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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중국 루산(廬山)의 진면목을 보다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 우리네 인생과 같은 곳 

글·사진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자연과 인문, 유불선이 공존하는 전통의 명산…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역사가 담긴 중국 현대사의 ‘박물관’ 역할도

▎1. 해발 1164m의 루산(廬山) 중턱에 형성된 고령진 마을. 19세기말 영국의 조차지 시절에 만들어졌다. 산세의 지형을 따라 600여 채의 서양식 별장이 들어서 있다. 2.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서림사 벽에 쓰다(題西林壁)’. 중국 장수성(江西省)의 루산에 위치한 사찰 서림사를 방문한 뒤 쓴 시다. ‘여산 진면목’이란 고사가 여기서 시작됐다.
북송(北宋)대 시인 동파 소식(東坡 蘇軾, 1037~1101)의 작품 가운데 ‘서림사 벽에 쓰다(題西林壁)’라는 시가 있다. 중국 장수성(江西省)의 루산(廬山, 여산)에 위치한 사찰 서림사를 방문한 후 남긴 시다. 루산은 양자강과 포양호가 연해 있어 경치가 빼어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예로부터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저명 인사들이 거주하거나 다녀가면서 다채로운 인연을 쌓아 그 가치를 더했다. 해발 1474m로 아주 높거나 낮지 않은 높이에 바위와 숲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다 크고 작은 폭포까지 어우러져 분위기가 자못 장엄하다. 그런데 물이 많은 곳이다 보니 안개가 자주 끼어 루산의 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소동파가 49세 나이에 루산을 찾았을 때도 그랬었나 보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그가 남긴 시를 우리 말로 풀면 이렇다.

“가로로 보면 고개(嶺), 세로로 보면 봉우리(峰)/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단지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지.”

단순히 경치를 읊은 서경시가 아니다. 고개 같기도 하고 산봉우리 같기도 한 루산,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다르고, 높은 데서 볼 때와 낮은 데서 볼 때 그 모습이 제각각이라고 했다. 어디 루산만 그런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소동파는 사물의 참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멋지게 뽑아냈다. 루산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이유는 내 몸이 루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안 시시비비를 떠나 살기는 쉽지 않다. 소동파 역시 시시비비에 시달리며 좌천과 유배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인식에 의존하는 한 사태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숙명적 한계인가!

기자가 ‘여산 진면목’의 현장을 체험한 것은 지난 7월 5~10일이다.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 선생을 기리는 심산김창숙연구회(회장 김정탁) 회원들과 함께 답사했다. 심산 선생이 성균관대 초대 총장을 지낸 인연으로 주로 성균관대 교수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한시 권위자인 송재소 명예교수가 루산 관련 한시를 해설하면서 답사가 진행됐다. 송 교수의 책 <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 인문기행>(창비)은 길잡이 역할을 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거족적 규모였음에도 민족대표에 유학자가 들어있지 않았다.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한 이데올로기가 주자학이었음에도 망국에 대한 책임과 저항의 중심에 유학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유학의 전통, 주자학인가 양명학인가


▎루산에 있는 삼첩천 폭포. 세 번에 걸쳐 떨어지는 폭포수가 절경을 이뤄 삼첩천을 보지 않으면 루산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점을 안타까워한 이가 심산이었다. 심산은 어려서부터 주자학을 공부했다. 주자학자중 드물게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이래 해방이 될 때까지 일관되게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박은식·정인보 선생은 양명학 계열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대조적이다. 양명학은 조선시대 때 이단으로 몰린 비주류였다. 망국의 시대 조선 유학의 진면목을 구현한 것은 주자학인가 양명학인가. 초라할 대로 초라해진 조선 주자학을 심산 한 사람이 떠받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 없었다면 더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주자학이 처음부터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았다. 남송(南宋) 시대 주희(朱熹, 1130~1200)가 성리학을 집대성할 때의 문제의식은 뚜렷했다. 주자가 세운 중국 최초의 서원인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루산에 있다. 조선시대 1542년(중종 37) 주세붕이 경북 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우리 서원의 효시인데, 그 모델이 백록동서원이다.

