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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5)] 중심·변경 경계 사라진 3~6세기 대분열기 

농경·유목 ‘잡종의 힘’ 수·당 중화제국 이끌었다 

한나라 멸망 후 5호16국·남북조 거치며 중원·오랑캐 서로 동화
胡·漢 융합 이룬 세력, 유럽사에는 없는 강력한 중세제국 완성

“합쳐서 오래되면 갈라지고, 갈라져서 오래되면 합쳐진다.(合久則分 分久則合)” 중국사에서 왕조의 성쇠(盛衰)와 치란(治亂)의 반복을 설명하는 데 속담처럼 널리 쓰여 온 말이다. 달의 차고 기움, 계절의 바뀜 같은 자연현상과 같은 이치로 정치의 굴곡을 설명한 것이다. 일견 그럴싸한 말이지만 너무 간명한 이치에는 함정이 있기 쉽다.


▎남북조 시대 선비족 전사의 모습을 담은 조상(彫像). / 사진 : Ayelie
중국사에서 왕조의 교체는 계절이나 삭망(朔望)의 순환처럼 규칙적인 것이 아니었다. 큰 혼란 없이 간판만 바꾸는 식의 교체가 있는가 하면, 수십 년이나 심지어 수백 년의 분열 상태를 겪으며 천하제국의 회복 자체를 기약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왕조 교체에 따르는 사회의 고통이 찰과상이나 타박상 정도에 그칠 때도 있었고, 환골탈태(換骨奪胎)의 큰 변화를 몰고 올 때도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21년의 진나라 통일 이후를 더듬어볼 때, 진-한(秦漢) 교체는 작은 변화였다. 왕조가 영(嬴)씨에서 유(劉)씨로 바뀌었지만, 중화제국 창건이라는 큰 과업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나눠 맡은 셈이다. 두 왕조 사이의 공백도 길지 않았다. 전한과 후한 사이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또한 한차례 외척의 찬탈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국 성립 이후 첫 번째 대란(大亂)의 시대는 400여 년 한 왕조가 쇠퇴한 뒤에 시작되었다. 220년부터 삼국의 분열이 벌어졌다가 60년 만에 진(晉)나라의 재통일로 수습되었지만, 치(治)의 시대가 제대로 회복된 것이 아니었다. 30여 년 후인 316년 진나라가 한차례 망하고 남쪽으로 도망가 명맥을 유지하는 동안, 원래의 중국이라 할 수 있는 북중국은 5호16국(五胡十六國), 오랑캐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통일하고 남쪽의 진나라가 송(宋)나라로 넘어가면서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접어들었다. 북위의 한 갈래로 출발한 수(隋)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것은 589년, 한나라 멸망 후 370년 만의 일이었다.

이처럼 긴 분열기는 중화제국의 역사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수-당(隋唐) 교체는 진-한 교체와 비슷한 작은 변화였다. 근 300년 지속한 당나라의 멸망 후 5대 10국(五代十國)의 분열기는 50여 년에 그쳤다. 960년 개국한 송(宋)나라가 1127년 금(金)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가면서 남북조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다가 1279년 몽골의 중국 정복 완성으로 원(元)나라 시대에 들어섰다. 1368년 건국한 명(明)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1644년 청(淸)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하는 과정에는 상당한 혼란이 있었지만 긴 분열기는 없었다.

중국 역사에 오랑캐의 역할 중요성 커져


▎뤄양 시의 남쪽 13㎞ 지점에 있는 룽먼석굴(龍門石窟)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북위의 효문제가 뤄양으로 천도한 494년부터 중국불교에서 룽먼기(494~520년)가 시작된다. / 사진 : Rialfver
한나라 멸망 후 삼국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긴 분열기가 그 후 중국사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면밀한 검토 이전에, 중화제국이라는 정치조직에 아직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도 서아시아에서도 고대제국이 무너진 후 문명권 전체 또는 대부분을 포괄하는 제국 체제는 회복되지 않았다. 고대제국에 이어 중세제국이 성립한 것이 중국사의 독특한 특징이고, 중화제국의 본질은 수-당 중세제국에서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전통적 역사학에서는 3세기 초에서 6세기 말에 이르는 대분열기 연구에 몇 가지 제약이 있었다. 첫째, 치세 아닌 난세였기 때문에 배울 것이 없는 시대였다는 편견. 둘째, 이 시대의 상황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랑캐’를 역사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통론. 그 위에 오랑캐에 관한 자료가 전통적 문헌 자료의 형태를 취한 것이 적다는 문제가 겹쳐져 있었다.

