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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6)] 이제현(4) 동아시아 격변과 생사의 기로 

공민왕의 개혁, 권력의 논리에 의해 파탄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즉위교서에서 고려말 개혁책의 종합판 제시… 측근정치와 개혁노선 대립이 파탄의 배경
권력의 본질은 군림과 지배, 소통의 본질은 공감과 교류다. 소통에 실패한 권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에 성공한 권력은 드물다. 이제현은 공민왕의 소통지향적 태도에 큰 희망을 품었으나, 결국 좌절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극심한 혼란을 부추겼다.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동해 문무대왕 수중릉은 그의 호국혼이 깃든 곳이다.
이제현이 고려정치에서 의미 있는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충목왕대였다. 그때 그는 이미 58세의 고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곧 무산되었다. 뒤이은 충정왕대에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 그가 고려정치에 가장 길게 관여한 것은 공민왕대였다. 공민왕은 영명한 군주였고, 의욕이 넘쳤다. 또한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대변동이 시작된 시대였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 또한 실패로 끝났고, 이제현도 삶을 마감했다. 어느 시대나 개혁을 열망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개혁에 성공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개혁의 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이다.

1348년 충목왕이 12세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발본적 개혁을 기대했던 이제현의 소망은 허사로 끝났다. 이제현은 충혜왕의 친동생이자 뒤에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에게 기대를 걸었다. 사실 충혜왕이 죽었을 때, 고려의 백성들은 강릉대군이 왕이 되기를 바랐다. 총명할 뿐 아니라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충숙왕의 고려인 왕비이자 강릉대군의 친모인 홍씨에 따르면, 강릉대군이 “원자가 되었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붙이고, 오직 임금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충혜왕의 무도함을 원망하였고 나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고 한다.

충목왕 사후 이제현의 정치적 입장은 기록에 따라 상반된다. 이색이 쓴 이제현의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이제현이 “일찍이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공민왕을 세우자고 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익재집>에 실린 ‘연보’에는 “선생이 표(表)를 받들고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 세우기를 청했다”고 한다. ‘표’란 차기 왕에 대해 백관의 의견을 적은 진정표일 것이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표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 가운데 부다시리 왕(충혜왕)의 친동생 왕기(王祺: 공민왕)는 나이 19세로 진작 상국 조정에 입시해 있으며, 부다시리왕의 서자 왕저(王㫝: 충정왕)는 나이 11세로 현재 본국에 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를 왕으로 선택하는 것은 황제의 마음에 달려 있사오니 백성들의 여망에 따라 왕위계승의 분부를 특별히 내려 주십시오.”

이를 보면 누구를 특정하지는 않았고, 황제의 결정에 맡겼다. 하지만 왕기를 앞에 거명하고, 또 백성의 여망에 따르기를 청했다. 왕기를 선호한 것이다. 이제현 또한 정치적 성향만 보면 왕기를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누구를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정왕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는 덕녕공주


▎개혁을 통해 고려의 재기를 꿈꿨던 이제현은 사대주의 세력의 견제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제는 처음에는 강릉대군을 차기 왕에 지명했으나, 출발 직전에 취소했다. 결과적으로는 충혜왕의 서자인 12세의 충정왕이 지명되었다. 고려로서도, 또 이제현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였다. 이제현은 1301년 15세에 환로에 들어선 이래 1357년 71세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56년간 7명의 왕을 섬겼다. 이색에 따르면, 이제현은 “일찍이 그 관직에서 떠난 일이 없었는데, 다만 충정왕이 왕위에 있던 3년 동안만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강릉대군을 옹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현은 충숙왕, 충혜왕대에도 실질적으로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있었지만, 관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정왕대에는 아무런 관직도 받지 못하고, 철저히 배제되었다.

