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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5)] 북방 영토 확립한 ‘파저강 정벌’ 100일의 기록 

치밀한 작전, 압도적 무력, 한반도 넘보는 여진족 응징 

여진족 만행 알려 명나라 개입 차단… 노략질 질책 빌미로 적진 정탐
중국 땅 들어가 속전속결 압승, 발해 이후 500년 만에 ‘조선의 땅’ 회복


▎조선시대 궁궐 호위군 사열행사인 첩종(疊鐘) 재현행사가 2011년 10월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열리고 있다. 첩종은 어전사열(御前査閱) 및 비상대기에 사용되는 큰 종을 뜻한다. / 사진:연합뉴스
평안도 북부와 함길도(함경도)는 여진족이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땅이었다. 그들로서는 귀중한 삶터였으나, 그들은 심하게 분열된 결과 그 땅을 잃었다. 조선왕조는 호기를 놓치지 않고 옛 땅을 회복했다. 고구려 때부터 우리 영토인 만큼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마침 태조 이성계가 화주(함흥) 출신이었던 만큼 북쪽 땅을 고수하겠다는 방침이 더욱 지지를 받았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강한 신념과 지략 그리고 무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한반도 북부 지방을 둘러싼 여진족과의 줄다리기는 고려시대부터 계속됐다. 12세기 초, 윤관은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하지만 1년 만에 다시 내주고 말았다.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자 판세가 변했다. 태종도 부왕의 뜻을 계승해, 우리 수중에 들어온 북방영토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때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접근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나, 태종은 강온 양면 작전을 구사하며 여진족을 다뤘다. 서울에 북평관을 설치해 그들과 친선을 유지했고, 국경에 무역소를 둬 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줬다. 그러면서도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여진족의 침략을 막았다.

세종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4군과 6진을 두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여진족을 통제했다. 그들은 변경을 침략해도 엄포만 놓을 뿐인 명나라보다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세종을 더욱 두려워했다. 왕은 국경 지방을 노략질하는 파저강(婆猪江, 압록강의 중국 쪽 지류인 혼강(渾江)의 옛 이름)의 여진족을 끊임없이 압박했고, 결국은 두 차례에 걸친 ‘파저강 정벌’을 단행했다.

이 사업으로 조선의 군사적 우세가 거듭 확인되자 여진족은 북부 지방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때 비로소 한국의 북방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확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저강 제1차 정벌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세종이 국방 분야에서 어떤 리더십을 행사했는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발해 멸망 이후 공지(空地)였던 북방영토

세종 때도 조정에는 문신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변방에서 전투를 벌이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세종은 생각이 달랐다. 파저강의 여진족을 거세게 응징해야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믿음이었다.

즉위 초부터 왕은 북방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세종 4년(1422) 10월 8일, 왕은 삼정승과 6조의 참판(종2품) 이상을 소집했다. 함길도에서 침략을 일삼는 올량합(兀良哈) 부족을 어떻게 통제할지를 논의했다. 훗날 청 태조라 불린 누르하치의 6대조인 맹가첩목아도 그때 그쪽에서 활동했다. 그는 오도리 또는 알타리의 추장이었다. 대신들은 올량합 문제는 함길도에 주둔하는 군사들에게 맡기면 된다며 안이한 주장을 폈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의 주장을 꺾고 서울에서 용맹한 지휘관을 파견했다. 왕은 상호군(정3품) 김효성을 조전첨절제사(助戰僉節制使)로 임명해 함길도의 군사기지 경원으로 급파했다. 왕은 그에게 친위부대인 내금위와 내시위에 근무하는 함길도 출신의 정예 무사 23인도 데려가게 했다.

그들이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 세종은 일행을 대궐로 불러 친히 격려하고 선물도 하사했다. 김효성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그대는 여진족이 재침하지 못하게 단단히 조치하고 오라. 그대가 데려간 정예 군사는 변경을 완전히 안정시킨 다음, 내년 봄에 돌아오게 하면 된다.’