최근 100년 동안 이 제약들이 많이 극복되었다. 서양 근대 역사학의 도입에 따라 역사학자들의 관심이 왕조의 정통성에서 풀려나 난세의 동태적(dynamic) 고찰에 큰 비중이 놓이게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다민족국가를 표방함에 따라 오랑캐를 멸시하던 풍조도 억제되었다. 그리고 고고학과 인류학 연구의 발전에 따라 자료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50년 전 내가 중국사 공부를 시작할 때와는 중국사의 풍경이 적지 않게 바뀌어 있다. 그중 크게 바뀐 영역의 하나가 3~6세기의 대분열기다. 위에 말한 20세기 후반 학계의 변화가 가장 큰 성과를 가져온 영역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통 왕조들의 위축된 모습만 안타깝게 그려지던 이 영역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활기차게 부딪치고 어울리는 모습을 이제 볼 수 있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연구 성과를 훑어보며, 이 시대가 중국의 진로와 성격을 결정하는 데 전국시대 못지않은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역의 새 모습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이 오랑캐의 역할이다. 김호동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2010)에서 이렇게 말한다.

“(···) 이제까지의 실크로드 연구에서도 유목민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아무래도 부차적인 의미밖에는 지니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유목민들은 국제상인들을 종종 약탈하거나 아니면 가끔 대가를 받고 안전을 보증해 주는 존재로 묘사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학자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사회를 그 남쪽에 위치한 농경민들의 사회와 함께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두 요소’로 꼽고 있으니, 말하자면 세계사를 움직인 두 개의 수레바퀴의 하나인 셈이다.”(25쪽)

부수적 존재로 경시되어 온 유목민의 역할을 살려낸다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두 개의 수레바퀴의 하나”라는 것은 좀 지나치다. 앞에서 나는 흉노 제국을 하나의 ‘그림자 제국에 비유했는데,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교섭에서 궁극적인 주도권은 농경사회 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철기시대에 들어선 이후는 분명히 그렇다. 생각해 보라. 철기의 등장으로 농경사회에서 삼림 개간, 수리(水利) 공사, 밭 갈기 등 얼마나 큰 생산력 향상이 일어났는가? 유목사회에도 생산력 향상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농경사회와 비교될 수준은 아니었다.

춘추시대까지는 이른바 중원(中原) 지역에도 오랑캐가 뒤섞여 있었다. 철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의 상태에서는 농경과 유목의 생산력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강변의 평야에는 농경사회가 자리 잡고 있어도 인근의 골짜기에는 유목사회가 나란히 존재하던 상황이 그려진다. 철기 보급에 따라 농경의 생산력이 더 큰 폭으로 자라나면서 유목민도 차츰 농경으로 전환하거나 농경민이 유목민을 몰아내고 그 터를 농지로 개간하는 일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전국시대를 통해 중원 지역이 완전한 농업지대를 이루었고 전국 후기에 북방 제후국들이 장성(長城)을 쌓아 유목지대와의 경계선으로 삼은 것은 그 결과였다.

초기의 오랑캐가 유목민만은 아니었다. 채집·수렵 등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다양한 생산-생활 방식이 있었다. 농업의 발달과 확장에 따라 이들 원시적 생산-생활 방식이 사라져 가는 중에 유목이 농업 다음으로 유력한 생산-생활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식물자원을 통제하는 농업과 동물자원을 통제하는 유목은 문명 초기에 나란히 발전한 경제활동이었다.