충정왕은 2년 만에 퇴출되었다. 충정왕대를 풍미한 사람은 왕의 친모 희비 윤씨의 인척인 윤시우, 그리고 덕녕공주가 총애한 배전이었다. 윤시우는 희비 윤씨와 이종사촌간이다. “윤시우가 왕의 곁에 있으면서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니,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윤왕(尹王)’이라 하였다. 배전도 또한 공주 궁에 있으면서 옛날과 같이 권세를 부리니, 청탁하는 자가 윤시우에게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배전에게 부탁하여야 했다.” (<東國通鑑>) 이 때문에 충정왕 옹립에 가장 공이 크다고 생각한 최유는 화가 나서, “윤시우는 무슨 공이 있기에 밀직(密直)에서 삼재(三宰: 찬성사)로 제수되었습니까? 그 아버지 윤신계와 숙부 윤안숙도 또한 모두 일찍이 삼재가 되었으니, 어찌 그들 집안에만 전해지는 관직이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배전의 어머니는 궁궐 노비 출신이다. 그는 충혜왕을 섬겨 오늘날의 국방부장관 격인 군부판서까지 승진했다. 충혜왕이 죽은 뒤, 그는 강윤충과 함께 충혜왕비 덕녕공주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충정왕대에도 실질적인 최고 권력은 덕녕공주가 쥐고 있었다. 충정왕이 원 사신 셍게(雙哥)를 위해 잔치를 베풀 때, 덕녕공주는 남쪽을, 왕은 동쪽을 향하여 앉았다. 원래 왕만이 북쪽에 앉아 남면할 수 있다. “충정왕 때에도 공주가 정치에 깊이 참여하였으나 왕이 막을 수 없었다.” (<德寧公主傳>)고 한다. 인사를 담당하던 정방제조 김광재는 덕녕공주의 잦은 인사 개입에 항의해 사직했다.

왕의 권위와 조정의 기강도 엉망이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최유가 배전에게 주먹질을 하고, 또 왕의 면전에서 민사평을 구타했는데도 왕은 성만 낼 뿐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감찰사가 최유를 견제하려고 종을 잡아가자, 그는 관리를 구타하고 종을 데려갔다. 최유의 동생 최원도 왕에게 불손한 말을 해서 왕이 순군옥에 가두도록 했는데, 그는 투옥을 거부하고 원나라로 달아나버렸다. 전 찬성사 윤환은 왕의 생일잔치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제학(提學) 곽균을 구타한 사건도 있었다.


▎1300년대 일류 강대국이었던 원나라는 기근과 전염병, 왜구의 노략 등 삼중고를 겪으며 급속히 기세가 약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가신들은 이런 동아시아 패권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고려의 화풍이 깃든 대방광불화엄경(일본 교토박물관 소장, 1291년작)
개혁에 대한 혐오감도 컸다. 충정왕 원년 8월, 전제개혁 기관인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없앴다. 전녹생은 원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는데, 취소되었다. 그가 충목왕대 정치 도감관이 되어 권세가와 부자들을 철저히 다스려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충정왕대는 왜소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장대한 드라마의 서막이었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와 고려, 그리고 세계의 운명을 바꾼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홍건적의 봉기와 왜구의 침입이다. 이 두 가지 일로 원나라는 명나라로, 고려는 조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세계사의 헤게모니가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갔다.

왜구 발호는 일본의 내전으로부터 기인


▎13세기 중반 흑사병(페스트)은 유럽과 아시아를 죽음으로 물들였다. 원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당시 인구가 절반 가까이 감소해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1331년 이후, 특히 1351년 이후 중국은 대재앙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1331년에는 페스트가, 1351년에는 내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백성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기아였다. 그 시기는 1335년에 즉위한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의 치세와 대략 겹친다. 100년에 걸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대평화가 끝난 것이다. 또한 13세기 초부터 소빙하기(Little Ice Age)가 시작되어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유력한 원인은 태양의 활동이 약화되어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가 감소한 것이다. 한랭한 비도 많이 내렸다. 이 때문에 곡식이나 과일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 날씨가 습해 건초도 제대로 마르지 않고, 소금 생산도 급감했다. 흉년과 홍수, 한파가 한꺼번에 닥쳤다. “14세기에는 기상악화로 겨울이 더 추워진 탓에 아무리 몸을 밀착해도 체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여기에 전염병이 가세했다. 1331년 허베이성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열 명당 아홉이 죽었다. 흑사병의 시작이었다. 1200년경 중국 인구는 1억 2300만 명 정도였으나 1393년에는 6500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격감했다.

