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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 남남끼리 만나 가족 되는 ‘공동체 주택 

“아이들끼리 친해지니 가족여행도 함께 가요” 

글 유정우 인턴기자 skdbwjddn@gmail.com / 사진 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육아실·다목적실 등 공동공간 설치한 주거모델, 지역사회 활성화에도 기여… 단체여행·취미활동 공유 통해 함께 사는 삶의 즐거움 ‘두 배’로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공동체 주택 소행주 내의 택견체육관. 아이들이 모여 암벽등반을 하고 있다.
서울 금천구 시흥3동에 자리한 전국 최초 독거노인 전용 공공원룸주택인 보린주택 2호점. 이곳에 찾아가려면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을 걷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힐 무렵, 독특한 디자인의 회색 건물이 보인다. 건물의 2층 외벽에는 ‘이웃을 보호한다’는 의미의 보린(保隣)주택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1층 다목적실, 2층 경로당을 지나 3층부터가 주거공간이다. 총 10가구가 보린주택 2호점에 살고 있다.

“심어놓은 이놈들이 걱정돼서 안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 사는 정경희(86) 할머니는 옥상 정원을 둘러보는 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한다. 며칠 전에 심어놓은 배추와 무 씨앗을 혹시나 비둘기가 쪼아 먹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다.

배추와 무 씨앗을 ‘이놈들’이라 부를 정도로 할머니는 정원의 농작물들을 애지중지 가꿔왔다. 몇 달 전 심어놓은 토마토와 고추는 부쩍 자랐다. 조금만 더 키우면 밥상에 올릴 수 있다. “이놈들을 보는 게 요즘 사는 낙이요.” 할머니는 채소들을 보기만 해도 흐뭇한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 할머니가 이곳에 거주한 지도 어느덧 8개월이 넘었다. “정 할머니는 1년에 한두 번은 중국에 가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단단하세요.” 관리소장의 귀띔이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던 정 할머니는 20년 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생애 마지막은 고국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정 할머니의 오랜 소신이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이런 집에서 살게 돼 무척 행복합니다.” 직접 채소를 기르는 일에서 삶의 만족을 얻는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보린주택은 대표적인 공동체 주택이다. 공동체 주택이란 육아실이나 다목적실 등 공동공간을 설치한 주거모델을 말한다. 공동규약을 마련해 입주자간의 소통·교류를 높이고 생활문제를 함께 해결한다. 이웃간의 소통을 늘리고 지역사회를 활성화시킨다는 점에서 최근 주목받는 주거형태다. 보린주택 2호점에서 거실은 주민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네 사랑방이다.

육아 걱정도, 노년의 외로움도 함께 나눠


▎매주 수요일, 금요일 보린주택 다목적실에서는 입주자들이 참여하는 노래교실이 열린다.
“얘 이제 살아났네.” 보린주택에 거주하는 임점덕(89) 할머니는 벽을 짚고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노윤경(80) 할머니를 환한 미소로 반겼다. “얘가 어제 화요일마다 하는 재활훈련을 너무 열심히 하더라니까! 그래 놓고 무릎이 아프다고 하더니 화장실도 못 가고 있지 뭐야. 나 없었으면 생리현상 해결도 못했을 거야.” 곁에 있던 관리소장이 한마디 거든다. “오, 엄마는 힘도 무지 세시네.” 임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부축하려고) 죽기살기로 힘썼어!”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무연고 사망자는 총 2279명에 이른다. 무연고 사망자란 혼자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고령화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문제다. 20년 뒤 국내 독거노인 수가 343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 점에서 노년층을 위한 공동체 주택은 무연고 사망자를 줄일 대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공동체 주택은 육아문제 해결의 대안이기도 하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육아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이음채’가 좋은 본보기다. 이음채는 공공토지임대형 주택협동조합을 육성하겠다는 서울시의 방침에 따라 건설됐다. 1층에는 ‘이음 채움’이라는 공동육아용 보육시설이 들어섰다.

유치원생인 서현이(가명)는 집 앞마당에 마련된 간이 수영장에서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보초를 서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이곳에 사는 장운석(40) 씨는 “입주민끼리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돌본다”고 했다.

“자기 아이 수영시키고 싶은 사람이 먼저 수영장에 물을 채우면 돼요.”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장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런 마당을 어느 아파트에서 볼 수 있겠어요? 애들이 뛰노는 모습만 봐도 이 집에 오길 잘했다 싶습니다.” 총 24가구가 사는 이음채의 입주자격은 만 4세 이하의 자녀가 있는 가족이다. 이곳에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많은 이유다.