‘그림자 제국’의 약탈 경제


▎오언 래티모어(1900~1989)의 1967년 모습. 중국과 중앙아시아 전문학자인 그는 학사학위조차 없었지만 존스홉킨스대(1938~1963), 리즈대(1963~1970)에서 가르친 석학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장제스(蔣介石)와 미국 정부의 고문으로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 사진 : 네덜란드 국립기록보관소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에 걸쳐 광대한 농업지대가 형성되었을 때 이 지대를 관리하는 정치조직으로 세워진 것이 진-한 제국이었다. 농업은 다른 경제활동에 비해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계속 확장된 것이었고, 확장에 따른 기술 발달을 통해 잉여생산이 더욱더 커졌기 때문에 대규모 정치조직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목의 잉여생산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흉노제국의 성립은 진-한 제국의 잉여생산을 탈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림자 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사에서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관계를 나란히 움직이는 두 개 수레바퀴보다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것으로 나는 본다. 자전거가 나아가는 동력은 하나의 바퀴에서 일어나고 다른 바퀴는 그에 끌려가거나 밀려가는 것이다. 중국 문명 발전의 동력은 농경사회의 잉여생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전거의 앞바퀴에는 동력을 일으키는 기능이 없지만 균형을 유지하고 진로를 결정하는 데 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중국사의 진행에서 유목사회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농경 문명 발전과 확장의 ‘변경(frontier)’ 역할이다.

아직도 중국 오지 곳곳에는 선사시대 이래의 원시적 생산-생활 방식을 지키고 있는 소수민족이 있다. 특수한 자연조건에 의지하는 생산-생활 방식이다. 유목이 필요로 하는 자연조건은 농경 문명의 확장에 적합한 편이다. 기온과 강우량의 차이를 빼면 농경이 가능한 광대한 평지가 유목지대에 남아 있는데, 기술 발전에 따라 농업지대가 건조 지역과 한랭 지역으로 계속 확장되어 왔다. 그리고 유목민은 상당 규모의 조직 활동 경험을 갖고 있어서 조건 변화에 따라 농업국가 체제에도 비교적 쉽게 편입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유목사회 연구의 개척자 오언 래티모어(Owen Lattimore, 1900~1989)는 [중국의 내륙아시아 변경지대(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1940)에서 중국 주변 유목민의 존재양식을 ‘내경(內境, inner frontier)’과 ‘외경(外境, outer frontier)’으로 구분했다. 중화제국의 판도 안에 존재했는가 밖에 존재했는가 하는 차이다.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Perilous Frontier)](1989)에서 이 개념을 발전시켜 유목사회의 농경국가에 대한 태도를 ‘내경 전략’과 ‘외경 전략’으로 구분했다.

5호16국 시대 이끈 흉노족의 조나라


▎북위 시대 낙타몰이꾼의 모습을 담은 조각품 (386~534년께). 프랑스 파리 세르뉘시 박물관 소장품. / 사진 : Pascal3012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초기의 흉노 제국은 외경 전략을 구사했다. 농경 국가의 외부에 세력을 이루고 있으면서 교역·약탈·조공 등의 관계를 통해 농경 국가의 잉여생산력을 흡수하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이 농경 국가에게 지우는 부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지는 경향이 있다. 유목사회의 소비수준 상승에 따라 요구가 갈수록 커지는 속도가 농경 국가의 생산력 확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원전 133년 이후 20년에 걸쳐 한나라의 국력을 기울인 흉노 정벌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 무제의 정벌로 흉노 제국이 무너진 후 대다수 흉노가 한나라판도 안에 들어온 후에는 내경 전략이 펼쳐진다. ‘귀순’한 흉노는 변경 방어 등 한나라의 안보에 공헌하는 역할을 맡으며 한나라 경제체제에 편입되는 것이다. 흉노 제국이 사라진 외곽 지역에는 오랑캐 세력들이 새로 형성되어 한나라에 대해 나름의 외경 전략을 취하게 된다.

흉노 제국이 무너진 400여 년 후인 304년에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조(趙)나라를 열고 광문제(光文帝)를 칭하면서 5호 16국 시대를 열었다. ‘5호’란 흉노와 갈(羯)·저(氐)·강(羌)·선비(鮮卑)의 다섯 종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연이 이끈 흉노는 한나라에 귀순해 제국체제 안에서 내경 전략을 펼쳐 온 존재였다. 유연의 성(姓)도 한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다른 종족들도 한나라가 느슨하게 끌어들여 ‘외이(外夷)’ 아닌 ‘내이(內夷)’로 통제해 온 대상이었다. 한나라 말기부터 진나라의 280년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100년 가까운 분열 시대의 군사적 수요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커졌고, 결국 제국체제의 전복에 이들이 앞장서게 된 것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로마제국의 붕괴에도 오랑캐 용병 집단의 역할이 컸다. 제국의 ‘대일통(大一統)’ 정신은 많은 이질적 요소를 제국체제 안에 끌어들이는데, 이 이질적 요소들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체제의 붕괴를 유발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사마천(司馬遷)이 살았던 것은 대일통의 시대였고, 150년 후 반고(班固)가 살 때는 체제 붕괴의 위험이 느껴졌기에 ‘정통(正統)’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돌아서 있었던 것 아닐지.