왜구의 침입은 1350년(충정왕2)부터 시작되어 40여 년간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국가를 거의 빈사상태에 빠트렸다. 왜구는 삼국시대에도 창궐했다.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왜병 막기를 기원했다.(<삼국유사>) 고려 고종(1225, 1226년), 원종, 충렬왕 대에도 기사가 보인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본격적 침입은 1350년부터 시작되었다.

여말선초 왜구의 발호는 일본의 내전으로부터 기인했다. 하지만 이를 막지 못한 것은 13세기 중엽 이후 중국과 고려의 국가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왜구는 고려와 중국의 해안을 광범위하게 유린하여 연안 주민들의 삶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특히 고려 해안 지역 주민들의 삶은 처참을 극했다. 주민의 기본적 삶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정당성을 잃는다. 왜구 문제는 충정왕 이래 공양왕까지 40여 년 간 고려 정치의 핵심 사안이었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결국 망국에 이르렀다.

대변혁이 시작된 충정왕의 시대에 이제현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다. 1351년 윤택(尹澤)과 이승로(李承老) 등은 원 조정에 “왕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충정왕을 폐하고, 강릉대군을 세우기를 청했다. 두 사람은 충목왕이 죽었을 때도, 원나라 중서성에 ‘백성의 신망이 왕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여 강릉대군을 추대한 바 있었다. 충정왕이 즉위하자 그들은 모두 지방 관리로 축출되었다. 윤택은 이제현의 문인이다. 조선개국공신 윤소종이 그의 손자다. 충숙왕은 윤택을 깊이 신임하여, 유언으로 강릉대군 왕기(王祺)를 부탁했다. 그 이후 윤택은 강릉대군 추대에 전심전력했다. 왕기는 두 번째 왕위계승전에서 패한 뒤 1349년 10월 위왕(衛王)의 딸 부다시리공주(寶塔實里公主)와 결혼했다. 비로소 원 황실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들의 집요한 운동이 주효하여, 충정왕은 퇴위당하고 강화에 추방되었다. 이듬해 독살당하니, 나이 15세였다. 사관(史官)은 강릉대군이 국인(國人)의 인심을 얻고 원나라의 후원이 있었는데, 외척 윤씨들이 이런 위태로운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당파를 만들어 사욕을 부렸으므로, 화근(禍根)을 빚어서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불행히 짐독(鴆毒)의 살해를 당하게 하였다”고 평했다.(<東國通鑑>)

정방 폐지와 야심 찬 즉위교서


▎공민왕의 신뢰를 얻어 권력을 장악한 이제현은 왜구 방어를 최우선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고려 말부터 왜적을 막기 위해 본격적으로 구축된 제주성.
강릉대군 왕기(공민왕)는 삼수 만에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아직 원에서 귀국하지 않은 공민왕은 즉각 65세의 이제현을 임시 정승(攝政丞權斷征東省事)에 임명하고, 왕을 대리해 국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제현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지닌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또 충정왕 원년 왕후가 죽고 난 이후 개혁의 대부와 같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의 첫 인사는 민심에 부응하는 것이었고, 또 공민왕의 정치적 지향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었다.

공민왕의 즉위 소식이 전해지자 “위로는 명덕태후로부터 아래로는 소민에 이르기까지 기뻐하여 날뜀은 가히 말로 다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공민왕은 이제현에게 “무릇 나라에 긴요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이로운 일은 모두 아래로 행하라”고 하였다. 이 말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갱생(更生)의 보람을 가지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 이제현의 심정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오랜 정치적 난조 끝에 공민왕에게 건 고려인들의 기대는 참으로 지대했다.

공민왕은 이제현을 최고위직인 도첨의정승에 정식 임명했다. 충선왕과의 사별 이후 이제현이 이처럼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가 취한 조치는 크게 네 가지인데 지방관에 대한 인사평가, 왜적에 대한 방어, 공민왕의 귀국에 대한 대비, 충정왕대의 권신에 대한 처리 등이었다.