왜, 왕은 이처럼 적극적이었을까. 하루빨리 북방을 온전한 우리의 영토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압록강 방면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의주와 창성 등지의 백성들은 식량이 부족해 압록강을 건너가 여진 땅에서도 농사를 지어야 했다. 세종 14년(1432) 1월 4일, 왕은 대신들과 함께 이 문제를 검토했다. 대신들의 견해는 제각각이었다. 그러자 세종은 망설임 없이 확고한 지침을 내렸다. 압록강 건너편 10리까지는 우리 백성이 경작해도 좋다. 단, 그 땅의 조세는 평안도의 반액으로 정한다.

처음부터 조선과 여진족은 이해가 상반됐고, 시간이 갈수록 갈등이 쌓여갔다. 마침 임합라라는 추장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명나라에서 지휘 벼슬을 받았는데, 어려울 때마다 조선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나 여러 번 말썽을 피웠다. 그 당시 임합라는 기장을 수확하던 박강금이란 백성을 억류하고는 자신의 종 김소소를 조선 측이 돌려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실록, 세종 14년 8월 28일).

세종 14년 여진족 도발이 정벌 계기


어찌 보면 사소한 문제였다. 하지만 북방에 대한 세종의 관심이 컸기 때문에, 이 사건도 중앙에 즉시 보고됐다. 왕은 대신들을 소집해 대책을 검토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양분됐다. 황희 등 10명은 박강금의 즉각 반환을 요구하는 사신을 내려 보내자고 했다. 그러나 권진 등 3명은 임합라의 요구부터 들어주자고 했다. 세종은 강경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단 한 명의 백성도 결코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박강금이 적의 소굴을 무사히 탈출함으로써 저절로 풀렸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파저강에서 강력한 군사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왕의 뜻을 읽은 명장 최윤덕은 몇 가지를 건의했다. 그는 4군의 한 곳인 여연에 견고한 성을 쌓아 침략에 대비하고, 무예가 뛰어난 관리를 파견하자고 했다. 왕은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 지신사(도승지) 안숭선에게 적합한 장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세종 14년 12월 13일).

그해가 다 지나가기 전, 여연과 강계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파저강 여진족이 기습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왕은 몇 가지 대응조치를 즉각 실행했다. 우선 세종은 피해 현황을 정확히 조사했다. 세종 15년 1월 9일, 평안도 관찰사가 발송한 사건조사 보고서가 도착했다. 군인 48명이 전사하고 백성 27명이 끌려갔다고 했다. 사흘 뒤 왕은 의금부 진무(정3품) 조서강을 현지로 보내 피해 상황을 더욱 상세히 조사하게 했다(세종 15년 1월 12일).

확인된 바에 따르면, 파저강 여진족은 400여 필의 말을 몰고 여연과 강계 지방으로 쳐들어왔다. 침략군의 360명은 파저강 여진족이었고, 나머지는 그들의 사주를 받고 합세한 홀라온과 올적합 부족이었다. 그런데 파저강 여진족은 조선의 책임 추궁이 두려웠던 나머지, 평소 조선과 내왕이 없는 홀라온의 침략 사건으로 위장했다. 이런 목적으로 파저강 여진족은 자신들의 얼굴에 먹으로 홀라온의 문신을 그려 넣었다.

다시 조사한 결과, 그들은 53명의 조선 군사와 백성을 살해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을 눈밭에 내던져 얼어죽게 만드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퇴각할 때가 되자 77명의 우리 백성을 끌고 갔다. 가축도 수백 마리나 빼앗아갔다(실록, 세종 15년 4월 2일자 참조).

세종은 사태의 전모가 완전히 드러나자, 파저강의 여진족 추장 이만주 등에게 문서로 그 책임을 따져 묻고 우리 백성과 가축의 즉각적인 송환을 명령했다.