당나라는 한나라와 함께 중화제국을 대표하는 왕조로 널리 인식되어 왔다. 지금은 ‘중국’을 뜻하는 접두사로 ‘한(漢)’ 자가 많이 쓰이고 있지만 예전에는 ‘당(唐)’ 자도 그 못지않게 쓰였다. 세계 각지의 차이나타운이 ‘당인가(唐人街)’로 흔히 불리고 서울의 ‘당인리’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당’자를 쓴 것이다.

당나라는 중화제국의 판도를 크게 넓혔을 뿐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도 매우 활발해서, 중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제국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당나라가 과연 ‘중화’ 제국이 맞는지 의문이 있다. 북중국을 통일해서 남북조시대를 연 북위는 선비족의 왕조였는데, 당 황실은 북위 중심세력에서 출발한 가문이기 때문에 오랑캐 혈통을 의심받는 것이다. 이 의심이 근년 더욱더 굳어져 가고 있는데, 바로 이 잡종성(雜種性)에 당 제국의 위대함이 뿌리를 둔 것이 아닌가, 많은 연구자가 경탄하고 있다. 이번 회에는 이 잡종성이 빚어져 나온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북중국 통일한 오랑캐 출신 부견, 천하통일은 실패


▎둔황시와 옥문관(玉門關) 사이에 있는 한나라 시대 곡물저장고. 실크로드의 주요 시설이다. 4세기부터 중국 승려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향했다. / 사진 : 존 힐
5호 16국의 초기 왕조들은 국가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역 군벌 수준의 세력들이었다. 한나라 제국체제 안에서 자치권을 누리며 결집력을 갖고 있던 집단들이 진(晉)나라 통치체제가 무너진 공백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안정된 통치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랑캐 왕조들도 중국식 정치 이념을 습득하며 통치의 시간적·공간적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338-385, 재위 357-385)은 370년대에 북중국을 통일하고 383년에는 천하 통일을 꾀하는 남방 정벌에 나서기까지 했다.

부견의 저(氐)족은 한나라 때부터 칭하이(靑海)-신장(新疆)-간수(甘肅)성 경계 지대에서 거주하다가 서진(西晉)이 무너지고 북중국이 혼란에 빠진 후 갈(羯)족의 후조(後趙)에 복속했다가 나중에 그 지도자 부홍(苻洪)이 남방에 있던 동진(東晉)의 정북장군(征北將軍)-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임명받았다. 5호 중에서 중국화가 많이 진전된 편이었다.

부견의 조부 부홍이 동진의 관직을 받으며 한편으로 자립해서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다가 350년 죽은 후 이어받은 백부 부건(苻健)이 352년 황제를 칭했다. 부건이 355년 죽은 후 그 아들 부생(苻生)이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2년 후 부견이 몰아내고 제위를 빼앗았다.

5호의 지도자 중 부견에 관한 기록은 사서에 많이 남아있는 편이고, 그를 통해 부견의 중국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8세 때 할아버지에게 “공부를 하고 싶으니 스승을 붙여 달라”고 조름에 부홍이 “우리 집안은 애쓰는 것이 고기 먹고 술 마시는 것뿐인데 네가 별나게도 공부를 하겠다니 신통하구나”라며 웃으며 승낙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위를 빼앗는 경위도 ‘중국적’으로 각색되어 전해진다. 사촌형 부생은 걸주(桀紂)를 방불하는 잔인한 폭군으로 그려지고, 끝내 부견까지 해치려는 위기에 몰렸을 때 주변사람들에게 이끌려 부득이하게 ‘기의(起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황으로 볼 때 부생은 조상들의 뒤를 이어 그저 고기 먹고 술 마시는 데 애썼을 뿐인데, 부견이 중국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별난 국가관을 갖고 새 세상 만들러 나선 것 아닐까 싶다.

