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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고대 집권국가화와 불교 수용(3) 화랑도 창설 

그들은 전륜성왕 돕고자 하생(下生)한 미륵이었다 

풍월도 전통 계승… 명산대천 순례하며 결속력 다져
인재로 천거된 이들이 훗날 신라 대표하는 일꾼으로 성장


▎삼국통일의 원동력 중 하나로 꼽히는 신라 화랑. 경주 천년 기념행사에서 소년들이 화랑 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신라는 불교 공인 후 급속도로 집권국가화됐다. 그것은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을 통해 증명된다. 반구대 암각화와 더불어 울산을 대표하는 국보인 천전리 각석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새겨진 그림과 글이 가득하다.

대표적인 글은 법흥왕 때 새겨진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이다. 원명은 불교 공인 3년 전인 법흥왕 12년(525)에 새겨졌다. 추명은 불교 공인 11년 후인 법흥왕 26년(539)에 새겨졌다. 그래서 원명과 추명을 비교해 보면 불교 공인 후 신라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알아낼 수 있다.

원명과 추명 이외에도 법흥왕 당시의 시대 변화를 알려주는 글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갑인년 대왕사중 안장(甲寅年大王寺中安藏)’이라는 글이 있다. ‘갑인년에 대왕사의 스님 안장’이란 뜻으로 갑인년은 법흥왕 21년(534)이다. 대왕사는 이차돈 순교 후 법흥왕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興輪寺)다. 그 흥륜사가 법흥왕 당시 ‘대왕사’로도 불렸던 것이다. 이유는 창건주 법흥왕이 ‘대왕’으로 칭해졌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던 동왕(同王) 15년(528)만 해도 ‘매금왕(寐錦王)’이었다. 그런데 불교 공인 후 ‘대왕(大王)’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매금왕’이란 ‘마립간왕(麻立干王)’으로 이해된다. 즉 매금왕이란 근본적으로 ‘칸’이었고, 그런 면에서 부족장의 속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울진 신라 봉평비(鳳坪碑)의 ‘훼부 모즉지 매금왕(喙部 牟卽智 寐錦王)’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표현은 법흥왕이 훼부 소속의 매금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불교 공인 이전의 매금왕 단계에서 법흥왕은 신라 전체의 통치권자 못지않게 훼부의 ‘칸’이라는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반면 불교 공인 후의 ‘대왕’은 훼부의 칸이라는 속성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권력자를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대왕’ 단계에서 법흥왕은 훼부의 통치권자라는 속성을 넘어 신라 전체의 통치권자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왕’ 단계가 되면 법흥왕은 더 이상 훼부를 명시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천전리 각석에는 ‘을묘년 8월 4일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표현도 있다. 을묘년은 법흥왕 22년(535)이다. 1년 전인 갑인에 법흥왕은 ‘대왕’으로 불렸지만 한 해 만에 ‘성대왕(聖大王)’으로 한 단계 격상됐던 것이다. 또한 을묘년으로부터 4년 후인 기미년에는 다시 ‘태왕(太王)’으로 표현됐다. 이 같은 천전리 각석을 통해 법흥왕이 불교 공인 후 대왕·성대왕을 거쳐 태왕으로까지 격상됐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신라의 집권국가화도 급속히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불교 공인이 신라를 집권국가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상통일 때문이었다. 불교 공인 이전 훼부(喙部)·사훼부(沙喙部)·잠훼부(岑喙部)·본피부(本彼部)·사피부(沙彼部)·한기부(漢岐部)의 신라 6부는 각각 독자적인 신앙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6부에는 각각 소도(蘇塗)라고 하는 전통 성지가 있었으며, 그곳에는 천군(天君)이라고 하는 전통 성직자도 있었다.

그 같은 독자적인 신앙과 전통을 기반으로 6부 칸들은 독립된 통치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불교 공인 후 소도는 급격하게 사찰로 바뀌었고, 천군 역시 급격하게 스님으로 변신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신앙의 정점에 자리한 법흥왕은 대왕으로 격상된 반면 6부 칸들은 관료로 격하됐다. 그렇게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법흥왕은 정복국가를 지향했다.

