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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납량특선] 추리작가 도진기 판사의 괴기환상 소설 (2) 

정글의 꿈 

도진기 서울 북부지법 부장판사
“불법이니 도덕이니 그런 말은 하지 말게… 난 단지 힘든 인생을 걸어온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뿐”

국내 정상급 추리작가로 활동 중인 도진기 서울 북부지법 부장판사의 두 번째 납량특선 단편소설을 싣는다. 도 판사는 그간 작품 활동을 통해 치밀한 스토리 구성의 백미를 보여줬다. 특히 예상을 불허하는 반전의 미학, 인간 심리의 탁월한 통찰이 압권이다. 법조인의 전문지식도 단단한 소설 구조에 일조한다. 한여름 더위를 식힐 도 판사의 환상소설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병원 뜰에는 초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광수 노인은 잔디밭 귀퉁이에 앉아 쪼글쪼글한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안경 쓴 간호사가 지나치면서 쏘아보았지만 그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암 선고를 받은 때가 언제던가. 청소부로 등을 굽어가며 일해 모은 돈을 박박 긁어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노인전문 요양병원에 의탁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발버둥치는 단계를 지나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쩌면 이미 죽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76세면 살 만큼 살았다. 우악스런 인생역정에 비하면 과분한 수명이기도 했다. 내세 따위, 바라지도 믿지도 않았다. 죽으면 그저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지 않을까. 겁에 질렸던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세란 게 없으면 하고 바란다. 너무 병으로 고통 받은 탓에, 쓸 데 없이 사후세계란 것이 있어 혹 이 괴로움이 연장될까 봐 두려웠다.

길게 뿜어낸 담배 연기는 고단하고 하잘것없었던 인생의 장면장면을 주마등처럼 피워 올렸다. 태어나기야 남들처럼 우렁찬 울음으로 시작했건만, 왜 이리 지지리도 못나고 궁상맞았던가.

골목대장을 할 만큼 힘이 세지도 못했고, 반장을 할 만한 인기도 없었다. 공부도 영 소질이 없었고, 그림, 음악, 체육 다 그저 그랬다. 성격이라도 강했다면 뻔뻔하고 배짱 편하게 한평생 살았겠지만 드센 놈 눈치만 보다 허송세월했다.

아버지는 광수 노인에게 생명의 한 방울만을 떨어뜨려 놓고는 일찌감치 그의 인생 무대에서 사라졌다. 엄마마저 힘든 삶을 의탁할 새 남자를 찾느라 광수에게는 통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거의 혼자 힘으로 상고에 진학해 졸업까지 했지만, 그 이후가 없었다. 책상에 앉아 주판알을 튕겨보지 못하고 일용직, 잡역부로 떠돌았다. 그러다가 배도 타고, 처절히 혹사도 당했다.

긴 인생이었으니 즐거운 때도 없지는 않았다. 젊었을 땐 어느 포구의 뒷골목에서 객기에 소주병 들고 싸움도 했고, 한때는 여자도 안아보았다. 너무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청춘의 한 조각이나마 잡아보나 했는데 어느새 남은 건 주름투성이 얼굴과 관절염으로 시달리는 노구다. 눈을 떠보니 76세였다. 왜 지금이 16세도 아니고, 26세도 아니고 76세인지, 한스럽지만 엄연히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해온 것은 생활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어제 살았기 때문에 오늘도 살았다. 습관이었다. 시시한 청춘이고, 인생이었다. 단 한 번도 활짝 피어보지 못한 삶이 벌써 끝나려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꽁초를 집어던지고 병원 뜰을 어기적어기적 거닐던 광수 노인의 머릿속에 아득하게 묻혀 있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정원 한가운데 오붓이 떨어져 있는 하얀 나무토막이 눈에 띄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각재료 같은 걸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 있다. 나에게도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닿지 않을 꿈도 꾸었었다.

그는 조각을 잘 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수수깡으로 선생님이 깜짝 놀랄 물건을 만들어낸 뒤로부터 손재주가 있는 아이로 통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재능이 발휘될 기회를 상실하면서 자연스럽게 퇴장해버리고 말았지만, 지우개나 비누, 연필 뒤꽁무니 따위를 이용한 조각은 반 아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곤 했다.

