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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화제] V4 이룬 두산 ‘화수분 야구’의 비밀 

마르지 않는 샘을 계속 팠더니 우승이 나오더라 

김식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정규시즌 3위로 포스트시즌 진출, 넥센·NC·삼성 차례로 누르고 통산 4번째 우승… 거액 들여 외부선수 영입하기보다 2군 집중투자를 통한 자체 자원 육성으로 결실

▎10월 3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삼성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두산 선수들이 한데 모여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82·95·2001년에 이어 통산 4번째다. / 사진·중앙포토
2015년 10월 31일은 두산 베어스 팬들에게 꿈같은 하루였다. 이날 끝난 2015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은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 메달 수여식과 우승 세리머니가 끝나 운동장이 텅 비었는데도 1만여 팬들은 서울 잠실구장을 떠나지 못한 채 두산 응원가를 불렀다.

같은 시간, 야구장에서 가까운 신천동에서도 두산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식당이나 술집을 찾은 그들은 삼삼오오 축배를 들었다. 신천 일대에 흩어져 축승가를 부른 두산 팬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두산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건 지난 2001년 이후 14년 만이었다. 상대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연속 통합 우승을 기록한 최강팀 삼성이었다. 정규시즌 3위였던 두산은 넥센 히어로즈와의 준플레이오프(3승 1패), NC 다이노스와의 플레이오프(3승 2패)를 거쳐 한국시리즈에서 1패 후 4연승을 기록했다.

여우 같은 불곰 감독


▎두산에서만 선수로(95년), 코치로(2001년), 감독(2015년)으로 우승을 맛본 김태형 감독. / 사진·중앙포토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하자 김태형(48) 두산 감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서울 홈팬들 앞에서 우승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서 정말 기쁩니다. 서울은 물론 먼 원정경기까지 와서 응원해주신 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별다를 것 없는 짧은 한마디에 팬들은 열광했다. 두산은 올해까지 프로야구 최초로 7년 연속 홈 관중 100만 명을 기록한 팀이다. 두산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고, 팬들은 진득하게 응원한 결과다. 두산 구단과 두산 팬들에게 남은 단 하나의 소원, 한국시리즈 우승이 14년 만에 이뤄졌으니 잠실구장이 거대한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건 이상하지 않았다.

경기 후 두산의 합숙소인 서울에 한 호텔에서는 우상 축하연이 열렸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과 박 회장의 조카인 박정원 두산 베어스 구단주(두산건설 회장), 그리고 구단 임직원과 선수단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그들은 서로 축하했고, 감사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달콤한 하루였다.

<월간중앙>과 만난 김 감독에게 “우승한 다음 날은 어땠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우승하고 술 많이 먹었다. 그리고 푹 잘 줄 알았는데 다음날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눈이 떠지더라. 평소엔 늦잠 자느라 아침을 안 먹는데 이상하게도 술 먹고도 정신이 말짱했다. 다른 코치들도 그렇더라. 함께 아침밥을 먹고 헤어졌다”고 말했다. 1년 동안 이어진 사투가 끝났고, 챔피언에 오른 뒤에도 흥분과 긴장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김 감독은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많은 분이 축하해 주시는데 내가 이런 칭찬을 받아도 될 사람인지 모르겠다. 기사에서 ‘우승 감독’이니 ‘용장(勇將)’이니 하는 단어를 보면 좋으면서도 어색해 죽겠다”며 웃었다.

사실 그는 이번 포스트시즌 전까지는 주목받는 감독이 아니었다. 지난해 말 두산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별로 화제가 되지 못했다. 지난해 오프시즌 때는 김성근 감독이 한화 사령탑에 오른 게 최고 이슈였다. 김용희 감독은 SK 와이번스, 김기태 감독은 KIA 타이거즈 사령탑에 앉았다.

지난해 선수단 감찰논란으로 물의를 일으킨 롯데 자이언츠는 이종운 감독을 선임했다. 선수 시절부터 무명이었던 김태형 감독은 사령탑에 오르고도 조용했다. 그가 “두산의 전통을 되살리겠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 있는 야구를 하겠다”고 취임일성을 했을 때도 별 반응이 없었다. 누구나 할 법한 말 같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1년도 지나지 않아 확 달라졌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한국시리즈를 중계하면서 “김태형 감독은 두산 팀컬러에 맞는 ‘곰 같은’ 감독으로 보이지만 그 속은 여우에 가깝다”고 말했다. 투수교체나 작전지시하는 걸 보면 영리하고 기발하다는 뜻이다.