‘불(不)살생’과 정복국가의 기막힌 ‘양립’


▎화랑의 복식(服飾)을 재현한 밀랍인형.
그런데 불교신앙을 이용해 법흥왕이 왕권 강화를 지향했다는 점은 쉽게 이해되지만 정복국가를 지향했다는 점은 선뜻 수긍되지 않는다. 정복국가가 되려면 전쟁을 해야 하는데 전쟁은 대량 살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불교의 ‘불(不)살생’과 정복국가의 ‘대량 살생’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법흥왕은 어떻게 불교신앙과 정복국가를 양립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불교사상 중에 정복 또는 전쟁을 적극 권장하는 사상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이 그것이었다. 법흥왕은 그 전륜성왕 사상을 이용해 왕권도 강화하고 정복국가도 이루고자 했다.

‘전륜성왕’이란 ‘법륜(法輪)을 굴리는 성스러운 왕’이란 뜻이다. ‘법륜’을 굴린다는 말은 ‘불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의 나라 또는 이방의 땅에 불교를 전파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법륜’을 굴리는 성스런 왕은 하늘로부터 7보(寶)를 받아 천하를 정복·통치한다고 한다.

즉 자비와 불살생의 불교는 원론적으로 모든 전쟁을 반대하지만, 전륜성왕의 정복전쟁은 오히려 적극 권장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7보까지 줘 전륜성왕이 승리하도록 돕는다고 하는데 그 7보는 윤보(輪寶)·백상보(白象寶)·감마보(紺馬寶)·신주보(神珠寶)·옥녀보(玉女寶)·거사보(居士寶)·주병보(主兵寶)다.

윤보는 보름날 새벽 하늘에 나타나는 수레바퀴라고 한다. 백상보는 코끼리 부대를 대표하는 흰 코끼리이고 감마보는 기마대를 대표하는 검푸른 말이다. 신주보는 어둠을 밝히는 구슬이며, 옥녀보는 아름다운 배필이다. 거사보는 재정 전문가, 주병보는 군사 전문가이다.

이렇게 보면 7보는 정복전쟁에 필요한 군사력과 경제력 및 신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7보 중 백상보와 감마보 그리고 주병보는 군사력을 상징하고, 거사보는 경제력을 상징한다. 반면 윤보와 신주보, 옥녀보는 신념을 상징한다. 윤보와 신주보, 옥녀보가 신념을 상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윤보는 1000개의 바퀴살이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로서 금륜·은륜·동륜·철륜으로 구분된다. 이 같은 윤보는 왕이 보름날 새벽녘 흰 옷을 입고 누각에 올라 기다릴 때 동쪽 하늘에 나타난다고 한다. 결국 윤보는 달맞이와 관련된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보름날 새벽녘에 맞이하는 달빛이 곧 4가지 윤보라 할 수 있다.

1000개의 바퀴살이란 달빛의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어둠을 밝히는 신주보는 샛별의 상징이고, 아름다운 배필인 옥녀보는 보름달 자체의 상징이다. 보름날 새벽녘의 달빛이나 샛별은 마지막 어둠을 밝히는 빛이기도 하고, 태양의 등장을 알리는 빛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전륜성왕에게 윤보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기도 하고 내면을 밝히는 신념이기도 하다.

전륜성왕의 윤보 4가지는 사실 전륜성왕의 신념 또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표시한 것이다. 예컨대 금륜을 얻은 전륜성왕은 금륜성왕이라 불리는데, 그의 신념 또는 능력이 금륜을 얻기에 합당할 정도로 크기에 세계의 4개 대륙 전체를 정복·통치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은륜성왕의 신념 또는 능력은 3개 대륙을 정복·통치할 수 있고, 동륜성왕은 2개, 철륜성왕은 1개를 정복·통치할 수 있다고 한다. 전륜성왕이 정복전쟁에 나서면 윤보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어떤 적이든 윤보를 보면 바로 항복한다고 한다. 그것은 전륜성왕 사상의 힘 또는 신념의 힘이 천하무적이라는 뜻이나 같다.

남모·준정의 질투와 시기가 부른 파국


▎삼국통일의 기본정신이 된 화랑오계비, 청도 운문사 입구에 건립됐다.
법흥왕이 공인한 불교사상이 바로 이 같은 전륜성왕 사상이었다. 그런 사실은 법흥왕이 창건한 흥륜사라는 사찰 이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흥륜사’란 ‘법륜을 부흥시키는 절’이란 의미로서 ‘법륜을 굴리는 전륜성왕’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불법을 부흥한 왕’이란 의미의 법흥왕 역시 전륜성왕의 다른 표현이다.

