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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5월 제주에서 만난 동북아 ‘평화 방법론’ 

국익보다 인류이익을, 국가주권보다 인류주권을!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日 소카대, 14일 제주대, 15일 경남대·중국문화대와 공동 학술대회
추락하는 한일·양안(兩岸) 관계 개선 방안 중점 모색

봄볕 내리던 5월 제주에서 동북아 평화 방법론을 고민하는 학술대회가 잇따라 열렸다. 5월 14일엔 제주대가 일본 소카대와 공동으로 학술심포지엄을, 다음날엔 경남대와 소카대, 대만 중국문화대가 함께 ‘2019 평화포럼’을 개최했다. 다국적 지식인들이 내놓은 깊은 분석과 기발한 솔루션을 지면으로 옮겼다.


▎5월 14일 제주대와 일본 소카대가 공동 주최한 학술심포지엄이 제주대 공과대학 강당에서 열렸다./사진:한국SGI
1991년 4월 19일 제주국제공항 주변 도로엔 예전에 접하지 못했던 낯선 깃발이 나부꼈다. 붉은 바탕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 바로 소비에트 연방기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한·소 정상회담에 참석하려고 이날 제주를 찾았다.

소련 국가원수의 제주 방문은 한반도 전체로 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맹국인 북한에도 국가원수가 직접 방문한 일은 없었다. 회담 장소가 서울이 아닌 제주도로 정해진 데는 소련이 북한을 의식한 행보라는 분석도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제주를 방문하기 전날, 문정인 당시 미 켄터키대 교수가 제주 지역 신문인 [제민일보]에 특별 기고를 실었다. 역사적 회담을 계기로 제주가 어떻게 국제 위상을 정립해 가야할지, 제주 출신 학자로서 자문했다. 그 해답이 ‘평화의 섬’ 제주였다.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제주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한·소 정상회담 이후 중국 장쩌민, 미국 빌 클린턴, 일본 하시모토 류타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열강 정상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2000년엔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진 끝에, 2005년 1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세계 평화의 섬’ 선언문에 서명했다. 문정인 교수의 바람처럼 제주가 “신혼여행의 섬에서 평화의 섬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케다 회장과 제주대의 20년 인연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1991년 4월 20일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아아, 이 곳은 시인이 오는 섬이로구나.’ 제주도에 도착해 곧바로 나를 사로잡은 감개(感慨)였다. 자동차가 푸르름의 길을 간다. 나무들은 한 그루 한 그루가 비로드 같은 윤기로 빛나고 있었다.”

평화의 섬 논의가 물꼬를 트던 1999년 5월,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은 제주도를 처음 방문했다. 제주 풍광에 감탄을 마지않던 이케다 회장은 이어 “정치가도 재계인도 이 섬에 일단 오면 눈앞의 이해 등을 잊고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비망록을 써내려갔다.

이때 이케다 회장은 국립 제주대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일본 소카(創價)대 설립자이기도 한 그에게 제주대가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다. 제주대는 ‘세계에 평화주의를 넓히고 인류의 문화 향상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해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내렸다.

올해는 그 인연이 이어진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제주대와 소카대는 이를 기념하고자 5월 14일 제주대 일원에서 학술교류 협약식과 공동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학술교류 협약은 제주대 평화연구소와 소카대 평화문제 연구소가 5월 14일 오전 본관 회의실에서 체결했다. 양 대학은 1998년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해 지금껏 교수와 학생들이 양 대학을 교환 방문하거나 한 학기 또는 1년간 상호 교류하면서 관계를 이어온 터다. 관계자들은 이번 협약이 교육 분야에 국한했던 교류를 평화 연구 분야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점에 의의를 뒀다.

이어 오후 2시 공과대학 강당에선 ‘평화의 무지개 만들기’를 테마로 한 공동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은 300여 명의 교직원과 학생이 강당을 메우는 등 열띤 분위기를 뿜어냈다.

