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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18)] 옥(玉): 왕(王)이 된 옥(玉) 

5德 갖춘 무결점의 화신 군자와 나라의 상징으로 

단지 아름다움 넘어 타인 존중하거나 임금 지칭하는 의미로도
죽은 이가 다시 태어나 영원한 삶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곤륜산맥 최고봉인 해발 7649m의 공걸봉. 곤륜산은 중국인들에게 ‘모든 산의 근원’, ‘용맥(龍脈)의 시작’이라 불리는 정신적 중심이다.
1. 옥출곤강(玉出昆崗)

“금생여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昆崗).”

“금은 여수에서 생산되고, 옥은 곤강에서 나온다네.” 금(金)에 대해서는 월간중앙 5월호에서 설명했고, 이번에는 옥(玉)을 설명할 차례다.

[천자문]에서 옥이 나온다고 한 곤강(昆崗), 여기서 곤(崑)은 곤륜산(崑崙山)을 말하고, 강(崗)은 그물처럼 얽혀진 ‘산언덕’을 뜻한다. 그래서 곤강은 구체적 지명이라기보다는 ‘곤륜산맥’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곤륜산은 중국의 신화에서부터 등장해 ‘서왕모(西王母)’가 산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산의 상징이다. 네팔 고원의 동부에서 시작해 신강(新疆)과 티베트(西藏) 사이로 해서 청해(青海)성까지 이어지는 길이 2500㎞, 너비 130~200㎞ 되는 엄청난 산맥이다. 최고봉은 7649m 높이의 공걸봉(公格爾峰)이고, 해발 5500~6000m 높이의 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중국인들은 이를 ‘모든 산의 시발이자 근원’이라 부른다. 중국의 상징인 ‘용(龍)’, 그 ‘맥(脈)’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옥으로 유명했다. 우리가 잘 아는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의 주인공 화씨벽(和氏璧)의 산지이기도 하다. 벽(璧)은 임금을 상징하는 크고 둥글게 만들어진 옥의 일종이다. 이 옥을 완전하게 가져왔다는 뜻의 완벽(完璧), 지금은 결점 없는 완전함을 뜻한다.

이곳 외에도 중국에는 유명한 옥의 산지가 많다. 신강성의 화전옥(和田玉), 요녕성의 수암옥(岫岩玉), 하남성의 독산옥(獨山玉), 섬서성의 남전옥(藍田玉) 등은 인구에 회자되는 4대 명옥 산지다. 특히 요녕성에서는 약 8000년 전의 옥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신석기 초기 유적이고, 세계사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 그 의미가 특별하다. 옥 숭배는 이처럼 오래됐다. “군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옥을 몸에서 떼지 않는다(君子無故, 玉不離身)”라고 한 [예기]의 말처럼 일찍부터 옥은 중국인들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을까?

2. 옥(玉)의 어원과 상징


옥은 보통 경도(硬度)가 5.5 이상 되는 돌을 말한다. 경도가 강해질수록 귀하게 여겨졌는데, 5.5~6이면 연옥(軟玉), 6.5~7이면 경옥(硬玉)으로 분류한다. 또 색깔과 무늬와 희귀 정도에 따라 귀함이 정해진다.

그중에서도 중국인들은 경도가 7 정도 되는 경옥으로 에메랄드그린색을 가진 ‘비취(翡翠)’를 특별히 귀하게 여기고 좋아했다. 경도고 높고, 색깔도 특이하고, 멀리 떨어진 미얀마 경계에서 생산돼 희귀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대만의 고궁박물원을 본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특별히 자랑하는 보물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청나라 때의 ‘비치로 만든 배추’인데, 중국인들의 옥 사랑을 잘 보여준다. 그 귀하디 귀한 비취옥으로 실제 배추 크기로 조각한 작품이다. 그 위에 앉은 메뚜기까지 마치 살아 있는 듯 사실적이다. 청나라 광서제(光緒帝)의 후비였던 근비(瑾妃)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이나 양쪽으로 점 남겨 王자와 구분


