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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베트남 하노이의 ‘메종 센트랄’과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전쟁관 

고문과 처형의 공간에서 마주한 인류의 미래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기요틴이 베트남 독립운동가 처형 도구로 쓰인 역사의 아이러니… 베트남의 석방 제안을 거부한 미군 포로 존 매케인은 미국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베트남은 21세기에 가장 촉망받는 희망의 나라 중 하나로 부상한다. 발 빠르게 서구 자본주의 체제 전환에 성공해 해외자본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생전의 여러가지 얘기가 들려온다. 기억에 남는 말 중 하나는 박진 전 국회의원으로부터 들었던 얘기다. 대통령 통역도 담당했던 박 전 의원이 김 전 대통령과 함께 1996년 베트남을 공식방문했을 때다. 베트남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의제에도 없는 얘기를 갑자기 꺼내 주변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 “한국이 베트남전쟁 때 몹쓸 짓을 해서 미안합니다.” 예민한 과거사 문제를 ‘불쑥’ 꺼낸 것이다. 당시 방문은 1992년 양국 수교 이래 첫 번째로 이뤄진 것으로, 정치·경제·문화 관련 교류가 주된 의제였다.

한국 대통령이 말을 꺼낸 만큼 베트남측도 즉석에서 역사진상규명위원회나 역사교과서 공동제작같은 것을 제의할 수도 있었다. 긴장의 순간이었지만, 베트남측은 웃으면서 ‘과거는 과거이고, 미래가 중요하다’는 식의 발언을 통해 상황을 넘겼다고 한다. 당장 경제에 주목하는 베트남은 과거사 때문에 양국 관계 개선의 속도가 느려진다는 데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외교전문가가 본다면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을 정치와 외교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할 듯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외국에 나가서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는지를 ‘3김의 선두주자’ 김영삼이 몰랐다는 지적이 나왔을 것이다. 공(公)과 사(私)를 구별하지 못하는 대통령이란 의미다. 틀리지 않다고 본다.

그 같은 김 전 대통령의 돌출 발언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공사를 구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평균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한, 너무도 한국적인 발상에 기초한 발언이었다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하노이 힐튼의 손님이 된 미군 포로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수용소 메종 센트랄. 하노이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건물 중 하나다.
필자 역시 베트남에 처음 갔던 1994년, 똑같은 심정으로 베트남 사람들을 대했다. 작은 체구에다, 너무도 맑고 밝은 베트남인들을 접하는 순간 미국이 저지른 ‘죄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그토록 무자비한 전쟁을 벌였단 말인가?” 더불어 한국이 미국과 함께 베트남인들을 고통에 빠뜨렸다는 상상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유동맹의 일원으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파월 한국군의 위상을 깎아 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냉전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결단이자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이념·외교를 떠나,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과의 관계로 보면 달라진다. 부끄럽거나 죄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처음 베트남에 가는 한국인이라면 아마도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앞설 듯하다. 김 전 대통령은 그 같은 ‘사(私)’에 근거한 평균 한국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사과발언을 던진 것이다.

지난 11월 말 하노이에 들러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메종 센트랄(Maison Centrale)’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는 ‘하노이 힐튼(Hilton)’으로 통하던 포로수용소다. 베트남인에게는 ‘호아로(Hoa Lo)’ 수용소라 불린다. 하노이에 들르는 미국인, 유럽인을 비롯해 남쪽에서 올라온 베트남인들도 반드시 찾는 관광유적지다. 베트남어 호아로는 한자어 화로(火爐)를 의미한다. 지옥의 불구덩이란 의미다.

필자가 하노이 힐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워싱턴 스미소니언 역사박물관(History Museum) 내 전쟁관을 관람한 뒤부터다. 미국은 건국 이래 지금까지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전쟁을 치르며 살아온 나라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부터 멕시코·스페인·독일·일본·구(舊)소련·베트남 최근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시리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구석구석을 오가며 벌인 전쟁으로 역사를 이어왔다.

