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33)] 왜군의 전라도 진출 차단한 경상도 의병대장 송암(松菴) 김면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임란 당시 병약한 몸으로 의병 일으켜 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과 함께해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지만 스승 남명 출사관(出仕觀) 좇아 벼슬 고사


▎도암서원 묵일당에서 송암 선생 현창 사업을 협의 중인 고령김씨 대종회 관계자들. 오른쪽부터 김용인 대종회장, 김태호 명예회장, 김영길 사무처장.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적 20만 명이 부산포에 상륙해 한양으로 북상을 감행한다. 진지는 무너지고 관군은 달아나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적은 파죽지세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임진왜란이다. 전쟁이 일어난 지 20일도 안 돼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한다. 나라의 존망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경북 고령 지역 한 선비가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한다.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4월 22일 그는 붓을 던지고 일어나 장정을 규합한다. 송암(松菴) 김면(金沔, 1541∼1593) 의병장이다.

지난 10월 18일 그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근거한 기록은 대구한의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낸 [의병도대장 송암선생실록(義兵都大將 松菴先生實錄)]이다. 40년 전인 1978년 고령문화원이 고령유도회와 문중의 협조를 받아 펴낸 책이다. 그곳에 송암 선생의 상세 연보가 실려 있다. 1592년 송암 52세 때다.

“(4월) 15일. 달밤에 유일헌에 올라 놀다가 갑자기 왜변(倭變)이 일어났음을 들었다…. 16일. 조카 홍원을 향청에 보내고 아우 회를 연강(沿江)에 보내 정세를 탐문케 하고 곧 전서(傳書)를 동강(東岡, 김우옹)·한강(寒岡, 정구)에게 보내다…. 회답이 오다. 적변(賊變)이 치열하니 국운이 어찌 될까. 피차 걱정인데 형의 선처를 바람…. 19일. 드디어 향리에서 의병을 모으니 촌락이 텅 비어 소집이 어려웠다….”

전쟁의 급박함과 창의(倡義)의 어려움이 느껴진다. 송암은 거의(擧義)한다. 시작은 미미했다. “22일. 즉각 집안 종을 불러 모았다. 창이나 작지를 들고 나선 장정이 79명이요, 조카들도 15명이라.”

송암의 의병 활동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김호동 연구원은 ‘송암 김면의 임란전적지’라는 글에서 “[송암실기] [모계일기(茅谿日記)] 등의 기록이 다른 것은 후대에 고쳐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낙동강 물속 깊이 말뚝을 박다


흔적을 찾아 김면이 태어난 고령으로 갔다. 그의 본관도 고령이다. 고향 전적지가 우선 궁금했다. 배가 드나들던 낙동강 개경포(開經浦)를 찾았다. 고령김씨대종회 김영길(56) 사무처장이 길을 안내하고 송암을 배향한 도암서원(道巖書院) 오원수(85) 운영위원장이 동행했다.

개진면 개경포에 닿았다. 강폭이 널찍한 낙동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가 들어선 덕분인지 강물은 넉넉했다. 개경포는 낙동강 뱃길로 운반한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기기 위해 정박하는 나루였다. 그 내력을 담아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대장경 경판을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인 채 한 장씩 이운하는 돌조각이 있었다. 그곳에서 고령지역 의병을 연구하는 이동훈(67)씨를 조우했다. 이씨는 “김면 의병장은 고령보다 거창·김산(김천)·지례 등지에서 더 큰 전과를 올렸다”며 “왜적이 호남 곡창지대로 진출하는 길목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도암서원 사당에 모셔진 송암 김면 선생의 위패.
송암은 창의 뒤 6월 9일 개산포(開山浦)에서 첫 전과를 올린다. 개경포·개산포·개령 등은 같은 지역의 다른 이름이다. 김호동 연구원은 개산포전투를 이렇게 정리했다.

“왜적 모오리(毛利輝元)는 경북 지역을 장악한 뒤 개령현에 주둔한다. 5월 19일 그는 부장 무라카마(村上景親)에게 고령 성산 무계리를 지키게 한다. 낙동강 연안을 확보해 수운을 엄호할 목적이다. 김면은 6월 9일과 10일 개산포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인다.”

