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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 (23)] 사랑에 빠진 양녕대군, 폐세자 되다 

‘어스름 달빛 아래 어리는 꽃보다도 아름답더라’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태종, 이씨 조선이 ‘민씨의 나라’ 될 것 우려한 나머지 처남 4명 역적으로 몰아 모두 처형… 외삼촌들 몰살당한 뒤 주색에 빠진 양녕, 유부녀까지 탐하다 책봉 15년 만에 결국 폐위돼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이 외삼촌 4명을 역적으로 몰아 모두 처형한 이후 방황하다 폐위되는 비운을 맞았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 태종(유동근 분)이 양녕대군(이민우 분)을 질책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1415년(태종 15) 12월 14일 태종은 자신의 집무실로 황희·박은·유사눌을 불렀다. 당시 의정부 참찬 황희와 이조판서 박은 그리고 도승지 유사눌은 춘추관 직무를 겸임하고 있었다. 태종이 다른 사람들은 제외하고 그들만 부른 것은 춘추관에 뭔가 알리고 싶은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태종은 그들에게 10여 년 전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처갓집 사람들은 잔인무도한 역적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태종이 그 증거로 든 것은 다음과 같았다.


▎양녕대군과 사랑에 빠졌던 어리(오연서 분).
13년 전인 1412년(태종 2) 봄에 효빈 김씨가 임신했다. 효빈은 태종의 잠저(潛邸) 시절 왕비 민씨의 몸종이었다. 그런 효빈을 태종은 왕비 몰래 만나 임신시켰다. 혹시라도 왕비에게 해를 당할까 염려한 태종은 8월쯤 효빈을 출궁시켜 따로 마련한 집에서 살게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효빈을 붙들어다 친정 행랑에 감금했다. 12월 13일 새벽, 효빈에게 진통이 왔다. 이 보고를 받자 왕비는 효빈을 온돌방 밖의 차가운 마룻바닥으로 내보내라 명령했다. 엄동설한에 얼어 죽으라는 뜻이었다. 이를 가엽게 여긴 효빈의 오빠가 담장 옆에 거적을 덮고 그곳으로 옮겼다. 효빈은 거적 아래에서 오전 8시쯤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왕비는 그날로 효빈과 핏덩이 아들을 차가운 흙집으로 옮기게 했다. 이불과 돗자리도 빼앗았다. 이 또한 한겨울 추위에 얼어 죽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를 가엽게 여긴 어떤 종이 말 옷을 줘 7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났다. 분노한 왕비는 효빈과 핏덩이 아들을 교하(交河)로 보내버렸다. 가는 길에 얼어 죽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효빈과 핏덩이 아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어제가 그 아들의 14번째 생일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춘추관에 내리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방종(放縱)과 왕비 민씨의 잔인함을 역사기록에 남겨 후손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처갓집 식구들을 몰살시키려는 심산이었다.

13년 전, 왕비가 자신의 친정 행랑에 효빈을 수 개월간 감금했다면 태종의 장인·장모를 비롯해 처남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태종의 처갓집 식구들은 왕의 후궁과 아들을 죽이고자 공모한 역적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태종은 왕비를 비롯해 그때까지 살아 있던 처남 민무휼·민무회 그리고 장모 송씨 등을 모조리 대역부도로 죽이려 작심했던 것이다.

황희·박은·유사눌도 이런 태종의 속셈을 간파했다. 만약 태종의 명령대로 하면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왕의 말을 믿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역사에 남기면 안 된다고 했다. 실랑이가 길어지자 태종은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명령했다.

다음날 태종은 세자의 사부 변계량을 불러 똑같은 명령을 내렸고, 그는 별다른 반대 없이 복종했다. 뒤이어 피바람이 몰아쳤다. 태종의 속셈을 짐작한 춘추관의 책임자 이숙번과 하륜은 이 이야기를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에게 알렸다. 민무휼·민무회 등 태종의 처가 식구들을 탄핵하라는 의미였다.

