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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의 파.스.텔. 인생④] 실용 글쓰기 전문강사 백승권 

“가능성 보았다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지요”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
청와대 행정관 거쳐 안정된 교수직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변신… 꾸준한 기본기 닦아 한 해 200여 회 강의 다니는 인기 강사로

▎백승권 씨는 작가와 기자, 청와대 행정관을 거쳐 대학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40대 중반에 자유직업인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1월 백씨가 미국의 한 교회에서 글쓰기 강연을 하는 모습.
독실한 불교도답게 그는 인도 브라만에 비유를 했다. 남자는 25년간 교육을 받고, 25년 동안은 가족을 먹여 살리며, 그 다음에는 자신과 세상을 위해 숲으로 떠난다는 임서기(林棲期)처럼 살겠다는 계획이다. 멋진 상상력이다.

회식이 직장인의 상징이라면 ‘혼밥’은 자유직업인의 일상이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커피 마시고,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많다. 그것은 프리랜서의 특권이면서 동시에 그들만의 페이소스다. 나이든 한국 남자들은 혼자서 식당 찾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 누가 볼까 두렵고, 혹여 낙오병처럼 여겨질까 몸서리친다. 차라리 집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먹으면 먹었지 그것만은 못한다. 직장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단체로 식사를 하는 회식문화, 그것은 직장인에게는 하나의 리추얼(ritual)이다. 일정한 의식(儀式) 같은 것이다. ‘또 회식이야?’라고 투덜거리면서도 한 달이라도 회식이 없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은 바로 리추얼의 반복 효과다.

프리랜서가 된다는 것은 이 같은 회식문화와의 작별을 의미한다. 대륙에서 뚝 떨어져 나와 바다 한가운데에 외로이 서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홀로 식사하고 홀로 있는 순간이 잦다. 작곡가 브람스가 일찍이 노래했듯이 “자유롭지만, 그러나 고독한”(Frei aber Einsam) 존재다. 줄여서 ‘FAE’라 말하는 그것은 진정한 예술가 정신을 가리키지만 자유직업인의 두 얼굴이기도 하다. 자유영혼의 소유자라면 달콤 쌉쌀한 그 고독의 기묘한 맛을 감당해야 한다.

백승권, 그는 바로 그러한 자유영혼의 소유자다. 올해 50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대학생들처럼 늘 어깨에 백팩(backpack)을 둘러매고 다닌다. 신발도 캐주얼 슈즈 차림이다. 공식적으로 ‘백승권 글쓰기 연구소’의 대표지만 초면에 인사를 나눌 때 그 흔한 명함조차 없어 겸연쩍어한다. 그는 글쓰기 강사, 미국에서는 ‘스토리 코치(Story coach)’라 부르는 직업이다. 주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용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올해로 이 일에 뛰어든 지 6년, 프리랜서로 독립한 것은 3년이다.

“작년과 재작년 평균 1년에 200여 회의 글쓰기 강의를 했어요. 한 회당 평균 4시간씩을 잡으면 대략 연간 800여 시간을 글쓰기 강의에 매달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강의 요청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양적으로 정점에 도달하는 느낌이네요. 이제야 제 식솔을 먹여 살릴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특별히 홍보하거나 영업하는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하는 연락이 오는 것을 보며 제가 축복받았구나 하며 감사하고 있어요.”