공동육아의 가장 큰 장점은 육아에 대한 고민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생일·돌잔치 등 아이들을 위한 기념일을 함께 기획할 수 있어서 좋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아이들끼리 금세 친구가 된다. “아이들끼리 친해지니 가족 여행도 함께 가게 되더라고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공동체 주택 ‘소행주’는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의 준말이다. 말 그대로 소통을 위해 주민들이 직접 설계·제작한 주택이다. 소행주의 대표이자 1호점에 거주하고 있는 박흥섭(54) 씨는 “원래 살던 아파트에서 계속 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전·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끼리 뜻을 모으게 됐습니다. 금세 많은 사람이 모여들더라고요.”

입주 경쟁률 10대 1에 이르는 곳도


▎1. 공용시설을 서로가 불만 없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생활수칙이 필수다. / 2. 우주 14호점은 캠핑이 콘셉트다. 공용 거실을 캠핑을 테마로 꾸며놨다. / 3. 보린주택 옥상에 있는 자그마한 텃밭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삶의 낙이다. 4 부모협동어린이집에서 부모가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 공동체 주택은 육아문제 해결의 대안이기도 하다.
주민들이 함께 주택 건설에 참여하고 같은 주택에 거주하자 동네 분위기도 달라졌다. 마음 맞는 주민들끼리 모여 함께 식사하는 공간인 ‘저녁해방모임’도 탄생했다.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소행주’ 3호점 1층에 들어선 ‘우리 마을꿈터’는 지역주민의 자녀들이 택견을 배울 수 있는 체육관이다. “얼마 전 휴가도 같이 보내고 왔습니다.” 입주 5년 차인 박씨에게 소행주 사람들은 새로운 가족이다. “남남끼리 만나 새로운 가족이 된 경우라 합리적인 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런 점은 오히려 피를 나눈 가족보다 낫다고 할 수 있지요.”

국회 입법조사처가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통합지표를 분석한 결과 한국은 사회적 관계 항목에서 유독 점수가 낮았다. 한국인의 27.5%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기댈 가족·친구·동료가 없다’고 응답했다.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소행주 입주민들에게는 그런 얘기가 남의 얘기처럼 들릴 법하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젊은층에도 공동체 주택은 인기다. 공동체 주택 공급업체인 우주(WOOZOO)의 대표인 김정현(30) 씨는 공실률이 거의 0%에 가까울 정도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고 했다. 어떤 곳은 입주 경쟁률이 10대 1에 이른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우주의 인기 비결은 집집마다 설정해 놓은 독특한 콘셉트에 있다. 우주 9호점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이다. 영화 매니어들의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실에 큰 빔 프로젝터를 설치했고 그 앞에는 어른 6명이 함께 편하게 누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넓은 소파를 들여놓았다. 영화 매니어라면 누구나 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이처럼 집집마다 지닌 특성이 젊은이들을 개성파 주거공간으로 끌어들였다.

9호점에 거주하고 있는 최수경(23·여) 씨는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허물이 없어진다. 대학 휴학 이후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이제는 그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가족 아닌 남남끼리 모여 살다 보니 불편한 점이 없을 수는 없다. 공동시설 이용, 청소, 취침시간 등으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 보린주택을 관리하는 금천구 관계자는 “다목적실은 공용시설이다. 가령 누군가가 에어컨을 오랫동안 독점한다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보린주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사람이 살다 보니 사소한 일 하나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생활수칙이다. 이음채도 한때는 비슷한 문제로 고민했다고 한다. 이음채에서는 매주 셋째 주 일요일에 입주자 회의가 열린다. 회의에서는 간이 수영장 건축, 탁구대 설치 등이 안건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피할 수 없는 갈등, 해결책도 각양각색

“저희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합니다.” 이음채에 거주하는 장운석(40) 씨는 “예전에 탁구대 설치를 안건으로 올렸는데 모든 사람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탁구대를 원하는 가구끼리 돈을 갹출해서 구매했다”고 말했다.

소행주는 분쟁 해결을 위한 묘책으로 단체여행을 택했다. 입주 전에 함께 여행을 떠나 생활수칙을 정하는 것이다.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산다고 해서 갈등이 없을 수 있겠어요? 함께 여행 가서 소주잔을 부딪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더라고요.” 박흥섭 씨는 그래도 갈등보다 기쁨이 더 크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최수경 씨는 “공동체 주택은 사람이 공간을 이기는 곳”이라고 말한다. 주택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입주 전에 비해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어요. 요즘 들어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절약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서적·경제적 도움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얻는 인생 조언은 최씨에게 큰 힘이 된다.

휴학 이후 사회적 단절을 두려워했던 최씨에게 우주는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이다. “금전적 절약만 생각하고 이곳에 오면 함께 사는 게 힘들 수도 있어요. 같이 사는 공간이다 보니 청소 당번을 정하거나, 12시 이후에는 조용히 하기 등과 같은 규칙이 있거든요. 하지만 함께 소통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 글 유정우 인턴기자 skdbwjddn@gmail.com / 사진 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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