중국을 미국에 버금가는 세계 패권국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는 부정적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경제나 외교력만으로 세계의 패권을 쥔 경우는 전대미문(前代未聞)에 해당된다. 패권국에 붙어서 생명을 이어가는 준패권은 될 수 있겠지만, 역사 그 자체를 창조하는 넘버원이 될 수는 없다. 피를 뿌리며 얻은, 현장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블러드(Blood)’ 역사가 패권을 만들어내는 기본조건이다. 멀리는 이집트·그리스·로마에서부터 비잔틴·몽골·베니스·스페인·영국에 이르기까지, 총과 칼을 통한 블러드 패권이야말로 왕좌를 만들고 보장하는 필수요건이다.

1980년 세계를 통째로 살 것처럼 기세 등등하던 일본이나 현재 중국의 경우를 보면 그 같은 요건이 결여돼 있다. 중국이 군사력을 길러 당장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키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리고, 그 과정을 승리로 이끄는 경험이 계속해서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패권국이 된다는 의미다.

한족이 만든 중국 역사는 북방과 중원 사이의 내부싸움이 전부다. 기본적으로 밖으로 나간 역사가 없다. 흔히들 오해하는데, 몽골의 원(元)은 한족 주도의 중국이 아니다. 오히려 한족 중국의 적이 몽골이다. 티베트나 위구르에서 보듯 한족 중국은 모두를 한족으로 둔갑시켜 통치하는 데 익숙하다. 페르시아 색목인(色目人)을 국가경영의 파트너로 받아들인 몽골과 같은 세계관이 없다. 따라서 한족이 이끄는 현재의 중국은 가상의 적을 고려한, 외국과의 동맹이란 개념이 없다. 유일하게 북한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이나 자세를 보면 사실상 유명무실한 조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에서 반미론에 근거해 21세기 미국 쇠망론을 얘기하지만 현실을 보면 당분간 미국의 패권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전쟁으로 만들어온 역사를, 전쟁을 통해 한층 더 확대해나가겠다는 것이 미국의 DNA 이자 의지다. 21세기 그 같은 생각을 가진 나라는 오직 미국뿐이다. 워싱턴 역사박물관 내의 전쟁관은 그 같은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알 수 있게 만드는 증거다.

전쟁포로가 많을수록 패권에 가깝다


▎1960년대의 하노이 힐튼. 전쟁 당시는 현재보다 세 배 이상 큰 면적이었지만 1990년 재개발 당시 일부가 철거됐다.
전쟁관에서 주목한 부분은 POW(Prison of War), 즉 전쟁포로에 관한 부분이다. 미국이 치른 갖가지 전쟁에서 몇 명의 자국포로가 있었는지, 얼마나 귀환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전시해두고 있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은 가장 많은 인적 피해를 입은 미국의 4대 전쟁에 해당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우 4120명이 포로로 잡혔고, 귀국자는 3973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13만201명이 포로이고, 이중 11만6129명이 돌아왔다. 한국전은 7140명이 붙잡혔고 4418명이 귀국했다. 베트남전에는 726명이 포로이고 661명이 돌아왔다. 한국전은 돌아온 미군 포로의 비율이 가장 낮은 전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포로 전시관은 미군 포로가 전쟁 때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시설도 마련해두었다. 베트남전쟁 당시의 하노이 힐튼은 대표적인 전시관이다. 당시 미군 포로들을 수용한 방과 침구, 생활도구 같은 것들이 모형과 함께 진열돼 있다. 포로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 중에는 조월친선(朝越親善)이란 붉은 한글로 장식된 큰 철밥통도 볼 수 있다. 원래부터 미군 포로용으로 제공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이라면 특별히 기억에 남을 밥통이었을 듯하다. 이들 도구는 창문 하나 없이 어둠 속에 가려진 포로용 한 평짜리 방과 함께 진열돼 있다. 방안에는 벽에 귀를 대고 서 있는, 포로복 차림의 미군 밀랍 입상(立像)이 들어서 있다. 고문이나 피를 뿌리는 식의 시설이 아니라, 심리적·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공간으로 와 닿았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하루만 지나도 거의 미쳐버릴 듯한 환경이다.

