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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7) 

나와 다른 상대 ‘청산’ 善을 가장한 정의의 남용이다 

‘나만 옮음’이라는 독선적 진영논리는 분열·갈등만 키워
원효의 화쟁(和諍)으로 서로 다른 정의의 공존 모색해야


▎사진:이정권 기자
우리는 그동안 ‘부정의’(不正義)를 통해 ‘정의’(正義)를 발견해 보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상존하고 있는 불공정·불평등·배제·소외 등에서 부정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 이러한 사회적 부정의를 강화하고 고착화하는 데에 ‘법제도’가 많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와 함께 부정의한 법과 현실을 제거해도 세상이 정의로워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하나의 사안에 각자의 진실, 각자의 정의가 대립합니다. 어쩌면 각자의 이해관계를 각자마다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의의 다원성. 옳음과 옳음끼리의 충돌. 이것이 정의를 모호하게 하고, 우리가 정의를 대면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적 부정의를 통해서 우리는 ‘부정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정의의 형상을 발견하긴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현실에 드러나는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에서 한 길 더 들어가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탐색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진태원 선생님은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본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탁월한 논의를 전개해주셨습니다. 법과 정의의 관계는 항상 더 이상 진전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아포리아로 돌진하지만 이를 견뎌내는 힘이 우리에게 정의를 일깨운다는 것. 법과 정의의 상호 견제와 협상, 그리고 법이 윤리학적 정의에서 영감을 받고 고취되어 바뀌어가는 가능성이 최악의 부정의와 도착적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희망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현실적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담론을 넘어 정의를 대면하기 위한 ‘정의에 대한 태도’에 대해 논의를 전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정의에 접근할 수 있는가. 먼저 종교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정의로 가는 길에 대해 조성택 교수님(고려대 철학과)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진실을 모색하는 자는 신뢰하되, 진실을 발견한 자는 의심하라.”(앙드레 지드 André Gide)

“완전한 확실성, 최종적 진실 따위는 한낱 허구의 산물이며 어떤 과학 분야에서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유연한 사고방식은 현대과학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큰 축복이다. 단 하나의 진리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소유한 자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Max Born,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연설(1954) 중)

하나의 정의, 최종적 진실을 의심하라


▎불교적 관점에서 정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조성택 고려대 교수
두 개의 인용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정의를 탐색하려면 최종적 진실, 하나의 정의가 있다는 믿음을 먼저 의심하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전제를 깔고 먼저 저는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정의’의 용례와 맥락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사회제도로서의 정의를 의미하는 경우입니다. 존 롤즈(John Rawls)의 저작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다루고 있는 정의의 문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정의론의 교과서로 통하는 이 저서의 제목이 The Theory of Justice가 아니라 A Theory of Justice라고 하는 것은 음미해 볼 일입니다. 롤즈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정의’에 관한 보편이론이 아니라 정의에 관한 한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롤즈에게 있어서 정의란 곧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로서 사회구성원 간에 합의된 제도적 원칙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역에서의 정의는 일종의 구성적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 합의(혹은 역사적 경험)의 가능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지만 어쨌든 ‘정의’에 관한 동서양의 고전적 담론은 사회제도로서 정의에 관한 문제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현실에 있어 이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 문제 혹은 교육·경제·복지 등과 같은 정부정책에 관한 논쟁으로 연결됩니다. 객관성과 합리성 그리고 사회적 실현성이 논쟁의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필요하지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맥락에서의 ‘정의’에 관한 논의입니다.

비례대표제나 입시제도, 기회 균등과 능력에 따른 차등원칙, 성장과 분배, 평등과 자유 등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되는 사회적 의제들이 이 영역의 문제입니다. 개인의 권리와 공공적 이익의 충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과 권한 등 다양한 사회적 갈등도 같은 맥락입니다.

