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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3) 

행운이 신분의 사다리로 작용 ‘신(新)신분사회’로 가는 우리 사회 

상위 10%가 민유지 96.7% 소유… 토지 불로소득 후유증 극심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 불공정 사회 가속화시켜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사상체계의 첫째 덕목이 ‘진리’라면, 사회제도의 첫째 덕목은 ‘정의(Justice, 正義)’이다.” 20세기 최고의 정의 철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롤즈는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론이 아무리 정밀하고 분명하다 하더라도 진리가 아니면 배척되거나 수정돼야 하듯, 법과 제도도 아무리 효율적이고 잘 정비되었다 하더라도 정의롭지 않으면 폐기되거나 개선되어야 한다.”


▎정의 철학 권위자인 김도균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앞서 ‘데카메론 정의’에선 우리 사회 부정의의 현상 혹은 현장으로서의 ‘갑을문화’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갑을문화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서로 억압하고 배제하는 논리로 작용하지만 계급·신분처럼 고착화된 것도, 제도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부정의를 생산하는 사회적·문화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위한 대안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 부정의의 현장은 갑을문화처럼 비제도적 차원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현상일까요.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는 정의의 차원에서 잘 정비되고 효율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젠 제도적 부정의의 현상 혹은 현장은 없는지 살펴볼 차례인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김도균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가 발제를 하시겠습니다. 김 교수는 법철학, 특히 존 롤즈의 정의론을 비롯한 정의 철학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의 한 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신(新)신분사회’라 할 만한 불공정성


▎용산참사가 발생한 2009년 1월 20일 서울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의 남일당 건물 옥상의 사고 현장. / 사진:연합뉴스
2017년 발표됐던 한국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이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10명 중 8명(80.1%)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죠. 특히 청년층(19~29세)은 가장 비관적이어서 83.8%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누가 한국 사회의 공정성을 떨어뜨리는지 묻는 질문에는 정치(51.9%)가 가장 높았고, 행정(19.8%), 사법(15.2%), 민간기업(6.7%), 언론(3.6%)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제도적 장치 모두가 불공정을 심화시키는 주범으로 꼽힌 것이지요.

특히 사회경제적 계층의 역전 가능성에 대해선 아주 비관적이었습니다. 절반의 응답자가 공정한 노력을 통한 사회경제적 계층 역전 가능성은 ‘10% 이하’라고 답했습니다. 국민 절반이 한국 사회를 계층 간 역전 가능성이 낮은 ‘닫힌 사회’ 혹은 ‘신(新)신분사회’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타고난 가정환경에 따라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이른바 ‘수저 계급론’은 완고하게 지지받고 있습니다.

‘수저 계급론’에 비춰 자신의 주관적인 사회경제적 계층이 어디에 속하는지 질문한 결과 ‘동수저(46.9%)’라고 생각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고, 이어 ‘흙수저(41.3%)’, ‘은수저(10.7%)’, ‘금수저(1.1%)’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성공을 위한 요소별 중요도를 묻는 질문에는 부모의 재력(88.4%), 부모의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87.4%), 본인의 인맥(83.9%), 본인의 학력(82.8%)으로 보았습니다. 세습된 자산과 지위, 사회관계를 성공의 열쇠로 보는 신분사회적 특징이 강하게 드러난 결과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치면서도 사회 구성원들은 대다수가 우리 사회의 실제 모습을 ‘신분사회’로 직감하고 있는 현실. 왜 시민들은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답을 얻자면 우리는 먼저 물질적 재화, 교육 기회, 삶의 전망(life chances)을 사회적으로 분배함에 있어 그 불공정과 불공평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하여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불평등은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심각한 불공정성과 불평등, 이로 인한 지배-예속 관계가 생겨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근원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속살과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우리 사회 부정의와 불공정의 문제를 탐색하기 위한 선행 과제일 것입니다.