20대 때 언젠가, 석공 일을 해본 적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가 가져본 일 중에는 그래도 가장 흠뻑 빠져서 했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돌 조각은 주위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흔해빠진 해태상을 하나 만들어도 틀에서 찍어낸 듯한 다른 인부들의 평범한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전근대적인 도제 시스템은 그의 의욕을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재능을 인정하고 길을 열어주려는 사람이 불행히도 주위에 없었다. 있는 거라곤 그의 재능을 질시하고 깎아냄으로써 안도감을 얻으려는 피해의식 가득한 사람, 아니면 그의 재주를 착취해서 이윤을 얻으려는 사람 두 부류밖에 없었다.

그래도 좋은 날을 기다리며 젖은 낙엽처럼 붙어 있어야 했을까. 그는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튕겨져 나와버렸고 다시는 입맛에 맞는 일을 가질 수 없었다. 먹고사는 일로 하루하루 부대끼며 떠돌다 한평생이 휙 하고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가끔 길을 가다 어정쩡한 조각물을 보면 왠지 모르게 뭉클해지기도 했다. 내가 저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래, 조각을 해보자. 내가 직접 하는 거다. 먹기 위한 일, 남의 일만을 해온 한평생이었다. 인생 마지막에는 나만을 위한 일, 먹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재미만을 위한 일을 해보고 가는거다.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광수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파묻힌 눈동자가 실로 오랜만에 반짝거렸다. 너무 늦게 찾아온 깨달음이었지만 그것은 폐기가 임박한 몸 구석구석에 생명의 마지막 전류를 흘려 보내주었다.

광수 노인은 정원의 나무토막을 주워 모아 병실 침대 밑에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비상금 몇 푼을 손에 쥔 채 조각에 필요한 칼과 도구를 사러 병원을 나섰다.

2.


광수는 팽팽한 팔 근육의 긴장을 느꼈다. 우람한 왼 팔뚝에 감기듯이 달라붙은 제인을 꽉 부여잡고 오른팔로는 넝쿨을 거머쥐고 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밀림 사이를 날았다. 뒤 쫓던 밀렵꾼이 탕, 하고 총을 쏘았지만 어림없다. 그 따위 둔해빠진 총질에 밀림의 영웅이 당할까 보냐. 광수는 유유히 웃으며 다음 나뭇가지에서 다음 나뭇가지로 날아갔다.

오늘도 상아를 탐내던 밀렵꾼 부대를 혼쭐내주었다. 코끼리 무리는 고맙다는 듯 일제히 뿌우 하며 코를 치켜들고 환송해 주었다. 맑은 물가에 지은 나무 오두막집으로 돌아가니 치타 녀석은 침팬지인 주제에 넙적한 손을 머리위로 하여 연신 손뼉을 쳐대며 반긴다. 옆에 안은 제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인의 방긋 웃는 얼굴에 치렁치렁 드리운 화사한 금발이 석양에 빛났다.

광수는 자신의 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지난달에 해치운 표범의 가죽으로 새로 장만한 찢어진 반바지 주위로 청동처럼 광택이 나는 선명한 복근과 터질 듯한 허벅지가 보였다. 이 자랑스러운 몸으로 오늘밤 제인을 공략해 오늘 하루의 마지막 정점에 오른다……. 이건 영화 따위에는 나오지 않는 은밀한 부분이다.

“어이, 광수영감. 멀 그리 멍하게 있노. 저녁 무로 가자.”

태봉 노인의 재촉에 광수 노인은 깨어났다. 침대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광수 노인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또 히죽히죽 웃고 있네, 이 영감쟁이.”

태봉 노인이 탓했지만 광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새장 같은 무언가를 소중한 물건처럼 한 번 어루만지고는 병원 식당을 향해 떠났다.