둘째, 제도 내에서의 부정의, 즉 비리나 불법·탈법에 대한 정의의 문제입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의 채용비리·불공정거래·부정 청탁·권력남용 등이 불거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맥락에서의 정의의 문제입니다. 이 경우 부정의란 사법적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거나 실현되지 않는 상태, 탈법 혹은 불법적 상태입니다. 이는 해결해야 할 과제와 같은 것들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도덕적 비난과 사법적 처벌이 구분되지 않은 채 정치쟁점화 되거나 또 다른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셋째, 흔히 ‘정의감’(Righteousness Mind)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도덕적 ‘정의’의 문제입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서 이해되는 일종의 도덕적 감수성이면서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루고 있는 정의의 문제가 바로 이 맥락에서의 정의입니다. 샌델이 논의하고자 하는 정의는 ‘옳음’ 혹은 ‘옳은 행위’를 뜻합니다. 이 정의는 앞서 언급한 롤즈의 ‘사회적 정의’ 즉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원칙으로서의 ‘정의’와는 그 맥락적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옳은 행위’로서 정의의 문제에는 사실판단에 앞서 도덕적 판단이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 토론과 타협의 여지없이, 옳고·그름, 심지어 선·악의 이분법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 세 정의의 영역은 현재 우리의 현실 상황에서는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얽혀 있습니다. 사실 근대 이후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이 세 가지 영역의 개념적 구분을 전제로 세워진 정치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행위의 측면에선 정치행동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제도 혹은 체제 측면에선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천의 목적이 다르고 판단의 준거와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도덕이 뒤섞일 때 어떤 재앙과 같은 상황이 도래하는지는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정치에선 중요한 사회적 이슈나 사안에 대한 진지한 설명과 설득 그리고 공적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치적·사회적 이슈들은 대중들의 도덕적 감성에 호소하는 ‘레토릭’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중들의 도덕적 감성에 호소하는 정치인들의 레토릭은 그야말로 싸구려입니다. 정제되지 못한 막말뿐 아니라 사안 자체를 ‘찬성과 반대’ ‘옳음과 그름’의 단순화된 구도로 던져버립니다. 이렇게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사안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차단한 채 구호만 난무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끝은 소위 ‘인두(人頭)’의 다수로 결정하는 표 대결입니다. 표 대결에서 진 쪽은 승복하지 않거나 승복하더라도 “정의는 끝내 이긴다”를 외치며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주요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가로막는 것은 진영논리에 바탕을 둔 배타적 주장들입니다. 배타적 주장이란 주관적 ‘확신’(certitude)과 객관적인 ‘확실함’(certainty)을 구분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배타적 주장의 한 특징은 이분법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인 리차드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은 9·11테러 이후 이슬람 세계를 ‘적’으로 규정하는 미국의 보수적 정치인들과 근본주의적 종교인들의 ‘악에 대한 담론’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경직되고 단순화된 이분법에 따라 세상을 둘로 갈라놓는 선과 악의 새로운 담론은 악의 남용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오늘날 악에 대한 호소는 복잡한 이슈들을 모호하게 만들고 진정한 사유를 차단하며, 공적인 토론과 논쟁을 막으려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사회에선 ‘정의’가 남용되고 있습니다. 절대선을 주장하는 이분법적 주장과 태도들, 단호함을 가장한 독선, 대중들의 혐오감을 자극하기 위한 이름 붙이기. 이 모두 ‘정의를 세운다’거나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과 선한 의지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민주적 에토스는 없습니다. 민주적 에토스란 나의 정치적 신념, 경험적 확신조차도 검토·수정·비판에 개방되어 있다는 사고방식, 공적 토론과 비판적 논의를 통한 합의를 중시하고 관용과 다양성을 긍정하는 마음가짐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민주적 에토스가 없는 민주주의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앞세워 자신의 독백만 읊조리고 갈등으로 치닫는 게 우리의 정치 현실입니다.

진영논리가 만든 ‘지성적 개인’과 ‘반지성적 사회’


▎‘정의’의 교과서로 통하는 존 롤즈의 [정의론]도 원제를 보면 그저 정의에 대한 한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완전한 정의에 대한 규정은 할 수 없다.
지금 한국사회의 정치 상황만 보면 반지성적(反知性的) 혹은 몰지성적(沒知性的)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성만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지성의 역할 없이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내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틀렸다”라는 확신의 무지(無知)가 압도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합리적 지성은 사치이거나 거추장스러운 장식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합리적 지성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수 있고 ‘확신’의 이면에 깔린 무지를 경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러한 합리적 지성이 기능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 몰지성 혹은 반지성적 상황에 대해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학력과 지적 수준은 세계에서 상위에 속합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을 역설한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말을 원용하자면 지금 한국사회는 ‘지성적 개인과 반지성적 사회’라고 할 만합니다.