야구 감독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결정은 투수교체다. 김 감독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결심을 할 때 거침이 없었다. 마무리 이현승을 7회 등판시키기도 하고, 중간계투 노경은이 던지고 있는 도중(볼카운트 1-1)에 바꾸기도 했다.

3승 1패로 앞선 5차전에서는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34·미국)를 중간계투로 투입하는 강수를 뒀다. 그러면서도 우승 확정 순간에는 포스트시즌 내내 고생했던 이현승을 올려 마무리의 예우를 충분히 했다.

큰 경기일수록 감독은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성공을 위한 베팅보다는 실패 확률을 줄이는 선택을 하려 한다. 초보 감독은 수(手)가 많지 않아서, 노회한 감독은 초라해지는 걸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태형 감독은 매뉴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리스크가 크더라도 강한 상대를 압박할 만한 카드를 꺼냈고, 결심한 이후에는 용감하게 움직였다.

김 감독은 “시즌을 치르면서 ‘초보 감독인 내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에 빠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선수들을 믿고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갔다”고 말했다. 두산 선수들이나 외부 전문가들이 김 감독을 전지전능한 리더로 보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선수들에게 가장 엄정한 감독이다. 선수들의 힘을 최대한 끌어내 우승을 만들어냈다.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 정수빈(26)은 “김태형 감독님은 감독이 되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라고 말했다. 평소 무뚝뚝한 정수빈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 기자는 적잖게 놀랐다.

팀워크 최우선… 김태형의 ‘규율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우승이 확정되자 마운드로 뛰쳐나가 기쁨을 함께하는 두산 선수들. / 사진·중앙포토
지난해 정규시즌 6위에 그쳤던 두산은 올해 정규시즌 3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김 감독의 리더십은 1년 만에 완성된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긴 어렵지만 그가 부임하면서부터 두산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두산 최고참 홍성흔(39)은 “선수 시절부터 아주 엄한 분이셨다. 나도 이제 나이 많은 선배가 됐지만 여전히 감독님은 어려운 분”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두 가지만 당부했다.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개인감정을 갖고 야구 하지 마라.”

너무나 명료해서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웠다. 김 감독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그는 “설렁설렁하는 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훈련하고 공부할 때는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경기에서 내야 땅볼을 쳐도 1루까지 열심히 뛰어야 한다. 그런 모습들이 팀을 강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기가 삼진을 먹었다고, 안타를 치지 못했다고 인상 쓰고 있으면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된다. 자기 성적이 안 좋다고 수비할 때 대충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가 강조하는 건 개인의 성실성과 팀의 조직력이었다. 야구는 단체경기이지만 개인종목의 성향이 강한 스포츠다. 아무리 잘난 선수도 다른 선수의 타순이나 포지션을 침범할 수 없다. 선수들 마음속에는 팀 성적보다 개인 기록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라기 쉽다. 연봉 산출 때는 개인 기록을 더 따지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이기심을 누르게 하고, 힘을 결집하는 게 야구 감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선수 시절부터 그랬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1990년 OB(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 김태형은 2001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타율 0.235를 기록한 평범한 포수였다. 대신 제멋대로 던지는 투수들을 어르고 윽박지르는 재주가 탁월했다. 그의 진가는 98년 OB의 주장이 됐을 때 드러났다. 실력만 믿고 까부는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를 혼낸 사건은 지금도 유명하다. 키 1m73㎝의 김태형이 근육질의 우즈(1m85㎝)를 라커룸 뒤로 끌고 간 것이다. 커튼을 치고 둘이 언쟁을 벌인 끝에 우즈는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몸싸움에 가까운 말싸움이 있었다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김태형은 2000년까지 3년 동안 주장을 맡았다. 당시 두산에는 김동주·안경현·홍성흔·정수근 등 개성 강한 선수가 많았다. 그래도 두산은 팀워크가 가장 좋은 팀으로 통했다. 이들을 휘어잡는 선수단 리더가 김태형이었다.