개산포는 송암의 집 개진면 양전리에서 낙동강 방향으로 6∼7㎞ 떨어져 있다. 인근에 산성 두 곳이 있다. 우곡면 도진리에는 낙동강과 접하는 급경사 봉우리에 대장산성이 있다. 김면 부대가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성산면 무계리에는 산 정상을 따라 길게 무계산성이 있다. 낙동강의 수로와 인근 육로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다. 김면은 당시 병력을 대장산성과 무계산성에 집결시켜 수차례 접전을 벌인다.


▎도암서원 왼쪽 능선으로 옮겨진 김면의 묘소.
전술이 다양하다. 송암은 왜적 침략에 대비해 개산포 지리에 밝은 박정완에게 낙동강 물속 깊이 많은 말뚝을 박게 했다. 또 문위 등에겐 화공에 필요한 화구와 돌을 준비시키고, 곽준에게는 강변에 복병을 배치해 육지로 올라오는 왜병을 공격하도록 했다. 다른 주장도 있다. 6월 9일 오전 8시쯤 왜군 선단이 현풍에서 낙동강 하류로 내려왔다. 강변에 매복해 있던 아군은 왜선을 급습, 왜군 80여 명(실록은 800여 명)을 사살한다. 배에 타고 있던 왜군은 두세 명이 남고 모두 사망했다. 김면 부대는 다시 적선 1척을 포획하는데 거기엔 보화가 가득했다. 그중에는 세조의 이름이 적힌 금지장자(金紙障子)도 있었다. 그는 전리품을 초유사(招諭使)에 보내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머무는 곳)로 전송할 것을 요청했다. 김면 부대는 낙동강을 운행하는 왜적에 일대 타격을 가한 것이다.

이동훈 연구자는 개경포 기념공원에서 아스라이 보이는 낙동강변 개호정(開湖亭)과 개산포 전적지를 가리켰다. 왼쪽으로 낙동강을 굽어보며 이동했다. 낙동강과 개진면 소재지 사이로 난 제방 끝에 개호정이 있었다. 자동차는 그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개산포전투 전적지가 900m 떨어져 있다는 팻말이 보였다. 가파른 산 아래 강물이 넘실대는 요새지다. 송암과 의병의 숨결이 서린 곳이다.

그 무렵 왜적은 성주 등지에 주둔하며 낙동강을 이용해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전라도 진출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김면은 개산포전투를 통해 낙동강 오른쪽 경상우도를 지키면서 전라도로 침공하려던 왜군의 작전 계획을 좌절시킨 것이다.

그는 이후 전라도로 가는 길목 거창으로 옮겨 병력을 모은다. 인품 덕분일까. 김면 의병장은 수일 만에 장정 2000여 명을 모아 대부대를 구성한다.

왜군은 전라도 진출이 어려워지자 김천 지례로 후퇴해 그곳의 사창(社倉, 곡물 대여기관)과 객사, 그리고 관아를 점거했다. 김면은 8월 1일 이번에는 사창 일대를 포위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는 화공을 펼친다. 김면 부대가 매복 위주에서 대규모 공격으로 전환한 전투였다.

8개월 동안 30여 차례 전투 참가 후 순국


▎개산포 전투지에 세워진 개호정.
그는 지례를 수복한 뒤 정인홍과 함께 성주성의 왜군을 공격한다. 왜적은 성문을 좀체 열지 않았다. 실패를 거듭한다. 12월 아군이 다시 성곽을 포위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펼친다. 왜군이 마침내 성문을 열고 성 밖으로 나왔다. 적장이 중상을 입는다. 왜군은 그날 200여 명 사상자를 낸 뒤 성 안으로 도망가 한 달을 버티다가 1월 중순 성문을 열고 도주했다. 5개월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성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이어 9월 중순에는 지례 사랑암에 주둔해 있던 왜군을 진주목사 김시민과 합세해 섬멸한다.

김면은 이렇게 1592년 6월부터 이듬해 3월 순국할 때까지 8개월 동안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다. 역사에 남을 전투도 무계·지례·성주성 등 6차례나 된다. 그가 의병장 시절 남긴 시에는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안타까움이 배여 있다.