▎대만 고궁박물원에 소장돼 있는 비취옥으로 만든 배추 조각품. 크기는 길이 18.7㎝ 너비 9.1㎝ 두께 5㎝이다. / 사진:하영삼
크기도 크기지만 실제 배추처럼 아래는 흰색이고 잎은 초록색으로 매우 자연스럽다. 배추의 주름과 결은 물론 잎에 앉은 메뚜기의 다리 털까지 섬세하게 조각됐다. 어디서 저런 재료를 찾았으며, 저 단단한 옥을 어쩌면 저렇게 섬세하게 조각했던 것일까? 황제라도 그 정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배추는 순결을 상징하고 메뚜기는 다산을 상징한다. 혼수품으로서 더 없는 안성맞춤이다. 원래 자금성의 영화궁(永和宫), 즉 근비의 처소에 있던 것을 장개석 정부가 1949년 대만으로 갈 때 가져갔다. 최상의 재료와 최고의 기술과 멋진 상징이 하나로 합쳐진 걸작 중의 걸작이다.

사실, 갑골문에서만 해도 옥(玉)자는 옥 여러 개를 실로 꿴 모습일 뿐이다. 원시사회에서 목걸이 같은 장식으로 쓰고자 꿴 옥을 형상화했다. 금문 이후 형체가 王(왕 왕)자와 비슷해 지자, 오른쪽이나 양쪽으로 점을 남겨 왕(王)자와 구분했다.

초기 한자에서 옥(玉)은 귀한 장식용 ‘옥’이라는 뜻 외에는 별 다른 상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옥’을 엄청난 문화상품으로 승화시킨 것은 후대의 철학서들이었다. 특히 한나라 때의 허신(許愼)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설문해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옥의 아름다움은 다섯 가지 덕(德)을 갖췄다. 윤기가 흘러 온화한 것은 인(仁)의 덕이요, 무늬가 밖으로 흘러나와 속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의(義)의 덕이요, 소리가 낭랑해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은 지(智)의 덕이요, 끊길지언정 굽혀지지 않는 것은 용(勇)의 덕이요, 날카로우면서도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은 결(潔)의 덕이다.”

옥에 대한 찬미가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허신의 찬사처럼 옥은 겉에서도 속을 볼 수 있기에 ‘정의롭다’. 겉 무늬와 속 무늬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같다는 것은 남을 속이지 않고, 언제나 정직하고 정의로움의 상징이다.

물론 이러한 찬사가 허신에게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의 [예기]에서도 매우 적극적인 찬미가 등장했다. 아예 옥을 군자의 덕에다 직접 비유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절로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고 광택이 나는 것은 인(仁)의 상징이고, 섬세함과 견고함은 지(知)를 나타내고, 모가 나 날카로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은 의(義)의 상징이고, 꿰어서 아래로 늘어뜨린 구슬은 겸허의 상징으로 예(禮)를 뜻하고, 두드려서 나는 소리는 멀수록 더 맑게 더 길게 이어지고 끝나도 남는 여운은 악(樂)을 상징한다. 티가 있어도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고 아름답다고 해서 티를 가리지도 않는 것은 충(忠)의 상징이다. 안에서 나오는 광채가 표면에 골고루 투과되는 것은 믿음(信)의 상징이다. 옥에서 나오는 빛은 무지갯빛과 같아 하늘(天)을 상징한다. 산천에서 난 정기이므로 땅(地)을 상징한다. 규(圭)와 장(璋) 같은 옥은 특별히 천자의 명을 전달하므로 덕(德)의 상징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 모두가 귀하게 여기므로 도(道)의 상징이다.”

군자가 갖춰야 했던 인(仁)·지(知)·의(義)·예(禮)·악(樂)·충(忠)·신(信)·덕(德)은 물론 하늘과 땅, 나아가 도(道)의 상징으로까지 승화시켰다.

