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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뽀빠이 이상용의 해피 라이프 

“집은 좀 작아도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이지. ^^” 

1973년 [유쾌한 청백전] 출연 계기로 시작된 반백 년 방송 인생
한 달에 강연만 50건… 3월부턴 유튜브에 [뽀빠이 이상용 TV] 열어


▎뽀빠이 이상용은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명동성당 앞에서 반팔 차림으로 근육을 자랑하는 이상용.
"실내는 답답한데 커피숍보다는 공원이 낫지 않을까?”

‘원조 국민 MC’ 이상용(75)을 만난 건 4월 2일이었다. 이상용은 이날 아침 서울 여의도 KBS에서 [아침마당] 리허설을 마쳤다. 점심 직후에는 부천에서 강연이 잡혀 있었다. 리허설과 강연 중간에 짬을 내서 월간중앙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이상용은 여의도공원 산책을 기자에게 제안했다. “KBS에 올 때면 늘 공원을 두 바퀴쯤 돌지. 내가 명색이 뽀빠이인데 오랫동안 건강해야지. 안 그래?”

이상용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뽀빠이, 또 하나는 보디빌더다. 70대 중반의 나이지만 만져 보니 이상용의 팔뚝은 돌덩이만큼이나 단단했다. 이상용은 “보디빌딩만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며 “어느덧 60년이 넘었다”고 했다.

이상용은 건강을 위해 자주 걷는다. 어지간한 거리는 차를 타지 않는다. 신발도 구두보다는 운동화를 즐겨 신는다. “걷는 것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 편한 신발 신고 천천히 걷다 보면 몸에 땀도 나고 기분도 좋아진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허리 펴고 많이 걸으실 것을 권한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나는 진짜 행복하게 삽니다. 내 친구들은 (은퇴해서) 다들 집에서 놀아요. 몸이 아픈 친구들고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있고요. 그렇지만 난 이렇게 바쁘게 살잖아요? 아침에 눈뜨면 갈 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내 강연의 주제는 ‘인생은 아름다워라’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올 수 없어요. 강연은 100분 동안 진행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웃어요. 요즘 웃을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폭소 강의거든요. 그래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 나이에 한 달에 강연만 50회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니까 친구들 만나면 내가 돈도 다 쓰죠(웃음).”

‘김신조 사태’ 때 토벌소대 소대장


▎이상용은 연기자인 부인 윤혜영씨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이상용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 직후에도 곧바로 차에 몸을 실었다. 부천에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이상용은 “40~50대 실직 가장 등 600명쯤 모인다고 들었다”며 “이분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뽀빠이 하면 건강의 상징이잖아요?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뽀빠이가 아프면 안 되죠(웃음). 그래서 열심히 관리하고 있지요. 아침에 성당 갔다 오면 헬스클럽에서 2시간 동안 역기를 듭니다. 63년째 하루도 안 거르지 않고 있어요. 그 운동이 끝나면 집 근처 양재천을 3㎞ 정도 걷습니다. 건강이라는 건 누가 지켜주지 않아요. 내가 알아서 해야지. 여러분도 자신의 힘에 맞는 운동을 하세요. 그리고 저는 술·담배·커피는 절대 안 합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어요. 대신 맛집은 잘 찾아 다녀요. 전국적으로 제가 가는 맛집이 500곳도 넘는답니다.”

어떤 계기로 운동을 시작했나요?

“제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무슨 일 때문에 백두산 근처 회령에 가 계셨던가 봐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친정인 부여에서 회령까지 걸어가셨대요. 그런데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다시 부여로 내려와서 저를 낳으신 거죠. 10달간 영양 공급이 안 됐으니 아이가 어땠겠어요? 태어나자마자 곧 죽을 걸로 생각한 어머니가 저를 땅에 묻었는데 이모가 몰래 파내서 산으로 데리고 가 한동안 키웠다고 하더라고요. 태어나서 이틀 동안 젖 한 모금, 물 한 모금 못 먹고도 살아남은 게 이상용입니다. 하지만 영양 부족 탓인지 여섯 살 때까지는 잘 걷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온갖 병에 걸려 빌빌댔어요. 11세 때 아령과 역기를 들기 시작했는데 살려고 그 운동을 한 겁니다. 가방에 도시락은 없어도 아령은 있었을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운동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미스터 대전고’로 선발됐고, 1966년에는 ‘미스터 고려대’에 뽑혔어요. 난 여자보다 운동이 더 좋은 것 같아요(웃음).”

