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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로렌초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다빈치도 없다 

피렌체의 대부호 로렌초의 문화·예술 후원은 먼저 간 동생에 대한 헌사… 4억6000만 달러 쾌척한 결단이 르네상스를 있게 한 근본적 동인(動因)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15, 16세기 메디치가 시대를 상징하는, 르네상스 건축의 최고봉인 피렌체 두오모(Duomo).
근 1년 만에 워싱턴국립미술관에 들렀다. 올 3월에 끝난 그리스 특별전을 놓친 것이 너무도 억울해 전시 화보 책이라도 구입할 생각에서다. 미니멀리즘과 인터넷이 횡행하는 시대에 책을 보관한다는 것만큼 촌스러운 것도 없다. LP레코드 수집과 같은 아날로그 마니아는 아니지만, 굳이 지켜야 할 책으로 미술관 화보만한 것도 없을 듯하다. 미술관에 들른 김에 유럽 밖에 존재하는 유일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인 <지네브라(Ginevra)> 전시룸으로 향했다. 15세기 피렌체 유화 전용관인 갤러리 6호실이다. 지네브라는 전세계 흩어진 다빈치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적은’ 관객을 자랑하는 곳이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처럼 5초 정도 지켜보기 위해 땀냄새로 범벅이 된 행렬에 기댈 필요도 없다. 언제 가더라도 그림과 5㎝ 거리를 유지하면서 즐길 수 있다.

6호실의 <지네브라>를 보기 위해서는 인접한 9호실을 통해야 한다. 15세기 피렌체 조각 전용 갤러리다. 자주 들른 곳이기에 스치듯 지나가려는데 뭔가 새로운 느낌이 와 닿았다. 영화 <식스 센스(Six Sense)>에서 본, 차원이 다른 세상을 접할 때와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간단히 말하자면, 예(藝)와 술(術)을 즐기는(Muse) 곳으로서의 뮤지엄의 모습이 아닌, 신성하고 거룩한 사원으로서의 공간이다.

왜일까? 이미 수차례 오간 9호실이지만, 전체를 하나씩 다시 한 번 더 살펴봤다. 내부는 크게 볼 때 피렌체를 대표하는 15세기 예술가 안드레아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작품 전시관이라고 보면 된다. 잘 알려져 있듯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길러낸 공방(工房)의 주인이다. 어머니 없이 자란 다빈치는 아버지 피에로에 의해 베로키오 공방에 ‘넘겨진다’.

르네상스 후원자의 비극


▎1. 베로키오가 만든 줄리아노 흉상. 잔잔한 웃음과 함께 형인 로렌초를 지켜보고 있다. / 2. 메디치 가문을 세계적 명가로 만든 로렌초 메디치.
당시 공방은 오늘날의 예술 개념과 거리가 먼 곳이다. 그림이나 조각을 마치 건물이나 물건을 만들어내 듯 집단으로 생산해낸다. 특정 분야에 특화한 아티스트(Artist)가 아니라, 예술 관련 모든 분야에 정통한 알티자노(Artizano)가 당연시되던 시대다. 수십 명이 모여 일하는 공방은 알티자노의 주된 산실이다. 15세기 중엽 피렌체에는 100여 개의 크고 작은 공방이 존재했다고 한다. 다빈치 는 모나리자 그림을 그린 화가인 동시에, 화학 재료, 조각 도구, 건축, 무기, 과학 도구, 축성(築城), 과학 기재와 같은 다방면에 익숙한 알티자노의 전형(典型)에 해당된다. 베로키오는 그 같은 다빈치를 길러낸 15세기 알티자노 세계의 대부(代父)에 해당된다. 그가 남긴 각종 조각품이 9호실 주된 전시작품이다.