우선, 법사(法司)에 지방관리 중 각도 장관(存撫使, 按廉使)의 공과를 조사토록 했다. 이제현은 대민행정을 직접 담당하는 지방관리(親民之任)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민생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충목왕대 개혁상소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

“자사(刺使), 수령(守令)에 합당한 사람을 얻으면 백성이 그 복을 받는 것이요,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이 그 해를 만나는 것입니다. 소위 관작이 높은 자(官高者), 나이가 많아서 관직을 얻은 자(年邁者), 청탁으로 시골에서 뽑힌 자는 부득이 하면 차라리 중앙 관직을 줄지언정 대민행정 관직(親民之任)은 주지 마십시오. 이것을 시행한 지 20년이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자가 돌아오지 않거나, 세금이 부족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李齊賢傳>) 즉, 20년 정도만 좋은 지방관을 선발할 수 있다면, 백성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고려정치에 해를 끼친 정치인들을 하옥하거나 유배 보내고, 지방관으로 폄직한 일이다. 정천기·배전·박수명·노영서는 충혜왕의 폐행들이며, 윤시우는 충정왕의 측근이었다.

셋째, 잠재적 왕권 경쟁자인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萬德寺)에 출가시켰다.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은 원나라로 도주하여 화를 면했다. 석기는 충혜왕의 서자다. 사기그릇 상인 임신의 딸 은천옹주의 소생이다. 공민왕 5년 6월, 손수경을 중심으로 석기를 옹립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었다. 손수경은 충혜왕의 1등공신으로, 충정왕대에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올랐다. 역모 한 달 전 공민왕은 기철 등 친원파를 주살하고 반원독립을 천명했다. 이 때문에 원의 지지를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손수경은 체포되어 참형되고, 석기는 제주도로 압송되었다. 압송 관리는 도중에 그를 수장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석기를 도망시키고, 거짓보고를 했다. 그 후 석기는 민가를 전전하며 목숨을 이어갔지만, 결국 1375년(우왕1)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이 조치들은 모두 시의적절하여, 권력 이양기의 혼란을 잘 통제했다. 공민왕은 1351년 12월말 귀국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일, 무신집권 이래 인사정책을 난맥에 빠트려 온 정방을 폐지했다. 다음날은 매우 길고 야심 찬 즉위교서를 발표했다. 그 첫 부분은 당시 고려의 현실을 진단하고 있다.

“현재 국가 상황은 쇠퇴하고 있고 풍속은 타락했으며, 조정에 부적절한 인사가 횡행하고 나라 재정은 고갈 상태다. 또한 이웃 도적들이 강토를 침구하고 하늘에 재변이 나타나고 있다.” 기강·인사·재정·국방 등 총체적 난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토지·재판·국방·복지 등 각종 시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말 개혁책의 종합판으로 볼 수 있다. 22세의 공민왕이 혼자서 이처럼 종합적인 국정비전과 국가정책을 준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현을 비롯한 개혁적 문신관료들의 전체적인 조력을 받은 게 분명하다.

권력은 권력 스스로의 논리가 있다


▎개성 만월대는 태조 왕건이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도읍을 정해 궁궐을 창건한 이래 공민왕 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였다. 만월대는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그런데 공민왕의 개혁조치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의사소통 문제다. 그는 즉위교서에서 “근래 측신들이 임금의 이목을 가려 백성의 실정이 제대로 위에 전달되지 못해 결국 임금을 그르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언(代言)의 정기적 건의(轉對)와 각 관청의 보고는 반드시 내가 직접 청취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이제현이 충목왕 원년 개혁상소에서 강조했던 것이다. 권력과 소통은 본질상 대립적이다. 권력의 본질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며, 소통의 본질은 공감하고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통에 실패한 권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에 성공한 권력은 드물다. 그런데 공민왕은 언로를 열면, “정인(正人)과 군자(君子)가 늘 나의 곁에 있어 언관(言官)과 현사(賢士)의 간언이 막히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제현은 공민왕의 소통지향적 태도에 큰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65세의 이제현이 품었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민왕의 첫 인사부터가 매우 실망스러웠다. 1351년 11월, 조일신이 공민왕의 첫 인사명단을 가지고 고려에 도착했다. 도첨의 정승에는 이제현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22명의 고위 관직 중 15명이 공민왕을 대도에서 수종한 이른바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들이었다. 그들의 자질은 매우 열악했다. 뒤에 발표된 37명의 공신 중 과거 합격자는 유숙과 정오뿐이었고, 음서로 진출한 자도 조일신과 허유뿐이었다. 나머지는 이력도 확실치 않은 인물이었다.

