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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2)] 삼국의 한강 쟁탈전과 치열한 정략 결혼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법흥왕과 보과 공주 등은 역경 뚫고 ‘결실’
사다함은 ‘미실 앓이’ 하다 끝내 목숨 잃어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이 그린 ‘월하정인(月下情人)’. 고요한 달밤에 청춘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있다.
서기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해 왕도 한성(漢城)을 함락했으며, 그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잡아서 돌아왔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63년’).

‘한강 삼국지’는 그렇게 막을 올렸다. 475년 한성백제의 패망부터 576년 신라 진흥왕의 죽음까지! ‘한반도의 젖줄’ 한강을 놓고 100년의 사랑과 전쟁이 펼쳐진다.

“도미 부인이 아름답다는 풍문을 듣고 개루왕(近蓋婁, 개로왕을 지칭)이 욕심을 품었다. 남편 도미의 눈을 뽑고 배에 태워 추방한 다음 부인을 불러 음란한 짓을 하려고 했다.”([삼국사기] 열전 ‘도미’)

475년 백제 도읍 한성(漢城, 서울 송파~강동과 하남 일원)에 민망한 풍문이 나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고구려 노왕 거련(巨連, 장수왕)이 곧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에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국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개로왕의 성추문까지 번졌으니…. 극심한 혼란 속에서 민심은 싸늘해졌다.

한성 대침공은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고구려의 본격 남진(南進)을 알리는 노골적인 신호탄이 아닌가. 실행까지는 50년이 걸렸다. 장수왕은 승려이자 국수(國手)인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 개로왕을 바둑에 푹 담갔다. 중원의 북위(北魏)에 수시로 조공해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않게 달랬다.

결정적 한 방은 개로왕의 자충수였다. 임금이 민간인 여성을 탐한 것이다. 도미 부인은 “월경 중이니 다른 날 오겠다”며 강가로 달아났다. 홀연히 나타난 빈 배를 타고 웬 섬에 도착한 부인은 눈이 먼 남편과 상봉했다. 두 사람은 배에 올라 고구려로 도망쳤다([삼국사기] 열전 ‘도미’). 도미 부인의 애절한 사랑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잔인하고 음란한 임금을 경멸했다. 민심이 등을 돌리면서 보이지 않는 방파제가 무너졌다.

475년 9월 고구려군이 패수(浿水, 예성강)를 건너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타락한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던 개로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아들 문주를 급히 한성에서 내보냈다.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사직을 보존하라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이윽고 고구려 3만 대군이 백제 왕성(王城,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에워쌌다. 개로왕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방어에 전념했다.

고구려군은 병사를 나눠 네 갈래 길로 왕성을 공략했다. 북성(北城, 풍납토성)이 7일 만에 함락되고, 이어서 남성(南城, 몽촌토성)도 흔들리니 백제 지배층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고구려군이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태우자 겁에 질린 자들이 앞다퉈 항복하려고 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개로왕은 성을 탈출해 서쪽으로 달아났다. 임금이 기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초라하게 도망친 것이다. 활로는 없었다.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길목을 지키다가 왕이 나타나자 가로막았다. 그들은 본래 백제의 신하였지만 도미 부부처럼 개로왕에게 쫓겨 고구려에 투항했다. 복수심에 창을 거꾸로 잡은 것이다.

백제 임금은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다. 재증걸루 등은 말에서 내려 옛 주군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는 임금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 죄목을 헤아렸다. 개로왕은 꽁꽁 묶인 채 아차성(阿且城, 서울 광진)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삼국사기] 백제 본기 ‘개로왕 21년’). 장수왕은 한 푼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475년 한성백제가 패망하는 순간이었다.

백제 공주가 신라로 도망간 까닭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풍납토성.
“법흥왕이 국공(國公, 후계자)일 때 백제에 들어가 보과 공주와 사랑했다. 후에 신라로 도망 온 보과가 입궁해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모랑’)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의 동맹을 빚어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니 힘을 합치는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신라 국공과 백제 공주의 사랑이 피어났다.

장수왕은 한성 침공 이후 칼끝을 신라로 돌리고 줄기차게 괴롭혔다. 481년 3월 고구려는 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에 침입해 호명(狐鳴, 영덕) 등 7개 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 포항)로 진군했다. 신라 군사가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눠 막으니 적들이 무너져 물러갔다([삼국사기] 신라 본기 ‘소지마립간 3년’). 단순히 국경을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서라벌까지 위협한 것이다.