나라가 파괴되고 집안이 망하니 오랑캐 원수 갚기 바빠서(國破家亡虜報忙)/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세 번이나 왔네(領軍三度到新倉)/ 도적 무리보다 우리 병사가 적다고 하지 마라(莫言賊衆吾兵少)/ 고향을 그리는 백성의 마음을 어찌 감히 잊으랴(思漢民心不敢忘)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런 중에도 조선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경상우도의 의병은 특히 향리를 지키던 선비들인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주도했다. 의병을 조직하는데 필요한 재력과 지역민의 지지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에서 두드러진 전과를 올린 의병장은 정인홍(1536∼1623)과 김면, 곽재우(1552∼1617) 등 3명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남명 조식의 제자로, 연합전선 등 서로 협조하며 왜적을 물리친다.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다. 김면의 의병 활동도 규모나 전과 면에서 그에 못지않았다. [선조실록]에는 “김면이 거느린 의병이 강성해 5000명”이라 기록돼 있을 정도다.

김면은 승전을 거듭한다. 조정은 김면에게 공로로 마침내 벼슬을 내린다. 1592년 6월 선조는 김면을 합천군수로 임명하고 9월에는 첨지중추부사로 승진시킨다. 이어 11월 선조 임금은 “…마땅히 한 사람의 사령을 가려 온 도내 의병을 통솔케 해야 하므로 너를 경상도의병대장(慶尙道義兵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김면이 경상도 의병 조직의 총대장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김면의 활약은 곽재우와 정인홍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이번에 김면 취재를 나선 까닭이기도 하다. 차이점 중 하나는 곽재우와 정인홍은 전란 이후까지 생존했지만 김면은 안타깝게도 전란 중에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현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김용인(71) 고령김씨대종회장은 “후손들이 못나 조상을 제대로 현창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한다.

김면의 최후는 이순신을 떠올리게 한다. 1593년 3월 김면은 김산으로 이동해 강성해진 선산의 왜군을 무찌를 작전을 세운다. 그 무렵 그는 과로가 계속돼 발열이 심해졌다. 급기야 11일 새벽 송암은 진중에서 세상을 떠난다. 오 위원장은 “송암은 눈을 감으면서도 (의병들에게) ‘내가 죽거든 군중(軍衆)과 좌우에 알리지 말고 가만히 신창(新倉)으로 옮겨 발상하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말했다.

“공물을 사사로이 내 조상에 바쳐서야”


▎묘소 아래 서 있는 김면 신도비.
경상감사 김성일은 장계를 올려 “김면은 본래 병이 잦아 산림에서 치유했는데 왜란이 일어나자 분기를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다…”고 추모했다. 선조는 김면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한다. 1666년(현종 7) 사림은 뜻을 모아 고령 현북에 도암사(道巖祠)를 세웠다. 1698년(숙종 24) 도암서원이 됐다. 지금은 고령 지역 20여 문중이 서원 운영위원회를 조직해 송암을 기리고 있다.

일행은 개산포 답사에 앞서 도암서원에 들렀다. 오원수 운영위원장이 서원을 안내했다. 송암과 동문수학한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후손인 인연이다. 먼저 서원 맨 위쪽 300년 배롱나무가 지키는 사당으로 올라갔다. 손을 씻은 뒤 참배했다. 위패에는 ‘松菴金先生(송암김선생)’으로 씌여 있었다. 서원 왼쪽 능선에는 송암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었다. 문중과 서원은 젊은 세대를 위해 장차 한글 신도비를 세우고, 교지 등 자료를 확보해 전시관을 증축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김면은 1541년(중종 36) 고령에서 김세문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면은 일곱 살에 [소학(小學)]을 배우고 여덟 살에 [대학(大學)]을 공부했다. 열 살이 되던 1550년 현풍으로 배신(裵紳)을 찾아가 학문을 배운다. 배신은 당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두루 학문을 익힌 선비였다. 김면도 스승의 영향을 받아 1560년 20세에 퇴계를 찾아 성리학 연구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김면은 23세엔 남명을 찾아 가르침을 받는다. 이듬해 남명이 자신의 집을 들르자 손수 쓴 [율례지(律禮誌)] 2권을 보이고 수정을 받는다. 28세엔 재실을 지어 남명에게 부탁하자 그 이름을 송암(松菴)으로 붙여 김면은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의병 이끌며 가족도 만나지 않아


▎송암 김면을 배향하고 있는 도암서원 전경.
1571년(선조 4) 31세 김면은 효성 있고 청렴하다며 능참봉에 제수되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다. 6년 뒤 그는 다시 학문이 높은 사람으로 천거돼 공조좌랑에 임명됐으나 어머니 병환이 깊다는 이유로 또 사양했다. 1589년에는 기축옥사에 연루됐으나 곧 혐의가 풀린다. 김면은 51세에 다시 공조좌랑에 임명된다. 그는 조정에 나아가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이번에도 벼슬은 사양했다. 송암은 이렇게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지만 스승 남명의 출사관(出仕觀)을 이어 받아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남명은 출세를 위한 학문을 포기하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 것이 소신이었다.

