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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안동 선비정신의 미학①] 도심에서 삼년상 치른 80줄 퇴계 15대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움직이다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방 안에 빈소 꾸미고 신주 모셔… 바깥출입 삼가고 관례·혼례 참석도 피해 1980년대 이후 점차 사라지면서 이따금 종택이나 유림의 지도자 타계시 겨우 명맥이 이어져

▎팔순을 바라보는 상주가 빈소에서 도포 차림으로 대상(大祥)의 초헌례를 하고 있다. 문 밖에 안 상주가 보인다.
가족도 무섭다는 세상이 됐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3년 3월까지 국내에서 일어난 존속살해는 381건이다. 자식살해도 230건이었다. 험악하다. 효(孝)나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다 스피드만 좇는 시대가 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마트폰 시대에 전통을 지켜가는 현대판 선비의 도리와 느림의 정신을 되돌아보려 한다.


▎대상과 다음날 치른 부제(祔祭)에 사용한 축문(祝文). 축문은 제사를 지내는 까닭을 신주에 알리는 내용이다.
3월 5일 오전 8시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송현우방하이츠 107동 3**호. 5분 거리에 지하철역이 있고 주변은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대구의 도심이다. 아파트 현관은 이른 아침 방문객의 신발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신발을 둘 자리가 모자라 문밖까지 구두가 수북하다.

무슨 일일까. 부모가 돌아가신 지 3년째를 맞아 유교식 상례(喪禮)의 마지막 절차인 대상(大祥)을 치르는 날이다. 전통 상례는 초상(初喪)과 소상(小祥), 대상으로 이어진다. 초상은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낼 때까지를 말하고 소상은 1주기, 대상은 2주기에 해당한다. 대상까지 치르는 걸 삼년상(三年喪)이라 부른다.

누가 대도시 한복판에서 삼년상을 치르는 걸까. 이제 대상이 진행되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아파트의 작은 방 하나는 빈소(殯所)로 꾸며져 있다. 병풍 앞에 교의(交椅)와 제상(祭床)이 있다. 교의에는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다. 신주에는 ‘현비유인진주강씨신주(顯妣孺人晉州姜氏神主)’라고 적혀 있다. 제상 왼쪽은 상주(喪主)의 자리다. 바깥 상주는 거친 삼베옷과 굴건을 쓰고 짚으로 엮은 자리(고석) 위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아이고∼ 아이고” 곡(哭)을 그치지 않는다. 고인이 아들만 하나를 둬 상주는 내외 둘뿐이다.

상주는 이동후(李東厚) 씨. 올해 78세로 여든을 바라본다. 나이를 속일 수 있겠는가. 바깥 상주는 어지럼증 등으로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 삼년상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움직인다.

자식은 태어나 3년이 돼야 부모 품 벗어나


상주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또 안동에서도 예의범절이 가장 깍듯하다는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출신이다. 하계마을은 옆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이 마을은 본래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이 모여 사는 진성 이씨 집성촌이었다. 토계라는 개울은 퇴계 종택이 있는 상계마을을 지나 하계마을에서 낙동강 상류로 흘러든다. 하계마을은 안타깝게도 1975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됐다. 누대로 고향을 지켜온 퇴계 후손들은 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다. 상주가 대구로 떠난 것도 그때였다. 그는 퇴계 선생 15대 손이다.

이번 삼년상은 주목할 만하다. 유교식 상례는 농경시대를 마감하고 산업시대로 바뀌면서 찾아보기 어렵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11년 <삼년상>이라는 책을 내면서 ‘한국의 상례 중 삼년상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전문가들은 부모가 돌아가시고 치르는 삼년상이 80년대 이후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따금 치러지는 삼년상은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종택이나 유림의 지도자가 돌아가셨을 때 겨우 명맥이 이어진다. 2010년 안동의 학봉 김성일 종택의 종손과 2007년 봉화 충재 권벌 종택의 종손이 삼년상을 치렀다. 또 유학자인 화재 이우섭은 2007년 유림장에 이어 삼년상이 치러졌다. 대부분 온 문중이 나서는 종택이나 유림이 주관하는 삼년상이다. 그래서 종택 아닌 한 집안의 삼년상은 더 이례적이다. 최근에는 안동의 큰 종택도 삼년상 대신 1년 만에 상례를 끝내는 경우가 늘어나는 실정이다.