1년에 800시간 글쓰기 강의에 바쳐


▎온라인 방송 콘텐트 서비스인 팟캐스트 ‘다시 배우는 글쓰기’에서 패널들과 방송을 하고 있는 백승권 씨(왼쪽).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백승권 대표는 이미 실용 글쓰기 강사의 지존(至尊)으로 통한다. 자유롭게 일하면서도 이미 그 나이 대의 보통 직장인들의 평균 연봉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직장인들이라면 꼭 써야 하는 보고서 글쓰기가 핵심이다. 강의시간에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닙니다. 반면에 모두가 다 알 수 있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용문이 아닙니다. 저는 문학을 하려는 분들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직업을 구하거나 직장생활에서 필요한 도구적 글 쓰기이죠. 대단한 게 아닌데,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어려워해요. 고통스럽게 생각하구요. 우리의 잘못된 교육 탓입니다. 마치 신비한 것처럼 만들어 놓은 탓이죠. 글쓰기는 고고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없애는 것이 제가 가장 먼저 하는 일입니다. 단지 기술과 약간의 요령만 익히면 실용 글쓰기는 가능합니다. 다행히 단기과정을 수료하고 일상생활에서 글쓰기 때문에 가졌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되는 분들을 보면 저도 기분이 좋고 보람도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직장생활이란 글쓰기에서 시작해 글쓰기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자기소개서, 프레젠테이션, 보고서, 기획안, 이메일, 이런 모든 것이 직장인들의 실용 글쓰기의 영역이다. 국내에서 어림잡아 500만 명 이상의 직장인이 글쓰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참고할 만한 실용적인 매뉴얼이 부족하고 적절한 훈련이 안된 탓이다. 그러다 보니 우후죽순처럼 글쓰기 강좌가 홍수를 이룬다. 요즘처럼 한국에서 글쓰기와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또 있었을까? 대학, 기업, 공공기관, 공무원 등 직종을 가리지 않고 글쓰기 교육을 하고 있으며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경쟁적으로 강좌를 열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뿐이 아니다. 스토리텔링 산업의 본거지인 미국 할리우드, 스타트업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실리콘밸리, 대규모 인수합병과 투자의 중심지인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도 스토리텔링 배우기는 열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최근 나는 뉴욕타임스 신문 기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신문에서는 스토리텔링 특집 기사를 다루며, 스토리텔링을 가리켜 이 시대의 유행어(buzzword)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발간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거역할 수 없는 파워를 지닌 전략적 도구’(a strategic tool with irresistible power)라 표현했으며 스토리텔링은 많은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주요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들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미국의 ‘내러티브(Narrative)’란 회사는 6000달러에서 2만5000달러까지 받고 있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앤드류 린더만이라는 사람의 경우 보통 2시간 강연에 1800~3500달러 정도, 일대일 트레이닝의 경우에는 500~5000달러 정도를 받는다. 물론 비영리 단체나 스타트업을 하는 회사들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요금을 받는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3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 특히 투자받기 위한 목적의 프레젠테이션인 ‘피치’(pitch)를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전문적으로 조언해준다. 한국은 말하기나 프레젠테이션, 혹은 피치 같은 다목적 스토리 코치보다는 아직은 글쓰기 시장이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에서 백승권 대표는 확고하게 인정받는 글쓰기 전문 강사로 우뚝 섰다. 어떤 비결이 있을까. 먼저 그의 특이한 인생 이력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문인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동국대학교 국문과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동화작가였다. 동화책 8권, 불교소설 1권, 한 권의 공저, <글쓰기가 처음입니다>라는 이름의 글쓰기 교재도 펴낸 저자다. <미디어오늘>에서 기자로 활동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대통령의 메시지’를 쓰던 사람이었다.

“청와대에서 ‘나’라는 개인의 존재는 빠집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근무하던 시절에는 아침 7시까지 출근해서 조간신문을 훑어보고 오전 8시에 대통령이 주재하는 ‘관저회의’에 참석했지요. 비서실장을 비롯해 10명 정도 참석하는데, 그날의 공식 일정 이전에 대략적인 국정의 핵심 메시지가 논의되고 역할이 분담됐습니다. 한미 FTA와 전시 작전권, 종합부동산세 같은 뜨거운 감자들이자 이슈 파이팅의 소재들이었지요. 때로는 대통령 비서실 이름으로, 또 어떤 것은 홍보수석실의 이름으로 대외적으로 나갑니다. 어떤 레이블을 달고 나가든지, 정확한 콘텐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3년 근무하면서 흡사 전쟁터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기자 글쓰기와 비슷하면서도 엄격함과 정밀함에 있어서는 언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대한 사실을 검증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작가·기자·대통령 메시지 작성 독특한 이력


▎백씨는 글쓰기 강사로 프리랜서를 선언한 지 3년 만에 연간 200여 회, 800여 시간의 강의를 뛰는 스타 강사가 됐다.
청와대에서 그는 행정관, 국장급 직위로 실무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원래 문학적 소양이 깊었던 데다 정부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무수한 보고서와 기획안을 다듬고 취합해서 리라이팅(re-writing)하는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레 실용 글쓰기와 보고서 작성의 전문가가 되었다. 지금의 자유인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엄격한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했던 그가 어떻게 글쓰기 강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까.