이렇게 학력과 지적 수준이 높은 한국 사회가 ‘반지성적 논리’에 뒤덮여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한국인 반지성의 발원지로 ‘진영논리’를 꼽습니다. 실제로 작금의 한국사회는 정치적 견해를 말하는 것이 두려운 사회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나 집단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침묵을 금(金)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진영논리만이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 속에서 우리 사회는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 증오와 혐오의 딱지 붙이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인터넷과 같은 공론의 장에서 상대에 대한 언어폭력과 정신적 폭력은 거의 일상화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다른 사회적 현안들로도 마구 파급됩니다. 사회적 현안이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잘잘못을 따지고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하는 논쟁으로 번져가기 십상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정한 논쟁도 없습니다. 논쟁이란 자신의 옳음과 상대방의 그름을 합리적으로 주장하는 과정인데, 진영논리가 압도하는 사회에서 ‘합리적 주장’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허공의 메아리이거나 말장난으로 치부될 뿐입니다.

지금 한국사회가 처해있는 진영논리라는 문제 상황은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 분야뿐 아니라 경제·언론·문화·교육 등 사회 제 분야로 번져가고 있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런 진영논리가 지배한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어쩌면 대화의 방법을 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정의를 대면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로써 불교의 ‘화쟁사상’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는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의 진단과 해법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진영논리와 거기에서 출발하는 ‘대결’의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 단초라고 하겠습니다.

화쟁(和諍)은 원효대사 고유의 용어이며 ‘대화’의 방법을 이르는 것입니다. 화쟁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원효가 들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원효의 ‘화쟁’에서 찾는 진영논리 극복 방법


▎올봄 극한 대결로 치달았던 국회 패스트트랙 사태 때에는 문을 열기 위해 국회에 망치까지 등장했다.
장님은 코끼리를 볼 수 없으니 각자 만져서 그 모양을 상상하게 됩니다. 장님들은 각자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백가(百家)의 이쟁(異諍)’이지만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손으로 직접 코끼리를 만진 결과로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 皆是)는 것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코끼리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효는 또한 “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皆)라고 하는 동시적 상황입니다. 나의 옳음이 저들의 틀림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저들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제 코끼리의 전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주장도 제한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코끼리 아닌 것을 만지고 코끼리라 주장하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되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때 점차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주장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펼쳐지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어지럽지도 하겠지만 이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조금씩 코끼리의 전모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원효는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발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때론 갈등도 빚고 다툼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길만이 그 사회의 지속적 발전과 미래를 만들어 가는 길입니다.

단 하나의 옳음이 아니라 복수의 옳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옳음’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저들의 옳음’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더 큰 옳음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화쟁의 정치학’이라 할 것이다. 화쟁적 정의는 바로 민주적 에토스, 즉 소통·대화·공감을 바탕으로 한 정의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딜레마와 모순 함께 껴안을 때, 갈등 해결 실마리


▎미국 9·11사태 당시 부시 대통령이 뉴욕 트레이드센터 잔해 위에서 현장연설을 하고 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나는 악의 얼굴을 보았습니다”라는 연설로 사태를 선과 악으로 대별시킴으로서 미국 지성계에 많은 우려를 낳았다.
화쟁은 배타적 이견(異見)들을 절충·종합하거나 혹은 제3의 견해를 통해 쟁점을 무화(無化)·용해(溶解)하는 것이 아니라 이견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 있습니다. 이른바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상황을 수용함으로써 갈등을 ‘건설적 전환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지요.