삼년상은 자식이 부모를 잃은 슬픔을 표하는 효의 행위로 해석된다. 공자는 일찍이 삼년상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예기(禮記)> 권58에서 공자는 “자식이 태어나 3년이 돼야 비로소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있다. 대체로 삼년상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것(孔子曰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達喪也)”이라고 했다. 부모를 여의면 자식은 사람 구실을 하게 해준 기간만큼은 적어도 잊지 않는 게 도리라는 것이다.

이날 제관(祭官)은 40명에 가까웠다. 대구는 물론 멀리 서울과 타지에 사는 상주의 자녀와 12촌까지 친척이 참석했다. 제관은 젊은이부터 노년까지 두루 모였다. 상주를 빼고는 모두 양복 차림이다. 참석자들이 서로 큰절로 인사를 마치자 제관 중 연장자가 행사 시작을 알렸다. 상주는 빈소에서 건넌방으로 옮겨 상복인 굴건제복을 벗고 손을 씻은 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도포(道袍)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갓을 썼다. 좌장 어른은 주변 제관들에게 “본래는 상주가 백립(白笠, 흰 갓)을 써야 하나 형편상 검은 갓을 그대로 쓴다”고 이해를 구했다. 상주가 의관을 갖추자 제례가 시작됐다.

상주가 초헌으로 잔을 드리자 축관은 축문을 읽었다. 다음 아헌은 고인의 며느리인 ‘안 상주’ 차례다. 여자는 빈소 바깥에서 잔을 올리고 네 번 절한다. 안 상주 역시 77세로 80을 바라보는 나이다. 척추 수술을 하고 무릎이 성찮아 큰절을 하기가 몹시 불편하다. 그때 좌장이 다시 나섰다. “절은 두 번만 하게.” 마지막 종헌은 상주의 맏사위에게 돌아갔다. 삼헌 등 절차에 이어 축관이 상주를 향해 “이성! 이성!”이라고 외치자 상주와 함께 참석한 제관이 모두 구슬피 곡을 했다. 고인을 향한 마지막 석별 의식이다. 제사가 끝나자 젊은 제관들은 제상에 차린 음식을 차례로 내렸다. 철상(撤床) 다음은 제사에 올린 술을 받는 음복례(飮福禮).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이 차례로 복주(福酒)를 마신 뒤 연장자 순으로 잔이 돌아간다. 모두 꿇어앉아 복주를 받아 마신 뒤 그제야 다리를 펴고 편하게 앉았다. 음복이 끝난 뒤 젊은이들은 빈소를 꾸몄던 휘장이며 교의 등을 철거했다. 마침내 대상의 절차가 끝이 났다. 제관 중엔 대학 교수도 있고 대기업 임원도 있었다. 모두 잘 따랐다.

2년 동안 매일 상식 올리고 초하루 보름 삭망 지켜


▎빈소에서 대상 제례를 마친 제관들이 자리를 옮겨 음복례(飮福禮)를 하고 있다. 제례에 올린 술은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이 차례로 마신 뒤 연장자 순으로 돌아간다.
상주에게 고인은 절대적이었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했다. 고인은 하나뿐인 아들을 기르며 시어머니 모시랴 농사 일하랴 힘든 세월을 보냈다. 가슴속엔 언제나 ‘교리댁을 일으켜야 한다’는 어른들의 당부를 품고 살았다. 상주의 고조부(이만규)는 조선 고종 때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 홍문관 부교리를 지내다가 망국(亡國)을 맞았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고조부는 낙향해 파리 만국박람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탄원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의병활동에도 나섰다. 고조부의 형은 안동에서 의병장을 지낸 향산 이만도. 향산 역시 대과에 급제한 뒤 공조참의를 지내고 갑신정변을 맞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길렀다. 향산은 24일간 일제에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했다. 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온 몸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였다. 벼슬하며 그냥 호의호식한 양반이 아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의 표상이랄까. 하계마을에선 독립유공자만 25명이 나왔다. 거기다 예의를 알고 인정이 돈독한 마을이다. “안동에 참 양반과 선비가 있다면 바로 하계마을”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고인과 상주에 드리워진 가풍(家風)이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장까지 지낸 상주는 그래서 사람의 도리를 강조하고 예(禮)를 몸소 실천해 왔다.