우리사회 신신분사회의 출발점으로 우선 부동산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불공정의 근원으로 ‘부동산’을 꼽는 건 그다지 개성 있는 견해는 아닙니다. 요즘은 관련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부동산 불로소득이 초래하는 불공정·부정의의 문제에 대해 몇 시간씩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먼저 자산의 불평등 문제를 보죠. 지난해 발표한 행정자치부의 ‘2017년 토지 소유 현황 통계’ 자료에 따르면, 우리 사회 토지 소유자 중 상위 1%(50만 명)가 민유지 53.9%, 상위 10%(500만 명)가 민유지 96.7%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은 토지 소유의 편중은 자산의 불평등 효과를 가져 옵니다. 실제로 2017년 기준 상위 10% 가구가 42.1%의 자산점유율을 나타냈습니다. 가구 순자산의 불평등도를 구성 요소 별로 분석하면 부동산 자산의 불평등기여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2016년엔 부동산 소득이 350조원에 육박합니다. 근로소득에 비해 둘째로 많지만, 생산성과 관련된 근로소득과 달리 부동산소득은 생산성과 무관한 불로소득과 연결됩니다. 물론 현실화된 소득이라기보다는 잠재적 이익을 포함한 것이지만 어쨌든 단순하게 보자면 국내 상위 1%가 국내 부동산이 창출하는 소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것이지요.

이러한 부동산 불로소득 현상에 나타나는 부정의는 우선 ‘응분의 원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라는 ‘응분의 원칙’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의의 대원칙입니다.

성적은 노력에 따라 부여돼야 하고, 업적이나 기여도에 따라 포상한다는 것. 자기가 고의로 저지른 잘못에는 응당 벌을 받아야 하지만, 가족이나 타인의 잘못에 연좌돼 벌을 받거나 잘못 이상의 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원칙. 이에 따라 자기 선택과 노력의 산물이 아닌 성과로 포상을 받거나 불로소득을 가져간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응분의 원칙입니다. 더 나아가 응분의 원칙은 개인들의 선택이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고 개인들이 통제할 수도 없는 유전적 요인이나 출생 시의 사회적 신분, 가족의 경제적 수준과 같은 행운·불운의 요인에 따라 사회적 재화, 기회·권한·직위 등을 배분하면 부당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정의의 대원칙을 위배한 부동산 부정의는 단순히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가졌느냐의 불만스러운 상황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분명한 부정의임에도 ‘합법적’으로 지지받으면서 사회 갈등으로 비화된다는 점입니다. 합법적 부정의는 심리적으로 법에 대한 저항감을 일으키게 하는 문제에서부터 갈등 해소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법의 부정의가 참사로 연결된 대표적인 사례가 ‘용산참사’입니다.

용산참사의 기저에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부동산 불로소득의 행태가 깔려 있습니다. 즉 건물을 임차해 애써서 가게의 명성을 높여 놓으면 건물주가 집세를 올려 상가 세입자를 내보내고 불로소득을 취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행태는 현행법상 불법이 아닙니다.

부동산 관련 합법적 부정의 대표 사례, 용산참사


▎용산참사 사고 현장인 옛 남일당 건물터에서 2020년 완공을 목표로 30~40층 주상복합 빌딩 6개 동 건물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사회에는 늘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들의 깨어진 힘의 균형은 법이 약자를 보호하는 등의 균형잡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유지해 나가는 것으로 사회제도적 정의를 구현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부동산 약자를 보호하는 법은 매우 취약합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후 정부와 언론은 그 원인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낳은 비극, 세입자와 사업시행자의 이기적인 주장들 사이의 충돌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세입자에 대한 보상 내용, 보상 절차 등을 정확하게 정하지 않는 법제의 불비와 부정의가 이 비극의 중심에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용산 재개발과 관련된 법률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입니다. 이 법률(이하 ‘도시정비법’)에 의해 규율되는 정비사업의 목적은 퇴락한 도시의 일부를 정비해 도시 전체 기능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도시의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에서 ‘도시재생사업’이라고도 불리는데, 도시재생이라는 용어는 정비사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촉진사업(‘도시재정비촉진을 위한 특별법’), 지역조합사업(‘주택법’), 도시개발사업(‘도시개발법’)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도시정비법에는 주택 재건축, 주택 재개발 등 우리가 잘 아는 개발사업 이외에도 도시환경정비사업과 주거환경개선 사업이라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두 개의 사업이 더 있습니다. 용산에서 벌어진 사고의 현장도 재개발사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는 국제빌딩 주변 용산4구역을 대상으로 하는 ‘도시환경정비사업’이었습니다. 재건축이나 재개발과 달리 도시환경정비사업에는 상가세입자들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용산참사의 경우 정비사업의 철거민은 당해 사업 지역의 상가 세입자들이었습니다. 상가 세입자들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철거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생떼거리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통상 세입자들은 재개발사업을 반대할 때 보상을 요구하고 철거를 저지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는 건물이 철거되면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에는 납득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상가 세입자의 경우 건물이 없어지는 순간 상가의 영업이 사실상 불가능해질 뿐 아니라 손실의 입증도 어려워지는 처지에 놓입니다. 더구나 상가 세입자 보상에 대한 법률상 근거 조문은 매우 불합리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세입자들은 사후적인 보상금 수령을 꺼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입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건물에 대한 점유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재개발사업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부동산 불로소득, 한국 사회 악순환의 연결고리