9호실을 지키는 베로키오 작품의 중심은 크게 둘이다. 전시관 중앙 왼쪽의 줄리아노 메디치(Giuliano de’Medici)와 오른쪽의 로렌초 메디치(Lorenzo de’Medici)다. 로렌초는 15세기 피렌체발 르네상스의 산파에 해당된다. 신보다 인간에 무게중심을 두는 르네상스는 로렌초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을 통한 결과물이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와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 미켈란젤로 나아가 다빈치는 로렌초가 만들어 낸 문화, 예술의 아바타일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로렌초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다빈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 같은 인물의 왼쪽에 들어선 줄리아노는 로렌초의 친동생이다. 9호실의 정수는 바로 나란히 전시된 메디치 형제의 조각상이다. 줄리아노는 대리석으로, 로렌초는 목재로 만들어져 있다. 줄리아노 석상은 베로키오가 직접 만든 것이지만, 로렌초 목상은 베로키오 작품을 복사한 것이란 설명이 이어져 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동시에 지켜보면 명과 암, 아니 극과 극으로 표현할 만한 대조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동생인 줄리아노는 마치 로마황제 군장(軍裝)을 연상케 하는 메두사 형상의 옷을 입고 있다. 근육형의 가슴에다 고대 그리스 미소년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헤어 스타일도 인상 깊다. 얼굴 모습은 전체적으로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시선은 오른쪽에 들어선 형, 로렌초를 쳐다보고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우며 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줄리아노 조각과 달리 로렌초의 모습은 뭔가 차갑고 무섭기까지 하다. 목재에 칠해진 붉고 푸른 색상이 세월과 함께 검고 어둡게 변한 탓도 있겠지만, 로렌초의 표정 자체가 너무도 굳어 있다. 일자형 입술과 상처를 입은 듯한 큰 코는 로렌초의 캐릭터를 대변하는 증거로 와 닿는다. 평소 웃음과는 거리가 먼, 원리 원칙형 직선형 성격이다. 신분의 상징인 모자의 경우도 호화스런 장식과는 거리가 먼, 붉은색 천으로 간단히 걸쳐져 있을 뿐이다. 15세기 피렌체에 유행했던 이슬람풍의 현란한 문양도 없다. 귀족풍의 동생 줄리아노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소박하고 간단하며 단순한 분위기다.

9호실이 ‘신성하고 거룩한 사원’으로 와 닿는 가장 큰 이유는 줄리아노의 온화함과 로렌초의 차가움이 갖는 모순된 긴장에 있지 않을까 싶다. 세계적으로 형제의 조각상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미술관은 극히 드물다. 같은 피를 타고난 형제이면서도 전혀 다른 캐릭터로 묘사된 조각상은 한층 더 귀하다. 워싱턴국립미술관 큐레이터는 무슨 생각에서 두 사람을 한자리에 모아 사원과 같은 경건한 공간으로 재창조해낸 것일까?

그 같은 생각의 발단을 필자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식으로 표현해내고 싶다. 줄리아노는 로렌초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다. 그러나 로렌초가 29세 되던 1478년, 줄리아노는 암살된다. 암살된 곳은 피렌체의 핵(核)이자 얼굴인 두오모(Duomo) 안이다. 공적인 행사는 물론 일요일에는 교회로도 사용되는 곳으로, 피렌체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명소이기도 하다.

1478년 4월 26일 로렌초는 동생인 줄리아노와 함께 일요 예배에 참가하러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교회 안에는 무려 1만여 명의 신자가 모여 있었다. 당시 메디치 가는 사실상 피렌체의 최고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하고 피렌체 공화정을 지켜나가지만, 사실상 왕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로렌초는 자타가 공인하는 피렌체 최고 실력자다.

그러나 정적(政敵) 파지가(Pazzi家)는 메디치가를 무너뜨릴 쿠데타 음모에 들어간다. 로렌초 암살이다. 신자 속에 숨어 있던 암살범 다섯 명이 교회 중앙제단에 들어서던 메디치 형제를 공격한다. 로렌초가 타깃이지만, 사진도 없던 당시 암살범들은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화려한 의상에다 잘생긴 모습의 줄리아노를 로렌초로 착각하고 칼로 난도질을 한다. 줄리아노는 무려 19번 칼에 찔려 즉사한다. 두오모 중앙제단 전체가 피범벅이 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암살범들은 로렌초를 칼로 찌른다. 몇 차례 공격을 당하던 중 로렌초는 중앙제단 왼쪽 기도실 안으로 도망간다. 암살범들도 따라가지만, 로렌초가 곧바로 안에서 문을 잠근다.

1만 명 앞에서 벌어진 일요일의 암살극


▎다빈치가 현장을 목격하고 그린 줄리아노 암살범의 교수형 장면.
당시 1만여 명의 피렌체 시민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요일의 암살극을 생생하게 지켜본다. 5명의 암살범이 감히 피렌체 한복판에서 살인극을 벌일 때는 엄청난 큰 배후가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피렌체 시민들은 그 같은 정치적 배경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암살범을 진압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벌어질 보복 때문에 모두가 관망한 것이다. 기도실 안으로 피한 로렌초가 숨진 채 발견된다면 한순간 세상이 바뀌게 된다.