부견의 중국화 성향을 체현한 인물이 왕맹(王猛, 325-375)이었다. 왕맹은 빈한한 한족 가문 출신으로 학업에 전념하며 지내다가 31세에 부견을 만나 경륜을 펼치기 시작했다고 하니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부견이 355년에 왕맹을 만나 2년 후 제위를 탈취할 때까지 그의 지략을 얻었다고 하는데, 왕맹의 지략은 권력 탈취에 이르는 파워게임보다 탈취 후의 체제 구상이었을 것 같다. 부견 즉위 후 왕맹의 큰 업적 하나가 포악한 귀족 20여 명을 처형한 것이니, 백성을 수탈하는 중간 권력을 제거하고 수탈을 국가가 독점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든 것이 왕맹의 체제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견 즉위 후 불과 20년 이내에 북중국 통일을 이룬 데는 항복을 관대하게 받아들여 체제를 확장하는 정책이 효과를 본 것 같다. ‘제국’ 부활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부견의 속성(速成) 제국은 기반을 충분히 다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83년 동진 정벌에 나선 부견의 군대는 조직력이 약한 연합군의 성격이었고, 비수(淝水) 전투 패배로 틈을 드러내자 복속했던 많은 세력이 이탈하면서 제국이 무너지고 말았다.

부견의 제국이 무너진 후 북중국 일대는 군웅할거의 양상으로 일단 돌아갔지만 그 혼란은 길게 가지 않았다. 30여 년 후 선비족 탁발부(拓拔部)의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북중국에 왕조를 세우는 오랑캐들도 이제 중국식 정치이념에 따른 국가 경영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이 중국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인 45년, 흉노와 함께 변경을 습격했다는 기사다. 흉노제국이 무너진 후 그에 복속했던 부족들과 주변 부족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는데, 동쪽에 선비가 있었고 서쪽에 오환(烏桓)이 있었다.

선비족은 후한 말에 두 차례 걸출한 지도자 아래 뭉쳐 큰 세력을 이뤘다가 도로 흩어졌는데, 5호 16국 시대에 선비의 여러 부족이 따로따로 왕조들을 세웠다. 4세기 중에는 전연(前燕)·후연(後燕)·남연(南燕)·서연(西燕) 등 모용부(慕容部) 왕조들이 활발하다가 4세기 말부터 탁발부(拓拔部)의 북위(北魏)가 세력을 일으켜 430년대까지 북중국을 통일했다.

선비족의 북위, 의복·성(姓) 중국식으로 바꿔


▎당나라 시대에 크게 유행한 백저무(白苧舞, white sleeve dance)의 공연 장면. / 사진 : shankar s
북위의 중국화는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 때의 일로 흔히 얘기되지만 일찍부터 그런 경향을 보여준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제위의 부자 계승이다. 도무제(道武帝, 386~409)부터 효명제(孝明帝, 515~528)까지 8대가 연속 부자 계승으로 이뤄졌다.(손자가 이어받은 한차례 포함) 힘과 능력에 따라 후계자를 결정하는 유목사회의 일반적 관습을 북위는 초기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398년의 평성(平城) 건설이다.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퉁(大同)시 지역에 계획도시를 만들고 30만 명의 한족을 이주시켜 약 1000㎞2의 농지를 경작시켰다고 한다. 이런 규모의 황도를 만들어 관료집단과 다양한 서비스 인력을 수용했다는 것은 진-한 제국과 같은 성격의 제국체제를 바라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평성은 강우량이 당시 기술 수준으로 농경의 한계선에 있는 곳인데, 오랑캐 왕조의 정책이 농경지역 확장을 바라보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북위의 중국화를 완성한 인물로 풍(馮) 태후(441~490)와 효문제가 꼽힌다. 풍 태후는 문성제(文成帝, 재위 452-465)의 황후로 문성제 사후 헌문제(獻文帝, 재위 465-471)와 효문제의 조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주도했다. 가장 중요한 제도 개혁은 균전제(均田制)와 삼장제(三長制)였다. 균전제는 농민에게 농지를 보장해줌으로써 제국의 농업 기반을 다지는 제도였고, 삼장제는 5가(家)를 1린(隣), 5린을 1리(里), 5리를 1당(黨)으로 하여 사회를 일률적으로 조직하는 제도였다.