덩치가 작았음에도 김태형은 곰 중에 가장 사납다는 ‘불곰’으로 불렸다. 두산은 전통적으로 위계질서가 강한 팀이다. 야구를 잘하든 못하든 나이에 맞는 ‘라커룸 역할’을 칼같이 해야 한다. 스무 살 나이부터 두산의 중심타자를 맡은 김현수(27)도 장비 정리 등의 막내 역할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2000년대 들어 다른 팀들이 수평적 관계를 중시했지만 두산에는 90년대 방식이 지금도 남아있다. ‘불곰’이 만든 문화다.

김태형은 2001년 선수 은퇴 후 두산 배터리 코치를 지냈다. 두산 사령탑이 바뀔 때마다 그는 감독 후보군에 올랐으나 2012년 SK 코치로 떠났다. 두산은 지난해 송일수 감독을 경질하고 김태형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감독으로는 분명 초보였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두산의 리더였다. 김태형 감독이 “두산 베어스다운 야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두산 선수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는 원칙만 강조할 뿐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시즌 중 전체 미팅을 소집한 적도 거의 없었다. 울타리를 넓게 쳐주고 규율을 어기는 선수를 엄벌하는 게 그의 특징이다. 선수의 자주권을 충분히 보장하는 ‘자율야구’도 아니고, 감독이 모든 걸 통제하는 ‘타율 야구’도 아니다. 룰 안에서 마음껏 경쟁하고 싸우는 ‘규율야구’가 김태형 감독의 야구다.

김 감독은 결과를 두고는 선수를 절대 나무라지 않는다. 대신 태도와 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엄하게 혼낸다. 마흔 살 가까운 홍성흔이 내야 땅볼을 때리고 설렁설렁 뛰다가 “너, 야구 그만하고 싶어?”라는 불호령을 들었다.

올 시즌 3할 타율(0.307)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성장한 김재호(30)도 동료들이 다 보는 더그아웃 앞에서 혼쭐이 났다. 김 감독은 “체력적으로 힘든 건 알지만 네가 지친 기색을 보이면 후배들은 더 지친다”고 김재호를 꾸짖었다. 긴 시즌을 치르며 자신도 모르게 ‘개인 야구’에 빠져 있던 선수들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사람 우선, 사람 중심의 야구


▎김인식 전 감독은 두산의 통산 4차례 우승 가운데 2차례를 책임진 명장이다.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시상대에 선 김 전 감독.(왼쪽) / 2 10월 29일 한국시리즈 3차전을 관전하고 있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박 회장은 재계에서 대표적인 야구광으로 통한다. / 사진·중앙포토
김태형 감독은 “지난해 두산이 6위에 그쳤다. 그게 두산답지 않다는 건 선수들이 잘 안다. 자존심이 상한 게 느껴지더라. 내가 감독으로서 한 일은 그걸 잘 지켜준 것뿐”이라고 말했다. 김태형 감독은 거창한 목표를 말하거나 새로운 성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거창한 걸 새로 창조하겠다는 게 아니라 두산 야구를 복원한다는 게 그가 제시한 비전이었다.

두산 야구의 본질은 육성이다. 두산의 전신 OB는 프로야구 원년(1982년) 우승을 차지한 직후 6개 구단 중 최초로 2군 팀과 2군 경기장을 만들어 운영했다. 우승에 취하지 않고 가장 앞서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1990년대 말 외국인 선수와 FA(자유계약선수) 제도가 도입돼 각 구단이 비싼 선수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산의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2005년 경기도 이천에 1군 시설 못지않은 ‘베어스필드’를 개장했다. 경기장은 물론 실내훈련장, 클럽하우스, 물리치료실, 합숙소 등의 시설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훈련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건 두산 선수들의 특권이다. “베어스필드의 시설이 워낙 좋고 식사도 훌륭해서 2군으로 떨어진 선수들이 별로 서운해 하지 않는다”는 농담도 나왔다.

두산 선수들은 좋은 시설에서 우수한 코치의 지도를 받아 성장해왔다. 훗날 스타가 돼서 많은 돈을 받고 팀을 떠나더라도 뜨거운 20대는 두산에서 보낸다. 이종욱·손시헌(이상 35) 두 친구는 2군에서 키운 꿈을 1군에서 이뤘다.