대상 의례는 사흘간 이어졌다. 첫날 저녁엔 마지막 상식(上食)을 드리고 다음날 아침에 대상, 3일째 되는 날엔 부제(祔祭)를 올렸다. 사흘간 행사는 공교롭게도 금·토·일 주말과 겹쳐 그나마 다행이었다. 상식은 초상이 끝나고 빈소가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아침 저녁 하루 두 차례 살아계신 부모처럼 매일 밥상을 차려 빈소에 올린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朔望)을 지낸다. 상식보다 음식을 더 준비한다. 안 상주는 2년 동안 상식을 올렸다. 상식례가 끝나고 제관 모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누군가 우스운 이야기를 꺼내자 젊은 제관 하나가 크게 웃었다. 그때였다. 좌장이 일갈했다. “오늘은 파안대소하는 날이 아니다!” 모두 일찍 돌아갔다. 다음날 대상 제례가 오전 8시로 잡혔기 때문이다.

제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필이면 대상 다음날은 고인의 남편 제삿날이다. 상주는 대상을 마치고 자정에 또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8시에 다시 부제. 사흘간 제사만 네 차례다. 부제는 삼년상을 마친 뒤 신주를 조상의 신주 곁으로 모시는 제사다. 고인의 시조모가 인도한다. 그래서 제상은 두 상이 차려졌다. 빈소 옆 아파트 베란다엔 4대 조상 신주를 모신 감실(龕室)이 있다. 부제를 지내느라 상주는 감실 문을 열고 증조모 신주를 왼쪽 제상으로 옮겼다. 출주(出主) 의례다. 오른쪽 제상은 고인의 몫이다. 부제를 올리고 이제 고인의 신주가 감실로 들어갔다. 감실에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상주의 고조부 신주부터 마지막 새 신주까지 4대가 왼쪽부터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1년 전 소상 때는 제사를 지낸 뒤 상주와 손자·손녀들이 빈소에서 차례로 기정(記情)을 드렸다. “…딸이 없어 제가 딸 대신이라 하신 큰엄마. 제가 얼마나 딸 노릇했는지 돌아가신 뒤 가슴을 칩니다….” 52세 맏손녀는 술 한 잔 올리고 제문에 적은 고인과의 생전 추억을 읽다가 눈물을 쏟았다. 그는 이후 “기정은 되살려야 할 아름다운 상례 문화”라고 말했다. 2년 전 초상 때 상주는 시속(時俗)을 따라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그때도 상주는 제단을 국화로 장식하는 것만은 예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고인은 꽃상여를 타고 하계마을 뒷산 남편 옆에 묻혔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바깥 상주’는 도리를 다하려 안간힘을 썼다. 이제 바깥 상주 뒤에 가려진 안 상주의 고충을 이야기할 차례다. 노부부는 고인이 연로해진 이후 성심껏 봉양했다. 특히 고인이 치매 증세가 심해지기 전까지 일흔이 넘은 며느리는 직접 수발을 들었다. 요양원 생활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안 상주는 가풍에 따라 상식과 삭망도 허투루 지내는 법이 없었다. 자식들이 장성해 떠나버려 이런 일은 고스란히 안 상주의 몫이었다. 그래서 맏딸은 어머니가 너무 고생한다고 “꼭 이래야 하느냐”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제사에 올릴 시루떡 망치고 목숨 끊은 종부의 전설


▎상주 집안의 며느리와 자녀들이 오전 6시 이른 시각부터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평소 관계가 돈독해 큰일이 있으면 모두 모여 일을 분담한다.
안 상주는 대상을 앞두고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는 의사에게 “제발 무사히 큰일 마치도록 사흘을 버틸 주사를 놔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부터 제사에 필요한 정갈한 음식 재료를 구하느라 이곳 저곳 다녔다. 몸도 불편한 노인이 사흘치 네 번의 제사 음식 재료를 구하는 건 상상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안 상주는 준비하느라 지쳐 첫날부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3일째 부제를 앞두고 안 상주는 피곤해 늦잠을 잤다. 전날 자정에 제사를 올렸으니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오전 8시 제사를 앞두고 오전 6시에 눈을 떴다. 안 상주가 나서지 않고는 준비가 될 리 없다. 제관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서둘러서 겨우 시간을 맞췄다.