중국인들 8000년 전부터 숭배한 보석


▎사진:하영삼
이렇게 철학적 의미가 더해진 옥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물건도 비견될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 됐다. 이는 [설문해자]의 오덕(五德), [관자]의 구덕(九德)과 함께 [예기]의 십덕(十德)이라 불리면서 인구에 회자됐다. [시경]에도 군자를 옥에 비유한 노래가 자주 보인다. 그리하여 옥은 군자가 몸에 항상 지녀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규범의 상징이 됐고, 중국인들은 팔에는 옥팔찌를 끼고, 귀에는 귀고리를, 목에는 목걸이를 달고, 몸에는 패옥을 차, 옥의 이러한 정신을 항시 되새겼다.

사실 중국인들의 옥 숭배 전통은 매우 이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8000년 전의 요녕성 유적 외에도 중국 장강 하류의 태호(太湖) 주위에 분포한 양저(良渚) 유적에서도 정교한 제의용 옥이 여럿 발견됐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5300~4300년 전의 신석기 후기 유적지이다. 특히 종(琮)이라 불리는 옥기는 겉은 네모이고 안은 둥근 모습의 속이 빈 기둥 모양을 했다. 밖의 네모는 땅을, 안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상징해 천지 신께 제사를 드릴 때 쓰던 제의용 옥기로 알려졌다. 이처럼 옥의 숭배는 상상보다 이르다.

珍(보배 진)에서 보는 것처럼 옥은 중국인들에게 단순한 보석을 넘어서 더없이 보배로운 길상(吉祥)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옥의 무늬가 드러나다’는 뜻을 가진 現(나타날 현)에서처럼 겉에서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옥의 무늬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징이 더해져 옥은 몸에 걸치는 장신구는 물론 신분의 상징이자 권위를 대신하는 도장(璽, 새)의 재료로 쓰였으며, 때로는 노리개로, 심지어 시신의 구멍을 막는 마개로도 쓰였다.

이 때문에 옥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예물로도 사용됐다. ‘순자’의 말처럼, 사자를 파견할 때는 홀(珪, 규)을, 나랏일을 자문하러 갈 때는 둥근 옥(璧, 벽)을, 경대부를 청해올 때는 도리옥(瑗, 원)을, 군신관계를 끊을 때는 패옥(玦, 결)을, 유배당한 신하를 다시 부를 때는 환옥(環, 환)을 사용함으로써 옥 모양에 따라 사안의 상징성을 표현했다.

3. 옥(玉)의 의미 확장

우리의 옥편에서는 옥(玉)을 어떻게 풀이했을까? [훈몽자회]에서는 “옥 옥”이라고 했고, [전운옥편]에서는 “옥”이라고 하면서 뜻에는 보옥, 사랑하다, 이루다 등의 뜻이 있다고 했다. [자류주석]에서는 [설문해자]의 오덕을 인용했고, 옥(玉)자에 든 점의 위치에 따른 이체자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신자전]은 [전운옥편]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고, 예문을 상세히 더했다. 이렇게 본다면 옥편에 담긴 옥(玉)은 옥이 기본 의미이고, “사랑하다”, “이루다”는 뜻이 핵심 의미다.

그러나 어휘에는 옥의 상징이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남았다. 개결함·훌륭함·아름다움을 넘어서 남을 존중하거나 공경해 높이는 말로도, 최고의 지존을 지칭하는 임금의 상징어로도 쓰였다.

예컨대 옥황(玉皇)은 옥황상제(玉皇上帝)와 같은 말로 도가에서 ‘하느님’을 일컫고, 옥새(玉璽)는 임금의 도장으로 국권의 상징이며, 옥엽(玉葉)은 옥으로 된 가지라는 뜻으로 임금의 가문이나 문중을 존대하는 말이다. 모두 ‘임금’처럼 최고의 존재를 말한다. 이후 이런 극존중은 임금에게 한정되지 않고 사대부로, 일반인으로 전해져 상대를 존중하는 보편적인 말로 쓰였다.