방송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저는 ROTC 5기로 기갑장교 출신이에요. 1968년 ‘김신조 사태’ 때 토벌소대 소대장이었고요. 그런데 1970년에 전역을 하고 보니 할 일이 마땅치 않았어요. 리어카에 미역·동태·다시마·멸치 등 온갖 것들을 싣고 다니면서 팔아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방송에 나가서 사람들을 웃기는 일, 코미디언 같은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하더라고요.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 사람들 웃기는 일에는 소질이 있었거든요.”

이상용은 1967년 고려대 농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ROTC로 임관해 군 복무를 했다. 1968년 1월부터 1969년 1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그는 1970년 3월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567명 살린 심장병 어린이 돕기 그런데…


▎[우정의 무대] MC 시절의 이상용. 그는 군복 패션과 스포츠형 머리로도 화제를 모았다.
그렇더라도 방송 입문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

“무작정 MBC 방송국에 가서 대전고 선배를 찾았습니다. 그때 만난 분이 제 은인인 유수열 PD입니다. 코미디언으로 출연시켜 달라고 졸랐죠. 그런데 그분은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며 거절하시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대학 나온 코미디언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내 손으로 방송국을 차려서라도 하겠다’고 버텼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빗자루를 하나 사서 20일 동안 서울 정동 MBC 정문에서 아침마다 눈을 쓸었습니다. 그리고 1층부터 10층까지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했죠. 그랬더니 유수열 선배가 ‘꿈에도 네가 나타나더라’며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시 구봉서·배삼룡·서영춘 같은 대스타들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저는 진짜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때 유수열 선배가 ‘최초의 학사 출신 코미디언’이라며 저를 띄워 주셨어요. 방송이 있던 날, 방송국 앞 우동집으로 고대 역도부 후배 40명을 불러 외상으로 우동 한 그릇씩 먹여선 방청석에 앉혔습니다. 이 친구들이 다른 사람들이 나오면 절대 박수를 안 치다가 제가 나올 때만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낸 겁니다. 물론 작전이었죠. MC인 변웅전 아나운서가 ‘저 친구가 도대체 누구냐’며 놀라더라고요.”

KBS의 대표적인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던 [모이자 노래하자] 사회도 오랫동안 본 걸로 기억합니다.

“MBC [유쾌한 청백전]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개그, 그러니까 넘어지고 자빠지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아닌 말로 사람을 웃기는 스탠딩 개그를 통해 인기를 얻게 됐죠. 변웅전 선배가 미국에서는 그런 스타일의 개그가 유행이라며 적극 권하셨어요. 이후 [모이자 노래하자]의 사회를 16년 동안 보게 됐습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로도 유명하잖아요?

“1975~76년쯤이던가요? [모이자 노래하자]를 진행하고 있는데 한 아빠가 입술이 시퍼런 아이를 데리고 와서 다짜고짜 병을 고쳐 달라는 겁니다. 서울대병원에서 데려가서 진단을 받게 했는데 심장병이더라고 하더군요. 당시에 제가 400만원짜리 독채 전세를 살았는데 치료비가 1800만원 든다는 겁니다. 수술만 받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하길래 야간업소 네 군데 사장한테 애걸복걸해서 선불로 아이 치료비를 마련했습니다. 그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심장병 어린이 40명이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자기들도 고쳐 달라고. 그 때문에 결국 이사를 갔다니까요(웃음). 모두 567명을 치료했고, 1987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습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선사업 때문에 곤욕도 치렀죠?

“[우정의 무대] MC로 한창 인기가 높을 때였습니다. 당시에 ‘이상용이 대전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 무투표 당선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절대 정치 안 한다고 선언했어요. 기자들한테 ‘내가 정치할 때까지만 살아라’고 할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여섯 살 때 어머니랑 사주팔자를 봤는데 도사님이 ‘정치 근처에만 가도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것도 몰랐던 나이지만 그 말씀이 깊이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던 거죠. 정계 입문 권유를 거절했어요. 결국 검찰 수사를 받게 되더라고요. 여의도 대중탕에서 목욕하다 잡혀갔다니까요.”