▎지난해 10월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를 위한 공시가격·지가 현실화와 보유세 강화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사진:연합뉴스
불분명한 공법상 보상 체계와 법적 불안정성, 즉 ‘법의 부정의’ 때문에 정비사업의 불법적이고 기습적인 철거가 반드시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용산참사와 같이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기도 합니다. 게다가 도시정비법과 함께 법원의 판례 역시 정당한 생활권 보상의 문제를 소홀히 다루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가 세입자들이 철거에 반대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재개발사업에서 세입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자기 몫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법의 결함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 준 사례가 용산참사라고 하겠습니다.

이밖에도 부동산 불로소득, 특히 토지 불로소득이 한국 사회 전반에 끼치는 해악을 전문가들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 토건 분야에 불필요하게 많은 국가재정이 할당돼 국가재정 사용의 왜곡을 낳는다.

둘째, 엄청난 부동산 불로소득의 사유화가 후진형인 토건형 산업구조를 고착화시킨다. 한국 사회가 지식기반형·기술기반형 산업구조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주범은 바로 토지 불로소득에 뿌리를 두고 있는 토건형 산업구조이다. 부동산 투자 이득이 자본 투자 이득보다 월등히 높으니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이 생산활동보다는 부동산 투기에 눈을 돌리게 되고, 기형화된 산업구조가 고착화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부동산 불로소득의 사유화는 경제 위기의 주된 원인들 중의 하나이며, ‘내수침체→투자하락→일자리부족/실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부동산 불로소득의 사유화는 ‘높은 주택가격→정규직 노동자들의 무리한 임금 상승→대기업의 고용의지 위축 및 하청기업에 대한 착취 심화→하청기업의 생산성 하락 및 임금 지불능력 하락→고임금-고생산성 고용 축소와 저임금-저생산성 고용 증가’ 악순환을 낳는다. 이에 더해 ‘토지 투기→고지가(高地價)→신규창업 제약→일자리 축소’라는 부작용도 동반한다는 것이다.

넷째, 부동산 불로소득의 사유화와 그로 인한 불평등 심화는 ‘주택가격 폭등→주거비 급등→생계압박→노동쟁의 증가’라는 사회갈등 현상을 고착화시킨다. 또한 부동산 격차가 곧 빈부격차를 낳고, 교육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까지도 초래한다.

다섯째, 부동산 불로소득의 사유화는 부정부패를 비롯,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온갖 반칙들의 온상이 된다. 부정부패, 뇌물수수로 구속되는 공무원의 60% 이상이 건설·토건 행정 관련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공무원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교육의 불평등과 운의 불평등


▎드라마 [SKY캐슬]은 교육 열망을 상징한다.
물론 소득 격차가 부동산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득의 불평등도 크죠. 그러나 부동산 불로소득은 본인의 생산성이나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개발·상속 등 본인의 운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부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됩니다.

신신분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운(運)’이 사회계층을 구성하는 기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한국 사회는 출생이나 소속이라는 운이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는 비중이 대단히 큰 사회입니다. 부모, 가정환경, 타고난 재능과 같은 자연에 의해 각 개인에게 임의로 주어진 운이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고, 이 운의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는 적절한 장치나 방안들이 마련돼 있지 않은 사회, 즉 사회적 안정망(Social Safetynet)이 부실한 사회는 전형적으로 부정의한 사회입니다.