직사각형 나무판 위에 자그마한 정글의 모형 같은 것이 있었다. 무성한 나무와 덩굴, 조그만 샘이 있고, 원숭이, 사람 같은 것이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는가 하면 덤불 속에 오붓이 숨어 있기도 했다. 초록과 갈색으로 감쪽같이 채색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나무를 정교하게 깎고 붙여 만든 것이다.

태봉 노인은 광수 노인을 뒤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저 영감은 늘 정신이 반쯤 나가있단 말이야.” 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

자리에 앉은 태봉 노인은 광수 노인에게 물어보았다.

“오늘은 한 번 물어보자. 대체 와 그리 늘 히죽거리노?”

“내가 그랬나?”

광수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너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란다. 슬슬 피하는 거 모르나?”

“내가 뭐 해꼬지라도 하는가?”

“이 사람아, 겁날 수밖에. 침대에 있다가도 히 웃고, 병원 뜰에서도 히 웃고, 복도에서도 히 웃고. 너 같으면 그런 사람 겁 안 나겄나.”

왜소한 광수 노인이 어울리지 않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모를 거야. 내가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를. 다른 노인들하고 노닥거리고 할망구들 꼬시는 것 보다 백번 즐겁게 지내고 있다구.’

태봉 노인은 광수 노인보다 늦게 병실에 들어와 옆 침대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광수 노인보다는 더 남았지만 그 역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다. 병색이 완연해서 얼굴은 온통 주름이 늘어졌고 곳곳에 검버섯이 돋아 있다. 2인용 병실의 한 방에서 지내는 인연도 있고, 같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동병상련으로 병원 내에서는 가장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병원 뜰에 나섰다. 그늘이 반쯤 져 있는 벤치에 걸터앉아 담배를 하나씩 꺼내 물었다. 담배는 금지 품목이었지만 그것도 살 희망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다. 둘 다 인생의 마감 선고를 받은 판에 모든 금제는 풀린 것이다. 담배면 어떻고 대마초면 또 어떤가. 그런 경지라면 경지에 있다. 간호사들도 그 두 사람에게는 가볍게 눈치를 줄 뿐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 니나 내나 인제 얼마 안 남았데이. 그래 말년에라도 기분 좋게 살아야제. 뭐가 아숩겠노.”

태봉 노인이 푸념하듯 말했다.

“너는 뭐 아쉬운 거 없나? 평생을 이렇게 보내버리고.”

“내는 뭐 없다. 소주 한잔 빨 수 있으마 최고제. 너무 술 좋아하다가 말년에 이래 됐지만……. 아, 죽기 전에 그건 한 번 더 해보고 싶구마.”

“뭔데.”

“거 머꼬, 보트 타고 막 강 타고 내려가는 거. 급류타기라 카나, 그런 거. 내 젊었을 때 필리핀에 살았거든. 거기 정글이 엄청나다꼬. 거서 상류에 갔다가 보트 타고 내리오마 기분 죽이는 기라.”

“인제는 못하나?”

“당연하제. 우예 가겠노. 다 늙어갖고. 다리 후둘거리가 보트에 올라타지도 몬 할기라.”

태봉 노인은 무말랭이처럼 말라빠진 자신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툭 건드렸다.

광수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3.


식인종 마을은 남쪽 정글을 벗어나고도 산을 하나 더 넘은 곳에 있었다. 시간이 늦으면 모든 게 헛일이다. 아름다운 금발 숙녀 오드리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있다. 오드리는 관광쯤으로 생각하고 대령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서 이곳 아프리카의 밀림으로 건너왔다. 그러다 그만 식인종에게 사로잡혀버렸다. 식인종들은 이 하얗고 먹음직스러운 식재료를 넝쿨로 챙챙 동여매고 통나무에 매달아 마을로 냅다 실어 날랐다.

광수는 소리를 죽여 마을로 잠입했다. 허리에는 칼을 찼다. 식인종들은 거의 실신 직전인 오드리를 옆에 세우고 장작을 쌓아올려 막 불을 지피려 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불길의 열기에 눈을 뜨더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식인종들의 축제를 뒤편의 높은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광수는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감지했다. 걸쳐놓은 넝쿨을 타고 축제판의 한가운데로 뛰어날았다. 몸부림치는 오드리의 양 팔을 쥐고 있던 식인종 둘을 멋지게 플라잉킥으로 해치웠다. 둘이 나뒹굴자 다른 식인종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해서 허둥지둥했다.