1996년 11월 이상용은 심장병 어린이 수술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는 [우정의 무대] 진행을 그만두는 등 방송 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1997년 2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상용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그런 곤욕을 치르게 됐던 것으로 안다”고 털어놓았다.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 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누워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김동길 박사가 찾아오시더라고요. 김수환 추기경은 ‘하늘이 장애물 경기를 하는구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법정 스님은 ‘자루를 흔드는구나. 더 많이 담으려고 자루를 흔드는 법이다’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김동길 박사는 ‘몇 사람이 오줌 눈다고 해서 강물은 지리지 않는다. 오줌 누는 사람 원망 말고 어서 흘러가서 바다를 만나거라’며 어깨를 다독여 주셨습니다. 그때 세 분의 말씀을 목판에 새겨서 지금까지도 집에 걸어두고 있습니다.”

강연 레퍼토리가 4만 개


▎2003년 미스코리아 충북대회 사회를 맡은 이상용.
그 일로 인해 미국으로 건너갔죠?

“놀라운 것은 LA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은 다 아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뽀빠이는 결백하는 것을. 생계를 위해 후배의 소개로 관광 가이드 일을 했습니다. 하루 14시간씩 버스를 탔죠. 관광객들이 주는 팁을 단 1달러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습니다. 2년여 동안 9000만원 벌어서 1999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죠.”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도 한동안 힘든 시간이 계속됐죠?

“한 지인의 안내로 시골에 내려가서 논일·밭일 하며 일당 2만5000원씩 벌었습니다.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열심히 살아야죠. 그러던 차에 대학 선배인 모 은행 관계자가 저에게 대출 받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 덕분에 집을 장만하게 된 겁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인데 당시 6억5000만원 대출을 끼고 샀어요. 결국 16년 만에 빚을 다 갚았죠 돌아보면 누구 욕할 것도 없는 것 같아요. 다 하늘이 정해준 스케줄이었는데요. 뽀빠이 이상용은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입니다.”

독서량이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책은 하루에 1권 이상 한 달이면 60~70권 정도를 읽습니다. 차로 이동할 때 책을 읽어요. 머리가 차야 말이 나와요. 머리가 비면 바람만 나오거든요. 내 강연의 레퍼토리가 4만 개입니다. 그게 다 책에서 비롯된 거예요. 생각해 보면 팔자인 것 같아요. 저는 돌아다녀야 신바람이 나지 집에만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요. 제가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심장병 어린이가 모두 567명인데 지금까지 연락되는 친구는 10여 명이에요. 그건 솔직히 좀 서운합니다. 그렇지만 그 또한 제 팔자겠죠.”

이상용은 지금도 2G 휴대폰을 고집한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보거나 다른 업무를 할 수 없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아무래도 책과 멀어질 것 같다는 게 이유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


▎1984년 LA 올림픽 출전 국가대표 선수단 격려식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당시 정주영 대한체육회장과 MC 이상용.
뽀빠이라는 애칭은 어떻게 해서 생긴 건가요?

“데뷔할 때 마침 [뽀빠이]라는 만화영화가 유행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자세히 보니 뽀빠이가 저랑 닮았더라고요. 여자친구 올리브가 뽀빠이보다 키가 더 큰 것도 저랑 비슷하고요. 아내가 저보다 10㎝ 정도 크거든요. 그래서 내가 한국의 뽀빠이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약한 사람은 도와주고 나쁜 사람은 물리친다는 마음가짐으로요.”

스포츠형 머리도 뽀빠이의 트레이드마크잖아요?

“제가 목이 워낙 없잖아요? 그래서 머리를 길면 환자처럼 힘이 없어 보여요. 데뷔 때부터 헤어스타일을 짧게 했어요. [우정의 무대] 때부터는 아예 군인처럼 잘랐고요. 오늘 인터뷰한다고 해서 어제도 이발했어요(웃음).”

방송 생활 50년입니다.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약하게 태어난 내가 가장 건강한 뽀빠이가 됐다는 건 정말 뿌듯합니다. 사실 저는 얼굴도 키도 별로 볼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이렇게 유명해진 것도 보람된 일이라면 보람된 일이겠죠. 또 내가 가면 사람들이 웃어요. 웃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 정치 안 하길 정말 잘했어요.”


▎1991년 당시 이종구 국방부 장관(왼쪽)이 사회복지법인 한국어린이보호회 이상용 회장에게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반면 안타까운 일이나 아쉬움도 없진 않을 텐데요.