피렌체 역사는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적이 감도는 상황에서 기도실 2층 난간에 로렌초가 피투성이 차림으로 나타난다. “나는 괜찮다. 저들을 처단하라.” 로렌초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교회 내 시민들은 메디치 가에 대한 충성을 몸으로 실천한다. 앞을 다퉈 암살범 5명을 체포한다. 곧바로 살인극이 벌어진다. 교회 밖으로 끌려간 암살범들은 파지가가 배후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힌 뒤 교수형에 처해진다.

당시 현장에 있던 다빈치는 암살범의 처형 장면을 연필 스케치로 남긴다. 로렌초는 살아남고, 메디치가는 한층 더 절대적인 권위와 파워를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로렌초는 자신이 아끼던 동생 줄리아노를 잃게 된다. 세상을 뜬 동생은 자신을 대신해 암살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원래부터 로렌초와 줄리아니는 돈독한 형제애로 유명하다. 아끼던 동생을 잃은 형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베로키오가 남긴 9호실의 줄리아노 조각상은 1478년 완성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줄리아노가 암살당한 해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볼 때 줄리아노가 저세상으로 간 뒤에 완성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형인 로렌초가 죽은 동생을 생각하면서 베로키오에게 특별히 요청한 조각상일 듯하다. 따뜻한 웃음과 잔잔한 표정을 보면, 죽은 영혼을 위로하려는 형의 특별한 사랑과 배려가 느껴진다.

반면 형은 결코 웃을 수가 없다. 자신을 대신해 숨진 동생을 생각하면 세상을 즐길 만한 여유가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만이 로렌초 인생 전체에 드리워진 숙명이자 운명일 듯 하다. 차갑고 어두운 표정의 로렌초는 바로 상실감과 공허함 나아가 스스로에게 드리워진 거친 삶에 대한 결의라 볼 수 있다.

문화· 예술 후견인은 메디치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부분일 것이다. 르네상스 문을 연 것만이 아니라, 르네스상스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간 르네상스 1막, 2막, 3막을 전부 창조해낸 명가가 바로 메디치다. 돈을 문화와 예술로 바꾼 곳이 바로 메디치가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먹고 살 만해지면 예술과 문화에 빠지게 된다. 잔인한 서바이벌에 주목하다 보니까 품과 격이 떨어진 천박한 삶으로 일관해왔다. 그러나 마침내 성공한 뒤 돈의 힘을 빌어 예술과 문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돈을 문화와 예술로 바꾼 은행가


▎보티첼리룸은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의 출발점이다. 그가 남긴 <비너스의 탄생>은 메디치의 지원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프라다,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를 문화와 예술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 세계의 뮤지엄이 중국인으로 뒤덮여가는 이유는 바로 그 같은 인간적 본능과 순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메디치가는 양에서 질로 넘어가는 그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기부를 통한 문화·예술 진흥은 메디치가 닮기의 전형적 패턴이다. 재벌이나 벼락부자를 보고 메디치가가 되라는 식의 호통도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문화부재=21세기 메디치가 필요=재벌, 벼락부자에 대한 호통’과 같은 공식이라 해둘까?

그렇다면 문화 후견인을 자처한 메디치가는 과연 어떤 생각에서 예술세계 진흥에 나서게 됐을까? 문화 관련 롤모델이 전무하던 15세기 이탈리아 지방 재벌이 과연 무슨 생각으로 속(俗)으로 상징되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수호신으로 활동하게 됐을까? 답은 속(俗)의 세계와 무관한, 성(聖) 즉 신(神)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출발점은 15세기가 시작된 1401년 피렌체 한복판이다. 주인공은 조바니 메디치(Giovanni de’Medici)다. 피렌체 최초의 은행가다. 조바니는 현재의 피렌체 두오모 자리에 들어설 청동제 대문 입찰심사위원장에 추대된다. 당시 결정된 입체형 청동대문은 현재 두오모 자리 정문에 그대로 남아 있다. 후에 로렌초가 전면 지원해 완성되지만, 피렌체의 두오모는 청동제 대문에서부터 돔형 중앙건물 전부가 메디치가의 흔적과 역사에 해당된다.