둘이 FA 자격을 얻어 NC로 이적하자 동갑내기 정수빈·허경민이 선배들처럼 성장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써도 줄지않는 화수분처럼 두산에서는 매년 새 얼굴이 등장했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기에 두산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팀플레이를 최고 가치로 여기며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를 한다. 그게 두산의 색깔이었다.

뚜렷한 팀컬러가 만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김인식 감독이 이끌었던 1995년, 두산은 OB의 이름으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듬해 꼴찌로 추락하는 등 부침을 겪다가 2001년 챔피언을 탈환했다. 그해에도 두산은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었다.

2002년부터는 삼성과 현대, 그리고 SK가 돌아가며 패권을 차지했다. 프로야구도 다른 산업처럼 투자와 성적이 비례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싼 FA와 외국인 선수를 사들일 수 있는 팀이 유리한 구조가 됐기 때문이다.

‘화수분 야구’는 나름대로 선전했다. 두산은 2001년 우승 후 다시 하위권으로 추락했다가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1년 동안 8번이나 포스트시즌(4강)에 진출했다. 그동안 주축 선수들이 몇 차례 바뀌면서도 두산의 컬러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산 사람’을 키우고 팀과 선수가 함께 성장했다. 두산은 매년 우승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두산은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멈췄다. 2004년 삼성에 4연패, 2007년 SK에 2승 뒤 4연패, 2008년 1승 뒤 4연패를 당했다. 2013년 한국시리즈에선 3승 1패로 앞서다가 5~7차전을 모두 내줬다. 두산의 객관적 전력이나 투자액(선수 평균 연봉 1억228만원, 2015년 10개 구단 중 6위)을 생각하면 매우 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야구계에서는 두산 야구단의 위기를 걱정했다. 2000년대 들어 두산그룹은 사업재편을 통해 소비재 중심의 사업구조를 중공업 중심으로 전환했다. 대중들이 친숙하게 소비했던 주류·외식사업을 접은 것이다.

넥센·NC를 제외하면 한국프로야구는 대기업이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야구단 운영의 최우선 목표는 홍보효과다. 야구계에서 “중공업 사업을 하는 두산이 프로야구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홍보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다. 두산이 야구단에 대한 투자를 늘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전문가다운 사장, 팬 같은 회장


▎95년 우승 직후 헹가래를 받고 있는 박철순. 그는 원년 우승의 주역이기도 하다. / 사진·중앙포토
두산 구단은 예상과 반대로 움직였다. 2012년 말 두산은 홍성흔을 4년 총액 31억원에 영입한 것이다. 1999년 두산에 입단했다가 2008년 말 FA 자격을 얻고 롯데로 이적한 그가 4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두산이 국내 다른 팀에서 뛰었던 선수를 FA 영입한 건 사상 처음이었다.

지난겨울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롯데 왼손 에이스 장원준을 4년 총액 84억원에 사들인 것이다. 원 소속팀 롯데를 비롯해 부자 구단들과 벌인 머니게임에서 두산이 이겼다.

당시 김태형 감독은 “구단에 딱 한마디만 했다. ‘장원준이 시장에 나왔습니다’라고. 그리고 기다렸더니 구단이 진짜로 장원준을 영입했다”고 돌이켰다. 김승영 두산 야구단 사장은 “안 그래도 장원준은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고 봤다. 왼손 투수가 우리 팀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의 기량과 인성, 무엇보다 왼손 선발로서의 안정감이 큰 힘을 줄 것 같았다”라고 설명했다.

감독과 사장이 원한다고 운영비 수십억 원을 갑자기 증액할 순 없다. 구단주인 박정원 회장의 결재가 필요하다. 두산그룹의 오너인 박용만 회장의 OK 사인도 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체가 없었다. 김승영 사장은 “그룹의 사업구조가 바뀌었지만 야구단 지원은 오히려 더 좋아졌다. 야구단이 그룹 전체를 결속하게 하고 대외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킨다고 믿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원준 영입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용만 회장은 “김승영 사장이 필요하다고 해서 OK한 것이다. 야구단 사장과 단장이 전문가들인데 의사결정은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난 열심히 응원하고, 열심히 돈 벌어다 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박용만 회장과 박정원 구단주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정규시즌 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야구장을 찾았다. 귀빈석을 마다하고 일반석에서 팬들과 어울리기를 즐기는 박용만 회장은 서울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5차전을 모두 현장에서 봤다. 두산은 ‘열혈 회장님’ 앞에서 세 경기를 모두 이겼다. 우승 세리머니 때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은 박용만 회장과 박정원 구단주는 흥겹게 우승 축하연을 베풀었다.