한국 사회의 20대~40대(일명 ‘2040세대’)의 70% 이상이 한국 사회를 ‘부모의 지위에 의해 계층상승 기회가 결정되는 폐쇄적 사회’, ‘패자 부활의 기회가 없는 사회’, ‘노력한 만큼 보상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회’로 바라본다는 여론조사 등은 이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동산 불로소득을 비롯한 소득 불평등과 교육 불평등은 매우 밀접한 상관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육 불평등(Educational Inequality)을 “교육의 기회와 질이 사회계층이나 집단에 따라 다르게 또는 편향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일단 정의해 봅시다.

교육 불평등 현실은 통계로도 나타납니다. 학원 교육비(사교육비) 통계를 보면 그 차이가 확 드러납니다. 금액보다는 그 격차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득 하위 10%(1분위)와 소득 상위 10%(10분위)의 사교육비 지출 격차는 지난해 통계에선 28배 차이가 났습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는 약 10배에 육박하는 수준이었고, 그 이전에는 6~8배 정도의 차이가 났습니다. 격차는 이처럼 점점 벌어집니다.

고소득층의 자녀들이 저소득층 자녀들보다 학업 성취도가 더 높다는 점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의 발표자료(2009)에서도 확인됩니다. 이에 따르면, 국내외 명문대학 진학률이 높은 외국어고등학교 재학생 아버지의 상위직 비율은 44.7%이고, 민족사관고등학교의 경우는 부모가 상위직인 경우가 87.83%였습니다. 일반 고등학교의 경우는 13.11%, 실업계고등학교의 경우는 3.58%였습니다. 부모의 학력과 지위와 자식의 학력과 지위 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우리의 상식은 각종 연구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최대 간접고용 국가


▎사설학원이 몰린 서울 대치동 학원가. / 사진:연합뉴스
소득 불평등과 그에 수반하는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의 불평등, 사교육비의 과중한 부담, 능력주의와 학력주의의 강고한 결합, 학벌(이른바 명문대학)의 과도한 프리미엄 등이 교육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속화하는 한국 사회의 교육 불평등의 원인과 양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불공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경쟁을 위한 출발선의 불공정한 차이가 교육의 불평등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득 불평등에 따른 교육 불평등은 취업의 불평등을 낳고, 또한 건강과 복지의 불평등과도 상관성을 갖습니다. 부모의 소득과 재산 등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자녀의 교육 기회와 능력이 결정된다는 점은 한국 사회가 계층 간 이동이 불가능한 폐쇄적인 신분제 사회로 이동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가 노력보다는 출생과 소속에 의해, 즉 개인이 선택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인 운(Natural Luck)과 사회적인 운(Social Luck)에 의해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일생이 결정되는 사회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초기 입구에서 인생이 이미 판가름 나는 사회가 되면, 그 입구에 들어가기 위한 각자도생의 시도들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매우 자원 낭비가 심한 비효율이 발생합니다.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을 초래해 신분을 고착화하는 대한민국의 또 하나의 주요 기제는 간접고용입니다. 한국은 세계 최대의 간접고용 국가입니다. 노동 영역과 관련해 2010년의 자료만 보더라도 비정규직이 860만 명(노동자의 50.4%)이고,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해마다 들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은 그들 삶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것인데도, 법은 그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수수방관적입니다.

경영상의 이유로 인한 정리해고는 한국 사회에서 불공정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은 노동자 자신과 가족들의 물질적 곤궁함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으로도 나타납니다. 정리해고는 기업의 영업의 자유와 노동자의 생존권이 충돌하는 지점으로서, 그 불이익과 비용은 어느 한 편에 과도하게 지울 것이 아니라 사용자·노동자·사회가 공평하게 분담하는 편이 정의로운데도, 우리 법제는 그 정의로운 해결책을 도외시해왔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법원의 판결은 정의의 측면에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집니다.

‘근로기준법‘ 제24조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의해서만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조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종래 법원은 경영 합리화와 영업실적 부진까지도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사회적 협동의 이익과 부담을 노사관계에서 불공평하게 할당한 대법원의 판결 사례를 한번 보도록 하죠. 대법원 2003. 7. 22. 선고 2002도7225의 이른바 ‘경영권 판결’에서는 정리해고 철회를 대상으로 하는 쟁의행위에 대해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습니다.

