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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논설위원의 ‘온 리버티(on liberty)’] 정치를 후퇴시킨 4·15 선거, 정당의 미래는 

위성정당 용인한 ‘팬덤 정치’··· 노사모는 달랐다 

“도둑 잡는 경찰”(유시민)이라는 명분에 비례대표제 훼손 눈감아
노사모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노무현 감시 모임’ 탈바꿈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말도 많고 탈도 많던 4·15 총선이 끝났습니다. 이번 선거에선 예비후보 등록일부터 실제 투표일까지 전 과정에서 각종 기록이 쏟아졌습니다. 사상 처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실시됐고, 35개의 비례정당이 등록해 투표용지의 길이만 50㎝에 육박했습니다. 여야 할 것 없이 공천 탈락 후 무소속이나 정당을 옮겨 출마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나흘 사이 당을 두 번이나 옮겨 비례대표 공천을 받은 정치인도 있었고요.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비례정당의 포문을 연 미래한국당과 이를 계승·발전시킨 더불어시민당·열린민주당의 존재입니다. 야당인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은 선거법 개정 이전부터 예고된 사안이라 충격이 덜 했습니다. 그러나 여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열린민주당의 창당은 입법 취지 자체를 스스로 갉아먹는 낯 뜨거운 광경이었습니다. 물론 여야의 위성정당 모두 한국 정치를 퇴보시켰다는 점에선 도긴개긴이긴 합니다.

이번 총선은 1948년 제헌국회 이후 가장 후진적인 선거 중 하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위성정당의 과잉 대표성 때문입니다. 비례 전용 정당을 만들어 의석을 석권한 거대 정당들의 행태는 모든 유권자의 의사를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일부 정파의 성향이 과잉 대표되는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즉, ‘정당을 통해 대표되는 집단과 대표되지 못하는 집단 사이의 갈등’이라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 선거였죠.

대의 기능이 빠진 한국의 정당


▎3월 10일 하승수 정치개혁연합 집행위원장이 ‘정치개혁연합 창당일정 발표 및 선거연합정당 기조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온 리버티’는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정당사를 개괄하면서 우리 정치의 근본적 문제점인 ‘과잉 대표성’에 대해 살펴봅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이 문제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과 결합하면서 의회 정치를 어떻게 말살하고 있는지 따져봅니다.

다문화 인구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지난해 8월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다문화 가구는 33만여 가구, 가구원은 100만900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귀화했거나 내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및 자녀로 사실상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제헌국회(198석)부터 현재(300석)까지 다문화 출신 국회의원은 2012년 비례대표로 당선된 이자스민 전 의원이 유일했습니다. 인구 비율만 놓고 봐도 현직 의원 중 6명은 돼야 정상인데 말이죠.

연령비를 보면 더 심각합니다. 전체 유권자 중 20·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34%지만 20대 국회 당선자(지역구)는 0.4%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유권자의 19.9%인 50대는 55.5%나 됐죠. 이번 21대 총선도 후보자 중 절반가량(48.2%)이 50대였습니다. 60대 26%, 40대 16.2%였고 20·30대 후보는 6.4%에 불과했죠. 그렇다 보니 평균연령은 20대(53세)보다 높아진 55세였습니다. 당선자들의 통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야 할 것 없이 ‘청년정치’를 강조했지만, 결과는 공염불에 그쳤습니다.

반면 외국의 정치인들은 연령대가 다양합니다. 2018년 국제의회연맹(IPU)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은 40세 이하 국회의원 비율이 우리보다 훨씬 높습니다. 덴마크(41.3%)와 스웨덴(34.1%), 프랑스(23.2%)가 대표적이죠. 정치를 ‘종신직’으로 여기는 미국(6.6%)도,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8.3%)도 한국(0.6%, 비례 포함)보다 젊은 정치인이 많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젊은 세대나 다문화의 목소리는 반영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정당의 생명은 ‘대의(代議)’입니다. 현대의 정당 체제는 19세기 산업화의 산물입니다. 당시 유럽에선 자본가인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이 갈등과 균열의 중심축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을 대표하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의 양당 구도가 자리 잡았죠.