풍 태후가 한족이기 때문에 중국화에 몰두한다는 비난이 당시에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출신을 보면 그냥 한족이 아니었다. 그는 북연(北燕) 황실 출신이었는데, ‘연’이란 왕조 이름은 원래 선비족의 모용부에서 쓰던 것이다. 풍 태후의 조부 풍발(馮跋)이 모용부 지역에 살며 후연 황제 모용보(慕容寶)의 양자 고운(高雲)과 친교를 맺었는데, 모용보의 동생 모용희(慕容熙)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를 죽이고 고운을 황제에 앉혔다가 2년 후 고운이 살해당하자(409) 풍발이 제위를 이었다. 5호가 북중국을 주름잡는 가운데 오랑캐의 중국화와 중국인의 오랑캐화가 나란히 진행되었는데, 북연의 풍 씨는 후자의 대표적 사례였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더라도 풍 태후는 대단히 흥미로운 캐릭터다. 문성제가 죽었을 때 유물을 태우는 불길 속에 돌연 뛰어들어 주변사람들이 겨우 구해냈지만 여러 날 사경을 헤맸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염문이 떠돈 총신(寵臣)이 여럿 있다. 그런데 그 총신들은 하나같이 태후에 대한 충성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다.

아들 헌문제와 손자 효문제도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헌문제는 12세에 즉위했다가 18세에 다섯 살 된 아들 효문제에게 양위하고 23세에 죽었다. [위서(魏書)]와 [북사(北史)] 등 정사에 대단히 훌륭한 능력과 성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이 그랬던 것 같다. 양위하여 태상황이 된 뒤에도 유연(柔然) 정벌에 나서는가 하면, 풍 태후의 개혁정책에 앞장서기도 했다. 왜 그가 일찍 양위를 해야 했는지 이해할 열쇠를 찾을 수 없고, 그래서 그 죽음이 풍 태후의 독살이었다는 소문도 떠돌게 된 것 같다.

효문제는 다섯 살에 즉위해 20년 가까이 할머니 그늘에서 지냈으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반감이나 싫증을 느낄 텐데, 웬걸, 풍 태후가 죽은 후 중국화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했다. 494년에는 호복(胡服)을 한복(漢服)으로 바꿔 입게 하더니 2년 후에는 성(姓)까지 중국식으로 바꾸게 했다. 황실의 성부터 탁발(拓拔)에서 원(元)으로 바꿨다. 아무리 중국화가 필요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자기 성까지 바꾸다니, 지나친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조치였다.

또 하나 효문제의 중요한 중국화 조치는 낙양(洛陽) 천도였다. 398년의 평성 건설만 하더라도 호족 왕조로서 획기적인 중국화 조치였는데, 100년이 지난 이제 중국의 전통적 중심지에 아예 들어앉기로 한 것이다. 권력의 근거지를 뒤바꾸는 이 조치에는 전통세력의 반발이 워낙 컸기 때문에 493년에 남조 정벌을 핑계로 낙양으로 군대를 끌고 왔다가 해를 넘긴 다음 천도를 선포했다. 이제 북위 왕조는 ‘중국식 왕조’를 지나 ‘중국 왕조’가 된 것이다.

효문제는 499년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발레리 한센은 [열린 제국(The Open Empire)] (2005)에서 그가 환갑까지 살았다면 남북조 통일이 그의 재위 중에 이뤄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지만, 그가 추진하던 과감한 개혁, 그리고 그의 사후 북위의 혼란을 생각하면 그럴싸하게 여겨지는 추측이다.