2015년 두산의 우승은 선수단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구단의 승리다. 프런트에서는 김승영 사장이 그 주역이다. 그는 야구단 실무진을 거쳐 단장에 이어 사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프로야구단 사장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에서 내려오는 게 관행이지만 두산은 달랐다. 선수들을 키우듯 내부에서 야구 전문가들을 육성하고 발탁한 것이다.

김승영 사장은 1984년 두산 계열 광고대행사 오리콤에 입사해 91년 야구단으로 옮겨와 25년째 근무하고 있다. 2004년 단장으로 승진한 후 두산은 거의 매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러나 2004·07·08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나 그는 “감독 이하 코칭스태프, 그리고 선수들이 힘을 모아 전력 이상의 힘을 내고 있다. 나만큼 행복한 단장이 어디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다른 팀이라면 세 차례나 준우승에 그친 책임을 단장에게도 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산그룹은 2011년 김 단장을 사장으로 승격시켰다. 실무진 출신이 사장까지 오른 건 프로야구에서 지난 10년간 없었던 일이다. 롯데 선수 출신으로 역시 25년째 두산 야구단에서 근무한 김태룡 운영본부장은 단장이 됐다. 2013년 다 잡은 우승을 놓쳤을 때도 그룹 수뇌부는 이들을 신임했다.

김승영 사장과 김태룡 단장은 자신 있게 우승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두산의 전력이라면 4강 진입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체 진단했다. 여기에 삼성 같은 강팀과 싸워 이기려면 강력한 원투펀치(뛰어난 두 명의 선발투수)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장원준 영입으로 확실한 선발 요원을 얻은 두산은 1선발 니퍼트와의 재계약에 공을 들였다.

지난 2011년 두산이 영입한 니퍼트는 그해 15승 6패, 평균 자책점 2.55를 기록했다. 그는 빠른 공과 제구력, 변화구 구사능력을 모두 갖춘 특급 투수다. 그의 첫 시즌을 본 김승영 사장과 김태룡 단장은 2011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2년 계약을 제시하며 니퍼트의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구단으로서는 리스크가 큰 계약이었다. 그러나 두산은 외국인 선수를 언제라도 교체할 수 있는 카드로 여기지 않았다. 동반자로 대우했다.

2014년까지 52승을 거둔 니퍼트는 올해 외국인 선수 최고 연봉인 150만 달러(약 17억원)를 받았다. 팀의 중심을 잡아줄 선수라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이 두산의 새 전략이었다. 김태형 감독을 선임해 팀의 뼈대를 다시 만든 건 김승영 사장과 김태룡 단장의 합작품이었다. 구단 내부의 ‘야구 전문가’들이 2015년 두산의 기적 같은 우승을 지휘했다.

가장 두산다운 야구로 우승하다


▎82년 한국시리즈 우승 시상식에서 서종철 KBO 총재와 악수하고 있는 OB 김우열. / 사진·중앙포토
야구는 계산대로 되지 않는다.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전략을 수십 차례 수정해야 한다. 두산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월 스프링캠프 때 노경은이 타구에 맞아 턱관절을 다쳤다. 3월 시범경기에서는 이현승이 왼손 약지 부상을 입었다. 5월엔 김강률이 발목 아킬레스건을 다쳐 수술을 받았다. 마운드 곳곳에서 구멍이 났다.

김태형 감독은 “부상 선수들이 나올 땐 솔직히 4강도 어렵겠다고 봤다. 우리에겐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갈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상위권에서 버텨야 했는데 대체 선수들이 정말 잘해줬다”고 말했다. 주력 투수가 이탈했을 때 ‘예비전력’이었던 진야곱·이현호·허준혁이 필요할 때 마운드에 공백을 메웠다.

장원준은 꾸준히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외국인 투수들이 문제였다. 니퍼트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며 20경기(6승 5패, 평균자책점 5.10)밖에 등판하지 못했다. 다른 외국인 투수 유네스키 마야(34·쿠바)는 2승 5패에 그쳤고, 그를 대신해 지난 6월 입단한 앤서니 스와잭(30·미국)도 5승 7패에 머물렀다. 선발이 흔들리자 불펜은 더 크게 무너졌다.