권력 지키기 위한 피의 숙청


▎<용의 눈물>에서 세자에 책봉된 직후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에게 인사하는 양녕대군 부부, 오른쪽은 세자빈 김씨(안연홍 분).
결국 민무휼과 민무회는 12월 18일 귀양에 처해졌고 다음해 1월 13일에 목매 자살했다. 그들의 처자식들 역시 귀양에 처해졌고 친인척들 또한 큰 화를 입었다. 이로써 태종의 처남 4명 즉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는 모두 역적의 오명을 쓰고 죽었다. 다만 태종은 장모 송씨는 연로하다는 이유로, 왕비는 왕비라는 이유로 살려줬다. 하지만 이제 왕비는 손발이 모두 잘린 산송장 같은 처지가 됐다. 왕비는 매일 울고불며 음식도 끊고 저항했지만 태종은 요지부동이었다.

태종이 굳이 옛날이야기를 꺼내 처남들을 냉혹하게 죽인 이유는 “지금 내가 늙어 생각하니 참으로 불쌍하다. (…) 마땅히 역사에 남겨 후세에 밝게 보임으로써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는 언급에 함축돼 있다. 당시 태종은 49세로 보름 후면 50세였다. 그 당시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나이였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태종은 그 누구보다도 외척들 즉 왕비와 처남 민무휼·민무회가 걱정이었다.

1407년(태종 7) 7월,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외척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민무휼과 민무회도 같이 죽이려 하다가 장인과 장모를 생각해 살려줬다. 태종은 이런 자신의 처사에 왕비와 처남들이 감복하기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특히 왕비가 자신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민무구와 민무질의 죽음 후 얼마 안 돼 친정아버지 민제마저 죽자 왕비의 원한은 하늘처럼 높아졌다. 왕비는 자신의 친정동생들과 친정아버지를 태종이 억울하게 죽였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죽고 왕비가 대비 자리에 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명 왕비는 친정 식구들을 불러들여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조선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 민씨의 나라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 가능성은 세자 양녕대군 때문에 더더욱 컸다. 세자는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를 빼닮았다. 외모는 물론이고 공부보다는 무술에 관심을 보이고, 인정에 휘둘리는 성품 역시 이성계와 비슷했다. 이런 세자가 태종에게는 큰 근심이었다. 게다가 세자는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기에 외가 식구들에게 남다른 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세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대비 민씨와 외삼촌들에게 마구 휘둘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살아 있는 처남들을 모두 죽이고, 왕비 민씨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없애야 했다. 그래서 태종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13년 전의 이야기였다.

이런 면에서 태종의 민무휼·민무회 숙청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죽음 이후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고 세자 양녕대군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포석은 세자를 헤어날 수 없는 갈등의 늪에 빠뜨렸다. 태종의 외척 숙청은 정치적으로 훌륭한 포석일지 모르지만 인간적으로 잔인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외삼촌들에게 깊은 정이 있는 세자 입장에서 본다면 태종의 외척 숙청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즉 인간적 감정과 정치적 결단 사이에서 세자가 어느 쪽을 택하는지 시험당하는 것이었다. 만약 세자가 인간적 감정을 우선한다면 적극적으로 외삼촌들을 보호할 것이다. 반면 정치적 결단을 우선한다면 외삼촌들 숙청에 앞장설 것이다. 조만간 왕이 돼야 할 입장의 세자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방황하는 세자


▎태종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戊寅靖社)을 통해 반대파였던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 한편 자신의 이복동생인 세자(의안대군 이방석)마저 척살했다. 무인정사 직후 대궐로 들어온 태종(유동근 분)과 이숙번(선동혁 분, 앞줄 왼쪽), 조영무(장항선 분), 태종의 바로 뒤 방립(方笠)을 쓴 이는 그의 장자방인 하륜(임혁 분). / 사진·중앙포토
당시 세자는 인간적 감정과 정치적 결단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했다. 혹 외삼촌들을 살려달라 애원한다면 태종은 세자를 정치적 결단도 없고 효심도 없는 아들이라 질타할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죽이라고 한다면 태종에게 좋은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애간장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견뎌야 했다. 세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눈치만 보았다.

