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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의 ‘바닷가 서재’] 소설가에게 나이란 없다? 

세상을 향한 청년 작가의 출사표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2010년대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 적나라하게 묘사… 사회적 맥락에서 탄생하는 문제적 소설가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써서 소설가가 된 것은 1980년, 그의 나이 마흔아홉 살 때이다. 그 후 다섯 편의 소설을 출간한 뒤, 소설 읽기와 쓰기에 대한 <젊은 소설가의 고백>을 발표한다. 작가 경력 28년, 그의 나이 일흔일곱 살 때이다. 일흔일곱 살의 젊은 소설가라니! 첫 소설을 출간한 게 ‘고작’ 28년 전이니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매우 젊고 전도유망한 소설가라는 것이다.

“50대 초반이 되었을 무렵, 나는 많은 학자가 그러하듯 내 글이 ‘창작’, 혹은 ‘창조적’인 쪽이 아니라는 사실에 낙담하지 않았다. (…) 프랑스어는 작가(ecrivain)와 기록자(ecrivant)를 구분하여 지칭한다. 이를테면 소설이나 시처럼 ‘창조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작가이고, 은행원이나 사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찰관처럼 사실을 정리하는 사람은 기록자에 속한다. (…) 내가 서사적 기술에 대한 은밀한 열정을 충족한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구두에 의한 서사 전달(narrativity)로, 종종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고 (…) 또 하나는 비평적 논문에서 모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움베르토 에코, ‘창작이란 무엇인가’, <젊은 소설가의 고백>, 박혜원 옮김, 레드박스)

소설가가 되기에 적합한 나이는 몇 살일까? 박완서가 <나목>(여성동아)으로, <고래>의 작가 천명관이 <프랭크와 나>(문학동네)로, 지난해 첫 소설집을 출간한 김종옥이 <거리의 마술사>(2012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작가가 된 것은 마흔 살이다. 황석영은 10대 후반 고교 재학 중에 <입석 부근>(사상계)로 데뷔했고, 최인호·김인숙·김사과·한유주·김애란·김엄지 등은 20대 초반 대학 재학 중에 데뷔했다. 은희경·전경린·이장욱 등은 30대 후반에, 이기호·편혜영·윤성희·정지돈·오한기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데뷔했다. 새삼스럽게 작가의 등단 나이를 반추하게 된 것은 최근 출간된 오한기와 김엄지, 이상우의 첫 소설집에서 비롯됐다.

작가란 생래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감수성, 문체,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 기법적인 배치 능력, 분위기(mood) 등 저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김엄지와 오한기의 소설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젊은 작가들의 관심사와 문제의식, 그것을 제시하는 서사의 구성과 문체이다.

“떡이나 개, 가끔은 좆. 라라는 본인의 면접 결과를 늘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라라에게 떡이었다는 말은, 개 같다 좆 같다와 같이 치명적인 표현이었다. 어쩌면 개나 좆,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떡은 라라가 먹지 않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세상에, 떡을 먹다 뒈질 뻔했어. 숨구멍으로 넘어갔거든. (…) 라라는 의, 식, 주가 아니라 식만을 추구했다.” (김엄지, ‘돼지 우리’,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스물두 살의 김엄지(1988년생)를 작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한 데뷔작 <돼지 우리>의 첫 장면이다. 사회학이나 정신분석학, 심리학이 학문 단위로 자리 잡기 이전, 소설이 그들의 역할을 대신했다. 혁명 이후 격동적인 변화와 혼란을 겪었던 19세기 유럽, 프랑스 사회와 인간의 욕망을 날카롭게 파헤쳐 보여주었던 소설들─<적과 흑> <나귀가죽> <마담 보바리>처럼, 2010년대 한국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은 김엄지와 오한기 소설에서 엿볼 수 있다.