이번 답사는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 무한)을 경유해 루산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우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엷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한은 중국에서 ‘4대 찜통’으로 불린다. 무더위에 내리는 비는 오히려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곳곳에 호수가 보였다. 우한은 물의 도시였다. 버스를 타고 4시간가량 가자 장수성 주장(九江)에 도착했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주장시 루산 일대에는 소동파와 주자의 유적 이외에 ‘귀거래사’의 도연명, ‘비파행’의 백거이, ‘망여산폭포’를 쓴 이백의 시혼이 서려있다. 무엇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져 토착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무대가 루산이다. 중국 현대사의 두 거물인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와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이 서로 다른 꿈을 키웠던 곳도 루산이다. 요즘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관광객들이 많은데 루산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루산의 수많은 문화 유산을 고려하면 의외였다.

백록동서원에는 주자가 세운 교칙이 전시되고 있다. ‘백록동 교조(敎條)’의 첫 조항은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주자 이후 동아시아의 절대적 윤리 규범이었던 오륜이다. 주자는 당시 크게 유행했던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며 유학의 윤리를 다시 건립하고자 했다. 주자학을 신유학(新儒學)이라고 부를 때의 그 새로움이란 노불(老佛)에 대한 비판이다.

본래 <예기(禮記)> 속 한 편이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끄집어내 <논어> <맹자>와 동격의 단행본으로 격상시키며 이른바 ‘사서(四書) 운동’을 펼쳤다. ‘대학’과 ‘중용’의 내용을 장구(章句)로 나눈 후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이단(異端)의 말은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하여, 노불(老佛)의 무리가 나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에 가까워 크게 진리를 어지럽혔다.”(‘中庸章句序’) 주자가 비판한 노불은 본래 도교와 불교의 진면목이 아니었을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래 도교와 불교가 유행하며 환영을 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불학과 도학의 폐단도 생겨났을 터인데, 주자는 바로 그 점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주자학이 과거시험 과목이 된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본래 공부를 통해 성인(聖人)을 지향했던 주자학의 새로움은 사라지고 시험 합격이 목적이 된 것이다. 이를 비판하고 나온 것이 양명학이다. 예컨대 ‘부자유친’을 교조적으로 배우고 외워서 효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해 효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상식을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새삼 일깨운 것이다. 중국에서 주자학에 이어 양명학이 유학의 새로운 바통을 이어나갔고, 일본에서도 양명학이 유행했는데 동아시아 3국 중 조선만 주자학의 강세가 지속됐다. 주자학 이외의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했다.

사상의 공존과 교류가 가능한 유연한 전통


▎1. 1179년 주자가 세운 중국 최초의 서원 ‘백록동서원’ 입구. 1542년 주세붕이 경북 영주에 세운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모델이 됐다. 2. 유학자이자 전원 은거 시인으로 유명한 도연명의 사당. 장수성 주장(九江)은 도연명의 고향으로 루산 기슭에는 도연명을 기리는 사당과 묘소·기념관이 있다. 3. 도연명 묘소 가는 길.
중국은 사상적 변신이 유연한 나라다. 오늘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동거도 그런 연장선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루산은 서로 다른 것들의 공존과 교류가 유연한 중국의 전통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불교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초기 중국에서 정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동진(東晉, 317~420) 시대 루산이다. 루산에는 중국 정토종의 본산인 동림사(東林寺)가 있고, 동림사에 주석한 혜원(慧遠, 334~416) 대사는 루산을 가장 루산답게 만든 주인공이다.

혜원 스님은 유불도(儒佛道) 3교에 두루 밝았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 유교와 도교를 공부했다. 혜원과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교류는 유명하다. 주장(九江) 지역이 도연명의 고향이다. 루산 기슭에는 도연명을 기리는 사당과 묘소·기념관이 있다. 루산에는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어느 날 도연명과 도교의 저명한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 406~477)이 동림사로 혜원을 방문했다. 대화를 나눈 후 혜원이 두 사람을 배웅하다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넘었다고 한다. 혜원은 호계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안거금족(安居禁足)’의 계율을 실천하고 있었다. 호계를 넘자 뒷산의 호랑이가 울었고 세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고 하는데서 ‘호계삼소’ 고사가 생겨났다. 혜원은 이 계율을 동림사에 주석한 30년간 어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사를 소재로 여러 화가가 그림으로 남겼는데 ‘여산삼소도(廬山三笑圖)’,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또는 줄여서 ‘삼소도(三笑圖)’라고 한다.