결국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세자는 태종이 주최한 술자리에서 잔뜩 술에 취한 상태로 “종묘사직은 전하의 종묘사직만이 아니니 죄인들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무휼·민무회를 법대로 처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태종은 옆에 있던 환관에게 “이 말을 자세히 들어둬라”고 명령했다. 세자가 술김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나중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틀 후 태종은 민무휼·민무회의 자진을 명령했고, 다음날 두 사람은 목매 자살했다. 실록에 의하면 세자는 1416년(태종 16) 1월부터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정확히는 민무휼·민무회가 자살한 직후였다. 이런 사실로 보면 세자가 주색잡기에 빠진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외삼촌들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서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세자 주변에는 간신배들이 들끓었다. 조만간 세자가 왕위에 오를 것이 확실했기에 간신배들의 아부는 치열했다. 간신배들 중에서도 구종수와 이오방이라는 자가 세자의 총애를 받았다. 구종수는 문신관료였고, 이오방은 장악원 악공(樂工)이었다. 구종수는 몇 년 전에 죄를 짓고 귀양을 갔다 왔기에 더 이상 태종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세자에게 아부했다.

1416년 1월 중순경, 세자의 총애를 받게 된 구종수는 거의 매일 밤 대나무 사다리를 넘어 동궁에 들어갔다. 혼자가 아니라 연주자 또는 기생과 함께 들어갔는데 그때 함께 들어간 연주자가 이오방이었다. 세자는 구종수와 함께 바둑을 두거나 이오방의 거문고 연주를 들으며 온밤을 지새우곤 했다. 헤어날 수 없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자의 주색잡기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동궁에서만 노는 것이 아니라 몰래 월담해 궁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세자는 구종수 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한강 주변에 가서 놀기도 했다. 세자는 구종수와 무술 대련도 하고 기생과 어울려 춤을 추며 놀다가 새벽녘에 돌아오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세자는 온갖 핑계를 대며 공부에서 빠져나갔지만 오래 갈 수는 없었다. 9월에 야간 월담하던 구종수가 적발돼 태종은 그동안 세자가 저지른 비행을 모두 알게 됐다.

깜짝 놀란 태종은 구종수·이오방·환관들을 엄하게 처벌한 후 쫓아냈다. 이는 세자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다음은 세자 자신을 처벌하고 쫓아내겠다는 뜻이었다. 겁을 먹은 세자는 크게 반성하면서 다시는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태종은 이렇게 맹세까지 하자 마음을 풀었다.

그런데 민무휼·민무회가 자살한 후 세자가 이렇듯 9개월이나 주색잡기에 빠진 이유는 분명 자책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런 자책과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비록 잠시 반성한다고 해도 주색잡기를 완전히 끊기는 어려웠다. 결국 문제는 세자가 강력한 정치적 결단력을 기르느냐 마느냐에 있었다.

그러나 반성 후 세자는 더 깊이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달리 말하면 정치적 결단력을 키우지 못해서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단순한 주색잡기가 아니라 아예 첫사랑에 빠져버렸다. 그 대상은 어리(於里)라고 하는 여성이었다.

“한 번 봐도 미인인 것을… 빨리 내놓아라”


▎사극 <대왕세종>에서 어리 역을 맡은 오연서. 어리는 양녕대군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음을 절감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사진·중앙포토
세자가 처음으로 어리라는 여성의 이름을 알게 된 시점은 1416년 1월이었다. 그때 구종수와 함께 몰래 동궁에 드나들던 이오방이 “곽선의 첩 어리는 자색과 재예가 모두 뛰어납니다”라고 칭찬했다. 이런 칭찬으로 판단하건대 어리는 얼굴은 물론 노래와 춤에도 뛰어난 기생이었을 듯하다. 세자는 당장 어리를 데려오라 명령했다.