“정말 우연이었어요. 저는 다양한 글쓰기 경험은 있었지만,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6년 전 어느 날, 언론사 주최 글쓰기 강좌를 이끌던 한 선배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저에게 갑자기 대타로 강의해줄 것을 요청해왔어요. 저는 원래 말주변이 없고 경험도 없어 못하겠다고 했지만 거의 강제로 등 떠밀리다시피 하게 된 것이 여기까지 왔네요, 핫핫!”

당시 그는 청와대 근무를 그만두고 불교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미래기획위원회 위원도 겸했고, 동양미래대학의 겸임교수라는 직함도 있었다. 잠시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면서 평소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빨간 펜으로 일일이 첨삭 지도하는 것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늘어나 휴가를 내서 강의를 하기에 이르고, 3년 정도 지나자 본격적으로 이 일에 전념할까 고민하게 된다. 부업이 본업보다 더 많은 수입이 생기는, 역전현상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다는 자유영혼의 기질이 되살아났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어요. 제가 다니던 직장은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되어 있었고,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연봉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한구석에는 돈키호테 같은 기질이 있나 봅니다. 저는 어떤 가능성을 보았고, 위험을 감내하지 않으면 그 가능성은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사표를 냈지요.”

안정된 직장 그만두고 전업강사로 변신


▎백씨의 글쓰기 강의는 언론사와 청와대 등에서 익힌 실무 경험에서 비롯돼 실용적이다. 보고서 작성에 서툰 직장인들도 그의 강의를 많이 찾는다.
공교롭게도 직장을 그만둔 뒤부터 4개월 동안 강의요청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10월말에 사표를 제출했는데, 그 다음해 2월까지 새로운 강의가 단 하나도 없었다. 매일 걸려 오던 휴대전화도 그때쯤 해서는 하루에 단 한 통도 울리지 않는 날도 있었다. 싸늘한 무반응이었다.

“순간적으로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다른 이들에게 부탁을 하거나 영업을 하는 성격이 못됩니다. 다만 지인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일, 강좌를 설명하는 리플렛과 메일을 돌리는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집사람이 주부들 대상으로 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제가 외출하기 위해 나가다 보니 제 구두가 어디론가 치워져 있는 겁니다. 혹시 무직자인 남편이 부끄러워서 치워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이 들어 순간적으로 욱하게 되었죠. 하하하!”

그렇게 지겨운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한두 통씩 강의요청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의 구청 같은 지방자치단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공공기관이나 기업들은 연말과 연초에는 대부분 일정상 교육 일정이 없다. 또 최소한 2~3달 전에 강의계획을 확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관행을 몰랐던 것이다. 노심초사 다시 시작한 강연은 점차 늘어 5월에는 한 달 동안 무려 40회나 글쓰기 강연을 했다고 한다. 무서운 가속도였다.

한편으로 글쓰기 시장이 크게 확장되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최근 공급자 과잉 현상도 두드러져 보인다. 한국의 성장 동력이 위축되고 시장경기가 냉각돼 조기 퇴직자가 늘면서 소위 ‘먹물’이라는 지식인 집단의 공급이 갑자기 많아진 탓이다. 별다른 자본투자나 준비과정 없이 손쉽게 뛰어들 수 있기 때문에 글쓰기 강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시장 진입 장벽이 가장 낮은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글쓰기 교육이다. 이미 블루오션이 아니라 레드오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의 교육법에는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 한동안 한국의 기업들에서는 자기계발 과정의 하나로 미국의 유명 컨설턴트가 펴낸 비즈니스 글쓰기 스킬을 번역해 사내 교육용 강좌로 도입했지만 그는 비판적이다.