이 이야기가 실제 사실인지는 불투명하다. 혜원이 입적할 때 도연명은 51세, 육수정은 10세였는데 어떻게 세 사람이 함께 고담준론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성 여부를 떠나 상징하는 바가 크다. 불교·유교·도교의 대표적 인물들이 종교적 차이를 넘어 함께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려 후기 유학자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1367)이 남긴 ‘여산삼소(廬山三笑)’라는 시도 참고할만하다.

釋道於儒理本齊(석도어유이본제)
强將分別自相迷(강장분별자상미)
三賢用意無人識(삼현용의무인식)
一笑非關過虎溪(일소비관과호계)

“불교와 도교는 유교와 이치가 본디 같은데/ 억지로 분별하여 스스로 미혹하네/ 세 사람의 어진 뜻을 사람들은 모르니/ 한바탕 웃음이 호계를 지나치는 것과는 상관없다네.”

고려 후기 주자학, 그리 배타적이지 않았던 듯


▎중국 정토종의 본산인 동림사(東林寺) 전경. 동림사에 주석하며 유불도 삼교에 두루 밝았던 혜원(慧遠, 334~416) 대사는 루산을 가장 루산답게 만든 주인공이다.
이제현은 루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남긴 ‘운금루기(雲錦樓記)’라는 글에도 루산이 등장한다. ‘운금루’라는 누각과 관련해서 쓴 산문이다.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글인데 특별한 곳에 가야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통념에 일침을 놓았다. “조정에서 명예를 다투고 저자에서 이익을 다투다 보니, 비록 형산(衡山)·여산(廬山)·동정호(洞庭湖)·소상강(瀟湘江)이 한 발 내디디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어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놓았는데 “왜 그런가 하면 사슴을 쫓아가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금을 움켜잡으려는 이는 사람을 보지 못하며, 가느다란 가을 털끝을 볼 줄 알면서도 수레에 가득 실은 섶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으면 눈이 다른 데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제현 역시 사물의 참모습을 못 보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소동파가 “여산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제현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으면 눈이 다른데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어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대동소이한 것 같다.

이제현은 불교 중심 국가였던 고려에 주자학이 들어와 자리를 잡던 초기에 크게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이제현의 ‘여산삼소’나 ‘운금루기’를 보면 고려 후기의 주자학만 해도 조선시대만큼 그렇게 배타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제현이 살던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교였던 영향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이제현은 주자학이 겉으로는 노불을 비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노불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음을 간파했던 것 같다. 소동파도 유학자이면서 불교와 노장 사상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천주교·원불교의 여성 성직자들이 교류하는 모임 이름이 ‘삼소회’라고 한다. 혜원·도원명·육수정의 삼교 회통 정신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니 먼 옛날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닌 듯해 더욱 반가운 느낌이다.

노장사상 통해 불교 이해하는 ‘격의(格義) 불교’


▎1. 장수성 주장(九江) 지역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대표작 ‘비파행’이 탄생한 현장이다. 616자에 달하는 ‘비파행’이 마오쩌둥의 글씨로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2. 마오쩌둥의 별장 입구.
중국 후한(後漢) 시대에 불교가 처음 전해질 때 사람들은 불교를 도교의 신선방술(神仙方術)과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비약적으로 불교의 교세가 확장되는데 대부분의 불경(佛經)이 이때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불경 번역에 다리 역할을 한 사상이 도교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노자와 장자의 ‘청담(淸談)’과 ‘현학(玄學)’이 유행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불교의 ‘공(空)’은 노장의 ‘무(無)’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공’과 ‘무’가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이 아님에도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노장 사상을 통해 불교를 이해했던 것이다. 이를 ‘격의(格義) 불교’라고 한다. 격의는 이질적인 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격의의 ‘격’은 ‘재다’는 뜻이다. 노장의 언어를 불교 용어와 비교해 적용시키는 방식이다. ‘공’을 ‘무’로 번역한 것을 비롯해 ‘열반(涅槃)’을 ‘무위(無爲)’로, ‘보리(菩提)’를 ‘도(道)’로 바꾸어 이해했다.