두산이 상위권에서 버틴 건 타선 덕분이었다. 간판타자 김현수가 중심을 잡았고, 유격수 김재호와 3루수 허경민이 성장하면서 ‘화수분 야구’의 진면목을 보였다. 외국인 타자 잭 루츠(29·미국)와 그를 대체한 데이빈슨 로메로(29·도미니카 공화국)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실상 국내 선수들로만 이뤄진 두산 타선은 팀 타율 3위(0.290), 팀 홈런 6위(140개)를 기록했다. 김태형 감독은 강타자가 아니더라도 강공을 지시했다. 안전한 전략보단 과감한 공략을 주문했다. 그 과정을 통해 두산은 점차 강해졌다.

시즌 후반 부상 선수들이 회복하고 이현승이 마무리로 고정되자 두산 전력은 완성에 가까워졌다. 시즌 초 두산보다 9월의 두산이 훨씬 강했다. 특히 2015년 가을야구는 가장 두산다운 야구였다. 니퍼트가 부상에서 돌아온 것만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한국시리즈까지 두산이 거둔 10승 중 니퍼트가 3승, 장원준이 3승을 올렸다. 아쉽게 진 다음날도 니퍼트가 등판하면 두산이 이겼고, 장원준이 승기를 이어갔다.

두산은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 5-9로 뒤진 9회 초 5안타를 몰아치며 6득점, 11-9 대역전승에 성공했다. 누구나 졌다고 생각한 경기를 맹공 끝에 뒤집은 것이다. 김태형 감독은 “이 경기를 잡고 나서 ‘우승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NC와 2승 2패로 맞선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두산은 1-2로 뒤진 5회 초 5점을 뽑아내며 역전했다. 5연속 안타가 나오는 동안 김태형 감독은 번트나 히트앤드런 등의 작전을 내지 않았다. 최종전에서 동점이나 1점 리드를 노리지 않고 강공으로 몰아붙인 배짱이 돋보였다.

두산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8-9로 역전패했다. 기세가 꺾인 것 같았지만 2차전부터 최강팀 삼성을 몰아 붙이며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넥센·NC·삼성을 상대하면서 매번 큰 위기에 부딪혔지만 두산은 놀라운 회복탄력성으로 극복했다.

‘화수분 야구’로 성장한 선수들과 과감한 투자로 영입한 선수들이 놀라운 시너지효과를 냈다. 포수 양의지(28)는 플레이오프에서 오른 검지발가락 미세 골절상을 입었고, 정수빈은 한국시리즈에서 왼 약지를 다쳐 6바늘이나 꿰맸다. 이들은 한 경기씩만 쉬고 끝까지 뛰었다. 이들의 투혼에 스태프와 동료들 모두가 놀랐다. 김태형 감독은 “선수들이 정말 잘해줬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두산의 야구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우승한 것보다 ‘두산다운 야구’로 이긴 게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이제 중요한 건 우승 이후의 두산이다. 김태형 감독은 “올 시즌을 통해 젊은 선수들이 성장했다. 우승까지 경험했으니 미래를 위해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본다”면서도 “물론 부족한 점도 있다. 우리 마운드가 약해서 타자들에게 강공을 많이 주문했다. 그래서 힘이 늘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세밀한 플레이로 상대를 압박하지 못한 건 아쉬웠다. 내년엔 아기자기한 야구를 가미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 두산의 우승은 환희와 영광, 그리고 과제를 남겼다. 김태형 감독으로선 부임 첫해 우승을 거머쥔 게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다. “4강을 목표로 하다가 우승까지 했으니 내년엔 어깨가 더 무겁겠다”고 하자 김태형 감독은 껄껄 웃었다.

“아뇨. 그런 거 없어요. 난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할 거예요. 또 선수들에게는 지금처럼 열심히 뛰라고 할 겁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두산 베어스답게 야구 하자고요. 그럼 만족합니다. 결과가 나쁘면 감독인 제가 책임지면 되니까요. 감독이 그런 자리 아니겠어요?”

그는 정말 ‘불곰’이었다.

- 김식 중앙일보 야구전문기자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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