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8)] 안중근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만주(1) 

“일본 침략군은 무고한 백성 2600명을 참살했다” 

글·사진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작가
우리 역사에서 영토 바깥 중 가장 중요한 지역… 청산리대첩 김좌진, 민족시인 윤동주의 숨결 간직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뤼순감옥으로 끌려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 관광객이 안중근이 처형된 곳(교형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만주의 독립운동의 흔적을 처음 목도한 것은 2008년 1월, 하얼빈의 빙등제를 구경하러 간 ‘나홀로 배낭여행’에서였다. 하얼빈 시내의 조선민족예술관을 찾아갔는데 1층이 바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었던 것이다.

안중근을 좀 더 ‘직설적으로’ 대면한 것은 2013년 6월 하얼빈역의 바로 그 1번 플랫폼에서였다. 이리저리 탐문해서 그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열차표 한 장씩을 사고 나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점에는 삼각형 표지가, 그로부터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피격 지점에는 사각형 표지가 그려져 있었다.


총알이 날아간 것은 눈깜짝할 사이였다. 역사의 그 순간, 거리로는 7m였다. 총을 쏘고 사형을 당한 자와 총에 맞아 절명한 자, 강점의 분노와 제국의 오만함이 7m로 좁혀진 순간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의 일이다.

그 이듬해 1월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 붙어 있는 사무실 하나가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개관됐다. 한·중 외교의 밀월기였다. 이 기념관은 2017년 초 하얼빈역 개축 공사가 시작되면서 예전의 조선민족예술관으로 다시 옮겨갔다. 마침 사드(THAAD)배치 문제가 불거진 탓에 보복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2017년 5월 말 다시 하얼빈을 찾았을 때 하얼빈 역사가 통째로 철거되고 있었으니 보복이랄 건 아니다.

2016년 8월 지인들과 함께 만주의 독립운동 답사여행에 나섰다. 다롄(大连)의 뤼순(旅顺)감옥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뤼순감옥은 바로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된 곳이다. 지금은 뤼순 일러감옥 유지(旅顺日俄监狱遗址)로 남아 있다. 감옥의 중앙에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 뇌방(牢房)’도 있다.

안중근은 하얼빈 현장에서 체포됐고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이곳으로 끌려왔다. 바로 이 감옥에서 심문과 재판을 거쳐, 교형장(絞刑場)에서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목에 흰 색 바위로 세운 표지가 하나 있었다.

“사형판결을 받은 항일지사는 손과 발을 결박당한 채 간수에 압송돼 이 길을 걸어 사형장으로 갔다.”

안중근의 죽음도 같았을 것이다. 안중근의 독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형장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목에 걸리는 줄이 천장에서 아래로 늘어져 있다. 이 줄이 목에 걸린 다음에는 바닥판이 밑으로 덜컥 꺼지고, 사형수는 허공에 매달린다.

뤼순감옥의 묘지는 감옥 뒤에 있는 둥산포(東山坡)라고 하는 야산이었다. 교통호처럼 미리 파인 곳에 일렬로 놓고는 그대로 흙을 덮어 매장했다. 아직도 안중근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형수들은 나무통에 담긴 채 매장했으나, 안중근은 관에 넣어 매장했다고 하는데 아직도 관에 담긴 시신은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뤼순감옥을 둘러보고는 그 다음날 일찍 출발해 선양(沈阳)을 거쳐 동쪽으로 150여㎞를 달려 신빈현 중심으로 들어섰다. 신빈현 정부 바로 뒤에 싱징공원(兴京公园)이 있다. 공원 옆 야산에 ‘항일영렬기념비’가 있다. 싱징현 중심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1920년대 후반 항일투쟁 동력 두 갈래로 살아나


▎안중근 의사에게 교형(絞刑)을 집행하던 각종 도구들.
이 기념비 뒤로 두 사람의 흉상이 멋지게 세워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조선인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다. 스물다섯이란 짧은 생을 살았으나 이국 땅에 그의 흉상이 이렇게 멋지게 세워져 있다.