조바니가 두오모 대문 입찰위원장에 오르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은행이라고 하지만, 조바니의 직업은 고리대금업자에 해당된다.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육체적 노동과 무관한 직업의 일이다. 기독교에서 은행업, 즉 고리대금업은 지옥행으로 통하는 최악의 직업이다. 예수는 고리대금업자와 부자에 대한 거부감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태복음 19장 24절. 마가복음 10장 25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마태복음21장12절)


▎피렌체의 얼굴인 두오모(Duomo) 내 중앙제단. 왼쪽 파이프오르간이 들어선 곳 앞에서 줄리아노가 살해된다.
피렌체 최초의 은행가로 나선 조바니는 돈은 벌었지만, 지옥행이 약속된 가장 천박한 위치에 선 인물이다. 피렌체가 낳은 단테는 대서사시 <신곡(神曲)>에서 은행가를 불기둥 밑바닥에 선 최악의 인물로 묘사한다. 신을 거부하거나 동성애에 빠진 죄인들과 동일한 행렬 속에서 고통받는 죄인이 은행가다. 21세기 인간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협박처럼 들리지만, 15세기 유럽인들은 눈앞의 현실로 받아들인다. 돈을 벌면 벌수록 지옥행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로마 교황청은 그 같은 불안을 현실로 강변한 곳인 동시에, 지옥행을 면할 수 있는 특별 방안을 제안해주는 해결사이기도 했다. 교회를 위해 돈을 쓸 경우 지옥행이 면해진다는 이른바 면죄부다. 은행가 조바니가 청동제 대문 입찰심사위원장이 된 것은 바로 그 같은 과정의 결과물이다. 물론 청동제 대문 수주에 따른 비용은 전부 조바니가 부담하게 된다.

교황이 지옥행 면죄부를 보증하다

보통 메디치가라고 하면 조바니의 아들인 코지모 메디치(Cosimo de’M edici)를 1대 원조로 한다. 메디치가는 교황청이나 왕·귀족 출신과 무관한 평민 출신 집안이다. 필자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인류 역사상 평민 출신으로 최초로 자수성가한 벼락부자 집안이 메디치가일 듯하다.

은행업을 통해 돈을 번 메디치가는 코지모가 들어서면서부터 피렌체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불과 2세대 만에 피렌체의 돈과 권력 모두를 독점하게 된다. 공화정의 피렌체지만, 코지모는 사실상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코지모의 아들인 피에로(Piero de’M edici), 피에로의 아들인 로렌초로 이어지는 3대는 15세기 피렌체의 정치·경제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최고 실력자 혈족이다. 문화·예술 후견인으로서의 메디치가의 명성은 이들 3대에 걸친 시기를 통해 발현된다.

지옥행을 면하기 위한 조바니의 면죄부 거래는 아들인 코지모를 통해서 한층 더 강화된다. 코지모는 1430년 당대 피렌체 최고의 건물인 산 마르코 교회를 교황 에우제니오(Eugenes)에게 바친다. 필자도 들러 내부를 살펴봤지만, 흥미로운 것은 적나라하게 새겨진 코지모 현판이다. 산 마르코 교회 내 구석에 들어선 코지모 기도실 입구에 새겨진 것으로, 내용은 교황의 약속에 관한 것이다. “내가(코지모) 교회를 지어 헌납할 경우 지옥행이 면해질 것이라고, 에우제니오 교황이 보장했다.”

조바니와 코지모가 생각하는 문화와 예술은 면죄부의 증거가 될 교회 관련 활동에 집중된다. 신이 기뻐할,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황청이 반길 만한 성전 관련 기부나 헌납이 예술과 문화 활동의 대상이다.

메디치가 3대 수장인 로렌초는 다르다. 교회가 아닌, 인간을 위한 문화·예술 활동이 주된 관심사다. 로렌초와 줄리아노는 오랫동안 제왕학 수업으로 단련된 15세기 최고의 교육을 받은 형제다. 두 사람이 가장 흥미를 가진 부분은 고대 그리스·로마에 관한 부분이다. 교황청이 말하는 막연한 신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당시의 역사와 철학 문화에 탐닉한 인물이 바로 로렌초 형제다. 특히 줄리아노는 골든 보이(Golden Boy)라는 별명에서 보듯, 수려한 외관과 더불어 스스로 예술 활동에 적극 나선 인물이기도 하다. 로렌초는 동생과 더불어 자신의 대저택 마당에 그리스·로마 당시의 조각상을 모아 피렌체 알티자노를 위한 실습재료로 제공하기도 한다.