“미국에서 개발된 책을 번역한 것을 보면 잘 정리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비즈니스 스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한국의 실제 직장 내의 상황과는 괴리감이 있지요. 현실 부합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고요.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한국은 아직 수직적 커뮤니케이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화의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 비즈니스 글쓰기 방법을 그냥 이식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죠.”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조간신문을 몇 개 정독한다. 신문은 스토리텔링과 글쓰기의 훌륭한 교재다. 기획기사는 기획보고서의 교재로 삼고, 사설이나 칼럼은 논리구조를 익히는 뼈대로 삼는다. 다양한 형식의 기사를 스크랩해서 교재로 쓰기도 하고 그때그때 살아있는 예문으로 적절히 활용한다. 백승권 대표는 자신만의 글쓰기 교육을 불교식 용어를 빌려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국 떠돌다 이문열 작가의 충고로 대학 입학


▎백씨는 인생의 전환기를 준비하려는 40~50대들에게 자기 콘텐트를 가질 것과 직장을 그만두기 전부터 꾸준히 준비할 것을 강조했다.
“실용 글쓰기는 기능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매뉴얼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강생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깊이 헤아리는 게 우선입니다. 그것을 공감해야 솔루션이 나오겠지요. 개인별로 특성에 맞춰, 증상에 따라 소화할 수 있는 처방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어느 정도 써본 사람들에게는 조금 가혹할 정도의 비평을 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보아야 할지 힘들 정도로 글쓰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부분을 발견해서 격려해주는 것이 우선인 듯합니다.”

1회용 특강과 일정한 교안이 있고 여러 차례 진행되는 강의는 비슷하지만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마치 120분 동안 집약되는 영화와 연속극, 혹은 미니시리즈의 차이라고 할까. 단지 단상에 서있고 청중을 향해 떠든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르다. 두 분야 모두 다 잘하기는 쉽지 않다. 전자는 하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형태로 진행되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큐시트가 있어야 한다. 반면에 후자는 학교 수업 비슷하다. 교안이 중요하고 친절한 가르침이 더 강조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분명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청중과 수강생들의 반응, 즉 리액션(reaction)에 살고 죽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방송인의 숙명과 유사하다. 수강생이나 청중들의 연령대, 남성과 여성의 성비, 직장의 성격에 따라 반응이 크게 달라진다. 그러하기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오랫동안 방송을 해왔고, 지금은 강단에 서있는 처지기에 그들의 남모를 고충을 그 누구보다 공감한다. 청중들의 몰입도가 높고 호응이 잘되는 날이면 마치 무당이 춤추듯 작두 위를 타는 것처럼, 신들린 듯 떠든다. 록스타처럼 몸동작 하나, 손의 움직임 하나가 청중을 휘어잡는다. 반면에 수강생들의 집중도가 떨어질 때, 리액션이 기대보다 떨어질 때 비참해진다. 그는 어떤 기분일까.

“광야에 홀로 버려진 막막한 기분이 들죠. 겉돈다는 느낌, 서걱거린다는 기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다른 방법 없습니다. 그래도 그 순간을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합니다. 설혹 헤매다가도 길을 찾게 됩니다. 강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백승권 대표는 다른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 기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그의 인생 그 자체로도 남다른 스토리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치열한 문학정신에 빠져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흑산도에서 중국식당 배달원을 거쳐 태백의 탄광촌에서 광부가 되려 했지만 미성년자라 음료수 도매상의 잡부로 몇 달을 보냈고, 오산에서는 초콜릿 공장의 공원으로도 일했다. 부산에서는 잡지를 팔러 다녔다. 그렇게 10대 후반에 호된 문학열병을 앓은 뒤에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작가 이문열 씨의 충고가 도움이 되었다.

<젊은 날의 초상> 등의 작품을 통해 당대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이문열 씨의 대구 집으로 그는 무작정 찾아가는 객기를 보였다. 다행히 이문열 씨는 젊은 시절의 자기를 닮은 백승권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후의를 베풀었다. 새벽까지 글을 쓰다 오후 2시 넘어 일어나던 이문열 씨는 새파란 미래의 작가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멋있구나. 다 좋은데, 너는 우선 검정고시하고 대학부터 가라. 너 대학 가면 2박3일 술 마셔줄게.”

