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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북한 실상 카메라에 담은 루마니아 아델린 페트리쇼르 기자 

햄버거 먹던 ‘10대 소년’(김정은), 환호받자 ‘최고존엄’으로 돌변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2012년 김일성 출생 100년 기념 취재차 평양 다녀온 뒤 <평양에서의 휴일> 발간 한겨울에도 난방 잘 안 되고 먹을거리 태부족… 혁명 전의 루마니아와 흡사해 슬펐다!

▎평양 시내에서 마주친 한 가족의 모습. 해맑게 웃는 아이와 엄마의 표정은 세계 여느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다를 바 없다.
“세계 최악의 언론자유 약탈자.”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국제단체인 국경없는기자회(RSF)는 10월 3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게 이런 타이틀을 붙였다. RSF는 “북한엔 최고 지도자를 칭송하는 선전·선동하는 단 한 종류의 언론만이 존재한다”며 “북한의 정치제도는 언론의 자유로운 취재활동이 불가능한 구조”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사실이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부터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대외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 등 북한의 모든 매체는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치밀한 계획과 검열을 거친 기사만 내보낸다. 당국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엄선해 내놓기에 북한의 민낯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때론 북한 당국도 통제하지 못하는 예외적 상황은 발생한다. 북한이 필요에 따라 해외에서 기자들을 부를 때다. 북한 당국이 배정하는 안내원들이 기자별로 따라붙어 밀착 감시를 하지만 일부는 북한의 생생한 모습을 렌즈에 담는 데 성공한다.

루마니아 기자인 아델린 페트리쇼르(41)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 출생 100년을 기념해 북한 당국이 대대적으로 연 열병식(閱兵式) 취재차 평양에 다녀온 경험을 사진집 <평양에서의 휴일>(한림출판사)에 담았다. 평양을 다녀온 후기(後記)와 200여 장에 달하는 사진에 한국어·영어로 설명을 함께 붙여 최근 펴냈는데 북한 관영매체에선 볼 수 없는 콘텐트가 풍성하다.

가령 이런 사진이다. 행사 당시 평양 중심가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공식행사에서 고위 관계자가 연설을 하는 도중 졸음을 참지 못하고 하품을 크게 하고 있는 북한 군인의 모습. 북한 공식매체엔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긴 연설을 경청하는 모습만이 잡히지만 역시 북한 군인도 사람이다. 장시간 대기 후 이어지는 긴 연설엔 장사가 없는 법이고, 페트리쇼르의 카메라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라도 해당 군인이 처벌을 받을 것을 우려해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린 옆모습을 담는 세심함도 보였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2년 김일성 주석 출생 100년을 기념한 열병식에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오른쪽으로 북한 관영매체 기자들, 왼쪽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박수를 치는 모습이 보인다.
페트리쇼르의 카메라는 이어 북한이 ‘최고존엄’이라 치켜세우는 김정은 위원장의 새로운 모습도 잡아냈다.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을 참관하기 위해 주석단에 올라 손을 흔드는 모습이다. <노동신문> 1면 전면에 으레 등장하는 김정은의 존엄한 표정 대신 어린아이처럼 혀를 살짝 내밀고 좋아하는 표정이다. 그런 김정은을 향해 기립박수를 보내는 고령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고위 엘리트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다른 편으로는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칠세라 전전긍긍하는 관영매체 기자들의 모습도 한 프레임에 담았다. 북한 당국이 제공하는 선전용 프레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담고 싶은 의도가 드러나는 컷이다.

사탕 두 알 받았다며 ‘찬양가’ 부르는 여성


▎평양 주민들은 외신기자인 페트리쇼르 일행을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어린이들만은 외신 기자 일행에 대해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의 이런 용기는 후과(後果)를 낳았다. 두 차례에 걸친 e메일 인터뷰에서 페트리쇼르는 “(루마니아에서 먼저) 책을 낸 뒤, 북한 당국이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같다”고 했다. 사진집과 별도로 루마니아에서 펴낸 <단 한 사람만 뚱뚱한 나라>(The Country With Only One Fat Man)라는 책도 한몫했을 법하다. 책 제목의 인물은 물론 김정은을 가리킨다. 하지만 북한 당국과 달리 국제사회는 그의 취재기를 호평했다. 사진집에 실린 사진으로 그는 국제사진상(International Photography Awards)에서 ‘비전문 에디터 부문(Editorial Non-pro)’ 상을 받았다.