경북 봉화의 한 종택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제관이 모이고 제상에 음식을 진설하는데 있어야 할 시루떡이 보이지 않았다. 시루떡이 잘못돼 쪄지지 않은 것이다. 종부는 제사가 끝난 뒤 죄책감에 목숨을 끊었다. 이후 그 종택은 제사에 시루떡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종부와 안 상주의 제사 음식 준비는 그만큼 큰 부담이다.

이날 안 상주는 부제까지 마친 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고 삼년상을 마친 소회를 털어놓았다. 힘은 들었지만 당연히 할 것을 했다는 것이다. 자식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물론 안 상주를 버티게 해준 지원군은 있었다. 안 상주와 촌수가 가까운 진성 이씨 하계 마을 며느리들이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이들은 제사 때마다 자기 일처럼 안 상주를 도왔다. 그런 도움 없이 삼년상은 불가능했다. 안 상주는 마지막날 제관이 모두 떠난 뒤 피로를 풀 겸 목욕탕을 찾았다. 그리고는 4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이 끊겨 가족은 안절부절이었다. 안 상주는 피곤이 몰려와 목욕탕에서 그대로 곤한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대상 마지막날 자식들에게 공개한 선조 유품


▎1. 상주의 고조부인 이만규 독립지사의 ‘차하(次下)’ 급제 과거시험 답안지. 2. 이만규 지사가 과거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됐을 때의 교지(敎旨).
바깥 상주는 이날 부제까지 마치고 가족들만 남게 되자 고이 간직해 온 고조부의 교지(敎旨, 임금이 내린 관직 문서)와 과지(科紙, 과거시험 답안지)를 꺼내 왔다. 그 옆에는 독립유공 훈장도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바깥 상주와 안 상주를 삼년상으로 이끈 버팀목일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1년이나 100일이 길어 3일장을 마치고 상복을 벗는 시대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을 낳아 준 부모 은혜도 쉽게 잊는 세상이다. 퇴계 후손이 도시에서 지키는 삼년상은 그래서 사람의 도리와 온 몸을 던져야 하는 아녀자의 굴레를 동시에 떠오르게 만든다. 어떤 길이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상주 이동후 씨가 말하는 아파트 삼년상 - “예의 근본정신은 도시와 농촌이 따로 없어”

아파트에서의 삼년상을 마친 상주는 가족들의 동의와 협력이 있어야 삼년상도 가능하다고 했다. 떠나는 분에게 예우를 다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자 정이라고 말한다.

삼년상을 마친 소회는?

“섭섭하고 서럽다. 빈소가 있을 때는 살아계시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나? 빈소마저 없어지니 이젠 어머니가 혼령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고인은 어떤 분이셨나?

“집을 일으키기 위해 아흔여덟까지 평생 자신을 희생하셨다.”

도시에 살면서도 삼년상을 실천했다.

“빈소에 짚으로 엮는 여막을 설치할 수 없는 걸 제외하면 도시나 농촌이 한 가지다. 어디에 있든 예(禮)의 근본정신을 지키는게 중요할 것이다.”

아파트에서 삼년상을 치르느라 생긴 고충은?

“아파트라고 못한 건 없다. 방음시설이 잘 돼있어 곡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삼년상을 치르면서 힘들거나 불편했던 것은?

“상주가 되면 본래 바깥출입을 않는다. 관례나 혼례는 갈 자격도 없다. 문상만 몇 번 갔다. 그런 게 불편했다.”

안 상주가 삼년상에 반대하지는 않았나?

“삼년상은 상주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안 상주가 못하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집 식구는 허리가 아프고 몸이 성치 않다. 1년 전 소상을 마치고 한동안 아팠다. 그래서 먼저 의견을 물어봤다. ‘못하겠다’고 하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하겠다’고 했다. 사명감 아니었겠나.”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풍을 이어가면 좋겠지만 꼭 지키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형편 되는 대로 지켜주면 고마울 뿐이다.”

상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죽은 사람을 예의를 갖춰 보내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지켜야 할 게 있고 지키지 않을 게 있다.”

삼년상이나 3일 탈상이나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말도 한다.

“3일 탈상은 손님이 떠날 때 출입문에서 문을 콕 닫는 것과 같고 삼년상은 1층까지 따라 내려가 안 보일 때까지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 떠나는 손님에게 예우를 다하는 게 사람답지 않은가? 사람의 도리이자 정이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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