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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민화에 매혹된 한 시인의 인도 순례기 

지역 축제와 시장에서 발견한 ‘민중의 명작’… 인간과 자연과 신이 어울리는 우주적 품격에 감동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사평역에서’의 시인 곽재구(62)는 언제부터인가 인도에 빠져 있다. 시인은 2011년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이란 인도여행 산문집을 펴냈다. 그 책을 다시 펴보면 시인이 2009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타고르의 고향, 한적한 인도의 시골마을 산티니케탄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은 시성 타고르가 사랑한 사람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알고 보니 시인의 인도 사랑은 15년에 가깝다.

곽재구 시인의 산문은 시 못지않게 좋다. 2002년에 그가 쓴 에세이 <포구기행>을 안방 책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놓고 되풀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바닷가 마을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은 꿈이 있다. 곽 시인의 <포구기행>을 읽은 탓이다. 고단한 삶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펼쳤다. 시인은 그러나 낭만보다 생활이 영위되는 곳으로서의 포구를 그렸다. 위로보다 꾸중을 들었고, 총총히 일터로 돌아왔다.

2013년에 나온 산문집이 <길귀신의 노래>다. 뜻밖의 기쁨과 위로를 선사한 많은 인연, 와온과 여수 바다가 주는 그리움, 세계 각지 여행길에서 느낀 상념이 담겼다. 신춘문예 당선작이면서 시인의 대표시가 된 ‘사평역에서’에 얽힌 청춘 시절 이야기도 세세히 적혀 있었다.

이번에 나온 <시간의 뺨에 떨어진 눈물>은 시인의 인도 방랑기라 할 수 있다. 특별한 목적의 방랑인데, 놀랍게도 찾아 헤맨 대상은 인도 민화다. 2001년 첫 방문 이후 매년 인도 각지를 순례하며 만난 가난한 화가들의 이야기다. <월간중앙>에 연재했던 산문을 토대로 작가 본인이 다시 한 번 전체 문장을 손질하고 새 글과 민화 사진을 넣었다.

제목은 타고르의 시구에서 가져온 것이다. 타고르의 고향 산티니케탄에서 한 시절을 보냈던 시인의 그리움이 배어 있는 걸까? 원래 시인은 교수 연구년을 맞아 벵골어를 배워 타고르의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자 했다. 그런데 타고르의 시보다 그림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역 축제와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가난한 세습 화가들의 민화다. 햇살 아래 펼쳐진 그림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고 한다. 강한 원색의 그림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농사짓고 결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축제처럼 펼쳐졌다.

인도 곳곳의 전통 화가촌을 찾아 나섰다. 어디에 어떠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산다는 말을 들으면 무작정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수십 시간을 느릿느릿 가는 열차를 탔고, 비포장도를 질주하는 야간버스에 몸을 싣기도 했다.

인도의 전통화가는 대부분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최하층의 불가촉천민이다. 이들은 역사 이래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한두 달 그림을 그린 뒤 각 지역을 떠돌며 그림을 판다. 무굴의 술탄 왕국에서 황제의 필사본에 그림을 그렸던 극소수의 화가를 제외한다면 이들의 운명은 세습 화가의 삶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시인은 책의 서문에 그들을 만났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먼지와 악취, 오물 범벅인 인도의 거리를 걷는 것이 좋았다. 몸을 한 없이 학대하며 고행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다 보면 문득 눈앞에 화가의 마을이 펼쳐지고, 활짝 웃는 그들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때 마음 안에 작은 샘물이 솟구쳤다.”

-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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