효문제를 이은 선무제(宣武帝, 재위 499~515)는 낙양 건설 등 중국화 정책을 계속 추진했지만 풍 태후나 효문제와 같은 영도력은 사라졌다. 그나마 선무제가 33세 나이에 죽고 여섯 살 나이의 효명제(孝明帝, 재위 515~528)가 즉위하고는 새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층의 동요를 더는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풍 태후와 효문제가 추진한 변화는 혁명 수준의 체제 변혁이었다. 30여년간 강력하게 추진된 이 변혁의 마무리 단계에서 북위 조정이 영도력을 잃은 것은 큰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회복 수단을 없앤 것과 같은 꼴이었다. 수술의 부작용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문제가 524년 6진(六鎭)의 난으로 드러났다. 비교적 안정된 통치체제를 오랑캐 왕조가 중국 땅에 세운 것을 흔히 ‘호-한(胡漢) 2중 체제’라 부른다. 부족사회 질서와 중국식 관료제를 병행하는 것이다. 바필드는 이 2중 체제를 동북방에서 모용부 왕조(전연·후연 등)가 장기간에 걸쳐 개발한 것으로 본다. 동북방에는 유목 외에도 농경·수렵·채집 등 다양한 생산양식이 혼재했기 때문에 이 지역 왕조의 효과적 경영을 위해서는 여러 형태의 사회를 포용하는 다중 체제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이다.

북위의 탁발부는 같은 언어를 쓰는 선비족이기 때문에 모용부의 경험을 쉽게 수용했을 것으로 바필드는 본다. 4세기 말 북위가 일어날 때는 모용부 왕조가 혼란에 빠질 때였으므로 모용부의 고급 인력이 탁발부로 많이 넘어갔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북위는 410년까지 모용부 지역을 평정한 다음 근 20년이 지난 뒤에 서남방으로 확장을 시작해 몇 해 안에 북중국 통일에 이르는데, 이 20년이 모용부의 2중 체제를 배우고 익히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서위-북주’는 한족에게 선비족 성(姓) 하사


▎예일대 발레리 한센 교수(사학). 한센 교수는 [열린 제국]에서 인도 불교와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논증했다. / 사진 : GeekofBooks
호-한 2중 체제에서 군사 방면은 ‘호’의 원리로, 행정 방면은 ‘한’의 원리로 운영된다. 군사와 행정의 분리에 따라 농민이 군대의 폭력에서 보호받고 조정의 조세 수입이 안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가 농민을 괴롭히는 특권을 빼앗기면 무슨 재미가 남는가? 군대를 거느리는 오랑캐 귀족들은 행정을 맡은 한족 관료들에게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풍 태후와 효문제의 변혁은 2중 체제를 넘어 1원적 중국화를 향한 것이었으므로 군대와 군사 귀족의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천하 통일이라는 그 변혁의 목표를 향해 대대적 남방 정벌에 나섰다면 군대의 역할이 생겨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효문제 사후 20여 년 동안 정치 혼란으로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늦어지는 동안, 군대와 군사 귀족의 불만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터져 나온 것이 6진의 난이었다.

6진의 난을 계기로 조정의 영도력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북위는 군벌의 각축장이 되었다. 528년 19세 나이의 효명제가 독살당한 뒤로는 권신들의 폭정이 이어지다가 결국 534년 서로 다른 황제를 내세우는 권신들에 의해 나라가 둘로 쪼개지기에 이르렀다. 낙양의 고환(高歡) 세력은 동위(東魏), 장안(長安)의 우문태(宇文泰) 세력은 서위(西魏)가 되었다. 동위는 550년, 서위는 556년까지 명목상의 황제를 받들고 있다가 고환과 우문태의 아들들에게 제위를 넘김으로써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왕조가 바뀌었다.

동위-북제는 효문제 이래의 중국화 노선을 지킨 반면, 서위-북주에서는 선비족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분위기 속에 새로운 정치실험이 진행되었다. [주례(周禮)]의 고제(古制)를 부활한다는 명분 아래 새로운 형태의 군사국가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가장 두드러진 성과가 부병제(府兵制)였다. 군사(호)-농사(한)를 분리하던 호-한 2중 체제의 원리 대신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조직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호-한 2중성을 병행시키던 종래의 2중 체제에서 양자를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북주가 북제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그 중심세력이 수-당 지배세력으로 이어지면서 천하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 부병제가 큰 발판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위-북주에서는 선비족이 중국식 성을 취하게 했던 효문제의 정책을 뒤집어 선비족이 원래의 성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한족 관리와 장군들에게도 선비족 성을 하사하는 정책을 취했다. 몇십 년 사이에 성이 이쪽으로 바뀌었다가 저쪽으로 바뀌는 일이 거듭되다 보니 서위-북주의 지배세력을 놓고는 성씨만 보고 한족 집안인지 선비족 집안인지 판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수나라 황실의 양(楊)씨와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가 과연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시비가 끝없이 이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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