그러면서 본인이 겪었던 인생의 소회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끝날 줄 모르게 방황하던 문학 소년은 마침내 학교 문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는 대학에 입학해서 일찍 문재(文才)를 드러냈지만, 한국의 노동현실과 맞닥뜨리면서 한동안 문학과 다른 길을 걸어야 했다. 남들이 100년 동안 겪을 일을 그는 10년도 채 못 된 기간에 모두 겪었다.

“마흔 살까지 철딱서니 없이 지냈죠. 워낙 남다른 일을 많이 겪어보아서 그런지 세상에 겁나는 것은 없습니다. 불확실한 영역에 던져져도 그렇게 불안하거나 겁나지 않았고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것은 그 시절 때문일 겁니다.”

자기만의 콘텐트가 프리랜서의 성공 조건

그의 백팩은 그가 늘 휴대하고 다니는 필수품이자 자유직업의 상징이다. 6만원짜리 국산 가방, 얼마나 많이 이용했으면 지퍼의 고리가 다 헤어져 수리를 맡겨야 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강의교재가 있구요. 만약을 대비해 예비용으로 강의내용이 담긴 USB를 넣어 다닙니다. 막간을 이용해 읽을 책 한두 권, 그리고 500기가 용량의 음악전용 스마트폰에 제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과 재즈 음악을 가득 넣어두고 틈나는 대로 듣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는 주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나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를 듣습니다. 두 곡 모두 북유럽 음악가 특유의 비극적 정서와 웅장함이 느껴지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강의할 주제에 생각을 집중시키는 데 큰 힘을 줍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흥분 증상이 가라앉지 않는 일종의 조증 상태에서 이어지는데 그럴 때 재즈 음악을 들어요. 미리암 알터의 재즈 음반 를 좋아합니다.”

미리암 알터는 나도 좋아하는 벨기에의 여자 재즈 작곡가, 유대계 출신으로 다양한 음악적 뿌리를 잘 섞은 매력적인 곡을 여럿 만들었다. 나도 하루에 서너 차례 강의 혹은 강연이 몰리는 날이 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것이 목소리다. 목에 이상이 있으면 큰일이다. 어떤 묘책이 있을까. 이미 6년 차에 접어든 전문가답게 그는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증상에 따라, 경중에 따라, 목 캔디에서 시작해 도라지 농축액, 그리고 응급 약품까지 휴대하고 다닌다. 언제 어떻게 목 상태가 나빠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프리랜서의 성패요건은 뭐라고 그는 생각할까?

“무엇보다 자기 콘텐트겠지요. 목공소를 하건 강의를 하건 자기 콘텐트 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실력을 축적해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통은 직장을 그만둔 뒤에 준비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힘듭니다. 급해져서 평상심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죠.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있는 동안 충분히 도움닫기를 해두고 프리랜서 선언해야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불안의 먹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스스로 앞당겨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는 올해 쉰 살이 되었다. 40~50세에 나는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었다. 남자 나이 쉰을 넘기는 기분은 어떤걸까. 혹시 슬프다거나 우울하지는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쓸데없는 욕망을 조금씩 덜어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 참 좋아요. 나쁜 점은 별로 없어요. 노안이 오고 책을 읽을 때 주의력이 떨어지고 하는 정도? 나이 먹는 게 참 좋아요. 하하. 일단 가족들, 저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지원을 하는 게 최소한의 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0년, 60세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고 그 다음에 제가 꿈꾸었던 저만의 글쓰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독실한 불교도답게 그는 인도 브라만에 비유를 했다. 남자는 25년간 교육을 받고, 25년 동안은 가족을 먹여 살리며, 그다음에는 자신과 세상을 위해 숲으로 떠난다는 임서기(林棲期)처럼 살겠다는 계획이다. 멋진 상상력이다.

손관승 - 세한대학교 교수. MBC 기자와 베를린특파원, 국제 부장 등을 거쳐,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중앙대학교에서도 미디어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ceonomad@ gmail.com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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