서양에서도 신비한 영험 지닌 돌로 생각

예컨대 옥용(玉容)은 상대의 얼굴을, 옥체(玉體)는 상대의 몸을, 옥함(玉函)과 옥언(玉言)과 옥음(玉音)은 ‘남의 편지’를 존중해 지칭할 때 쓰인다. 그런가 하면 훌륭함을 더하고자 일반 사물에 옥(玉)을 더하기도 했다. 예컨대, 옥식(玉食)은 맛난 음식을 말하며, ‘옥수수(玉蜀黍)’를 부르는 옥미(玉米)는 ‘맛난 수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옥토(玉兎), 즉 옥토끼는 달에 산다고 전해지는 ‘토끼’이다. 옥토끼(玉兎)는 미인 항아(嫦娥)와 관련된 전설에 나온다. 인간 세상에 어느 날 태양이 10개나 뜨게 되자 상제가 활의 명수 후예(后羿)를 보내 이를 해결해 줬다. 그것이 후예사일(后羿射日), 즉 후예가 9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다.

항아(嫦娥)는 그 후예의 아내다. 인간세상의 영웅이 된 후예와는 달리 남편과 세상으로부터 점차 소외돼 날로 고독해져 병이 든 항아,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西王母)로부터 받은 약을 혼자 먹은 죄로 천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달로 가 흉측한 모습의 두꺼비로 변했다는 전설이다. 두꺼비가 이후 옥토끼로 변했다.

이런 아름답고도 슬픈 신화 때문일까?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까지 탐사하는 ‘우주 굴기’를 진행하고 있는 중국, 달로 가는 우주탐사선의 이름을 항아호(嫦娥號), 달에 내려 탐사하는 차 이름을 옥토호(玉兎號)라고 붙였다. 이걸 두고 중국의 현지 음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창어호’니 ‘위투호’니 하고 불러대니 도대체 무슨 뜻이지 헷갈리기 십상이다. 한자음 표기의 원지주의를 채택할 때 지향했던 근거가 주체성 확보였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오히려 우리의 주체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식의 한자음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옥토’면 되지 ‘위투’가 될 필요가 없고, ‘항아’면 되지 ‘창어’가 될 필요가 없다. ‘위투’가 되고 ‘창어’가 되는 순간, 우리의 전통도 우리의 정체성도 우리의 자존심도 오히려 파괴되기 때문이다.

4. 약이 된 옥


▎1968년 하북성 만성(滿城)에서 발견된 서한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금루옥의(金縷玉衣). / 사진:하영삼
이런 상징을 가진 옥, 그것은 이미 보통의 ‘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문명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어권에서도 옥은 단순한 돌이 아닌 신비한 영험을 지닌 것으로 생각됐다.

예컨대 옥(玉)을 뜻하는 영어 ‘jade’는 “piedra de (la) ijada”(1560년께)에서 왔는데 ‘신비한 영험을 지닌 돌’을 뜻한다. 또 대항해 시절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에서 탈취해간 돌도 ‘옥’이었는데 그것은 처음에 ‘신장을 치료해 주는 신비한 돌’(stone of the side)이라고 불렸다. 멕시코인들이 옥이 가진 치료 기능을 알았고, 특히 신장에 좋다고 생각했던 때문이다.

먹으면 수명 연장된다는 속설도


▎죽은 이의 입에 넣던 옥인 반함(飯含). 주로 매미 조각이 쓰였는데 허물을 벗는 곤충의 상징인 매미를 통해 다른 세상에 태어나서 영생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중국에도 비슷한 언급이 보인다. 전통 의학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는 옥을 두고 “맛은 달며, 성질은 뜨겁거나(熱) 춥거나(寒) 따뜻하거나(溫) 차지도(凉)도 않은 평화로운 성질을 가졌으며 독성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옥을 핥거나 계속 만지고 몸에 지니면 “진액을 만들어 갈증을 멈추게 하고(能生津止渴),위속의 열기를 제거하며(除胃中之熱),가득한 번뇌를 평정시킨다(平煩懣之氣). 심장과 폐를 강하게 하고(滋心肺),성대를 윤활하게 하며(潤聲喉),모발을 잘 자라게 한다(養毛髮)”고 했다.