13세부터 유학과 노장 공부에 몰두하던 혜원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21세 때 도안(道安, 312~385) 대사의 ‘반야경(般若經)’ 강설을 듣고 나서다. 혜안은 동림사를 창건(386년) 하기 전까지 30년 동안 도안의 가르침을 받았다. 도안과 수제자 혜안은 초기 중국 불교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나란히 손꼽힌다. <고승전(高僧傳)>에 따르면, 혜원이 도안의 문하에 들어온 후 어느 날 스승에 이어 ‘반야경’을 강설할 때 대중 가운데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어 혜원이 <장자(莊子)>를 인용해 설명했더니 비로소 요지가 명확해졌다고 하였다. 그 후부터 도안은 혜안이 불교 이외의 중국 고전을 인용해 강설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도안과 혜안은 유학과 노장 사상에 관대한 모습을 보였지만 자신들의 삶에서는 불교 계율에 철저했다. 혜안이 동림사에서 30년간 호계 밖을 나가지 않았다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대승불교의 ‘반야경’을 주로 강설했지만 소승불교를 폄하하지도 않았다. 소승불교와 계율 관련 경전을 두루 번역한 것은 도안과 혜안이었다. 혜안이 얼마나 계율에 충실했는가를 <고승전>은 이렇게 전한다. 혜안이 입적하기 직전에 여러 스님과 제자들이 그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약으로 술을 좀 마시도록 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시 미음을 마시도록 요청했으나 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다시 꿀물을 권하자 혜원은 율사(律師)에게 그런 것들을 마셔도 좋은지 찾아보라고 요청한 후 율사가 책을 반도 읽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혜원은 출가(出家)와 재가(在家)의 차이도 그렇게 크게 두지 않은 듯하다. 68세 때인 402년에 훗날 ‘백련사(白蓮社)’라고 명명되는 염불결사를 창립하는데 재가 인사가 상당수 참여했고 그 가운데 유유민(劉遺民, 354~410)은 제문(祭文)을 짓고 주요 사항을 혜원과 논의하는 등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백련사는 후대에 결성되는 수많은 신앙결사의 효시다. 이들은 계율을 지키고 수행에 힘쓰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며 극락세계인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했다. 혜원은 도연명에게도 참가할 것을 권했지만 도연명은 음주를 금하는 계율을 지킬 수 없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벼슬을 버리고 전원과 술을 즐겼던 도연명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음주(飮酒)’ 20수인데 가장 유명한 제5수는 다음과 같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결려재인경 이무거마훤)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문군하능이 심원지자편)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차중유진의 욕변이망언)

“사람 사는 세상에 띠 집을 지었어도/ 말이나 수레가 시끄럽게 하지 않네/ 묻노니 그대는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멀어지면 땅도 절로 외지다오/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산 기운 밤낮으로 아름다워서/ 나는 새들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네/ 이 가운데 참된 뜻 들어있는데/ 말하고자 하여도 말을 잊어버렸네”

이 시에서 “유연견남산”의 ‘남산’이 바로 루산으로 알려져 있다. 유유자적하게 루산을 바라보면서 삶의 참뜻을 깨닫고 말을 잊어버린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도연명의 ‘여산 진의(眞意)’와 소동파의 ‘여산 진면목’이 겹쳐서 다가온다. 소동파는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는데 루산을 매개로 두 시인의 마음이 통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500여 명의 문인·학자가 4000여 편 시문 남겨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별장으로 유명한 미려별서의 외부, 내부(오른쪽 사진) 모습. 1903년 지어진 영국식 2층 건물의 별장으로, 1933년부터 1948년 8월까지 장제스(蔣介石)· 쑹메이링(宋美齡) 부부의 별장으로 사용됐다. 마오쩌둥도 1959년 약 50일간 이곳에 머물렀다.
이 밖에 여러 저명한 시인 묵객이 루산과 동림사에 관해 쓴 글들이 전해진다. 동진 시대 이래 청나라 때까지 500여 명의 문인 학자가 루산을 찾아 4000여 편의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당나라 때의 시선(詩仙) 이백(李白, 701~762)도 세 번 루산에 올라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망여산오로봉(望廬山五老峰)’ 등의 시를 지였다. 역시 당나라 시인인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저명한 ‘비파행’ 이외에 ‘동림사백련’이란 시도 남겼는데, 동림사의 상징인 백련은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어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루산에 오기 전 답사 기간 내내 비가 내릴 것이란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는 거의 매일 쾌청했다. 중국 5대 담수호의 하나인 파양호의 안개도 루산의 풍광을 감상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지고,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이 공존하는 루산의 진면목은 중국 근현대사로 계속 이어진다.