전쟁 당시 하노이 힐튼의 실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워싱턴 전쟁관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호아로 즉 메종 센트랄에 찾아갔다. 1시간 남짓 돌아다니면서 평소에 몰랐던 부분들을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원래 의도했던 미군 포로에 관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베트남 독립운동과 서구 제국주의의 만행이 어떤 것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단서는 하노이 힐튼이 가진 ‘유구한’ 역사에서 시작된다. 하노이 힐튼은 미군 포로수용소로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다.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 당시에 세워진 140년의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다. (왜 베트남인들이 하노이 힐튼을 호아로, 죽 ‘불구덩이 지옥’이라 부르는지는 19세기 말 시작된 역사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호아로는 독립을 외치던 베트남인을 고문하고 죽이던 지옥에 해당된다. 1886년 프랑스는 베트남 정치범수용소로 호아로를 건설한다. 프랑스에 반대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베트남인들이 늘어나면서 수용소 시설도 확대된다. 원래 수십 명 규모의 시설에서, 1922년 895명에다 이후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으로 돌아온 1954년에는 2천 명 수용시설로 확장된다.

기요틴 처형을 둘러싼 프랑스의 이중잣대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하나로 연결된 쇠자물쇠 막대기를 통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구금됐다.
호아로는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필자가 원래 주목한 미군 포로수용소인 하노이 힐튼과, 베트남 독립운동가를 수용한 호아로 수용소로서의 시설이다. 호아로를 한 번 돌아보면 프랑스인의 식민지 정책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충분히 알게 된다. 수용소에 감금된 죄인들의 다리를 큰 쇠자물쇠로 묶어, 수십 명 단위로 하나로 연결한다. 쇠자물쇠로 인해 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방안에 설치된 작은 변기를 이용할 때에만 쇠자물쇠에서 해방된다. 폭행·고문·살인은 다반사다.

가장 놀라운 것은 독립운동가를 처벌하는 방식이다. 프랑스혁명을 공포정치로 몰아간 기요틴(Guillotine)이 주인공이다. 프랑스는 무려 두 개의 기요틴을 하노이로 갖고와 베트남인들의 목을 벤다. 3m 높이의 공포스러운 기요틴은 호아로 수용소에 아직도 보관돼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느껴진다.

날카로운 칼이 걸린 기요틴 바로 옆에는 희생자 사진이 전시돼 있다. 1930년 독립운동과 관련해 처형된 4명의 베트남인이다. 기요틴 처형은 베트남인 모두에게 공개한, 오픈 이벤트식으로 실행됐다. 참수자의 머리를 보관하기 위해 엉성하게 만들어진 나무 바구니가 기요틴 바로 앞에 마련됐다.

기요틴의 역사를 피부로 절감할 수 있는 가장 유명한 곳은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이다. 에펠탑을 보러 가는 사람이라면 함께 둘러보는 곳으로 이집트에서 옮겨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센강을 낀 프랑스 관광명소에 들어가지만, 사실 역사적 기원을 안다면 방문을 망설일 수도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시토죵(Citoyen, 시민군)’ 이름으로 처단된 1만8천 명의 원혼이 서린 기요틴 처형의 현장이 콩코르드 광장이기 때문이다.