이처럼 대의 민주주의는 정치가 다양한 사회 갈등과 균열을 대리해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당시 정당은 사회 균열 구조와 맞아떨어졌고 정당을 통해 갈등이 조정되고 합의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분화하면서 계급 외에도 젠더·세대·문화·환경 등 다양한 갈등 요소가 생겨났죠. 그러면서 복잡한 이해관계를 대표하고 조율할 수 있는 ‘대의’ 기능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은 다양한 가치를 표방하는 군소정당이 존재하며, 이들이 연정을 통해 합의점을 찾습니다. 미국은 양당제라도 다양한 이슈에 유연하게 대응합니다. 결국 정당은 다양한 시민의 의사가 대표되는 창구이며, 그런 고민이 모여 하나의 가치를 이루고 이를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유독 사회 균열구조와 정당 체제의 불일치가 심각합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는 다양한데 정치는 진보와 보수 2개의 진영 논리뿐입니다. 무슨 이슈를 대입해도 한국 정치는 진보의 ‘적폐’와 보수의 ‘빨갱이’로 찢어져 있습니다. 이는 정당이 이념과 정책에 따라 차별화된 것이 아니고 오직 권력 획득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최상층 권력인 대통령을 노리는 명망가 위주로 정당이 조직되면서 한국의 정당 체제는 “이념적 차별성이 없는 보수 일변도의 양당체제로 구축되는”(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념·정책 없는 명망가 정당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들과의 오찬을 위해 4월 7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으로 향하고 있다. 왼쪽은 양정철 민주연구원장. / 사진:연합뉴스
갑작스럽게 민주주의를 이식받은 해방공간에서의 대한민국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이를 뒷받침할 제도도 마련돼 있지 않았죠. 19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은 300여 개에 달해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1946년엔 400여 개로 증가하면서 정상적인 선거가 불가능할 정도였죠.

수백 개의 정당이 난무했던 해방공간 이후에도 정당 간 이합집산과 반복적인 당명 바꾸기는 지속됐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진영재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정당 태동기에 이념적으로 한국의 정치 구조가 빈약했기 때문”이라며 “동일한 이념 아래서도 작은 노선 차이가 발생하면 조화를 모색하지 않고 바로 분당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정치 통치 구조·정당·선거])

1948년 첫 선거는 48개 정당이 참여해 16개 정당이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주류 정당이 등장하지 않고 군소정당이 난립한다는 것은 정당정치가 제대로 체계를 잡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2년 후 치러진 2대 총선에서도 39개 정당이 참여해 11개 정당이 의석을 얻었죠. 다만 1954년 선거에선 4개 정당만이 원내 진입에 성공하면서 점차 정당정치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들 정당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사회 균열과 갈등 구조를 대표하거나 특정 계층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과 정책에 있어서 큰 차별성을 보이지도 않았죠. 그 대신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붕당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의 여당은 말할 것도 없고 지주 계급인 김성수 중심의 야당 또한 보수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와 같은 대의 기능을 정당에 기대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됐고 곧바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를 최초의 사법살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 한국의 정당 정치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보수 양당 정치로 귀결됩니다.

그 이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노태우의 민주자유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등은 모두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이합 집산된 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회창의 신한국당,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역시 비슷한 이념과 정책 성향을 가진 이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특정인을 중심으로 오로지 권력 획득이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뭉친 이익집단과 같았죠.

이렇게 한국의 정당은 이념적 정체성보다는 인물 중심이었고, 그 결과 정당 지도자가 권력을 잃으면 조직도 약해졌습니다. 정당은 이념 정체성에 따라 정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대로 전락했고요. 이런 흐름 속에 정당은 유권자의 니즈와 사회 균열 및 갈등을 대표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습니다.

날 찍지 않으면 내 국민이 아니다


▎정봉주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이 3월 29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지지자들과 대화를 하는 동안 한 지지자가 팻말을 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유권자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고, 이념과 정책의 차이 없이 오로지 권력 획득을 목표로 하는 한국의 정당 정치가 남긴 것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치열한 진영 논리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각 정파는 기존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죠. 여기에는 투표율의 함정이 포함돼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2개의 명제 중 옳은 것은 무엇일까요. ① 2012년 국민 10명 중 5명(51.6%)이 박근혜를 뽑았다. ② 2017년 국민 10명 중 4명(41.1%)이 문재인을 뽑았다. 정답은 ‘둘 다 틀렸다’입니다. 모집단을 실제 투표한 사람으로만 놓고 봤기 때문에 ‘국민’이란 표현을 써선 안 됩니다.

실제로 모집단을 전체 유권자로 확대하면 득표율은 확 떨어집니다. 2012년 박근혜는 39%(1577만 명), 2017년 문재인은 31.6%(1342만 명)의 지지를 얻었을 뿐입니다. 각각의 선거에서 61%와 68.4%는 당시 당선된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10명 중 6명(박근혜), 7명(문재인)은 각각의 대통령을 뽑지 않았다고 표현해야 정확합니다.

하지만 정치인은 늘 이 부분에서 착각합니다. 누구든 당선이 되고 나면 상대적 다수표를 받았다는 이유로 ‘민심의 뜻’ ‘시민의 명령’ 같은 수식어를 쓰며 자기 생각이 국민의 의견인 양 과장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다수 반대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습니다.