죽은 이의 입에 넣던 옥인 반함(飯含). 주로 매미가 쓰였는데, 허물을 벗는 곤충의 상징인 매미를 통해 다른 세상에 태어나서 영세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일까? 중국에서는 옥을 먹으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속설도 전해온다. 뿐만 아니라, 옥으로 아홉 구멍 모두를 막았더니 시신이 썩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진(晉)나라 때 나온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한나라 왕들은 장례 때 구슬로 만든 저고리와 옥으로 만든 갑옷(珠襦玉匣)을 입혔다고 한다. 옥이 시신의 부패를 막아주고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사실로 밝혀준 것이 ‘금루옥의(金縷玉衣)’, 금실로 꿰맨 옥 옷이다. 금과 옥은 영원히 변치 않고 영원히 썩지 않는 것의 상징이다. 1968년 하북성 만성(滿城)에서 서한 경제(景帝)의 아들 유승(劉勝, B.C. 113년 사망)의 무덤이 발굴됐다. 그의 부인 두관(竇綰)도 합장됐다. 유승의 옥의에는 2498편의 옥 조각과 1.1㎏의 금실이 쓰였고, 두관의 옥의에는 2160편의 옥조각과 700g의 금실이 사용됐다.

게다가 두 눈과 두 귀, 두 개의 콧구멍과 입, 그리고 생식기와 항문 등 시신의 아홉 구멍을 모두 옥으로 막았다. 옥으로 만든 베개를 베었고, 머리 갑옷 윗부분은 가운데 구멍이 난 둥근 벽옥(璧玉)을 썼고, 옥의 위로는 패옥이 장식됐다.

이런 ‘금루옥의’는 1983년에는 광동성의 서한 남월문왕(南越文王) 조매(趙昧)의 무덤에서, 1995년 강소성의 서한 초왕(楚王) 무덤에서, 1987년 하남성의 서한 양공왕(梁共王) 유매(劉買)의 무덤 등에서 계속 발견됐다. 지금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20여 점이나 발견됐다.

옥으로 구멍을 막던 전통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상나라의 무덤에서도 입에 넣은 옥이 많이 발견된다. 이런 옥을 반함(飯含)이나 옥함(玉琀)이라 한다. 상나라 때는 옥으로 만든 매미(玉蟬)·누에(玉蠶)·물고기(玉魚)·관(玉管) 등이 많이 보이고, 춘추 전국시대 때는 돼지(玉豬)·개(玉狗)·소(玉牛)·물고기(玉魚) 등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가장 많이 쓰였던 것은 매미였다. 매미는 허물을 벗는 곤충의 상징이다. 죽은 시신이 다른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 영원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5. 보물에서 왕으로, 다시 나라로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백제 묘실에서 나온 목걸이. 흩어진 구슬 오른쪽으로 굽은 옥이 보인다.
옥(玉)과 왕(王)은 원래 다른 글자였다. 하나는 꿰어 놓은 옥을 그렸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상징하는 모자나 도끼를 그렸다. 그런데 권위의 상징인 모자나 도끼가 왕(王)으로 변하자, 이를 두고 “천지인(天地人)의 셋(三)을 하나로 관통할(丨) 수 있는 존재”로 해석해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 시작은 공자였다. 이후 허신의 [설문해자]에서는 이에 다 “천하 모두가 귀의하는 존재”라는 말까지 덧붙임으로써 왕(王)의 존재를 더욱 극화했다.