“(1996년에) 당한 거죠. 그 일이 있고 나서 솔직히 좋은 일 하는 게 꺼려졌습니다. 너무 힘들었을 때 집사람이 ‘내 애들도 아니고 친척도 아닌데도 고쳐줬는데 이게 뭐냐’며 울더라고요. 집사람한테는 정말 많이 미안해요. 그래도 나는 행복합니다. 어제 죽은 재벌은 오늘 아침에 라면도 못 먹잖아요?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시죠?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돈이 없어도 비굴하지 말고 돈을 벌어도 건방지지 말라. 친구가 다 떠나도 외로워하지 말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성내지 말라. 돈을 다 잃어도 애닯아하지 말라. 아침에 눈뜨면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 집사람과의 사이에 딸(50)과 아들(44)이 있어요, 손주가 셋이고요. 다들 잘됐어요. 여기에서 내가 뭘 더 바랄 것이며, 누굴 부러워하겠어요?”

좌우명이 궁금합니다.

“키 크고 잘생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카바레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어요(웃음). 쌍꺼풀 없는 눈이라고 실망할 필요 없어요. 작은 눈이라도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으면 됩니다. ‘작은 눈일지라도 바른 길로 가라’는 게 제 좌우명입니다.”

출연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우정의 무대] [모이자 노래하자] [출발 동서남북]이죠. 지금도 그 시절이 아련합니다.”

최근에는 유튜브 활동도 하고 있죠?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저를 보면 ‘오늘 유튜브 재미있더라’는 식으로 인사를 하는 겁니다. 저는 한 적이 없는데. 유튜브에 들어가 보니 뽀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사실 짝퉁인데 사람들은 뽀빠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상용이 하는 방송인 줄 알고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20여 일 전에 [뽀빠이 이상용 TV]를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야한 이야기 좀 올려 달라고 채근하네요(웃음).”

이상용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직접 찾아가서 강연을 할 수 없으니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건강과 즐거움을 선물해드리고 싶다”며 [뽀빠이 이상용 TV] 채널을 소개했다.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홍콩 출신 배우 성룡의 무술 지도자인 황정리 등을 섭외해 채널을 진행하고 있다.

연예계에서 절친은 어떤 분들인가요?

“탤런트 이정길(75) 그리고 송해(92) 형과 친해요. 많은 분들이 [전국노래자랑]의 다음 사회자는 이상용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려면 송해 형이 아파야 하는데 저보다 더 오래 사실 것 같아요(웃음). 저는 그 형을 걸어 다니는 국보라고 부릅니다. 진짜 대단하신 분이에요.”

“'너희가 100세를 알아?'라는 프로그램 하고 싶어”


▎2004년 언론 인터뷰에 앞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뽀빠이 이상용.
숱한 고비를 어떻게 넘겨 왔나요?

“‘하나님은 내 편이다. 내가 죽냐 사냐를 시험하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또 ‘지금 나는 장애물 경기를 하고 있다. 그물·뜀틀 다 넘었다. 이제 골인만 하면 된다’고 마음먹곤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요?

“남의 다리를 걸지 않는 겁니다. 격려는 못해줄 망정 남 잘 된 꼴 못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행복과 건강은 백화점에서 팔지 않아요.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특별한 음식을 먹어서 건강한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이 먹고 싶은 걸 먹으면 건강해져요. 저는 쌀밥에 시래기된장국을 가장 좋아해요. 내 고향 서천에서 나오는 김도 잘 먹고요. 전국 각지 공연 다니면서 제 스스로 520곳의 맛집을 정했습니다. 지금도 그 지역에 가면 그 식당에 들르곤 합니다.”

인생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나요?

“100세 시대라면 나라에서도 100세 분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죠. 100세가 죄인가요?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현재 100세 되신 분들이 전국적으로 1만6000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골인한’ 분들이니 나라에서 그분들을 위해 뭔가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너희가 100세를 알아?]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진행해 보고 싶어요.”

어떤 비전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나요?

“전국 각지를 돌아다녀보니 소외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군(郡)만 해도 공연 등 문화 혜택이 많은데 이(里)는 달라요. 그래서 저는 자그마한 버스 한 대 사서 ‘뽀빠이가 고향에 간다’는 무료 문화 공연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고 싶어요. 버스에는 가수·배우 그리고 의료진 등을 태우는 겁니다. 시골 어르신들이 공연도 보고 진료도 받을 수 있도록. 그런데 다들 경제적으로 이익 되는 곳에만 관심이 있을 뿐 소외된 분들에게 혜택을 드리는 일에는 소홀한 것 같아요. 작더라도 나이 드신 분들, 소외된 분들과 나누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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