현 정부도 ‘촛불정신’이라며 다수가 동의하지 않은 일까지 적폐로 몰고 무리한 정책을 폈죠. 전문가들의 반대 여론에도 원전 폐기나 소득주도 성장 같은 국가 중대사를 밀어붙였습니다. 지난 연말에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자사고·외국어고를 일괄 폐지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대의민주주의는 자신을 지지하는 집단의 의사를 대변하면서도 지지 받지 못한 국민까지 배려하는 정치체제입니다. 군주정과 달리 위임된 권력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비판적 시민들을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죠. 그랬다면 지난해 조국 사태 당시 여권에서 촛불시위 대학생을 마스크 썼다고 조롱하는 일이나, ‘20년 장기집권’ 같은 오만한 발언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국민의 마음을 읽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인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 기본소득을 주장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이슈가 됐던 앤드류양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은 시대적 난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러스트벨트 같은 지역의 일자리 400만 개가 자동화로 사라진 게 주원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기술혁명에 따른 사회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 트럼프 당선의 이유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어떤가요. 시민의 삶과는 크게 상관없는 이슈로 싸우기 바쁩니다. 개혁·정의와 같은 ‘대의(大義)’를 좇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회민주주의 기본인 ‘대의(代議)’를 신경 쓰는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국민이 대표자에게 권력을 맡긴 것은 정치인 마음대로 하란 것이 아닙니다. 비정규직과 소상공인, 청년과 다문화 등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도 대변해 달란 뜻입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시민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기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대중을 편향적으로 동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당정치의 뿌리가 취약한 상황에서 정치인에 대한 광신적 팬덤이 가미되자 한국 정치는 전체주의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습니다. 선거 직전에 있던 두 가지 사례를 먼저 살펴보죠.

지난 3월 금태섭 의원이 최종 공천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이를 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민주당이 미쳤다, 기어이 금태섭의 목을 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친문 팬덤 정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막대기에 ‘조국수호’라고 써서 내보내도 공천받았을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의회정치 위협하는 팬덤 정치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의 신년 행사인 ‘문파 라이브 에이드-해피뉴이어 토크쇼’가 지난해 1월 국회 의원회관 대강당에서 열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또 한 가지 사례는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정당의 플랫폼으로 ‘시민을 위하여’를 선택한 일입니다. 이 단체는 친문·친조국 성향의 개국본(개싸움국민운동본부)이 주축이 돼 논란이 됐습니다. 이들은 지난해 ‘조국 수호’를 외치며 서초동 집회를 주도했던 세력입니다. 반면 ‘비례민주당’의 우선협상 대상이었던 정치개혁연합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진보정치의 분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정치개혁연합에는 진보성향의 원로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의 선거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온 집단이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기에 그동안 진보 정당 내에서의 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개혁연합은 ‘시민을 위하여’에 밀려 팽을 당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발생한 걸까요?

당시 개혁연합의 하승수 집행위원장은 이 일의 주동자로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을 지목했습니다. 하 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양 원장에 대해 “적폐 중의 적폐다. 이런 사람이 집권여당의 실세 노릇을 하고 있으니 엉망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 중진들조차 양정철씨 눈치를 보는 듯하다. 민주화운동 원로에 대한 마타도어를 퍼뜨리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양 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후보 시절부터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현 정권의 최고 실세 중 한 명입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양정철은 개국공신인 광흥창팀의 수장”이라면서 “이낙연은 PK 친문의 데릴사위로 성골 조국의 낙마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육두품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죠.

대통령이 키운 ‘문파 현상’

진 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친문은 곧 친조국입니다. 그는 “지금의 민주당은 과거 김대중·노무현의 민주당이 아니라 전체주의 정당의 이상한 변종이다, 철학과 이념이 아닌 적나라한 이권으로 뭉친 집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조국 사태’를 민주당의 정체성이 드러난 핵심사건으로 꼽습니다.

결국 ‘시민을 위하여’가 주축이 돼 더불어시민당이 탄생했고, 한발 더 나아가 열린민주당이라는 자매 정당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열린민주당은 시민당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친조국’을 실천했죠. 조 전 장관의 측근인 최강욱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 등이 비례대표로 나서면서 친문·친조국 팬덤의 색깔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선거 막바지에는 ‘윤석열 vs 조국’ 구도를 내세우며 진영 논리를 더욱 강화시켰죠.

‘문파’는 단순한 팬덤을 넘어 이제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맘카페에서 정권을 비판했다 ‘강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지난 2월에는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에 대한 고발을 취하한 민주당을 대신해 문파가 나서 또다시 고소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문파의 영향력과 활동 범위는 왜 더욱 커지고 넓어지는 걸까요?