직접 본 김정은의 인상은 어땠나?

“1주일의 취재기간 동안 김정은을 여러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조각상 제막식에 참석했을 때와 김일성 출생 100주년 열병식 때다. 첫인상은 이랬다. 정크푸드와 달착지근한 간식을 좋아하는 뚱뚱하고 버릇 없는 10대 소년. 회의 석상에서 본 김정은은 산만하고 주의력이 결핍된 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열병식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군중이 그에게 환호를 보내자 돌변하더라. 표정이 싹 달라지며 생기가 돌았다.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3년) 숙부인 장성택을 숙청하면서는 또 다른 잔혹한 모습을 보여줬다.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인물이다.”

취재 과정에서 제약도 많았을 텐데.


▎한 군인이 행사 대기 중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고 있다.
“이라크부터 아프가니스탄 등 다양한 전쟁 현장을 취재했지만 북한과 같은 곳은 처음이었다. 사막에서도, 망망대해에서도 위성전화로 기사를 마음껏 송고했던 나였다. 그런데 북한에선 어딜 가나 안내원이 우리를 감시했고, 영상 촬영기자와 내가 찍는 사진을 검열하려고 했다. 일부 사진은 안내원이 삭제하기도 했다. 취재 현장은 물론 숙소에서도 인터넷과 전화를 쓸 수 없었다. 모든 게 당국에 의해 통제가 된다는 게 오싹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불쾌한 장면들을 목도했지만 최악은 북한이었다. 자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주민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나?

“우린 어딜 가나 ‘프레스’ 완장을 차고 있어야 했는데, 이 완장을 본 평양 시민들은 대부분 우리를 피했다. 그럴 만도했다. 우리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주민에겐 안내원이 이름까지 적어가더라. 안내원이 통역도 담당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통역 이상의 역할을 했더라. 루마니아로 돌아와 주민들과의 인터뷰 녹취(錄取) 내용을 일일이 따로 번역해봤다. 안내원이 주민들에게 어떻게 답을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때론 주민들이 하지도 않은 김정은 찬양 내용까지 마음대로 추가했다는 걸 알게 됐다. 어쩐지 한 여성을 인터뷰하는데 사탕 두 알을 선물 받았다는 얘기를 하고선 다짜고짜 김정은을 찬양하더라. 나라 전체가 수용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 취재 위해 6년간이나 공들여


▎행사를 기다리는 청년들. 몇몇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다.
주민들과 자유롭게 대화하지는 못했지만 페트리쇼르가 담아온 사진엔 북한 주민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묻어난다. 북한이 선전하고 싶은 이미지보다는 평범한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주로 담았다. 빨간 구두솔로 구두를 닦는 운전기사들과 이방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꼬마들, 그리고 불꽃놀이를 즐기는 붉은 볼의 젊은 남녀까지, 일반 북한 주민들의 다양한 표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사실 페트리쇼르에게 북한은 기자로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었다. 평양 취재를 허가받기 위해 6년간이나 공을 들였다. 그가 나고 자란 루마니아 역시 1989년 혁명 이전까지 공산국가였던 영향이 컸다. 혁명으로 쫓겨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절친한 사이였다. 혁명 당시 14세 소년이었던 페트리쇼르는 그래서인지 북한 주민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도 현재 북한 주민들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6년간 공을 들였다.

왜 그렇게 북한에 끌렸나?


▎평양에서 취재 중인 아델린 페트리쇼르.
“어렸을 때부터 김일성의 나라에 가보는 게 꿈이었다. 북한은 학생들에게 김일성은 비를 몰고 올 수도 있고, 새와 대화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고 들었다. 기자라면 누구나 이렇게 고립된 나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을 거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6년 동안 어떤 시도를 했나?