김면은 생전에 청렴결백했다. 일화가 전한다. 의병을 이끌 때다. 한번은 가족이 가까운 곳에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만나지 않았다. 선영을 지날 때는 주변에서 제물을 준비했다. 그러자 송암은 “주상께서도 능침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데 어찌 내가 감히 공적으로 받아 사사로이 내 조상에 바칠 수 있겠는가”라며 물리쳤다. 대신 글을 지어 무덤에 올린다.

도암서원 앞에는 김면 의병장의 어록 여덟 글자가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只知有國 不知有身(지지유국 부지유신,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이다. 원로 사학자 강만길 박사는 [송암유고]를 해설하면서 “의병장으로서 그는 약속을 엄수하고 무기 정비와 적정(敵情) 탐사에 철저했으며 충성심이 강했다”고 평했다.

김면은 평화로울 때는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학문을 연마한 선비였다. 전쟁이 났을 때는 유약하지 않았다. 왜적이 이 땅을 짓밟자 병약한 몸으로 분연히 일어나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붓 대신 칼을 차고 진중에서 최후를 마친 그의 충의는 시대가 흘러도 진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박스기사] 덕망·문필로 존경받는 낙강칠현(洛江七賢) - 임진왜란 발발 전 김면 등 지역 명사가 한 자리에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낙강칠현시비’.
경북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 봉화산 자락. 사망정(四望亭) 아래로 낙동강이 흐른다. 가슴이 탁 트이는 풍광이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고령교를 건너면 바로 대구광역시다. 사망정 앞에는 2003년 건립된 ‘낙강칠현시비(洛江七賢詩碑)’가 있다. 내력이 새겨져 있다.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두에 걸쳐 (낙동강) 중류 유역에 홍유석사(鴻儒碩士)가 배출돼 세상에 명성을 떨치고 길이 아름다운 향기를 남겼으니 세칭 낙강칠현이 대표적인 분들이다….”

그 칠현을 출생지역과 연령순으로 보면 고령의 육일헌 이홍량, 모재 이홍우, 송암 김면, 옥산 이기춘 등 4명이고 성주의 한강 정구 그리고 현풍의 대암 박성, 인동의 청휘당 이승 등 모두 7명이다. 김면 의병장이 바로 여기에 들어간다.

성균관대 이우성 명예교수는 시비에 이들 시 7편이 지어진 내력을 적었다. 때는 1589년 5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 전이다. 이들 7명이 개산포에서 강정 멍드미 사망정에 이르는 강 위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만경창파욕모천(萬頃滄波欲暮天)’이라는 시구 7자로 운(韻)을 나눠 각각 5언 또는 7언 절구로 시 한 수를 읊으며 그날의 흥취와 정황을 노래했다.

이 시 7편은 당시는 물론이고 뒷날까지 회자됐다. 그것은 시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시를 지은 7명 모두 덕망과 문필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송암은 의병을 일으켰고 한강은 도학으로 나아가 퇴계 이황을 이어 유현(儒賢)의 반열에 올랐다.

송암은 그날 ‘욕(欲)’자 운을 받았다. 그가 지은 시는 이렇다. ‘강호에 어진 벗님 다행히 반겨 맞아(江湖何幸奉諸賢)/ 옥잔에 술 기울이니 흥취 또한 고상하네(斫玉傾霞興不俗)/ 이처럼 즐겁고 흡족한데 무엇을 또 구하리오(充然有得又何求)/ 오늘은 초암에 머무름이 오직 나의 소망일세(今日留庵是所欲).’

당시 시회 뱃놀이는 7명 중 연장(年長)인 사망정의 주인 육일헌이 주재했다. 그런 인연으로 육일헌 후손들은 낙강칠현시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일곱 문중은 지금도 해마다 이곳에 모여 추모 행사를 한다. 김면은 이렇게 뛰어난 문사이기도 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12호 (2018.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