원래 ‘문파’의 뿌리는 노사모까지 올라갑니다. 노사모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탄핵 위기에서 열린우리당 창당의 공신이었죠. 그러나 정권 출범 후엔 자신들의 정체성을 ‘노감모(노무현 감시 모임)’로 바꾸며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는 이들도 나왔습니다. 노 대통령 역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건강한 비판자 역할을 요구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문파는 다릅니다.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SNS로 가혹한 공격을 퍼붓기 일쑤입니다. 그 결과 지식인들의 입엔 자발적 재갈이 물려지죠. “SNS 조리돌림이 두려워 실명으로 정부를 비판하기 꺼려진다”고 토로하는 교수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겐 같은 민주당 안에 있더라도 자신과 노선이 다르면 적입니다. 2017년 4월 민주당 경선에서 안희정·이재명 후보에게 비난 문자가 쏟아진 일이 있습니다. 당시 친노의 핵심인 안희정조차 “질린다”고 표현했죠. 현재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인 박영선 의원은 “국정원 댓글부대와 동일선”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는 “히틀러 추종자가 연상된다”고 했고요.

이는 사실상 팬덤의 대상인 문 대통령이 용인한 영향이 큽니다. 앞서 ‘문자폭탄’ 사건에서 그는 “경쟁을 흥미롭게 만드는 양념”이라며 지지자들을 감쌌습니다. 그러면서 문파의 맹목적 지지는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문프께 모든 권한을 양도했다’와 같이 심화됐고요. 특히 정권 출범 후에는 그나마 있던 내부 견제마저 사라지면서 폭주하기 시작했죠. 초기에 “문파는 환자다, 치료가 필요하다”(서민 단국대 교수)는 지적이 나왔지만, 그 역시 SNS에서 융단폭격을 당해야 했습니다.

문파 현상은 2019년 조 전 장관을 통해 친일·적폐 논쟁으로 확전됐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토착왜구’로 낙인찍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한국 사회를 재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난 조 전 장관의 범죄 혐의조차 가짜뉴스로 치부하며 검찰개혁의 희생양으로 승화시켰죠.

이는 대통령이 “마음의 빚을 진”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조국 전 장관이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고초만으로도 아주 크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발언은 문파의 생각에 날개를 달아 친조국을 더욱 강화하는 명분을 제공합니다. 그 결과 민주당의 두 위성정당 모두 친조국으로 일관될 수 있었던 것이고요.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

문파의 입김이 강해질수록 공당인 민주당을 쥐고 흔드는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은 더욱 심화됩니다. 민주당이 임미리 교수에 대한 공개 사과를 섣불리 할 수 없던 것도 문파의 눈치를 봤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두 비례정당 모두 문파가 주축이 돼 만들어졌기 때문에 향후에도 이런 종속 현상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의 의사를 대의해 정치를 펼쳐야 할 정당이 소수 강경파의 입김에 행동이 제약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 발전에 큰 장애물입니다.

정치 팬덤은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도 공적 정치기구가 갖춰야 할 3가지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아 큰 문제가 됩니다. 첫째 이들은 시민으로부터 대표성을 위임받지 않았습니다. 둘째 정치적 행동에 대한 이념적 공통성과 책임의식이 부재합니다. 셋째 정치인이 가져야 할 윤리·도덕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이는 문파에서 영향력이 큰 ‘나꼼수’의 김어준씨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그는 팬덤의 주요 논리를 만들어내는 위치에 있지만 그 어떤 제도적 절차를 통해 대표성을 위임받은 바 없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공적 책임에서 자유롭습니다. ‘합리적 의심’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거짓으로 밝혀지면 ‘아니면 그만’이라고 넘어갑니다.

지금의 문파와 이를 등에 업은 여권의 정치세력은 적폐를 쓰러뜨리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진영 논리가 ‘필요악’이라고 말합니다. 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도둑(미래통합당과 그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잡기 위해 경찰이 출동하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유시민 이사장의 발언처럼 말이죠. 조 전 장관이 갖은 범죄 혐의에도 불구하고 문파 세력의 큰 지지를 받는 것은 검찰 개혁을 위한 ‘순교자’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고요.

그러나 정의를 구현한다며 정의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열린사회를 지향한다면서 닫힌사회를 만들어버리는 이들의 행태는 정치 발전에 큰 해악입니다. 민주주의 이론의 권위자인 후안 린츠 예일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고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사회적 자유와 그 안에서 파생되는 다양성과 개별성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획일화된 전체주의 사회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른 의견은 과거 ‘이적’이라고 공격받던 것처럼 ‘적폐’로 몰리고, 표현의 자유는 일부 목소리 큰 사람의 독선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원래 ‘팬덤(fandom)’의 ‘팬(fan)’은 라틴어 ‘fanátĭcus’에서 유래한 말로 ‘광신자’를 뜻합니다. 옳고 그름과 진위를 따지는 이성의 개념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뜻하는 감정의 언어죠. 정치인에겐 광신적 팬덤이 아니라 노사모와 같은 비판적 시민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짜 민주주의’를 몰아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 윤석만 논설위원/중앙일보 -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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