인사의 핵심은 논공행상이자, 권력의 안전을 위한 직계체제 구축을 목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현을 도첨의정승에 임명한 것은 이런 문제를 가리는 장식품이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공민왕의 측근정치와 개혁노선이 대립했다는 것이다. 즉, 공민왕은 권력과 동시에 개혁을 원했다. 공민왕의 정치에서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은 조일신이고, 개혁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제현이었다. 권력과 개혁이 항상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을 위해서도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은 권력 스스로의 논리가 있다. 이 때문에 개혁은 권력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문제는 개혁가가 언제나 직면하는 모순이다. 공민왕도 두 요소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점차 권력의 논리가 강화되기 시작했고, 개혁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이제현 또한 생명의 위협에 직면했다.

조일신은 조인규의 손자요, 홍탁의 사위다. 조인규는 몽고어 통역관 출신으로 시중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홍탁은 충혜왕의 제3비 화비(和妃)의 부친이다. 조일신은 소부윤직에 있다가 원에 사신으로 가서, 강릉대군 왕기를 10년간 수종했다. 그의 가문은 전형적인 친원파이고, 장인 홍탁 역시 유명한 친원파 홍복원의 일족이다. 당시 그의 가족은 원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조일신의 난 후 노비가 되었다가 기황후가 후에 이를 면하게 해주었다.

조일신은 연저수종공신 중 으뜸이다. 이로 보아 일족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공민왕의 즉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듯하다. 공민왕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원 승상 톡토(脫脫, 1314∼1355)가 사신을 보내 섬인(纖人: 간사한 사람)을 쓰지 말라고 왕에게 훈계했다. 조일신은 사신에게 “유숙과 김득배가 안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린다(居中用事)”고 하자, 사신은 왕에게 말해 그들을 파직시켰다. 톡토의 사신이 조일신을 먼저 만나고, 조일신의 발언에 따른 것이 주목된다. 이는 조일신이 톡토의 고려 내 대리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당시 중국 대륙은 홍건적의 난으로 들끓었고, 톡토는 홍건적과의 전투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다. 공사다망한 그가 고려의 내정 상황을 알았을 리 없다. 더욱이 그는 매우 현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첨하는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유숙과 김득배는 공민왕의 측근 중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조일신은 톡토의 전언을 이용하여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다. 그는 또한 정방의 복구를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원 조정 권신들의 청탁 때문이었다.

조일신, 공민왕 상대로 사직을 협박하다

“전하께서 환국하실 때 원 조정의 총애를 받는 권신(權臣)으로서 우리나라와 인척 관계가 되는 사람이 그 친족에게 벼슬 줄 것을 이미 성상께 부탁하였고 또 신에게도 위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리사와 군부사가 인사를 맡게 한다면 아마도 관련기관이 법에 구애되어 지체됨이 많을 것이니, 청컨대 정방을 회복하시어 그곳에서 제수하도록 하십시오.”

공민왕은 이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개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꾼다면, 개혁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공민왕은 자기에게 말하면 인사기관에 알려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조일신은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무슨 면목으로 원나라 조정의 사대부를 다시 보겠습니까?” 하고 사직하였다. 이처럼 조일신은 공민왕의 즉위에 기여한 원나라 권신들 전체의 고려 내 에이전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원 지배기의 고려 국왕들에게 원과의 관계는 절대적이었다. 충혜왕은 심지어 원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고, 충정왕은 퇴위당하여 독살을 면치 못했다. 충선왕조차 티베트에 유배되어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원이 건재하는 한 공민왕의 목숨도 대원관계에 달려있었고, 그 고삐를 조일신이 쥐고 있었다. 조일신의 사직은 공민왕에 대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다음 호에는 공민왕대의 이제현의 정치활동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 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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