이어서 왕은 민심을 수습하고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 세종 15년 1월 13일, 왕은 삼정승(황희, 맹사성, 권진)과 이조 및 호조판서(허조와 안순)를 불러서 사안을 협의하고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정벌사업, 반대 10명 vs 찬성 1명


▎고려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압록강 하구(강동 6주)에서부터 동해안에 접하는 함경남도 정평군 지역까지 쌓은 천리장성.
첫째, 지난해 피해지역 백성들에게 빌려준 곡식은 상환을 면제하고 새해에 납부할 조세도 감면해줬다. 둘째, 향후 3년간 피해지역의 부역과 조세를 폐지했다. 셋째, 불행히도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은 관청에서 옷과 음식을 즉시 제공하고, 차후에 마땅한 친족을 골라서 양육을 위임하기로 했다. 넷째, 이 기회에 변경에 대한 군수물자 공급도 대폭 늘렸다. 압록강변의 요지마다 망루를 설치하며,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군사들이 사용할 화살을 서울의 군기감이 공급하고, 함흥·길주·평양 및 영변에서 필요한 무기를 제작해 변경 지역에 보급하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세종은 군사작전을 준비했다. 왕은 최윤덕과 김효성을 현지로 보내면서 최윤덕에게 비상조치권을 줬다. 여진족의 침략을 저지할 목책을 새로 만들고, 군사를 차출하는 것이며 병력 운용도 상황에 따라 먼저 시행하고 사후에 보고해도 좋다며 폭넓은 재량권을 허락했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대신들의 의견은 항상 분분했다. 언제나 그들은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내놓았다. 세종은 그들이 쏟아놓는 여러 가지 의견을 모두 청취했다. 그런 다음 왕은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금세 결론을 내려, 시행해야 할 사안을 모두 확정했다. 왕의 신속한 판단력 덕분에 정벌사업은 속도를 냈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세종은 용의주도한 왕이었다. 그가 기획한 제1차 파저강 정벌사업은 다음의 6단계로 진행됐다. 첫째, 정벌의 사유를 명확히 정의했고, 둘째, 적진을 상세히 정찰했다. 셋째, 정벌계획을 세부적으로 마련하고, 넷째 군사행동 계획도 짰다. 다섯째 포고문까지 미리 작성해놓고, 마지막에는 작전통제 계획을 세웠다. 이 모든 준비가 끝나자 왕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정벌사업을 전개했다. 이제 단계마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첫째, 세종은 파저강 여진족을 정벌해야 하는 이유를 문서로 만들었다. 문헌의 작성은 지신사 안숭선에게 맡겼다. 그가 초안한 문서에는 파저강 여진족의 대표 격인 이만주, 심타납노 및 임합라의 죄상이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세종 15년 1월 18일, 안숭선은 왕명에 따라 요샛말로 관계기관 회의, 즉 의정부와 6조 판서 및 삼군 도진무 합석회의를 열어 문안을 만들었다.

둘째, 세종은 그해 2월 10일에 전 소윤(정4품) 박호문과 호군(정4품) 박원무를 세 명의 추장에게 보내어 침략 행위를 질책했다. 그때 박호문 등은 왕의 밀명으로 여진족의 소굴을 샅샅이 정탐하고 앞으로 원정군이 사용할 진격로를 검토했다.

압도적 승리 위해 병력 5배로 늘려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랴오닝(遼寧) 성환런(桓仁) 현의 오녀산성.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파저강)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셋째, 정벌계획을 확정하기에 앞서 세종은 다시 관계기관 회의를 열었다. 비밀회의 형식으로 대신들의 목소리를 폭넓게 청취했다(실록, 세종 15년 2월 15일). 이 회의는 왕이 추진하는 정벌사업의 정당성을 검토하는 것이면서, 정벌사업에 참고할 전문가의 견해를 수집하는 공간이었다.

회의 참석자는 총 21명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안건은 정벌사업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즉각적인 정벌을 반대하는 신중론이 10명의 입에서 나왔다. 우의정 권진과 이조 판서 허조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여진족의 거주지역은 지형도 험악하고, 수목이 무성한 데다 성곽도 없이 흩어져 거주하는 형태라서 효과적인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아군이 쳐들어갔다가 크게 누르지 못하면 도리어 비웃음을 사게 될 테고, 우리 군사가 움직이면 두만강 방면의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 누르하치 6대조)까지 놀라서 반격할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즉각적인 정벌을 지지하는 대신도 11명이나 됐다. 그들은 이 기회에 여진족을 소탕하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될 것이라며, 속전속결을 강조했다. 또, 이 정벌은 끝까지 기밀을 유지해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는 견해가 많았다.