법흥왕은 전륜성왕 사상을 이용해 정복군주를 자처했으며, 그로써 신라를 정복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전륜성왕 사상과 결합된 화랑도가 창설됨으로써 신라는 더욱더 강력한 정복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법흥왕 27년(540) 7월, 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흥왕이 즉위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진흥왕이 몇 세에 즉위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르게 증언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7세에 즉위해 왕태후가 섭정했다고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15세에 즉위해 태후가 섭정했다고 한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에 따라 섭정 주체가 달라지고, 최초의 화랑도인 원화(源花)를 창설한 주체도 달라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원화 제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진흥왕이 즉위했을 때, 군신(群臣)은 인재를 알 길이 없어 근심했다. 그래서 무리를 지어 놀게 해 그 행동을 보아 인재를 천거해 쓰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고 하는 미녀 2명을 뽑아 원화로 삼고 300여 무리를 뽑았다.

그렇게 뽑힌 무리 300여 명은 남모 원화와 준정 원화에게 소속됐다. 그런데 질투심에 눈 먼 준정이 남모를 유인해 살해했다. 남모 무리는 준정을 보복·살해했다. 이에 진흥왕은 원화 제도를 아예 폐지해버렸다.

위에 의하면 최초에 원화 제도를 창설한 주체는 ‘군신’이었다. 군신이란 ‘여러 신료’란 의미지만 실제는 섭정을 중심으로 한 신료집단일 것이다. 진흥왕이 미성년으로 즉위했기에 섭정이 있었고, 그 섭정이 ‘여러 신료’의 도움을 받아 원화제도를 창설했으므로 위의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옳다면 원화를 창설한 주체는 섭정 왕태후이고, 그 왕태후는 법흥왕비 보도(保刀)부인 박씨로 이해된다. 반면 [삼국유사]가 정확하다면 태후는 진흥왕의 생모 지소(只召)부인 김씨로 이해되고, 원화를 창설한 주체도 지소태후가 돼야 한다.

이와 관련해 천전리 각석 추명(追銘)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추명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내용이 많아 여러 학자들이 세밀히 검토했고 논쟁도 많았다. 특히 다음의 추명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제시됐다.

기미년 칠월 삼일 흥(己未年 七月 三日 興)
왕여매공견서석질견래곡(王與妹共見書石叱見來谷)
차시 공삼래(此時 共三來)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另卽知 太王妃夫乞支妃)
사부지왕자랑 심맥부지 공래(徙夫知王子郞 深麥夫知共來)”


위의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불교 공인 11년 후다. 그러니까 ‘기미년 칠월 삼일 흥’은 ‘539년 7월 3일 새벽’으로 해석되고, 별다른 논쟁은 없다. 문제는 다음 구절인 ‘왕여매공견서석질견래곡((王與妹共見書石叱見來谷)’이다. 기왕에는 이 구절을 ‘왕과 누이가 함께 본 서석을 (왕의 비인 지소부인이) 보려고 골짜기에 왔다’로 해석했다.

여기 등장하는 ‘왕’은 진흥왕의 생부인 사부지(徙夫知) 갈문왕(葛文王)이다. ‘누이’는 사부지 갈문왕의 누이로서 둘은 지난 법흥왕 12년(525) 함께 천전리에 놀러 왔었다. 그런데 그 둘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사부지 갈문왕의 왕비인 지소부인이 둘을 추모하고자 천전리에 왔는데 그때 생모인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 그리고 아들인 ‘사부지왕자랑 심맥부지’와 함께 왔다는 것이 기왕의 해석이었다.

폐쇄성 극복이 국정현안으로 대두

즉, 기왕의 해석에서는 539년 시점에서 사부지 갈문왕은 사망했지만 지소부인은 생존한 것이 된다. 이런 해석에는 진흥왕 즉위 후 지소태후가 섭정했고, 원화 역시 지소태후가 창설했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그런데 위처럼 해석하는 것은 문장에 없는 주어를 억지로 붙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래서 문장 자체에서 주어를 찾아야 한다는 비판이 있었고, 그 결과 ‘왕(사부지 갈문왕)은 누이와 함께 봤던 서석을 보려고 골짜기에 왔다’는 해석이 제시됐다.