해발 1164m의 루산 중턱에 형성된 고령진(牯嶺鎭) 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이 중국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별천지다. 산세의 지형을 따라 600여 채의 서양식 별장이 들어서 있다. 주홍색 지붕 주택이 즐비한 유럽의 작은 구시가지를 옮겨놓은 듯하다. 1885년 22세의 한 영국인 선교사가 중국에 와 우한·주장·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 1886년 우연히 루산에 올라가면서 고령진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덕립(李德立· Edward Selby Little)이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한 이 선교사는 루산의 시원한 기후가 마음에 들어 ‘쿨링(Cooling)’이라고 명명했는데 ‘고령(牯嶺)’의 중국어 발음(‘구링’)이 영어 ‘쿨링’과 비슷하여 외국인들 사이에 여산은 ‘쿨링’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그는 1895년 영국 영사를 설득해서 지금의 고령진 일대를 999년 동안 조차(租借)하는데 성공했다. 이로부터 1929년 중국을 떠날 때까지 그는 이 일대를 서양인들의 피서 별장촌으로 개발했다. 지금도 2만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비롯해 각종 상점과 서점·호텔·우체국·영화관·은행 등이 들어서 있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어우러지는 이색 공존의 현장이다. 아편전쟁(1840~1842년) 이후 서양 제국주의에 속절없이 무릎 꿇은 중국 현대사의 아픔을 색다르게 간직한 곳인데, 1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관광명소로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현대사 희비가 교차하는 별장 ‘미려별서’

고령진에서 셔틀버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백거이의 초당과 그를 기념하는 ‘화경(花徑·꽃길) 공원’이 나오고, 곧이어 중국 현대사의 희비가 교차되는 미려별서(美廬別墅)를 만날 수 있다. ‘별서’는 별장이라는 뜻이다. 1903년 지어진 영국식 2층 건물인데, 1933년부터 장제스·쑹메이링(宋美齡) 부부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장제스 총통은 이 별장을 무척 아껴서 국민당 정부의 ‘여름수도’로 사용했다. 실제 중요 회의와 결정이 이곳에서 많이 이뤄졌다. 1937년 6월 황포군관 학교 부주임 자격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곳을 방문해 장제스와 담판을 벌이며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곳이다.

장제스는 직접 기초한 대일(對日) 항전선언문을 이곳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 다시 국공내전이 벌어지는데 패색이 짙어진 장제스는 1948년 8월 9일 이 별장을 찾아 10일간 머문 후 정원 바위에 미려(美廬)라고 새긴 후 영원히 이곳을 떠났다. 쑹메이링이 쓰던 가구와 피아노, 중국 최초의 냉장고 등이 보존돼 있다.

주인 없이 비어 있던 미려별서를 마오쩌둥이 1959년 6월 29일 방문해 50일간 머물렀다. 공산당과 군의 주요 간부들이 다 루산에 와서 머물며 중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른바 ‘루산회의’다. 당초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계획했다가 ‘제8기 중앙위원회 제8차 총회’까지 이어서 개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지 10년이 되던 시점이었고, 50일간 루산은 사실상의 수도였다. 당초 루산회의는 대 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나 회의가 진행되면서 결과는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와 측근들을 숙청하는 쪽으로 결말이 났다.

펑더화이는 중국 공산당의 10대 원수(元帥) 중 한 명이면서 1950년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맹장 중의 맹장이었다. 당시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은 누구나 알았지만 마오쩌둥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발설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펑이 나서 오류를 지적하다가 마오의 분노를 사면서 반당 반혁명 분자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마오쩌둥도 문제점은 알았지만 자신이 주도한 정책이 무시되면서 권위가 실추되는 것까지 용납하지는 않았다. 대약진운동은 결국 3000만 명의 아사자를 내면서 실패로 판명되었고, 마오쩌둥도 일시적으로 권력을 류사오치(劉少奇)에게 넘겨 주게 되었다. 펑더화이는 진실을 이야기했지만 역사는 그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이어서 전개되는 문화대혁명에서 펑은 온갖 곤욕을 치르다 쓸쓸히 죽어갔다. 이후 마오쩌둥은 또 다른 루산회의를 두 차례 더 개최한다. 그 루산회의의 옛터가 지금도 보존돼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드는 것은 루산의 운명인가. 1960년 노림호(蘆林湖) 옆에 마오쩌둥의 별장이 들어서는데, 마오는 ‘노림 1호 별서’로 불린 이곳에 와서 자주 수영을 즐겼다고 한다. 혁명도 영웅도 모두 사라진 그곳은 박물관으로 변해 누구도 세월의 힘을 이길 순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면서 역사의 새로운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 글·사진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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