“우선 루마니아 주재 북한대사관을 공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사관 관리들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북한 외교관들은 대사관 안에 들어앉은 채 기자들과 만나길 꺼렸다. 처음으로 북한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난 혼자서는 그 건물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북한 외교관 한 명이 밖에 있는 인도로 먼저 나와 좌우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에게 비자 신청서를 건넸지만 몇 년 동안 연락이 없었다. 물론 계속 전화를 걸었고 팩스와 e메일을 보냈다. 아마 모두 합치면 수백 통은 될 거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페트리쇼르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루마니아 주재 북한대사로 김선경이라는 인물이 부임해온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근무했던 김선경 대사는 쾌활하고 비교적 개방적이었다고 했다. 페트리쇼르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시골 기차역 같았던 순안국제공항의 첫인상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대기 중인 평양 주민들.
김선경 대사는 어떤 사람이었나?

“북한 외교관과 면대면으로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김 대사는 달랐다. 유쾌한 사람이었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는 나를 여러 번 대사관에 초청했고, 우린 함께 시가도 피우고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그에게 북한을 방문해보고 싶다는 계획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와 김일성의 우정, 공산주의 시절의 루마니아 등에 대해 얘기했다. 조심스러운 주제였지만 민주주의 혁명이 루마니아를 어떻게 변혁시켰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김 대사의 반응은 어땠나?

“묵묵히 듣는 편이었다. 그러다 차우셰스쿠와 김일성의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그 둘을 찬양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주제를 놓고 우리 둘은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기이한 경험이었다.”

김 대사를 만난 뒤 페트리쇼르의 평양행은 순풍을 탔다. 친분을 맺고 나서 2년쯤 시간이 지났을 즈음인 2012년 봄, 페트리쇼르에게 김 대사가 희소식을 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취재 비자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페트리쇼르는 곧 평양행 고려항공에 올랐다.

실제로 본 평양의 모습은 어땠나?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평양 순안국제공항은 마치 루마니아 작은 시골마을의 기차역 같더라. 음식은 어딜 가나 부족했다. 외국인들에게는 그래도 조금 나은 모습을 보이려고 했을 텐데도 그렇다. 한 번은 호텔 식당에서 디저트를 시켰는데 안내원과 웨이터가 한참을 얘기하더니 웨이터가 한참 후에야 사과 몇 조각을 잘라서 갖고 왔다. 음식의 양도 그렇지만 질도 좋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혁명 전의 루마니아와 비교해본다면

“슬플 정도로 비슷했다. 어린 시절이긴 했지만 혁명 전의 루마니아와 관련해선 기억이 생생하다. 대부분 안 좋은 기억들이다. 한겨울에도 난방이 되지 않아 오들오들 떨었고 항상 배가 고팠으며 전기는 갑자기 끊기곤 했다. 누군가와 얘기를 해도 항상 불안했다. 그가 비밀경찰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내 조국 루마니아 역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북한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뒤 페트리쇼르는 친구라고 믿었던 김 대사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가 김정은을 염두에 두고 <단 한 사람만 뚱뚱한 나라>를 펴내고, 사진집을 통해 혀를 내밀고 있는 김정은의 사진을 공개한 뒤부터다.

“북한 체제 바뀌면 다시 한번 가고 싶어”


▎북한에서는 행사에 어린아이들이 동원되는 경우가 흔하다. 초등학생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줄을 지어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선경 대사는 더 이상 페트리쇼르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e메일에 답장하지도 않았다. 대신 페트리쇼르가 “북한대사관의 사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한 사회주의단체가 그가 근무하는 루마니아공영방송국 사장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페트리쇼르는 “문법도 엉망인데다 북한은 부유한 나라이며 인민은 행복하고 만족감에 넘친다는 내용이었다”고 회고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당분간 페트리쇼르가 평양행 고려항공을 탈 일은 없을 거라는 점이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북한에 다시 갈 것이다. 아마 북한이라는 체제가 바뀔 때가 아닐까. 주민의 자유를 빼앗고 나라 전체가 수용소가 된 체제의 민낯은 그때서야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날, 나도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할 것이다.”

-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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