“수심이 얼마나 될까. 그는 알지 못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 그러나 모든 것과 별개로 그는 다이빙을 할 것이었다. 그의 핸드폰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물 묻은 이끼들은 짙게 번쩍였다. 그는 바위의 가장 높고 가파른 곳에 올라서서 어깨를 돌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에 숨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김엄지, 위의 책)

현실과 허구를 낯설지 않게 환유하는 <의인법>

젊지만 가난으로 인해 죽을 만큼 고독한 영혼들이 바다로, 산으로 간다. 어느 날 젊은 그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돌고래가 나오는 장면을 보다가 갑자기 다이빙이 하고 싶어져 계곡이 있는 산으로 떠난다. 또 다른 젊은 그는 바다로 떠나는 데, 이유가 단지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행위와 행로는 일시적으로 촉발되어서 끝없이 되풀이된다. 시지포스의 그것처럼 무한하고, 무력한가 하면, 괴이쩍다. 굴러 내려오는 바윗돌을, 무한 반복, 산으로 끌고 올라가야 하는 천형(天刑)을 받은 자의 존재 의미 또는 방식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것, 아니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벗기듯 점점 적나라하게 실존의 맨 얼굴과 대면하는 과정이 처절하고, 슬프다.

“텍사스 주 외곽에 위치한 브라니스 모텔에서 컨트리 가수 W가 시체로 발견됐다. 그는 왼손에 콜트 한 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권총 자살이었다. W의 지갑에서 발견된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죽음도 내가 원한 건 아니다.” (오한기, ‘파라솔이 접힌 오후’, <의인법>, 현대문학)

스물일곱 살의 오한기(1985년생)에게 작가의 타이틀을 부여해준 데뷔작 <파라솔이 접힌 오후>의 서두이다. 김엄지가 젊은 ‘그’들을 등장시켜 종잡을 수 없는 실존의 행로를 지금 이곳 현실에서 추동시킨다면, 오한기는 다국적 고유명들을 호명해 언젠가 그곳 그 사람들을 지금 이곳의 현실로 능청스러울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위장해 들려준다. 이곳의 현실을 낯설게 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저곳의 현실을 낯설지 않게 재현해내는 환유의 감각과 기술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무한히 둘로 갈라지는 거울 속의 미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섬뜩함을 던져준다.

“우리가 만난 곳은 상수동의 어느 카페였다. 3월이었나 4월이었나 어쨌든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이 출간될 무렵의 봄날이었고, 우리가 모여 있는 테라스는 너무 따뜻했다. 후장사실주의라는 모임이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볼라뇨 편집자, 소설가 셋, 펜싱 선수처럼 생긴 소설가 지망생이 모인 자리였다. (…) 우리가 모인 건 한상경을 송별해주기 위해서였다. (…) 이 나라에는 더 이상 문학이라 부를 만한 게 없단 말이야. (…) 한상경은 배를 타고 남미를 거쳐 북아프리카와 유럽을 차례로 순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오한기, 위의 책)

오한기의 소설은 안과 밖, 허구와 사실이 혼재되어 있다. 그는 위의 내용처럼 정지돈, 이상우 등의 또래 작가들과 ‘후장사실주의(anal realism)’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그의 소설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공인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불분명하다. 오한기를 통해 가짜 전기와 가짜 주석을 소설의 서사 기법으로 고안해낸 남미 환상 서사의 대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한기와 김엄지는 19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2010년대에 20대의 청춘기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20대가 보여줄 수 있는 서사의 새로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첨단병들이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와 <의인법>은 그들이 세상에 던진 출사표(소설법)들을 모아놓은 첫 소설집이다. 이 한 권에 작가로서의 미래가, 한국 소설계의 미래가 담겨 있다. 폭발하는 봄빛, 봄꽃 그늘 아래 유쾌하게 일독을 권한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장편소설 〈춘하추동〉〈내 남자의 책〉, 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소설가의 여행법〉〈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번역서〈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행복을 주는 그림〉등을 썼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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