원래 루이 15세가 자신의 기마상을 기념하며 만든 공간이 콩코르드지만, 1789년 혁명과 함께 혁명 광장(Place de la Révolution)으로 개명한다. 반 혁명 분자를 처형하는 기요틴 이벤트장이 바로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이다. 이벤트장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혁명 직후 기요틴 처형을 대하는 프랑스인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마치 콜로세움의 검투사 싸움의 관람과 엔터테인먼트로서 기요틴 처형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프로파간다로 채워진 하노이 힐튼


▎1 프랑스혁명 당시의 기요틴 처형 장면을 담은 그림. 왕과 왕비, 공포정치의 원흉이 모두 사라진 뒤 기요틴의 광기도 멈췄다. 2 베트남 독립운동가 처형에 사용된 프랑스 기요틴. 혁명의 도구가 폭력과 압제의 흉기로 돌변한다.
처형이 벌어지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족 모두가 보러 가는 공연장과 같은 것이 당시 분위기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면 어린아이들이 달려가 만지거나, 축구를 하듯 발로 차기까지 했다고 한다. 화가들의 경우 처형 장면을 그려 외국인에게 고가에 팔기도 했다. 오랫동안 왕과 귀족으로부터 수탈을 당한 데 대한 복수심이 작용했겠지만 가슴속에 깊숙이 숨겨진 인간의 야수성이 기요틴 이벤트를 통해 표출됐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이란 대의명분을 앞세워 한층 더한 자극과 피를 원하게 된 것이다.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요틴으로 처형한 데 이어, 기요틴을 혁명의 면도날로 활용한 공포정치의 대부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도 기요틴에 의해 사라진다. 프랑스인이 이성을 차린 것은 그 이후다. 21세기 콩코르드 광장에는 당시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단지 광장 한가운데에 새겨진, 프랑스 자신의 국왕과 왕비를 처형한 곳이라는 동판 하나만이 들어서 있을 뿐이다.

기요틴이 베트남 독립운동을 짓밟는 상징으로 활용됐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혁명과 자유를 위해 만들어진 정의의 칼이 식민지 지배를 위한 압제의 흉기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기요틴이 베트남에 전해진 20세기 초는 혁명기의 광기가 사라지고, 이성과 문명으로서의 프랑스가 정착된 시기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프랑스 안에만 국한됐다. 인도차이나 식민지 현지인들에게는 자유와 박애가 허용되지 않았다. 베트남 역사가에 물어봤지만, 정확히 베트남에서 기요틴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얼마인지에 대한 통계도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손을 떼면서 관련 문서를 전부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정책도 공포 그 자체였지만, 프랑스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기요틴 처형으로 악명 높은 호아로는 1930년대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호아로의 베트남인들은 함께 모여서 독립운동에 대한 체계적 논리와 현장감각을 익히게 된다. 도 무오이(Do Muoi) 전 국가주석을 비롯한 원로 지도자의 상당수가 이 수용소 출신들이다.

하노이 힐튼에는 기요틴으로 얼룩진 베트남 독립운동사만이 아니라, 미군 포로에 관한 얘기도 남아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미군들이 얼마나 북부 베트남 정부에 의해 대접을 잘 받았는지, 더불어 미국과 서방에서 베트남 반전운동이 얼마나 격렬했는지에 관한 전시관이 대세(大勢)다.

첫눈에 봐도 프로파간다임을 알 수 있는, 만찬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는 미군 포로들의 모습이 들어서 있다. 미국과 유럽 대학, 일본에서 벌어지는 각종 반전데모도 인상 깊다. 지식인들이 앞장서 닉슨의 전쟁을 반대한다는 메시지가 전시관 곳곳에 메워져 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 내에서부터 정당성과 정통성을 잃어버린 전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하노이 힐튼과 워싱턴 전쟁관을 비교해보면, 동과 서의 전쟁관 또는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베트남 독립운동의 경우 베트남인이 얼마나 굳건히 항거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문과 기요틴의 위협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 호아로 수용소의 교훈이다.

더불어 미군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간답게 인격적으로 대했는지를 자랑하는 곳이 하노이 힐튼의 역사다. 미군 포로에게 제공된 각종 생활물품은 당시 베트남인들에게는 사치품에 해당되는 물건들이다. 워싱턴 전시관은 어떨까? 고문을 당했다는 식의 얘기도 있지만, 그보다 포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성원에 대한 얘기가 포인트 중 하나다. 더불어 포로가 될 경우 포로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가’라는 부분에 주목한다.