갈등을 ‘해결’이 아닌 ‘전환’(transformation)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서구 철학에도 존재합니다.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rach)은 “명백한 모순과 역설을 공존시키는 능력이 갈등전환의 핵심”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레더락은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의 하나로 갈등을 딜레마로 규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both A and B’라는 통합적 패러다임으로 질문할 때 우리의 사고도 전환된다 … 딜레마와 모순을 동시에 껴안을 때, 양립 불가능한 갈등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다르지만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면이 공존하는 복잡한 상황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선택이, ‘either A or B’라는 양자택일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복합적인 문제를 제대로 다룰 능력을 잃고 말 것이다.”

상황을 딜레마로 규정하는 능력, 명백한 모순과 공존하는 능력이 갈등전환의 핵심이라고 보는 레더락의 관점은 원효의 용어로는 ‘개시개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끼리의 예화에서 모두 옳다는 ‘개시’가 모순과 역설을 공존하게 하는 원리라면, 모두 틀렸다고 하는 ‘개비’는 모순적 상황을 새로운 변화로 이끌고자 하는 ‘갈등전환’의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코끼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정함으로써 갈등이라고 하는 모순적 상황을 더 큰 그림을 위한 전환의 에너지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원효의 개시개비는 ‘복수의 옳음’을 상정함으로써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모순적 상황을 용인 혹은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한 철학적인 원칙은 무엇이며 또 일상적인 실천원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한편으로 상대 주장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타당함이 ‘부분적’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철학적 정직함이며 종교적 겸손이라 할 것입니다.

화쟁이 곧 대화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논쟁이 나의 옳음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대화는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클리 대학 철학과 교수 도널드 데이비슨(Donald Davidson)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그들의 행동이 지극히 비정상적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상당한 진실과 동기를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데이비슨은 소위 ‘자비의 원칙’(the principle of charity)을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 그들이 옳다고 생각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화쟁의 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견해가 일종의 ‘조건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고통이다)와 같은 종교적 가르침도 예외는 아닙니다. 조건문이기 때문에 일정한 관점을 전제한 것이며 그 의미는 그 견해가 설파되는 ‘맥락’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건’을 결여한 그리고 맥락을 떠난 절대적 견해는 없습니다. 특정한 의미와 맥락에서만 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대결에선 분열과 갈등 외엔 답 없어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표결 당시 국회 본회의장 모습. 타협과 대화는 없고 주장과 대결, 몸싸움으로 번지는 한국 정치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런데 진영논리는 견해의 조건성과 의미맥락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견해는 무조건 옳고, 상대의 견해는 무조건 틀렸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이런 입장이라면 갈등·분쟁·대립 이외의 다른 대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논쟁에선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 입장에서 옳고 그름은 상대방 입장에선 그른 것과 옳은 것을 거꾸로 생각하는 것, 즉 옳음과 옳음의 대결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옳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회적 갈등 현안에 대해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개의 정답이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원적 방법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배타적 견해를 양자택일의 갈등국면으로 이해하지 않고 둘 다 맞는 말로 받아들일 때, 다시 말해서 ‘모순’을 용인할 때 상황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중도(中道)가 바로 이것입니다. 중도란 어느 한 극단(極端)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양극단을 떠나 일종의 ‘무중력’의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대립하는 주장을 떠나 새로운 견해를 만들거나 혹은 양비양시(兩非兩是)의 무견해·무입장이 곧 중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도는 모순적 상황에서 ‘옳고 그름’이라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입장을 취하는 대신 ‘복수의 옳음’이라는 모순을 용인함으로써 갈등의 국면이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입장을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화쟁은 번스타인이 주장하는 참여다원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번스타인은 독자성과 차이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상대주의와 추상적 보편주의를 함께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문화 화합행사의 장면.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평화로운 대화의 길이 열린다.
“실용주의자들은 일관되게 참여다원주의(engaged pluralism), 즉 우리와 다른 것을 인정하되,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려는 지향을 옹호해 왔다. 실용주의자들은 상이한 문화와 언어들을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것처럼 다루는 프레임워크의 신화에 반대한다.… 낯선 것, 이질적인 것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실천적인 실패이자 상상력의 실패이며, 우리와 다른 것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다.… 참여다원주의는 상대주의의 정반대 편에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타자인 것 그리고 우리와 다른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것은 상대방의 견해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견해도 비판 할 것을 요구한다.”