만주는 고대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체 역사에서 현재의 영토 바깥에서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조선 말기 1860년대 중반부터 가렴주구와 기근에 고향을 등진 백성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면서 조선인 이민사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00년대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실패하면서 조선인들의 망명지가 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는 생존자립과 함께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만주에서도 1919년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항일 무장투쟁이 점화됐다. 1920년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청일전쟁 이후 불패를 자랑하던 일본 정규군을 격파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후폭풍은 엄청났다. 일본군은 1920년 10월부터 다음해 봄까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독립군을 추격하는 한편 간도의 조선인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경신참변이다. 2600~3700명이 살해됐고 수많은 마을이 초토화됐다.

이렇게 가라앉은 만주에서의 항일투쟁 동력은 1920년대 후반이 돼서야 두 갈래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1929년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통합운동이었다. 3부 통합운동의 결과 민족주의 계열의 국민부와 신민부로 재편됐다. 또한 갈래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었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부터 만주총국을 두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1929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1930년부터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한중 연합 성격의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국민부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리에 따라 당-정-군의 구조를 갖췄다. 조선혁명당을 지도정당으로 해 자치단체로 국민부를, 무장대오로 조선혁명군을 뒀다. 조선혁명군은 1929년 12월 조직됐다. 양세봉은 창설 당시 부사령이었고 얼마 후에 총사령이 됐다. 만주에서는 유명한 항일 명장이다.

조선혁명군은 1932년부터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등이 바로 조선혁명군의 전적이다. 그러나 1934년 총사령 양세봉이 피살된 이후에 점차 기울다가 1936년에는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토벌에 밀려 크게 위축됐고, 1938년 잔여 병력이 중국 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면서 소멸됐다.

신민부도 한국독립당을 세우고 1931년 10월 지청천을 수장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을 조직했다. 한국독립군도 1933년 대전자령 전투의 승리 등을 기록했으나 1933년 10월 지청천 등의 지도부가 만주를 떠나 중화민국 관내로 이동하고 잔여 병력은 중국 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에 합류하면서 소멸됐다.

中 공산당의 항일유격대 기초 닦은 이홍광


▎‘남과 북 모두의 총사령’으로 불린 양세봉의 석상.
사회주의 계열은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다. 조선인들은 식민지 백성이란 민족모순 위에 ‘잘해야 소농, 대부분 소작농’이라는 계급 모순이 중첩된 신세라 중국인들보다 일찍 사회주의 운동에 기울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 안에서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괴뢰 만주국을 세우자 만주 각지에서 항일운동이 생겨났다. 중국 공산당 역시 유격대 투쟁을 시작했다. 1931년부터 곳곳에서 결성된 중국 공산당의 유격대들은 1933년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합됐다.

중국 공산당은 1936년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면서 조선·몽골 등 소수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지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1940년 가을과 겨울 소련으로 넘어갈 때까지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상이 1930년대 만주 무장투쟁의 개요다.

신빈현 싱징공원에서 멋진 흉상으로 만난 이홍광이 중국 공산당 휘하의 지방 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합 발전하는 시기의 핵심인물이었다.

이홍광은 남만주에서 193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의 항일유격대의 기초를 닦았다. 1935년 초 국내 진입작전도 전개해 우리 민족에도 커다란 희망과 각성을 안겨줬다. 일제 패망 이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다수의 조선인이 공산당 측에 가담해 국민당과 싸웠는데, 이때 활약한 조선의용군의 한 부대를 이홍광 지대로 명명할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스물다섯에 절명했음이 안타깝고, 스물다섯을 살았음에도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 게 놀랍다.

싱징공원에서 내려와 동쪽으로 20여㎞를 더 가면 신빈현 왕칭먼진(旺清门镇)이다. 이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우회전해서 6㎞ 정도 내려가면 오른쪽 야산에 ‘양서봉(梁瑞鳳) 기념비’가 있다. 양세봉이란 이름도 사용했다. 중국의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곳을 찾아가는 차 안에서 내가 책 한 권을 꺼내 동반자들에게 보여줬다. <남과 북 모두의 총사령 양세봉>이란 제목이었다. 본문은 ‘남과 북 국립묘지 모두 모신 한 사람’이란 말로 시작했다.