광수는 손이 뒤로 묶인 오드리를 한 손으로 품에 안고 제일 약해 보이는 식인종 쪽으로 뛰었다. 그제야 사태파악을 한 듯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그를 향해 오른 주먹을 날렸다. 그 녀석의 얼굴 한가운데에 정확히 타격됨과 동시에 묵직하고 뻐근한 느낌이 주먹 끝에서부터 전해졌다. 이 정도면 확실한 케이오다. 길이 열렸다.

광수는 오드리를 안고 달렸다. 식인종들은 소리를 지르며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놈들의 독화살과 창이 빗살처럼 퍼부어졌다.

이제 승부다. 저녁나절부터 녀석들 몰래 작업해두었다. 광수는 밀림 안으로 뛰어들면서 칼을 꺼내 오른쪽 넝쿨을 힘차게 잘랐다. 동시에 나무 위에서 잎이 무성한 거대한 나무 가지가 뒤엉켜 떨어져 길을 막아버렸다. 이건 부비트랩이라는 거야. 맛이 어때?

그들이 낑낑대며 길을 치웠을 때, 오드리와 광수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식사를 코앞에서 놓친 식인종들은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한참 달렸다. 넝쿨을 타고 날기도 했다. 오드리의 손을 묶은 밧줄은 광수의 칼에 잘려 나간지 오래다. 광수는 식인종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물가에 다다르자 멈춰서서 오드리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목을 축인 오드리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스름한 달빛에 물든 금발은 불꽃처럼 눈부셨고, 발그레해진 뺨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광수, 와주었군요.”

“당신의 그 미소가 한 번 더 보고 싶었거든.”

오드리는 넓은 광수의 가슴팍으로 와락 안겨왔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이 호수처럼 찰랑거렸다. 붉은 입술이 살포시 열리고 광수의 그것과 합쳐졌다. 제인, 오늘만은 미안해…….

광수 노인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맡에는 정글이 놓여 있다. 광수 노인은 햇볕을 쬐기 위해 병원 마당으로 나갔다. 그의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마치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처럼 들뜬 표정이 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타잔 영화를 좋아했다. 좋은 여자와 가정을 이루고 오순도순 사는 것이 현실에서의 꿈이라면, 타잔처럼 멋진 육체를 가지고 정글에서 금발의 미녀와 함께 모험에 가득 찬 인생을 사는 것은 비현실의 꿈이었다.

그 비현실의 공상을 조각했다. 솜씨가 그리 녹슬지는 않은 모양이다. 조각을 마치고 채색까지 내놓으니 꽤 그럴 듯한 작품이 되었다.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는데, 못 쓰는 새장을 구한 다음부터는 조각품을 안에 담아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무로 만든 정글이 곁에 있을 때는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 처음엔 꿈을 꾸는 것인가 했지만, 분명히 현실이었다. 광수 노인은 실제로 철인이 되어 정글을 날고 있었다.

넘치는 스태미나와 팽팽한 근육은 분명 자신의 몸이었다. 텁텁하지만 맑은 공기, 아늑한 통나무집, 귀여운 동물들, 붉고 탁한 정글의 강 모두 실제였다. 제인과 금발의 미녀들 또한 현실의 사람이었고, 그것이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모험을 떠나지만 결코 다치거나 패배하는 일이 없다. 항상 아슬아슬하지만 멋지게 적들을 해치운다. 즐거웠고, 그 행복 역시 실감이었다.