사후 세계로 이어진 형제의 우애


▎1. 피렌체 메디치 채플 속의 로렌초 기념비. 맞은편에 있는 동생 줄리아노를 쳐다보는 형상으로 세워져 있다. / 2. 메디치 가문을 연 코지모 메디치. 피렌체 문화에 대한 후원은 그의 손자인 로렌초 메디치에 의해 본격화된다.
예수나 마리아로 대변되던 성화는 실습 재료에서 제외됐다. 신에 눌리고 찌들면서 살아온 수많은 청년이 환호한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로렌초 마당은 세계 최초 사설 예술아카데미로 명명되기도 한다. 15세의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저택 마당에 거의 매일 출근한 조각의 귀재였다. 미켈란젤로가 로렌초는 물론 메디치가 나아가 로마 교황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바로 세계 최초 사설 예술아카데미와의 연(緣)에서 비롯된다.

문화 후견인으로서의 메디치가는 사실상 로렌초가 구축한 이미지에 해당된다. 로렌초는 종교적 열정과 무관하게 피렌체 예술과 문화를 적극 지원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당시의 예술로, 르네상스의 본류에 해당되는 주제와 테마들이 주된 관심사다. 따라서 15세기 르네상스 핵심이 그리스·로마 문화의 재발견이 된 것은 로렌초의 개인적 취향에 따른 결과라 볼 수 있다.

만약 로렌초가 10세기 비잔틴 문화에 빠졌다면, 아니 12세기 고딕 양식의 예술에 탐닉했다면… 아마 르네상스의 주된 내용이 전혀 달라졌을 듯 하다. 그리스신화 속의 아폴로나 로마의 비너스를 대신해 비잔틴의 모자이크와 로마네스크 건축이 르네상스의 얼굴로 자리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로렌초는 생전에 자신과 메디치가가 지원한 문화·예술 관련 돈이 현 시세로 4억6000만 달러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대부분의 돈은 로렌초 스스로가 사용한 지원금이다. 엄청난 돈을 사용한 것은 결코 교회에 잘 보이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자신을 대신해 세상을 떠난 동생에 대한 애정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로렌초의 무덤은 피렌체의 산 로렌초 교회 내 지하시설인 메디치 채플에 들어서 있다. 산 로렌초 교회는 역대 메디치가의 가족무덤 보관소이기도 하다.

메디치 채플은 메디치가의 최고봉에 해당되는 로렌초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공간이다. 21세기 현대인에게 메디치 채플은 로렌초보다 미켈란젤로의 작업 현장으로 한층 더 유명하다.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들이 무덤 주변에 들어서 있다.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상은 로렌초 맞은편의 작품을 통해 한층 더 빛을 발한다. 바로 동생 줄리아노다. 메디치 채플은 지하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에 로렌초, 왼쪽에 줄리아노 무덤이 들어서 있다. 각자의 조각상은 무덤 위에 새겨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작품을 보면, 로렌초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줄리아노를 응시한다. 줄리아노는 해맑은 표정으로 지하 중앙제단을 쳐다본다. 형이 동생을 지켜주고 동생은 중앙제단을 통해 천국행을 보장받는 식의 구도다. 워싱턴국립미술관 9호실에서 보는 두 형제의 우애는 삶이 끝난 사후의 세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로렌초의 문화·예술에 대한 특별한 정열은 바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대한 동생의 애정으로 연결될 수 있다. 골든 보이 동생을 대신해 그리스 ·로마의 미적 세계를 파고 또 팠던 것이다. 관심을 갖고 후원을 할수록 동생이 한층 더 기뻐할 것이라 믿었고, 믿고 싶었던 것이 바로 르네상스 대부 로렌초의 세계관이었을지 모른다.

세계적으로 볼 때 형제애로 두각을 나타난 인물은 극히 드물다. 부모·자식·친구·연인·사제간의 얘기는 넘치고 넘치지만 인류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해낸 따뜻한 형제애는 전무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현실을 보면, 거꾸로 불편한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형제관계의 일상일지 모르겠다. 예수조차도 4명의 형제와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표적인 예다. “이는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한복음 7장 5절)” 로렌초가 보여준 따뜻한 형제애는 인류 역사에 남은, 보기 드문 본보기인 동시에 르네상스를 창출해낸 근본적 동인(動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늙고 가난한 음악가들 위해 전 재산을 쓴 베르디


▎르네상스의 문을 연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다비드>.
운동선수의 쓸쓸한 죽음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아시안게임 역도 분야 금메달리스트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김병찬 씨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준 그의 다부진 체격과 인상은 아직도 필자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교통사고로 고생하다가 불과 46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영광스런 삶이었지만, 가난한 인생이었다. 마지막 자존심이자 재산이었을 각종 메달이 고물상을 전전하다가 사후(死後)에야 발견됐다고 한다.