양서봉 동상을 둘러보는데 우리보다 먼저 올라왔던 예닐곱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면서 말을 붙여왔다. 굵직하고 힘이 실린 목소리에는 양서봉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 석상은 원래 조선족 소학교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소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우리 동포들이 돈을 모아 땅을 사서 옮긴 것이지요. 이 양반 대단한 장군이었지요. 아 글쎄, 김일성이도 양 장군 꼬붕(일본어로 부하라는 의미)이었지요. 그래서 해방 후에 김일성이가 양 장군 가족을 모두 모셔갔더란 말입니다.”

이들은 선양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문을 닫게 된 그 소학교의 교장이었단다. 남과 북의 총사령, 양서봉은 평양의 애국열사능에 묻혀 있다. 서울의 국립현충원에는 양세봉이란 이름으로 그의 허묘(墟墓)가 있다. 현지 동포가 “김일성도 꼬붕이었다”던 양서봉(1896~1934, 양세봉은 이명). 20대의 김일성이 초급 간부로서 양서봉이 속한 부대에 소속된 적이 있었다.

다음날 지린시에서 의열단 창단지 등을 찾아보고는 옌볜(延边) 조선족자치주의 행정중심인 옌지시(延吉市)로 갔다. 옌볜(延边)은 두만강 건너의, 우리 땅이 아닌 우리 땅이다. 강만 건너면 되는 조상의 땅이 분명하다.

그러나 혈통과 문화라는 넓은 역사를 정치군사적 분할이라는 좁은 역사가 땅에 금을 긋고 갈라놓았다. 남의 땅, 그것도 허락 없이 들어가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금단의 땅이 된 것이다. 그곳의 강력한 지배자들에게는 자기 조상만의 땅이었거나 언젠가 되돌아갈 수도 있는 자기들만의 땅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대륙 한복판으로 나가고 이 땅에는 봉금을 선포했다.

청산리대첩, ‘일군(日軍) 무적’의 신화를 깨뜨리고


▎김좌진 장군의 장손녀인 김을동 씨가 장군의 초상화와 유물인 은수저 한벌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1800년대 초부터 시작해서 특히 1860년대 중반에는 다수의 조선 민초가 가렴주구와 기근을 피해 넘어갔다. 청조는 19세기 들어서면서 급격히 노쇠해지고 러시아가 북에서 압박해오자 이민실변(移民實邊)의 일환으로 1881년 조선인들에 대한 봉금을 해제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망명과 도피뿐 아니라 대륙 침략에 따른 반강제적 이주까지 더해졌다. 이주의 세월이 길어지면서 뿌리가 깊어지고 일제가 패망했어도 쉽게 귀국하지 못하는 동포도 많았다. 지금은 인구 217만(2010년 기준) 가운데 82만(37.7%)이 우리 동포인 옌볜, 정식명칭으로는 옌지시(延吉市)를 행정중심으로 하는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다.


▎일본 유학 시절 윤동주(윗줄 오른쪽)와 송몽규(아랫줄 가운데). / 사진제공·윤동주기념사업회
2016년 8월 뜨거운 여름, 옌지에 도착한 다음날 백두산 방향으로 가서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를 먼저 보기로 했다. 옌지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룽징(龙井)과 허룽(和龙)을 거쳐 90여㎞를 가는 길이다. 허룽시 임업국이 운영하는 청산임장(靑山林場) 바로 안에 기념비가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대첩비 앞에 섰다. 고개를 바짝 치켜들어야 탑의 꼭대기가 보였다. 어른 키의 다섯 배는 족히 되는 것 같다. 탑 뒤의 옹벽에 비명이 새겨져 있다.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대소 수차 격전을 거쳐 천으로 헤아리는 일본침략군을 섬멸하였거늘 (…) 청산리대첩은 ‘일군 무적’의 신화를 깨뜨리고(…) 그 실패를 달가워 않은 일본 침략군은 연변지역 무고한 백성에 대하여 선후로 2600명을 참살한 경신년 대학살(…) 경신년 대참안중 조난당하신 동포 원혼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청산리 전역 중 피 흘려 분전하신 항일 영렬들이여, 영생불멸하라! _ 연변 각 민족 인민 삼가 드림 2001년 8월 31일 준공