화쟁의 입장은 일종의 ‘소통적 정의’(communicative justice)라 하겠습니다. 이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적 세계를 지양하고, 다원적·개방적 세계를 지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호함으로 포장된 독선적인 정의, ‘신념화된 정의’를 경계합니다. 타인을 위한 공간, 대화를 위한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 대화를 위해 ‘나의 옳음’을 잠시 유보하고 ‘타인의 옳음’에 대해 숙고하는 것 이것이 소통적 정의로서 화쟁의 정신입니다.

플라톤이 전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역시 화쟁과 소통적 정의의 한 정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에 앞서 자신의 무지(無知)의 깊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대화는 상호 간의 명상이며 친절과 자비로운 태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한 믿음과 악의 없는 태도로 질문과 답변이 교환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주의 깊게 공감적으로 경청하고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옳음에 대한 집착이 정의 어렵게 할 수 있어


▎1. 원효대사의 초상. 원효대사는 ‘화쟁’이라는 대화의 기술로 다양한 옳음을 긍정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 2.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라쇼몽(羅生門)]의 한 장면. 라쇼몽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럿’의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정의로운 사회란 지금 당장 정의가 실현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회는 인류역사에서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직한 현실 인식입니다. ‘정의를 모색해 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이념적으로 수많은 이상적(理想的)인,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있지만 한쪽에서 만족하더라도 다른 쪽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란 정의로운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진영논리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는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힘든 모색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 가야 할 결정, 무엇이 정의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가에 관한 결정을 너무 쉽고 단순하게 도덕적 감정으로만 해결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친일·적폐세력·식민잔재 등 단순하게 ‘악’의 이름표를 달아준다고 해서 불의와 잘못된 역사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농단’ ‘청산’이란 말은 얼마나 모호한 말입니까. ‘국정농단’ ‘적폐세력’이란 이름표는 이제 다시 ‘운동권’ ‘좌파세력’ ‘악의 세력’이라는 뒤집힌 이름표로 되돌아 오고 있습니다.

물론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상충하는 가치 그리고 서로 다른 역사인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악의 세력을 상정하고 친일이란 이름표, 적폐란 이름표를 붙이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우리가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 역사적·현실적 과제들을 모호하게 만들고 미래를 위한 진지한 토론과 탐구의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것은 아닌가?”

1950년에 개봉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 明)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럿’의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과 이를 지켜본 목격자의 진술은 제각각입니다. 영화는 네 사람의 엇갈리는 진술을 통해 인간의 조작적 기억과 그 바탕에 있는 자기보호 본능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각 진술에 담긴 ‘거짓’이 아니라 각 진술에 담긴 ‘진실’입니다. 네 사람은 각자가 경험한, 서로 다른 진실‘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사실에 대한 각자의 진실입니다. 영화는 누구의 진술이 ‘사실’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건에 연관된 네 사람의 ‘진실’을 떠난, 독립적인 ‘사실’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인간의 현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인간은 흔히 나의 진실만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진실만이 ‘사실’이라면 저들의 진실은 ‘거짓’이 됩니다. 어느 한쪽의 진실만이 사실이며, 그래서 서로 다른 진실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갈등과 대립은 불가피합니다. 또한 그 대립은 종종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여겨지면서 극한적인 대립적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면서 끝없는 반목과 투쟁을 다짐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사람들은 흔히 ‘옳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곧 ‘옳음’이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실천하려는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의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의 방향과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옳음만을 ‘정의’라고 집착하면서, 다른 사람의 ‘옳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분열되고 대립과 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의 양상이 바로 그러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옳음’을 관철하고 ‘저들의 그름’을 타도하려는 독선적 정의감이 아니라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옳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화쟁적 성찰이 아닐까 합니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은 어느 한쪽 ‘진영의 승리’일 뿐이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일 뿐입니다

화쟁은 정의 그 자체보다는 ‘정의로 나아가는 여러 가지의 길’을 강조합니다. 화쟁은 정의에 이르는 평화로운 길 ‘들’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의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쟁은 다툼이 없는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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