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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제1부 광복) 

제3장 - [3] 선전포고 

복거일(卜鉅一) / 조이스 진
거족적인 3·1만세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전기가 마련되자 한동안 미국에 머물던 안창호는 상하이로 향했다.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의 의장인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대통령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구는 3·1운동 이후 출소 후 머물렀던 황해도 안악에서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둥(安東)으로 건너갔고, 다시 영국 배를 얻어 타고 상하이로 갔다. 한 연배의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조선의 독립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현순의 전보로 국내의 독립운동이 알려지자, 미국과 하와이의 한인들은 열광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안창호였다. 그는 정치 형세에 민감하고 설득력이 뛰어나고 조직의 중요성을 잘 아는 천부적 지도자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엔 양기탁, 이동녕, 전덕기, 이갑, 이동휘, 조성환, 신채호, 노백린 등과 함께 비밀 계몽독립운동 조직인 신민회를 만들었다. 8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이 조직은 를 발행하고 평양과 정주에 각각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서점들을 내고 도자기회사도 운영했다. 그러나 1912년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음모에 회원들이 연루되거나 망명하면서, 시나브로 조직이 무너졌다. 미국으로 망명한 뒤엔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해서 미주 지역의 ‘무형 정부’로 키웠고 를 창간했다. 1913년엔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해서 계몽독립운동을 실행하는 기관으로 발전시켜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거족적인 3·1독립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전기가 온 것을 깨닫자, 그는 바로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했다. 조선과 가깝고 외국 조계들이 있어서 해외 독립운동에 적합하며 곧 망명정부가 세워질 상하이로 가서, 자신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안창호는 4월 1일 국민회가 모은 자금 가운데 6000달러를 지니고 캘리포니아를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3월 12일 이종관은 이승만의 워싱턴의 주소로 현순의 전보 내용을 알리는 전보를 쳤다. 3월 15일엔 현순이 다시 국민회 중앙총회로 이승만을 찾는 전보를 쳤다. “우리 내지의 정형이 사람과 돈을 아울러 요구합니다. 리승만 박사가 유럽에 갔는지요? 그의 번지를 알기 원합니다. 그이더러 유럽에 가기를 권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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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호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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