이렇게 해석하면 539년 시점에서 사부지 갈문왕은 생존했지만 지소부인은 사망했다. 현재는 뒤의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천전리 각석에 입각한다면 진흥왕이 즉위하던 시점에 지소부인은 이미 사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진흥왕 즉위 후 섭정한 주체는 왕태후이고, 그 왕태후는 당연히 법흥왕비인 보도부인 박씨다. 이런 사실에서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해 왕태후가 섭정했다고 하는 [삼국사기]가 더 정확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보도부인을 파도(巴刀) 부인이라 했는데 영흥사(永興寺)로 출가해 법류(法流)라 불렸다고 한다. 보도부인은 남편 법흥왕처럼 독실한 불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보도부인은 진흥왕에게 외할머니이기도 하고 큰어머니이기도 했다. 진흥왕 생부인 사부지 갈문왕은 법흥왕 친동생인데, 법흥왕 딸인 지소부인에게 장가들어 진흥왕을 봤기 때문이다.

법흥왕이 아들 없이 승하한 후 7세의 진흥왕은 생부 사부지 갈문왕 그리고 외할머니 보도부인의 추대를 받아 즉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진흥왕 즉위 후 실세는 섭정을 담당한 보도 왕태후였고, 원화를 창설한 주체 역시 보도 왕태후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원화를 창설한 이유가 ‘군신이 인재를 알 길 없어’로 돼 있다. 이 기록은 기왕에는 ‘군신이 인재를 알 길이 있었는데’, 어떤 사정 때문에 ‘인재를 알 길이 없어졌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인재를 알 길 없어진’ 어떤 사정이란 다음 아니라 불교 공인 후 왕권 강화와 집권국가화였다.

즉 ‘인재를 알 길 없어졌다’는 것은 불교 공인의 부작용이었던 것이다. 불교 공인 전 신라는 6부 칸들의 합의제로 운영됐다. 인재 역시 6부 칸들의 추천으로 충원됐다. 그런데 불교 공인으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가는 왕과 왕족 중심으로 운영됐다. 인재 역시 왕족 중심으로 충원됐다. 집권국가화에 따라 국가 운영이 폐쇄적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것은 집권국가화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국가 운영의 지나친 폐쇄성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진흥왕 즉위 시에는 법흥왕 이래의 왕권 강화와 집권국가화에 따른 폐쇄성을 극복하는 것이 국정 현안으로 대두됐다고 봐야 한다. 그 대안으로 당시 보도 왕태후를 비롯한 군신은 신라의 전통적인 공동 활동을 주목했다.

나라 부흥 위한 ‘회심작’ 풍월도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7월 16일부터 8월 보름까지 한 달 동안 6부 여인들을 대부(大部)의 뜨락에 모아 길쌈을 하게 했다. 그때 두 패로 나눠 경쟁시켰으며 왕녀 2인으로 통솔하게 했다고 한다.

8월 보름 저녁에 작업 결과를 가지고 승패를 결정하는데 패배한 쪽에서 음식을 마련해 이긴 쪽에 사례하고 함께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했다. 이것이 이른바 8월 한가위였다. 현재도 한가위는 추수감사와 달맞이가 어우러지는 민속명절이지만, 신라 때도 본질적으로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위의 ‘대부(大部)’는 신라 6부의 대표부인 훼부다. 따라서 ‘대부의 뜨락’이란 ‘훼부의 칸이 집무하는 궁전’으로서 바로 월성(月城)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신라 6부 여성들이 7월 16일부터 8월 보름까지 월성에서 공동 노동을 했으며, 추석에는 달맞이를 겸한 축제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공동 노동 및 공동 축제는 6부 칸들이 사로국을 형성했을 때부터 지속된 전통으로서 상하 신분 구별 없이 성인 여성 모두가 참여한 것이 분명하다. 즉 여성들의 길쌈이라는 공동 노동 및 공동 축제는 전통적인 만큼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여성들이 대부의 뜨락에서 공동 길쌈을 할 때 남자 청소년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들도 뭔가 공동 활동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추석 저녁에는 달맞이를 겸한 공동 축제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자 청소년들의 공동 활동과 공동 축제 역시 길쌈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이었고 그래서 개방적이었을 것이다.

보도 왕태후는 그런 개방성이 불교 공인 후 폭증하는 폐쇄성을 극복하는 데 유효한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했을 듯하다. 그래서 마치 길쌈 노동 집단을 두 패로 나누고 왕녀 2명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했듯이, 남자 청소년들을 모아 두 패로 나누고 원화 2명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무리 지어 놀게 하면서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선발하려 했지만 그들은 화합하지 못해 실패했다.

원화가 폐지된 지 몇 년 후, 진흥왕은 나라를 부흥시키자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된다고 생각해 ‘양가의 남자 청소년’을 뽑아 화랑(花郞)이라 했다고 한다. 이것이 본격적인 화랑도의 시작이었다. 진흥왕이 화랑도를 창설한 시점은 성년이 돼 친정(親政)한 직후였다. 그때 진흥왕은 기왕의 ‘풍월도’를 이용해 화랑도를 창설했던 것이다.