김병찬 씨 관련 기사를 대하면서 머릿속에 겹쳐진 인물은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다. 형이하학으로서의 지도상의 ‘이탈리아’를 창조해 낸 주세페 가리발디에 맞서, 형이상학으로서의 ‘이탈리아인’을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베르디다. 25개 오페라 작품을 남긴 베르디는 웃고 즐기는 엔터테이너에 그치지 않는다. 흩어지고 나눠진 각 지역의 사람을 하나의 음악·언어·문화로 결집해 ‘이탈리아 국민’으로 재창조해 낸 ‘의식의 통일자’이기도 하다.

베르디를 김병찬 씨의 죽음에 연결시키는 이유는 베르디 스스로도 자랑한 ‘생애 최고의 작품’에서 비롯된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은퇴한 음악가를 위한 휴식처(Casa di Riposo per Musicisti)’가 주인공이다. 베르디가 평생 모은 사재를 털어 완공한 노(老) 음악가를 위한 양로원 같은 곳이다. 베르디 스스로가 그러했듯이 19세기 이탈리아 음악가의 삶은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돼 있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음악가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무용지물 늙은이로 전락해 갔다. 화려한 무대에서의 기억만이 음악가 삶의 자랑일 뿐 현실은 척박했다. 베르디는 동병상련의 친구들을 위해 전 재산을 음악가 양로원에 바친다. 음악가가 지향한 품과 격의 세계를 삶의 마지막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베르디가 남긴 생의 마지막 작품은 1899년 완공 이래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5년 전 필자가 들렀을 당시 양로원에 거주하는 음악가가 30여 명에 달했다. 가난 때문만이 아니라, 여생을 음악가 ‘동지’들과 함께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문명과 야만의 차이는 밥 네 끼에 있다고 한다. 네 끼를 건너뛸 경우 천하의 성인군자라도 추한 동물로 전락한다. 개인적·사회적 이유와 핑계야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밥 두 끼 아니 밥 세 끼를 건너 뛸 위기에 직면해 있다. 김병찬 씨 얘기가 아니더라도 신문·방송에 등장하는 ‘돈에 울고 돈에 우는’ 막장 삶의 흔적을 쫓아간다면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망상일지 모르겠지만, ‘퇴직한 운동선수를 위한 휴식처’ 같은 곳이 한국에도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해 봤다. 국민소득 5만 달러, 10만 달러 쟁취에 목을 매기보다 교통사고 이후 두 끼, 세 끼 밥을 건너 뛴 역도선수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는 사회라면? 퇴역군인, 1970년대 만화가와 소설가, 월남전 당시 위문단으로 간 가수와 배우, 중동 진출 근로자… 그 같은 사람들 가운데 밥 한 끼, 밥 두 끼를 때우기 힘든 사람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선진창조에 입을 모으기보다, 은퇴자·고령자들을 위한 배려와 애정이 앞서는 사회. 한국이 나아가야 할 목표이자 목적은 내일이 아닌, 오늘과 어제에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의 품과 격의 격상… 문화·예술의 지향점


▎1. 로렌초 메디치가 르네상스 창조의 구심점이 됐다는 사실은 피렌체 곳곳에 남겨진 15세기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2.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에 의해 탄생된, 르네상스 아니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조각가다.
메디치가의 흔적은 문화·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품과 격의 격상은 문화와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주변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자세가 문화·예술이 창조해낼 이상향일지 모르겠다. 돈과 사이비예술가로 들끓는 문화·예술 세계도 척박하지만, 이웃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무한 추락선상에 빠진 지 오래다. 돈과 파워로 무장된 권력자나 재벌만이 메디치가의 전부는 아니다. 야만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인간에게 밥 한 끼 더 보태줄 만한 자세라면 그 누구라도 메디치가 될 수 있다. 권력자 재벌만의 메디치가 아니라, 국민·시민·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이 메디치의 분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재력만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가슴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메디치의 흔적이다. 동생에 대한 사랑이 르네상스의 출발점이란 단순한 사실은 바로 인간 모두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따뜻한 사랑으로서의 메디치 정신을 재확인시켜주는 최적의 증거일 것이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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