그때 어리는 파주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오방은 어리의 조카사위인 권보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세자가 원한다는 말에 권보는 어쩔 수 없이 중매를 섰다. 권보는 자신의 첩을 어리에게 보내서 다시 시집갈 의향이 있는지 떠봤다. 하지만 어리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며 거절했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 9월에 구종수와 이오방이 처벌되면서 어리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그해 12월, 어리는 한양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연말연시가 됐기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어리는 남편 곽선의 양자인 이승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세자는 또다시 주색잡기에 빠져든 상태였고, 주변에는 간신배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이법화라는 악공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세자가 어리를 만나려 했다가 실패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리가 한양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이법화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법화는 세자에게 어리 소식을 고한 후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지난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즉 세자가 선물을 보내 확실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세자는 비단주머니를 징표로 내줬다. 그때가 1417년 1월쯤이었다. 세자가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자 어리는 “저는 본래 병이 있고 얼굴도 예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남편이 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며 거절했다. 이쯤에서 세자가 포기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단주머니를 보낸 날 저녁, 세자는 휘하의 환관들을 거느리고 어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세자께서 납셨다”는 환관의 전갈에 주인 이승이 나타나 엎드렸다. 세자가 “빨리 어리를 내놓아라”고 윽박지르자 이승은 마지못해 어리를 내보냈다. 세자의 회고에 의하면 그때 어리는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러 그런 꼴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자는 “한 번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세자가 어리를 데려가기 위해 이승에게 말을 대령하라 하자 이승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양아버지의 첩인 어리를 보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세자의 명을 어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세자가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어리를 태우고 나는 걸어가겠다”고 협박하자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세자는 손수 어리의 옷소매를 잡고 말에 태우려고 했는데 어리는 “알아서 타겠다”고 하면서 말에 올랐다. 그 길로 세자는 어리를 데리고 광통교로 가서 동침하고 다음날 저녁에 함께 동궁으로 돌아갔다.

동궁으로 오던 그 어스름한 밤길에서 세자는 어리에게 매혹됐다. 세자는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세자가 어리를 데리고 갈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같이 모여 구경했다. 세자는 어리를 들인 일을 태종에게 숨겼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안 된 2월 15일에 들키고 말았다.

태종은 크게 분노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세자는 더 나빠져 있었다. 태종은 세자 주변의 간신배들을 엄벌에 처하고, 어리는 출궁시켰다. 아울러 “세자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태갑(太甲)을 내쫓았던 고사를 본받고자 한다”고 공포했다. ‘태갑을 내쫓았던 고사’란 중국의 은나라 때 있었던 일로서 왕이 방탕하자 신하들이 왕을 내쫓아 개과천선하게 한 뒤 다시 받아들였다는 고사다. 세자를 쫓아냈다가 개과천선 여하에 따라 다시 세자로 삼던지 하겠다는 뜻이었다.

“다시는 안 하겠다”며 ‘눈물의 반성문’까지 썼건만


▎양녕대군에 이어 세자에 오른 이는 훗날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충녕대군이었다. <대왕세종>에서 즉위식을 통해 세자위(位)에 오르는 충녕대군(김상경 분). / 사진·중앙포토
당연히 여러 신하가 반대했다. 그러자 태종은 세자를 김한로 집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장인 김한로에게 잘 배우며 반성하라는 의미였다. 세자는 자칫하다가는 정말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빠져들었다. 세자는 선생님들 앞에 꿇어 엎드려 흐느껴 울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듭거듭 맹세했다. 세자는 비록 어리에게 빠져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자 자리에도 미련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태종에게 반성문을 써서 올리는 것은 물론 종묘의 조상님들 앞에서 반성문을 낭독하기까지 했다. 조상님들 앞에서 맹세했다는 것은 다음엔 더 이상 용서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만약 한 번만 더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세자는 정말로 쫓겨날 상황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맹세를 하고 나서야 태종은 세자를 용서하고 다시 불러들였다.

