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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의 ‘바닷가 서재’] 새해에 다시 만나는 ‘프루스트’ 

개인의 시공간 의식에 따라 전혀 다른 서사가 열린다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벌써 3년째다. 새해가 시작되면 매주 오후 바닷가 서재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다. 혼자 조용히 읽는 것이 아니고, 문청들과 둥글게 모여 앉아 3시간 동안 목소리를 나누어 낭독한다. 낭독을 시작할 때에는 창 밖의 바다색이 파랬는데, 목소리들이 석양빛을 따라 은은히 울려 퍼진 뒤에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하늘과 바다를 감싸고 있다. 그렇게 두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바닷가 서재에 이들을 초대할 생각을 한 것은 소설의 중심무대인 파리와 일리에-콩브레(소설에서는 콩브레)를 여러 차례 답사한 뒤였다. 그 전에도 나는 이 소설에 대한 글을 써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매번 책을 펼쳐 첫 문장을 읽을 때면, 까맣게 잊혔던 나의 어느 한순간이 거대한 기억의 실타래에서 풀려나오는 듯했다. 그리고 잘 자라는 엄마의 다정한 입맞춤을 갈망하는 어린 소년 마르셀의 잠들기 회상으로부터 마술 같은 이야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소설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콩브레에서 매일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어머니와 할머니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고, 그래서 잠을 이룰 수 없는 순간이 오기 훨씬 전부터 내 침실은 내 불안의 고정점이 되었다. (…)슬프게도 저녁 식사가 끝나면 엄마 곁을 떠나야 했다.”(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1부 콩브레, 김희영 옮김, 민음사)

누군가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알아왔던 사람이지만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의 표정과 음색을 발견하곤 한다. 무엇보다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문장에 대한 매우 섬세하고 엄격한 성찰을 경험할 수 있다. 개성이 다른 악기의 소리들이 모여 한 편의 아름다운 음악을 이루어내듯이, 문장들은 작가의 스타일, 곧 문체를 형성한다. 작가란 자신만의 기질과 체취가 녹아 있는 스타일, 곧 문체를 가진 사람이다. 스타일을 창조한 소설들은 시, 희곡, 회화, 음악, 영화를 아우르는 서정적인 심상과 이미지, 서사적인 욕망과 미적인 여운을 안겨준다. 눈으로, 마음으로 읽을 때와 소리 내어 읽을 때의 뉘앙스, 깊이, 다채로움 등이 청각을 자극하며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에, 현악 합주곡이나 교향악에서의 어울림, 혹은 넘나듦처럼 조화로운 충일감을 준다. 특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서로 다른 내면의 형상을 탐사하며 낭독하기 좋은 작품이다. 낭독의 감동은 문체에서 온다. 미슐레에 의해 잘 알려진 대로,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

언어의 결(結)과 분위기(mood) 담은 문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예민한 소설가 지망생이 소설을 쓰기 시작까지의 열망과 환상, 좌절과 도전의 기나긴 탐색이다. 그 핵심에 문체를 향한 작가의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작가에게 문체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비전의 문제”로 인식한다. “세계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방식”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이 문체”라는 것이다. 소설을 예술로 이끄는 결정적인 것이 문체이며, 이러한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보는 비밀스러운 우주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은 1913년부터 작가가 생을 다하던 1928년까지 15년 동안 발표되었다. 한국어로는 1985년 이형식의 번역으로 처음 선보였다. 2000년대에 들어 카뮈 전공자인 김화영의 번역으로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다가 중단되기도 했다. 내가 바닷가 서재에서 낭독하는 번역본은 프루스트 전공자인 김희영의 번역본이다. 평생 프루스트를 연구하고도 번역이 늦어진 데에는 저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문자적 내용 해독에 그치지 않는 미묘한 언어의 결(結)과 분위기(mood)를 구조와 관습이 다른 우리말로 곧이곧대로 옮기기 난감한 문제들이 있다. 번역자는 이러한 문제에 고심하면서 번역에 대한 회의와 자기 설득 과정이 힘겹게 이루어진다.

프루스트의 언어와 정신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가장 황홀하고도 고역스러운 투쟁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랑스에서 1편 첫 권이 출간된 1913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2013년부터 매년 한두 권씩 선보였고, 현재 3편 6권에 이르렀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전2권), 2편은 <꽃핀 소녀들의 그늘>(전2권), 3편 <게르망트 쪽>(전2권)이 그것이다. 7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이 완역되려면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른다. 바닷가 서재에서의 낭독의 속도는 더 더디니 완독까지 10년 이상이 흐를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라면, 의문이 들 것이다. 도대체 프루스트가 뭐길래 그렇게까지 읽어야 하는가. 각자 시간 나는 대로 자유롭게 읽으면 되지 않은가. 읽지 않는다 해도 삶이 어떻게 되지 않지 않은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 소설계에서 탐독가이자 문장가로 손꼽히는 후배 소설가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이라는 소설 작법 에세이의 첫 장을 펼쳐보면, 슬며시 ‘나도 프루스트라는 인간을 한번 만나볼까’라는 욕망이 생길지도 모른다.

“올해의 계획으로는 초심으로 돌아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다’가 되겠다. 완역 본은 11권이니 1월부터 한 권씩 읽은 뒤, 12월이 되면 (…)2권짜리 <프루스트>를 읽자는 게 나의 원대한 목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않고 죽는다면 어쩐지 내 인생에 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프루스트를 실용서처럼 읽자는 건 알랭 드 보통 씨의 주장인데 (…), 나 역시 보통의 의견에 동의한다. 분명히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는데, 이제 무엇인들 읽지 못하겠는가!”(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이 글은 해운대 바닷가 서재에서 시작해 파리에서 쓰고 있다. 날이 밝는 대로, 프루스트 공간으로 달려갈 것이다. 샹젤리제, 콩코르드 광장, 몽소 공원과 마들렌 사원 인근, 포부르생제르맹. 모두 센 강 오른쪽, 프루스트 생존 당시 사교계들이 있었던 장소들이다. 이곳은 최근 출간된 3편 2권, 그러니까 소설의 화자 마르셀이 유년시절 콩브레에서 이상적인 여인으로 품었던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환상이 성년이 되어 상류사회를 경험하면서 환멸로 바뀌어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인 <게르망트 쪽>의 무대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새해에 여전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을 계획할 것이다. 대부분은 프루스트가 누구인지 모르고, 안다고 해도 무심하게 흘려 보낼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저 흘러가버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 시간과 공간을 내가 어떻게 의식하고 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새로운 시공간, 새로운 이야기(서사)가 열린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속절없고 무모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새해 프루스트 읽기 계획에, 또 나처럼 바닷가 서재에서처럼 매주 둥글게 모여 앉아 느리게 목소리를 나누어 낭독하는 자리에 동참할지도 모르기에.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장편소설 〈춘하추동〉〈내 남자의 책〉, 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소설가의 여행법〉〈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번역서〈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행복을 주는 그림〉등을 썼다.

201602호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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