤 한다. 첫 번째 항해에서 마지막 도착이 어떨지를 쉽게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흔을 훌쩍 넘은 노장이자 거장인 리들리 스콧은 <마션>을 통해 휴머니즘을 다시금 정의한다. 사람이 주는 온기, 그것이 곧 휴머니즘의 근간이며 따뜻한 농담의 습기 그것이 휴머니즘의 표현이라고 말이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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