이 기념비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는 명칭 그대로 청산리 전투의 승전을 스스로 축하하고 기념한 것이다. 그런데 비문 말미에는 청산리대첩의 전사들보다 후폭풍으로 참살당한 2600여 명의 민간인을 먼저 달래주고 있지 않은가. 작은 것이지만 크게 보이는 대목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족과 여성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당시는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으니 독립운동이란 남자들의 일이었다. 어떤 경우든 항일을 다짐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 가정을 버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족들의 생계는 물론 부모 봉양과 자식 양육의 모든 짐은 부인이 떠맡았다.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없는 자식들이 뭘 먹고 어떻게 공부를 했겠는가. 그러니 독립운동가라는 명예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가족에게도 함께 주어져야 옳다. 최근 정부에서 보훈행사에 가족을 배려하는 사례가 종종 보인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말로 흐뭇한 풍경이 아닌가.

승리를 기록하되 패배도 감추지 않아야 한다. 승패의 앞뒤에서 희생된 수많은 가족과 백성도 함께 기록해야 한다. 독립운동사의 이면은 친일매국사이고, 독립운동사의 내면은 작게는 가족들의 희생사이고 크게는 백성들의 수난사다. 청산리대첩에 이와 같이 백성들의 희생을 먼저 위무하는 문구 하나가 내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청산리대첩 기념비에서 묘한 어색함이 눈에 뜨였다. 승전 기념비는 당연히 누가 누구와 싸워서 얼마나 많이 살상했고 얼마나 많이 노획했고, 그로 인해 어떤 승전의 효과를 거뒀는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일종의 자랑이다. 그런데 “천으로 헤아리는 일본군을 섬멸하였다”고만 돼 있다.

청산리대첩 기념비를 찾아본 다음날 투먼 근처에 있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의 기념비를 살폈다. 기념비의 오른쪽 날개에는 “격전에서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했고 10명을 부상 입혔으며 보총(개인화기) 60여 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노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왜 청산리대첩 기념비에는 두루뭉술하게 ‘천으로’라는 말로 애매모호하게 썼고, 경신참변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2600명이란 구체적인 숫자를 밝힌 것일까. 헤이룽장성 하이린시(海林市) 중심에 있는 한중우의공원 안에는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에도 청산리의 전적에 대해서는 ‘큰 승리’라고만 돼 있지 전투에서 살상한 일본군 수는 없었다.

죽어서도 함께하는 윤동주와 송몽규


▎1. 죽어서도 윤동주와 함께하고 있는 송몽규의 묘. 2. 민족시인 윤동주의 묘.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된다.
하이린시 외곽에는 김좌진이 운영하던 금성정미소(海林市 山市镇 道南村 文明路 11-1)도 독립운동 유적지로 조성돼 있다. 정미소 마당에 김좌진의 흉상이 있는데 그곳 설명에는 ‘일본군 3300여 명 섬멸’이라고 돼 있다. 금성정미소는 배우 김을동 씨가 회장으로 돼 있는 김좌진기념사업회가 주도해서 만든 것이다.

국내에서 돌아와서도 몇 가지 자료를 더 찾아봤다. 크게 승리한 것에는 이론이 없지만, 구체적인 전적은 불분명하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기회가 되는대로 질문했다. 다수의 공통된 답은 ‘지나친 과장’이란 것이었다.

김좌진의 측근이었고 해방 후에 대한민국 국무총리까지 지낸 이범석이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공적을 너무 과장했고, 홍범도는 청산리전투에 참여조차 않았다고 배제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봉오동전투 기념비를 보고 온 그날 저녁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조선족 동포 한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 따르면 청산리대첩 기념비를 세울 때 한국과 중국이 주장하는 수에 워낙 차이가 커서 꽤나 심각한 논쟁 끝에 아예 수를 적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옌볜의 룽징(龙井)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는 인물은 윤동주다. 룽징중학교 에 있는 윤동주 시비와 흉상, 밍둥촌(明东村)의 생가 그리고 룽징 외곽의 묘까지.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라 더 많은 사람이 찾는 것 같다. 윤동주는 지금의 룽징시 동남쪽 15㎞ 정도에 있는 밍둥촌에서 태어났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지금은 룽징시 외곽의 공묘에 묻혀 있다.