한국 외교·안보 브레인 집결한 학술대회


▎제주대 평화연구소와 소카대 평화문제연구소는 5월 14일 제주대 본관 회의실에서 학술교류 협약을 체결했다. / 사진:한국SGI
송석언 제주대 총장은 환영사에서 “교육·문화·평화 등의 분야에서 인류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해 온 이케다 박사에게 본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던 것에 대해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바바 요시히사 소카대 총장은 “귀 대학에서 이케다 창립자에게 수여한 학술 칭호는 소카대 교직원과 학생에게도 최고의 기쁨과 긍지였다”며 “제주대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인류 평화에 공헌하는 최고 학부로서 ‘인간교육’의 연대를 한층 더 굳게 다져가고자 한다”고 화답했다.

심포지엄은 1부와 2부로 나눠서 진행됐다. 1부의 주제는 ‘법과 평화’. 나카야마 마사시 소카대 법학부 교수와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발제에 나섰고, 김부찬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좌장을 맡아 토론을 이끌었다.

나카야마 교수의 발제문 주제는 ‘21세기 평화와 국제법-인간의 안전보장을 위한 세계질서구축’으로 압축됐다. 그는 국제사회가 갈수록 ‘법의 지배’를 필요로 하고 있고, 실제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나카야마 교수는 “세계화가 자유·민주주의·인권 등 가치의 보편화를 가져왔다”며 “이러한 변화 가운데 국가주권에 대한 인권·인도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고조돼 ‘인권의 주류화’라는 조류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99년 코소보 사태 당시 NATO군이 ‘인도적 개입’을 명분으로 개입한 사례를 근거로 들었다. “인권 보호의 1차 책임이 있는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경우 국제사회가 그 책임을 완수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는 또 “국제사회의 합의 형성에 있어 국익보다 인류이익을, 국가주권보다 인류주권을 기축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케다 회장의 과거 발언을 들어 “국제법이 국익의 조정에 그치지 않고 인류이익을 반영한 ‘세계법’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제법과 평화-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를 발표한 고봉진 교수는 국제법의 미래에 대해 신중론을 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정의를 말하지만, 그것들을 절충해 구속력 있는 ‘세계법’을 만들긴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자연법은 그 자체로 정의로움을 대변하지만, 사람마다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게 가장 큰 약점”이라며 “가톨릭과 개신교가 맞붙은 ‘30년 전쟁’에서 양측은 모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연법을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1부에서 위로부터의 평화를 논했다면, 2부에선 아래로부터의 평화를 화두로 삼았다. 주권국가가 아닌, 국경을 넘어서는 시민들의 관계에 주목했다.

조성윤 제주대 평화연구소장은 지난해 11월 제주 4·3사건 70주년 특별기획으로 진행된 전시회 ‘오키나와 전(戰)의 기억과 그림’ 준비 과정을 돌이켰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를 몸으로 겪은 주민들이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린 그림 130여 점을 전시했다고 한다.

조성윤 소장은 “이 작품들은 막연한 언어보다도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그리고 일본군과 미군의 시선이 아닌 지역 주민들의 시선으로 기억을 재현하게 해줬다”며 국경을 초월해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제주대에서 불씨를 피운 ‘평화 방법론’의 바통은 이튿날인 5월 15일 서귀포시 한국SGI 제주 한일우호연수원으로 전달됐다.

경남대와 소카대, 그리고 대만 중국문화대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SGI가 후원한 ‘2019 평화포럼’이 이날 오전 열렸다. ‘동아시아의 갈등, 협력 그리고 평화’를 주제로 한·일 관계와 양안(兩岸, 중국과 대만)관계, 남북관계를 다뤘다.

경남대와 소카대, 중국문화대는 동아시아 평화연구 활성화 및 3개국 간 학술교류 증진을 목표로 2017년부터 매년 각국을 돌아가며 평화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2017년엔 일본 오키나와에서, 지난해엔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렸다.