하긴 여기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정글 조각이 옆에 있으면 꿈이 현실이 되는 현상이 광수 노인에게 전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어째서 따위의 의문은 들지 않았다. 내 조각이 생명을 얻은 것이다. 나는 조각에 생명을 깃들게 하는 재능이 있고, 내가 숨을 불어놓은 조각을 가까이 하면 그것이 현실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아쉽지는 않았다. 모른 채 쓸쓸히 세상을 뜨는 것보단 천만 배 다행이다. 평생에 한 번 찾아온 이 짧은 행복에 괜한 자책으로 돌을 던지지 않으리라. 그냥 즐기면 된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뜰에 나가 햇볕을 쬐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침대에서나 복도를 걸을 때나 정글 조각과 함께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광수 노인은 매일매일 새롭고 신기한 모험 속에서 살았다. 그는 항상 주연이었다. 이전의 인생이 타잔의 발길질 한 번에 나가떨어지는 이름 없는 밀렵꾼이나 원주민이었다면, 지금은 늘 승리하는 모험의 주인공 역할이다. 글래머 미녀들의 환호를 한 몸에 받는 밀림의 대스타다.

“영감아, 오늘도 뭐 재밌는 일 있나?”

태봉 노인이 광수 노인이 앉아있는 벤치로 다가와 물었다.

“뭐 그냥…….”

“또 실실 웃고 있는데.”

광수 노인은 말없이 싱긋 웃기만 했다. 태봉 노인이 작심한 듯 물었다.

“오늘은 얘기 좀 해봐라. 내가 옆에서 보니깐 정신이 이상한 영감은 아닌데, 분명 실실 웃는 기 이유가 있을 기라. 내도 좀 알자.”

“얘기 해봤자 웃을 거야.”

“안 웃는다. 나도 세상 돌아볼 만큼 돌아본 사람이다. 인자 머 신기한 것도 놀랄 것도 없는 기라.”

광수 노인은 한동안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면 재미삼아 말할 테니까 들어봐.”

광수 노인은 정글 모형이 옆에 있을 때는 정글에서 활극을 벌이는 또 다른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태봉 노인은 어이없게 들리는 대목에서도 나름대로 경청해주었다.

“내 조각이 뭔가 요술을 부린 건지 몰라. 하하.”

웃음으로 마무리하는 광수 노인의 말투에 비해 태봉 노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라마, 니 말은 그기 꿈이 아니고 꼭 실제 같다 이기가.”

“그래, 내 느끼기에도 꼭 그렇고, 또 꿈이라면 항상 그렇게 밀림에 사는 꿈만 꿀 수 있겠나.”

“그렇기야 하제.”

“요새 늘 즐겁다. 다른 인생을 얻은 기분이야. 이렇게 밀림에서 모험하다 죽으면 여한도 없을 거 같아.”

태봉 노인은 광수 노인의 얼굴을 낯선 사람의 그것마냥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날도 정글을 날고 있었다. 사람을 해치고 다니는 식인 사자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광수는 녀석을 퇴치하러 출동했다. 녀석은 신출귀몰했다. 겨우 찾아낸 서식지는 밀림에서 벗어난 사바나 한가운데였다. 마주한 녀석의 덩치는 보통 사자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지축을 뒤흔드는 녀석의 포효 앞에 광수는 칼을 꺼내 들고 자세를 취했다. 막 녀석과의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일순 갑자기 견고한 땅이 두 겹으로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사바나가 점차 회색빛으로 변하고 초점이 흔들렸다. 그 튼튼한 광수의 몸마저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렸다. 칼을 든 손이 절반쯤 사라지고 있었다.

때가 왔구나.

이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과의 이별이다. 후회는 없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행복은 비록 짧았고, 너무 늦었지만……. 안녕. 인생이여. 정글이여. 평생 동안 시시하더니 내 인생은 마지막에 큰 선물을 주었어.

광수 노인은 정글 조각을 들고 복도를 어슬렁거리다가 벽에 기댄 채 무너지듯 서서히 쓰러졌다. 곧 침대에 뉘어지고 위급하다는 소식이 담당의사에게 전해졌다. 의사는 서둘지 않았다. 끝의 시기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간호사 둘을 대동하고 광수 노인의 침대 옆에서 앙상한 손을 잡았다. 광수 노인은 가늘게 눈을 뜨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4.