‘서시’ ‘나그네’ ‘소낙비’…. 윤동주는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이 없기를”이라고 시작했다. 그는 이 한 구절만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부끄러움으로 적셔놓았다. 그는 그 시대가 부끄러운 시대였고 부끄러움 때문에 밤마다 고뇌했으며, 부끄러움에 가위 눌리지 않으려면 목숨을 던져야 했음을 저항의 언어에 진한 감성을 실어 노래했다.

그 시에 감동한 사람들은 윤동주 시대의 부끄러움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부끄러움을 끊임없이 고뇌해야 했다. 윤동주의 시는 시대를 넘어 인간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그 시대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시로 오늘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리 마음속에 윤동주는 저항시인으로 새겨져 있지만, 윤동주의 작품 대부분은 동시를 포함한 서정시다. 사실 독립운동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윤동주보다는 그의 옆에 있었던 송몽규에게 눈길을 줘야 한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송몽규의 어머니 윤신영이 남매지간이다. 둘은 같은 집에서 같은 해에 태어났고,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온 형제이자 친구였다. 소학교 중학교도 같이 다녔고, 서울 연희전문학교 유학은 물론 일본 유학도 같이 갔다. 죽음에 이른 사건에도 함께 걸려들었고 같은 감옥에서 같은 해에 20여 일 차이로 세상을 떴다. 죽어서야 눕게 되는 ‘망자의 집’ 역시 송몽규와 윤동주는 10여 m 거리를 두고 있다.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을 만나다


▎낙연공원에 세워진 ‘중국의 피카소’로 불린 한락연의 흉상.
송몽규는 1917년 밍둥촌에서 망명 2세로 태어났다. 1932년 4월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했는데 이때의 동학들 가운데 윤동주 외에 나운규, 문익환도 있었다. 송몽규는 은진중학 재학 시절인 1935년 4월 중국 난징으로 가서 김구가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개설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의 한인특별반에 2기생으로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관학교 수료 후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1936년 3월 산둥성 지난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본적지인 함경북도 웅기로 강제 송환됐다. 그해 8월까지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석방됐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쪽이었다면 송몽규는 총을 드는 쪽이었다.

1937년 4월 룽징의 대성중학(大成中學)에 편입한 뒤 1938년 4월 윤동주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했다.

함께 유학을 떠난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으로 옮겼다. 송몽규는 교토에서 윤동주·고희욱 등과 자주 모임을 가졌는데 1943년 7월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송몽규는 1944년 4월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함께 수감됐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고, 송몽규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199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됐다.

첫 번째 룽징 답사에서 가보지 못했던 곳을 두 번째 답사 때 찾아갔다. 바로 룽징 시내에 있는 낙연공원이다. 룽징 태생의 한락연(韩乐然)이란 인물을 기려서 만든 천변의 작은 공원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한락연의 흉상이 있다. 동그란 안경테 속에 웃고 있는 그의 눈이 참 부드럽다. 흉상 뒤로는 3층 누각 낙연정이 깔끔하게 세워져 있다.

한락연은 1930년대 이후 ‘중국의 피카소’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조선인 화가다. 조선인 사회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첫 번째 조선인 당원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한락연을 처음 만난 것은 베이징의 중국미술관도 옌볜의 룽징도 아닌, 신중국 영토의 서쪽 끝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쿠처에 있는 키질석굴이었다.

2015년 11월의 일이었다. 키질석굴의 승방굴 하나에 누군가의 초상화와 그의 작품(조악한 복사물이지만)들이 석굴 벽에 걸려 있는 것이다. 한락연이란 이름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자화상도 있었다. 이지적이고도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한락연이란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서역이란 곳이 21세기인 지금도 한국인 여행객조차 몇 명이 되지 않은데 관리가 엄격한 석굴 안에 개인을 위한 전시실이라니!

2017년 6월 초순 어느 날 옌볜에서 그를 기념하는 낙연공원을 찾아갔다. 저녁 식사 후에 지도를 참고해 숙소에서 나와 걸어갔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지나가던 중년 부부에게 낙연공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30m 정도 더 걸어가니 낙연공원이란 커다란 표지석이 있지 않은가. 같은 동네에 살아도 공원 이름을 모르고, 나 역시도 한락연을 모르고 있었으니….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201709호 (2017.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