고문 주목한 베트남, 군기에 초점 맞춘 미국


▎베트남전 당시 크리스마스를 맞아 축하파티를 하는 하노이 힐튼 내 미군 포로들.
적의 잔인한 고문이나 처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포로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포로로서 지켜야 할 군기(軍紀)에 관한 부분이 워싱턴 전쟁관의 핵심이다. 필자도 몰랐지만, 전쟁 중 미군 포로의 가족들은 금이나 은으로 된 팔찌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부대명·이름·계급·나이·출신에 관한 간단한 기록이 새겨진 팔찌다. 교회나 마을 공동체 모임을 통해 미군 포로들이 결코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파했다고 한다. 더불어 포로로서의 지켜야 할 군기, 즉 관등성명 외 군기밀 누설에 관한 부분을 얼마나 지켰는지에 대한 부분도 전쟁관 곳곳에 전시돼 있다.

베트남이 행했을 육체적·정신적 고문을 고려할 때, 군사 기밀에 관한 부분은 미군 모두가 언젠가 발설하게 될 사항에 그친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비밀을 폭로했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고문·처형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군기를 ‘지키려 했는지’에 방점을 두는 것이 워싱턴 전쟁관의 모습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지켜야 한다는 얘기도 없다. 단지 군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개개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아시아는 개개인의 투혼이라는 주관적 요소에 집중하는 반면, 미국은 개개인을 지지하는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군법이란 객관적 차원의 부분에 방점을 둔다. 베트남에서는 영웅이나 열사가 나올 수 있지만, 미국은 아예 처음부터 영웅이나 열사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베트남에서는 자신들의 싸움이 얼마나 정의로운지를 세상에 알리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의·불의를 떠나 과거 역사의 하나로 객관적으로 처리하는 데 주목한다. 베트남이 적에 대한 분노와 복수라는 측면을 강조한 데 비해, 미국은 자신과의 싸움 나아가 가족과 국민들의 성원을 중시 여긴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 관한 부분은 하노이 힐튼 내 미군 포로 관련 전시관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현재 미국의 대외 국방부분을 좌지우지하는 애리조나주 출신의 정치인으로 2008년 대통령 선거에도 나선 공화당 중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존 매케인은 비행기 조종사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1967년 10월 26일 전폭기 A4-E를 타고 하노이 공습에 나서던 중 대공포 포탄에 의해 추락한다. 그러나 추락 직전에 탈출해 목숨을 구한다. 현재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치민의 무덤 북서쪽에 있는 ‘호 트룩 바흐(H Trúc B ch, 竹帛湖)’에 비상 착륙했다.

미국과 재수교 일등공신이 된 존 매케인


▎2000년 가족과 함께 하노이 힐튼을 공식 방문한 존 매케인 미 상원의원(가운데).
호수 위에 떨어졌을 때 벌어진 장면은 당시 찍힌 사진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물에 빠진 존 매케인을 향해 10여 명의 베트남인들이 뛰어든다. 목숨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라 복수하기 위해 달려든 것이다. 지상에서 폭격의 대상이 된 베트남인들 입장에서 보면 미군 조종사는 철천지원수에 해당된다. 존 매케인은 지상으로 옮겨진 뒤 베트남인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팔과 갈비뼈가 부러진다.