그런데 풍월도가 풍월도인 이유는 공동으로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달맞이도 했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최치원이 풍월도를 풍류도라 부른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같은 풍월도 또는 풍류도는 신라의 전통적인 여성 공동 노동에 상응하는 전통적인 남자 청소년 공동 활동으로 이해된다. 즉 신라 여성들이 대부의 뜨락에 모여 한 달 동안 공동 길쌈을 할 때, 남자 청소년들은 공동으로 명산대천을 순례하다가 추석에 공동 달맞이 축제를 했는데, 그런 공동 활동이 풍월도 또는 풍류도라 불렸던 것이다.

그들의 사명은 절대 충성


▎신라의 전통을 재현하는 행사에서 원화들이 무리를 지어 행진하고 있다.
하지만 풍월도는 불교 공인 이후 급격히 약화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족과 비왕족의 차별이 강화됐고, 그 결과 왕족 출신의 남자 청소년과 비왕족 출신의 남자 청소년이 함께 어울리는 풍월도가 약화됐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흥왕은 전통적인 풍월도를 되살림으로써 왕족 출신 청소년과 비왕족 출신 청소년이 함께 어울리게 만들고, 그 기회를 이용해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고자 했던 것이다.

진흥왕에게 기왕의 풍월도는 왕권 강화와 인재 발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보였음이 확실하다. 달맞이와 관련되는 풍월도는 전륜성왕의 윤보(輪寶)와 연결될 수 있고, 진흥왕이 거처하는 월성 역시 전륜성왕의 윤보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법흥왕을 계승한 진흥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자처하면서 경주에 풍월도와 월성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유는 신라 왕실이 오래 전부터 전륜성왕이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풍월도를 되살린다는 것은 곧 전륜성왕 사상을 강화하는 것이나 같았다.

그런데 진흥왕이 되살려낸 풍월도는 이전과 많이 달랐다. 이전 풍월도에서는 왕족과 비왕족의 차별이 없었지만, 진흥왕이 되살려낸 풍월도에서는 강했다. 예컨대 진흥왕은 ‘양가의 남자 청소년’을 뽑아 화랑으로 임명했는데 ‘양가의 남자 청소년’은 ‘왕족 출신의 남자 청소년’이었다.

진흥왕은 왕족 출신만이 화랑이 될 수 있는 근거를 전륜성왕 사상에서 찾았다. 그 사상에 의하면 전륜성왕이 지상에 출현할 때 도솔천의 미륵이 귀족 자제로 하생(下生)한다고 한다. 전륜성왕의 정복 활동을 돕기 위해서였다. 진흥왕 당시 귀족은 곧 왕족인 진골이었다. 진흥왕은 진골 자제 중 꽃 같은 미모를 가진 남자 청소년을 미륵의 화신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화랑을 ‘미륵선화(彌勒仙花)’라고도 불렀는데, ‘미륵이자 신선인 화랑’이라는 뜻이었다. 진흥왕에게 화랑은 곧 젊은 미륵이었던 것이다. 진흥왕은 자신이 전륜성왕이라는 명분으로 화랑을 직접 임명했다.

이론적으로 전륜성왕의 정복활동을 돕고자 하생한 미륵이 화랑이므로 화랑의 사명은 전륜성왕을 자처하는 왕에게 절대 충성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전륜성왕 사상과 미륵신앙이 고양되면 고양될수록 화랑의 충성심은 높아졌고 왕권 역시 강화됐다. 그만큼 신라는 정복국가로 변신했다.

게다가 진흥왕에 의해 미륵신앙이 고조되면서 화랑에 대한 숭배도 고조됐다. 그에 따라 진골 자제 중에서 화랑이 임명되면 1000명에 내외의 낭도(郎徒)들이 생겨나곤 했다. 낭도는 화랑과는 달리 신분 차별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낭도가 바로 기왕의 풍월도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화랑과 낭도는 함께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강력한 결속력을 다졌고 전륜성왕에 대한 충성심도 키웠다. 그 과정에서 뛰어난 인재로 천거된 사람들이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재상·병사가 됐다. 그런 점에서 진흥왕의 화랑도 창설은 집권국가화로 야기되는 폐쇄성을 공동체 전통의 재창조로 극복해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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