세종은 안숭선에게 회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단단히 밀봉해두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대신들의 다양한 견해를 꼼꼼히 검토한 뒤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부탁했다. 안숭선은 한 달 동안 회의기록을 철저히 분석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세종은 이번에는 정벌사업을 반드시 시행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넷째, 이어서 왕은 군사작전을 세부적으로 수립했다. 세종은 지신사 안숭선을 마치 자신의 손발처럼 여기며, 정벌사업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종목마다 하나씩 확정하고, 수량 및 조달방법도 구체적으로 정했다(실록, 세종 15년 2월 19일과 같은 달 21일).

그런 다음, 세종은 관계기관 회의를 재소집해 정벌사업의 세부 내용을 하나씩 다시 검토했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의견에는 엇갈리는 점이 있었다. 임금은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다음, 자신의 견해를 재검토했다. 왕은 그 결과를 안숭선에게 알려주면서 비밀리에 삼정승을 만나 절충안을 만들라고 했다. 이처럼 여러 단계를 거쳐 세종은 정벌사업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하나씩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안숭선에게 명해 결정된 사항을 [사목(事目, 시행세칙)]의 형식으로 정리하게 했다(실록, 세종 15년 2월 29일).

왕이 일을 추진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언제나 세종은 대신들과 전문가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청취했고,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몇 번이고 절충할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은 항상 자신이 내렸다. 또한, 사업의 중요성을 고려해 비밀을 유지했다.

“여진족 정벌은 조선의 내정 문제”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정벌부터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정벌까지 일곱 차례 전쟁을 기록한 [국조정토록].
[사목]의 내용을 일부만 적어둔다. 하나, 이번에 출동할 군사는 3000명으로 하고. 그 대부분은 평안도에서 선발한다. 하나.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 두세 곳을 선정해 필요할 때 그곳에 부교를 설치한다. 기밀유지를 위해 부교는 이웃 고을의 선군(船軍)을 데려다 짓는다.

이 사목은 극비리에 지체 없이 최윤덕에게 전해졌다. 정벌을 공식적으로 논의한 지 열흘 만에 세부 지침이 일선 지휘관에게 시달된 셈이다. 왕은 정벌사업을 이렇듯 신속하게 추진했다.

다만 4월 10일부터 시작된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원래 계획보다 5배 많았다. 평안도에서 기병과 보병 1만 명, 황해도에서 기병 5000명을 동원했다. 작전 시작 한 달여 전인 3월 15일 이미 대신들과 논의한 끝에 결정했다. 그만큼 세종이 정벌에 거는 기대가 컸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다섯째, 포고문도 미리 작성했다. 이 문서는 정벌을 시작할 때 도절제사 최윤덕의 명의로 발표될 것이었다. 세종은 안숭선과 김청(판승문원사)에게 명령해, 그동안 여진족이 저지른 만행을 열거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아직 적지에서 머물고 있는 조선사람들의 귀순을 촉구했다(세종 15년 3월 10일).

끝으로, 작전통제계획까지도 완성했다(세종 15년 3월 16일). 이 정벌사업의 총사령관은 최윤덕인데 그에게 일임한 권한은 막중했다.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령관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는 보완책이 필요했다,

아울러, 정벌사업이 눈앞에 다가오자 세종은 명나라에도 사신을 보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파저강 여진족이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를 전달했다. 장차 우리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가 적진을 강타할 계획이었으므로 혹시라도 명나라가 오해할까 봐 미리 이해를 구한 것이었다(세종 15년 4월 2일). 그러나 세종은 그 문서에서 파저강 정벌계획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했다. 왕은 정벌사업을 조선의 내정으로 간주했다. 그는 명나라 측에 우리의 계획을 알릴 이유가 없다는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서 세종은 최윤덕에게 작전계획을 엄수하라고 명했다(세종 15년 3월 24일). 혹시라도 정벌사업을 방해하는 불의의 변수가 잠복해 있는지도, 왕은 미리 점검했다. 대신들과 함께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이 행여 파저강의 여진족을 도울 가능성을 살핀 결과,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고는 정벌작전을 전개했다. 결과는 아군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승리였다. 바로 승전보가 올라왔다. 평안감사 이숙치가중군절제사 이순몽의 전승을 급히 알려왔다(세종 15년 4월 25일). 며칠 뒤 조정은 승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세종은 근정전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특사령을 내렸다(세종 15년 5월 3일).