하노이 힐튼은 당시의 상황은 물론, 존 매케인이 입었던 조종사 복장과 감옥에서 사용한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다. 존 매케인을 치료하는 베트남 의사의 웃는 모습도 보인다. 베트남이 얼마나 따뜻하게 대했는가를 보여주려는 프로파간다 전시다.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하노이 힐튼에서 생사를 오갔던 존 매케인의 행적이다. 수용소 안에는 2000년 4월 가족과 함께 방문한 존 매케인의 모습이 큰 사진으로 걸려 있다. 자신이 수용됐던 시설을 둘러보면서 어두웠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존 매케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해군 최고위급 장군들이다. 존 매케인이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것도 가계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포로로 잡혔을 당시 그는 관등성명만 밝힐 뿐, 나머지는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태평양함대(CINCPAC) 사령관인 자신의 아버지, 잭 매케인에 대한 부분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군사정보를 얘기해주면 병원으로 옮겨주겠다는 회유도 마다했다. 거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 기적이 일어났다. 존 매케인에 관한 정보가 불시착 이틀 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거꾸로 들어왔다.

베트남군은 존 매케인이 사령관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베트남 고위간부와 바꾸려 했다. 그러나 존 매케인 스스로는 물론 아버지도 거부한다. 다른 포로들과의 형평을 고려한 결정이다. 결국 파리평화협정에 의해 포로생활 5년 6개월 만인 1973년 5월, 다른 미군 포로들과 함께 무사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목발을 짚은 채 닉슨과 악수를 하는 존 매케인의 모습은 미국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미국이 공산 베트남과 재수교에 들어간 것은 1995년이다. 한국의 1992년보다 3년 늦다. 베트남 재수교의 일등공신은 놀랍게도 존 매케인이다. 자신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적이지만, 시대가 변한 만큼 다시 친구로서 가깝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1992년 상원의원으로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해 구원(舊怨)을 푸는 데 앞장선다. 존 매케인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히 말하자면 평화와 미래다. 어제와 전쟁이 아니라, 내일과 번영이다.

4년 전 기억이지만, 천안 독립기념관에 들른 적이 있다. 전시관을 돌면서 느꼈던 부분은 두 가지다.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항일투쟁에 관한 부분이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얘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느끼는 씁쓸함


▎워싱턴 스미소니언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베트남전 미군 포로의 모습. 얼마나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군기를 지키려 애썼는가에 주목하는 전시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고문을 받는 독립군에 대한 존경만이 아니다. 당시를 살아간 평범한 한국인들의 생각을 담은 스토리텔링도 어딘가에 있으면 좋을 듯하다. 포로가 될 경우 존 매케인 같은 영웅으로 버틸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문당하는 사람의 비명만 들어도 전부 털어놓을 듯하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버티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비겁하게 살아남았다고 손가락질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99% 사람은 그 같은 약한 존재들이다.

식민지 당시 독립군으로 활동한 사람은 극히 일부다. 나머지 독립군에 들어가지 못한 99.9% 사람들을 욕할 수는 없다. 총부리를 맞대고 싸우지도 않았고, 고문을 당할 경우 곧바로 자백할 정도로 약한 존재겠지만, 그들의 마음속은 항일의지로 불타올랐다. 행동에 나서지 못한 99.9%를 비겁자로 몰아세우면서, 모든 사람을 혀를 물고 자살하도록 만드는 곳이 전시관의 설립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피를 흘리며 대항하는 장면이 전시관에 넘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그 반대였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해진다.

1970년대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은 참전(參戰)을 피했고 심지어 반전운동으로 낮과 밤을 세웠다. 그렇지만 베트남 미군 포로를 기억하는 팔찌는 미국인 사이에 조용히 퍼져나갔다. 실종 미군(MIA)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의 검은 깃발은 베트남전이 끝난지 40년을 넘긴 지금도 아메리카 전역에 휘날리고 있다. 워싱턴 전쟁관은 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모아 모두에게 전하고 있다.

이기고 지고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전부는 아니다. 상대가 얼마나 악하고 내가 얼마나 옳은가의 문제도 아니다. 비극이 벌어질 당시 모두가 합심해서 대응했다는 점과, 다시 한번 더 그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항일투쟁사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노이 힐튼에서부터 워싱턴 전쟁관과 한국의 독립기념관으로 이어지는 여정(旅程)은 그 같은 평범한 사실을 확인시켜준 증거로 와 닿는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 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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