“헌법 제15조는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바, 여기에는 기업의 설립과 경영의 자유를 의미하는 기업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의 취지를 기업 활동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기업은 그가 선택한 사업 또는 영업을 자유롭게 경영하고 이를 위한 의사결정의 자유를 가지며, 사업 또는 영업을 변경(확장·축소·전환)하거나 처분(폐지·양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고 이는 헌법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틀어 경영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오늘의 우리나라가 처하고 있는 경제 현실과 오늘의 우리나라 노동쟁의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 등을 참작하면, 구조조정이나 합병 등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경영 주체의 경영상 조치에 대하여는 원칙적으로 노동쟁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석하여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촉진시키는 것이 옳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면 근로자들의 노동3권이 제한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과도기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기업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투자가 일어나면 더 많은 고용이 창출되고 근로자의 지위가 향상될 수 있으므로 거시적으로 보면 이러한 해석이 오히려 전체 근로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는 길이 된다.”

‘경영상 이유’ 빌미로 정리해고 자행


▎모회사의 공장 가동 중단과 정리해고에 반발해 서울 양천구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농성을 벌였던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 / 사진:연합뉴스
이 판결에는 불평등한 분배는 생산성을 높여서 사회 전체의 파이를 키운다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등 분배 상황보다는 일부에게 더 높은 지위와 권한과 더 많은 소득을 부여함으로써 사회구성원 모두의 처지를 낫게 하고 사회 전체에 기여한다면, 불평등한 분배는 정당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정당한 불평등 조건’입니다. 불평등의 결과가 평등의 결과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 불평등은 정당하다는 이 조건을 위 판결은 충족하는 것일까요? 불평등의 결과 효율성과 생산성이 증가한 경우에 그 혜택의 공정한 분배도 중요하지만 그 비용의 공정한 부담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노동유연성’의 결과 생산성이 증대하겠지만, 그 비용과 부담은 고스란히 노동자가 짊어집니다. 부담과 비용의 공정한 분배도 정의의 문제라면, 불평등의 결과로 생겨난 이득 중 상당 부분은 불평등의 비용을 짊어지는 사회구성원들의 처지 개선에 실제로 투입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부정의 지지하는 법원 판결이 정의 개념 혼란 불러


▎지난 3월,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민주우정협의회 조합원들이 청와대 인근에서 연 ‘우정노동자 결의대회’. / 사진:연합뉴스
그런 환경의 보장 없이 일방적인 해고의 권리를 헌법상의 경영권으로 선언한 위 판결은 부정의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후 우리 법원의 태도는 조금씩 전향적으로 개선되고 있기는 합니다. 2009년 ‘콜트악기 해고무효확인 판결’(인천지방법원 민사11부 2009.5.14.) 이후 법원은 “단순히 도산의 위험성이나 장래 막연한 경영상 위기라는 이유로 그 기업을 폐지하여 근로자를 해고하고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방기하는 결과를 낳는 방향으로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에선 정리해고 과정을 통해 관리직 사원들의 경우 임금 상승이, 남은 생산직 사원들의 경우 노동시간 330% 증가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특수성을 지적합니다. 법원은 주문량 감소로 인한 구조조정이라는 회사 측의 논거가 설득력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2003년 대법원의 경영권 판결은 이후 우리나라 경제계와 언론 등이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하는 정당함’에 대한 논리기준을 제공하면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망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법원 판결을 통한 ‘부정의에 대한 지지’의 경험은 우리 사회에 법에 의한 정의의 실현에 대한 신뢰감을 흔들고, 약자들의 정의에 대한 신념과 용기를 꺾고, 강자의 논리에 따른 여론 조성으로 ‘정의’의 개념을 혼란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특히 부정의를 지지하거나 정의에 무감각한 가치 지향은 마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어떤 지점을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를 피력하면서 차별을 제도화하여 동등해야 할 시민적 지위를 각 영역에서 침범할 우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헌법의 가치를 표방하면서도 암암리에 진행되는 후천적 신분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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