옥(玉)도 마찬가지였다. [예기]와 [설문해자]를 거치면서 옥에는 특별한 의미가 더해졌고, 그것은 보물의 상징이 됐다. 그래서 보물을 뜻하는 보(寶)에 옥(玉)이 들었는데, 집안(宀)에 옥(玉)과 돈(貝)이 가득한 모습이다. 여기서 부(缶)는 발음을 나타내는 요소다. 보(宝)는 보(寶)의 속자인데, 옥(玉)과 돈(貝) 중에서 옥(玉)이 선택된 것은 옥이 더 귀하고 ‘보배로운’ 것임을 말해준다.

무엇이 참다운 가치인지 되새겨봐야 할 요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을 줄여서 쓸 때도 옥(玉)이 들어간 국(囯)으로 쓰기도 했다. 바깥을 둘러싼 囗(나라 국, 에워쌀 위)은 성곽을 그려 한 나라의 ‘영역’을 뜻했다. 그렇다면 국(国)은 옥(玉)이 가득한 곳, 보물로 가득한 곳이 나라(囗)임을 선언했다.

국(國)의 이체자 중, 이와 비슷한 것으로 국(囯)이 있다. 이는 옥(玉) 대신 왕(王)이 들어가 ‘나라’가 왕(王)의 소유임을 천명했다. 국(囯)자는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의 속자에서 특히 많이 사용됐다. 1851년에 건국한 태평천국 때는 국(囯)이 국(國)을 대신해 정식 국호를 나타내는 글자로 쓰였다.

그들이 썼던 ‘태평천국(太平天囯)’은 태평스런 하늘이 내려준 나라라는 뜻이며, 태평천국의 주인 홍수전의 나라임을 천명했다. 이는 그 후 60년의 세월이 지난 1911년 새로 세워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국호와 매우 대비를 이룬다. 민국(民國)은 국민이 세운 나라, 국민의 나라, 국민을 위한 나라라는 뜻이다. 이를 강조하고자 중화민국에서는 국(國)을 국(囯)으로 바꿨다. 민(民)이 국(囗) 속에 들어 ‘민(民)이 주인 되는 나라’임을 천명했다. 그런 이상과 바람이 민국(民國)을 대신하여 민국(民)에 담겼다.

여하튼 이런 과정을 통해 옥(玉)은 왕(王)과 통했고, 동등한 지위로 올라섰다. 그 때문일까? 현대 옥편의 214부수에서 옥(玉)은 왕(王) 부수에 통합됐다. 정말이지 왕이 된 옥이 아니던가?

6. 사람은 배워야 도리를 안다

“옥불탁(玉不琢), 불성기(不成器)”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옥이라도 다듬지 않으면 기물이 되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다듬고 꿰지 않으면 아무리 귀하고 훌륭한 옥이라도 ‘보물’이 되지 못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말이 “인불학(人不學), 부지도(不知道)”이다. “사람은 배워야 도리를 안다”는 뜻이다.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인류의 영장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도 도리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렇듯 옥(玉)을 보면서 훌륭한 인격을 생각했고, 그 어느 것과도 비견될 수 있는 고상하고 훌륭한 인품을 부여하며, 군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리하여 ‘군자’들은 옥을 장식물로 달고 다니면서 옷의 미덕을 생각했고, 옥을 곁에 두고 만지작거리며 옥의 덕성을 되새겼다. 그 때문에 옥(玉)은 보물의 상징이 됐고, 왕(王)과 통합됐고, 나라를 상징하는 국(國)에도 당당히 들어가게 됐다 옥(玉)도 금(金)도 모두 한갓 돈으로만 생각하는 작금의 사회, “숨 쉬는 것조차도 자본주의를 벗어나 쉴 수 없다”는 자조는 정말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속박인가? 무엇이 진정한 보물인지, 무엇이 참다운 가치인지 발상의 전환을 옥(玉)을 통해 생각해 본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 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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