나흘 뒤에는 상세한 내용을 담은 공식적인 승전 보고서가 도착했다(세종 15년 5월 7일). 도절제사 최윤덕이 올린 보고서였다. 그들은 그해 4월 10일 강계에 집결한 다음, 7명의 장수가 공격 목표를 나누어 한꺼번에 쳐들어갔다(4월 19일). 이후 수일 만에 작전은 성공리에 종결됐다.

총사령관 최윤덕의 직할부대는 98명을 사살하고 62명을 생포했으며 말 25필과 소 27마리 등을 노획했다. 7명의 장수가 사살한 여진족은 총 183명, 포로는 236명이었다. 노획한 말은 67마리, 소도 110마리였으며, 이 밖에도 많은 무기를 거두었다. 이런 숫자도 물론 중요하겠으나, 여진족이 조선군과 맞서 싸우지도 못한 채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났다는 사실이 더욱 의미심장했다.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총사령관 최윤덕, 정승에 오르다

세종은 정벌사업의 결과에 만족했다. 즉위 초의 대마도 정벌보다도 더욱 큰 승리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당연히 장수들에 대한 포상이 잇따랐다. 세종 15년 5월 16일, 최윤덕은 우의정으로 발탁됐고, 이순몽은 판중추원사, 이각과 이징석은 중추원사가 됐다. 평안도 관찰사 이숙치도 공조 좌참판을 겸하게 됐다. 또, 김효성과 홍사석도 중추원 부사로 승진했다.

이때 최윤덕을 정승으로 기용한 것은 파격이었다. 세종은 무관 최윤덕의 배움이 부족한 줄 알면서도, 그는 정성스럽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며 정승으로 삼았다.

왕은 근정전에서 승전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었다(세종 15년 5월 26일). 우의정 최윤덕을 비롯해 이순몽·이징석·김효성·홍사석 등 유공자가 모두 참석했다. 왕세자와 종친 등도 와서 축하했다. 주흥이 오르자 최윤덕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고 임금에게 술잔을 바쳤다.

곧이어 이만주와 심타납노 등 파저강의 여진족이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이에 세종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로와 가축도 되돌려줬다.

그러면서도 여진족의 재침에 대비해 세종은 군사훈련을 더욱 강화했다. 북방에 배치된 군사들이 연습에 쓸 화살도 지원을 확대했다. 앞으로 해마다 평안도와 함길도에는 각기 3만 개의 화살이 갈 거였다. 또, 무신 하경복의 도움을 받아 [진서]를 편찬했다(세종 15년 7월 18일). 실전에 유용한 책자였다. 그 밖에도 후방의 날쌘 신백정을 뽑아서 여연으로 보내, 억지력을 강화했다(세종 15년 윤8월 16일).

세종의 파저강 정벌 작전에서 필자는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한다. 첫째, 왕에게는 북방영토를 수호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귀에 솔깃한 현상유지론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었다. 둘째, 왕은 복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덕분에 물샐틈없는 정벌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셋째, 일단 정한 계획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도 대단했다.

뒷이야기도 있다. 제1차 정벌이 끝나고 4년쯤 지나자 세종은 다시 군대를 일으켜 파저강 여진족을 토벌했다. 한 번의 정벌로는 여진족의 침략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제2차 정벌 때는 제1차 정벌 때보다 훨씬 강도 높게 여진족을 공격했다. 세종은 그들을 강도로 규정하고 엄벌을 시행했다. 정벌이 시작하자마자 승전보가 다시 올라왔다(세종 19년 9월 22일).

이후에도 평안도와 함길도를 온전한 우리 영토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세종은 사민 정책을 장기적으로 펼쳐 인구를 늘리고 농업도 힘껏 장려했다. 토관 직을 만들어 현지 백성들에게도 출세의 기회를 줬다. 우리의 영토가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확장된 데는 세종의 공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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