영안실로 실려간 노인의 얼굴에 하얀 천이 덮이던 무렵, 광수 노인의 병실에서는 좀 동떨어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김 박사님, 기어이 발표하실 겁니까?”

흰 가운을 입은 40대 초반의 남자가 맞은편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은 볼품없는 노인을 향해 따지듯이 물었다. 흰 가운의 남자는 광수 노인의 임종을 지켰던 의사였고, 김 박사라고 불린 인물은 태봉 노인이었다. 김태봉은 한쪽 눈을 치켜뜨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이지. 그럴 생각 아니었으면 몇 달간 힘들게 그 짓 하지도 않았어.”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광수 노인과 대화할 때 튀어나오던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나도 어차피 살 날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와서 사람들이 욕한댔자 학자로서 의사로서 겁날 건 아무것도 없어. 불법이니 도덕이니 그런 말은 하지 말게. 난 단지 힘든 인생을 걸어온 사람들이 말년에 가질 수 있는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뿐이야. 나처럼 인생의 끝이 보이는 노인들이라면 모두 쌍수를 들어 환영할걸세.”

“제 입장도 생각해주십시오. 박사님의 연구를 방치한 저도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자네는 관련이 없는 걸로 해두지. 실제로도 거의 그렇고. 자넨 그냥 환자 중에 시한부 인생이면서 연고가 없는 환자를 소개해준 게 다지 않은가. 내가 혼자 독단으로 그 방에 들어가 환자를 가장하고 옆 침대를 쓴 거고. 하긴 가장을 한 건 아니지, 나도 여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거짓말은 안 했어. 이름도 병도. 그 노인이 말이 없는 사람이라 일부러 옛날에 쓰던 사투리 팍팍 쓰면서 친근하게 다가가려 한 거 말고는 다 사실이잖나.”

“……구체적으로 연구가 어느 단계까지 가신 겁니까?”

“난 아질산아밀을 원료로 호흡만으로 강력한 환각을 일으키는 물질을 만들었어. 본인이 희망하는 대로의 신세계가 펼쳐지는 최고의 환각제야. 냄새도 없어. LSD 같은 건 여기 대면 잡스런 하품에 불과하지. 그 노인은 테스트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어. 마침 조각이니 뭐니 하면서 밀림 모형을 만들었길래, 잘 됐지 뭔가. 매일 아침 그 조각물에다가 내가 만든 환각제를 몰래 뿌려놓았어. 수시로 관찰하고 대화해봤지. 대성공이었어. 영감은 늘 조각을 가까이 두면서 평생 동안 꿈만 꾸던 일을 현실처럼 느끼고 행복해하더군. 그 노인은 밀림의 왕자처럼 살고 싶었던 모양이야. 비록 실험일 뿐이었지만 그 영감에겐 선물을 준 셈이지. 공식적인 학술지에는 안 될지 몰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내가 만들어낸 환각제와 이번 임상실험결과를 발표할 걸세. 그리고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거야.”

“어떤 문제를요?”

“죽음을 앞 둔 노인들에게 의사의 처방에 따라 환각제를 투여하는 방안에 대해서 말이야. 고달픈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걸세. 비아그라 따위는 갖다 대지도 못할 거야.”

“휴우.... 박사님.”

흰 가운의 의사는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청난 부작용이 있을 겁니다.”

의사는 그 말을 끝으로 막 일어서다가 김태봉의 옆에 놓인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저건 뭡니까?”

팔뚝 절반만한 크기의 나무 조각품이었다.

“광수 영감이 준 선물이야. 공들여 깎았대.”

김태봉은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듯 조각품을 조심스레 손에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카누 모양의 나무 조각이었다. 급류타기를 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도진기 - 서울대 법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현 서울 북부지법 부장판사. 2010년 <선택>으로 추리작가협회 신인상, 2013년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문광부 선정 올해의 청소년 도서, 2014년 <유다의 별> 한국 추리문학 대상, 2015년 <가족의 탄생> 세종나눔도서 선정. 4개의 작품이 중국어로 번역됐고, <유다의 별>과 <백수탐정 진구> 시리즈는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 중이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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