올해 평화포럼엔 경남대의 박재규 총장과 이관세 극동문제연구소장, 북한대학원대의 김선향 이사장과 안호영 총장 및 양무진 부총장 등 한국·일본·대만의 외교안보 전문가 30여 명과 제주도민 등 총 100여 명이 참여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던 박재규 총장은 개회사에서 최근 요철을 지나고 있는 남·북·미간 협상국면을 언급했다. 박재규 총장은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은 지난 70년 동안 지속됐던 상호 불신과 반목의 역사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협상이 될 것”이라며 협상 당사자들의 인내를 주문했다.

평화는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


▎‘2019 평화포럼’에 참석한 내빈들은 동북아 주요 국가간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사진:한국SGI
차오 치엔민 대만 중국문화대 사회과학대학장은 환영사를 통해 미·중 경쟁과 중국의 전략적 비전, 중국에 대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태도, 대만해협의 새로운 상황 등에 대해 설명하며 이번 포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안호영 북한대학원대 총장은 외교통상부 1차관을 거쳐 2013년 6월부터 4년여 간 주미 대사를 지낸 정통 외교 전문가다. 안호영 총장은 지난 70년간 한국·일본·대만이 이룩한 경제·정치·안보 측면의 발전 성과를 나열했다. 나아가 3개국이 직면한 도전 요인으로 ‘신 냉전’이라고 불리는 전략 환경,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테러리즘, 대규모 난민, 사이버전 등을 거론했다. 그는 “모든 국가가 공통으로 직면한 전 지구적 도전이지만, 3개국에는 더욱 엄중한 도전”이라고 내다봤다.

기조연설에 이은 제1세션은 ‘한국과 일본의 갈등과 협력’을 다뤘다. 일본 정찰기의 위협 비행에 맞선 한국 해군 구축함의 레이더 조준 문제와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에 대한 ‘전범의 아들’ 발언 등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한·일 관계를 반영한 구성으로 읽혔다.

하르트무트 렌츠 소카대 교수는 한·일 간 협력의 진정성에 대한 불확실성 및 정보의 비대칭성이 양국 협력에 혼란을 야기한다고 지적했고, 같은 대학의 조나단 럭허스트 교수는 한·중·일 정상회의가 지역 차원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해법을 내놨다.

또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양국 간에 군사력, 경제발전, 민주주의의 질 등에서 균형이 이뤄진 반면, 상호 안보위협 인식 수준에서 불균형이 존재한다”며 “이러한 비대칭성이 악순환을 초래한 탓에 지난 10년 동안 한·일 관계가 개선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北 체제보장과 평화체제 수립, 동시 걸음해야”

‘대만과 중국의 갈등과 협력’을 주제로 열린 제2세션에서 팡치엔구오 중국문화대 교수는 “대만이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면 차후에 비싼 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상만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도 “미국과 대만이 현재 정책 방향을 변경하지 않는 한 중국이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북 관계를 다룬 마지막 세션에서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한·미 간 긴밀한 공조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선순환을 이끌어온 점 ▷한반도 비핵화 의제를 북·미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북 관계의 테이블에 올린 점을 들어 “과거 안보정책이 평화를 지키는 수세적 차원이었다면 이젠 평화를 만들어가는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평가했다.

임을출 교수는 “그러나 비핵화 진전 없이 남북 간 지속가능한 평화가 이어지기 어렵다”며 “북한의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토대로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가 선순환 하도록 만드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히데키 타마이 소카대 교수는 “북한의 정권 안보와 평화체제 구축을 모두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하룻낮 꼬박 이어진 이날 포럼은 오후 5시가 돼서야 막을 내렸다.

이케다 회장은 1971년 일본 도쿄에 소카대를 건립하면서 ‘인류의 평화를 지키는 요새이어라’를 건학 이념으로 삼았다. ‘발고여락(拔苦与樂,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나눈다)’의 마음으로 행동하자는 사명을 담은 글귀다. 한때 미군에 대항한 일본군의 천연 요새로 무장하기도 했던 제주는 70여 년을 지나 평화를 지키는 가장 큰 요새로 변모해 있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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