그런데 김한로의 증언에 의하면 어리가 출궁당할 때 세자는 “어리의 인생이 가엾다”며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에 김한로는 ‘세자의 심정을 가련하게 여겨’ 어리를 자신의 집에 살게 했다. 이로 보면 세자는 자신이 쫓겨나게 된 상황에서도 어리를 먼저 걱정했다. 어리에 대한 첫사랑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고 정치적 결단력이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자는 1417년(태종 17) 2월 22일에 용서받고 입궁했는데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나서 어리를 몰래 입궁시켰다. 이 사실이 들통나면 세자는 정말 끝장이었다. 그럼에도 어리를 입궁시킨 세자는 그때 이미 세자 자리보다는 첫사랑 어리를 선택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궁에서 반년 정도 머물던 어리는 겨울에 해산하기 위해 다시 출궁했다. 세자는 어리가 해산하자 누나에게 유모를 물색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누나가 문안인사차 궁궐에 들어왔다가 그 사실을 태종에게 알리고 말았다.

인간적이었지만 정치적 결단력은 부족했기에…


▎관악산의 주봉(主峯)인 국사봉 북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지덕사(至德祠),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이다. / 사진·중앙포토
태종이 어리의 출산소식을 들은 때는 1418년(태종 18) 3월 초였다. 세자가 새사람이 되겠다고 조상님들 앞에서 맹세한지 1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그동안 세자는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태종을 속이고 어리를 들였을 뿐만 아니라 애까지 낳았다. 태종은 이 사실을 조말생에게 전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때 태종은 “세자가 불의해 죄를 받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 내가 진실로 부끄럽다. 우선 잘 가르쳐서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고 이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태종은 세자가 스스로 고백하거나 대오각성하기를 기다렸다.

약 두 달 정도 기다리던 1418년 5월 10일 마침내 태종은 어리를 쫓아냈다. 세자 역시 호된 질책을 받고 동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태종은 세자가 대오각성하고 사사로운 인정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했을 듯하다. 즉 후계 왕으로서의 정치적 결단력을 기대했을 듯하다.

만약 세자에게 진정 정치적 결단력이 있다면 어리와의 정을 끊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잔인한 사람이란 비난을 감당해야 하고, 스스로도 애간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 고통은 나라의 평화와 안정으로 보상될 뿐 달리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그런 것을 알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세자에게는 과연 이런 정치적 결단력이 있었을까?

세자는 어리와의 정을 끊지 못했다. 세자는 매우 인간적이었지만 정치적 결단력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감정에 복받친 세자는 출궁된 어리가 머무는 연지동으로 가서 공개적으로 만났다. 시종들이 말렸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이제 세자는 태종에게 공개적으로 저항한 셈이었고, 더 이상 세자 자리에 미련이 없음을 공포한 셈이었다. 세자는 태종에게 다음과 같은 항의 서한을 올리고 이틀 뒤에 폐세자 됐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하여 다 소중하게 생각해서 모두 받아들이십니까? (…) 한나라 고조는 산동에 거처할 때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좋아했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하지만 진나라 임금 광이라는 사람은 비록 어질다고 소문났지만 왕위에 올라서는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는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저의 첩 어리 하나를 금지하다가는 잃는 것은 많지만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5월 30일)

돌아보면 세자 양녕은 10세 때 세자가 됐다가 25세 때 폐세자 됐다. 15년을 세자로 있으면서 최고 교육을 받았지만, 간신배들과 주색잡기에 휘둘리다 폐세자 됐다.

<대학연의>에서는 주색잡기에 대한 경계로 ‘침면지계(沈湎之戒)’를 들고 있다. 술과 여자 그리고 간신배들에게 빠졌다가 나라를 망친 은나라 주왕 이야기가 ‘침면지계’이다. ‘침면지계’를 수없이 들어 알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실천하지 못해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과 나라를 파탄시키는 사람들이 고금에 즐비하니 슬픈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11호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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