492년 징글징글한 장수왕이 죽고 문자명왕이 즉위하자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반격하는 강력한 동맹을 모색한다. 나라든 집안이든 동맹에는 결혼만큼 확실한 보증이 없다. 493년 3월 백제 동성왕이 신라에 혼인을 청하자, 신라 소지마립간은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15년’).

혼인동맹이 이뤄지자 군사 원조는 더욱 긴밀하고 끈끈해졌다. 494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薩水, 괴산)의 들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패하고 말았다. 신라군은 물러나 견아성(犬牙城, 문경)으로 들어갔고, 고구려군이 성을 포위했다. 이때 백제 동성왕이 군사 3000명을 보내 구원했다([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16년’).

495년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연백)을 에워쌌다. 치양은 369년 근초고왕의 아들 수(훗날의 근구수왕)가 고구려 대군을 격파하고 고국원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곳이다. 백제는 ‘승리의 치양성’을 사수하고자 동맹을 불렀다. 신라 소지마립간은 장군 덕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게 했다. 신라 병력의 가세에 포위망이 풀리고 고구려군은 돌아갔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7년’).

양국의 밀월은 청춘남녀의 사랑을 꽃피웠다. 신라 국공 원종(훗날의 법흥왕)은 지대로의 맏아들이었다. 소지마립간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재종 아우 지대로(훗날의 지증왕)가 다음 보위를 잇기로 돼 있었다. 지대로 또한 나이가 많았으므로 원종이 젊은 실력자, 국공으로 떠올랐다. 495년 신라군이 백제로 출동하자 그는 원정길에 동행했다.

백제 동성왕은 국공 원종을 왕궁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신라의 기대주를 융숭히 대접해 동맹을 돈독히 하려는 의도였다. 이 자리에는 동성왕의 딸 보과 공주도 참석했다. 신라의 젊은 실력자에게 공주는 반하고 말았다. 굽실거리기 바쁜 왕궁 남자들과 달리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원종도 백제의 아리따운 공주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청춘남녀는 남몰래 만나 정을 나눴다. 애초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고귀한 신분일수록 정략결혼을 하기 마련이다. 보과 공주는 유력한 귀족에게 결혼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백제는 웅진 천도 이후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이 득세했다. 임금이라도 그들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원종은 보과 공주와 작별하고 쓸쓸히 신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어긋난 인연은 뜻밖의 정변으로 다시 이어졌다. 501년 백제 동성왕이 사냥 나갔다가 자객의 습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위사좌평, 곧 임금이 가장 믿었던 경호 책임자가 암살의 배후였다. 동성왕은 재위 중 신라와 동맹해 고구려를 한강 유역까지 밀어붙였고, 무진주(武珍州, 광주)로 나아가 탐라(耽羅, 제주)를 복속시켰다. 국위를 회복하자 그는 왕권을 세우려고 했는데 끝내 귀족들의 칼에 쓰러진 것이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이복형인 무령왕이 즉위했다. 이때 보과 공주가 왕궁을 나와 신라로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공주로서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어쩌면 무령왕이 귀족들과 결탁해 아버지와 충신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보과 공주는 꿈에 그리던 정인(情人)을 찾아 신라로 갔다.

원종은 기뻐하며 공주를 궁으로 맞아들였다. 500년에 아버지 지증왕이 즉위하면서 그는 태자가 돼 있었다. 원종에게는 박씨 보도 부인이 있었지만 보과 공주를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남모와 아들 모랑이 태어났다(남모는 비운의 공주다. 후일 신라 원화에 뽑히지만 질투에 눈먼 동료 준정이 술을 먹이고 강물에 던져 살해한다).

동성왕 사후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무령왕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물리치며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521년에는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갱위강국(更爲强國)’,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됐다고 선언한다.

“왕봉현(王逢縣)은 개백(皆伯)이라고도 한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기에 왕봉(王逢)으로 이름했다.”([삼국사기] 잡지 ‘지리’)

이번에는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한씨 미녀의 사랑 이야기다. 519년 문자명왕의 뒤를 이어 태자 흥안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안장왕이다. 498년부터 태자였으므로 꽤 나이를 먹고 임금이 된 것이다.

그에게는 한강 재탈환이 지상과제였다. 태자 시절 흥안은 상인 행색을 하고 개백(皆伯, 고양)에 잠입해 장자(長者, 토호) 한씨의 집에서 묵었다. 한 장자의 딸 한주는 절세 미녀였다. 첫눈에 반한 흥안은 은밀히 정을 통하고 부부의 언약을 맺었다. 돌아갈 날이 되자 태자는 신분을 밝히며 후일을 기약했다.

백마 탄 고구려 임금의 ‘연애 대첩’


▎대표적인 한강 유역 고구려 유적지인 아차산 ‘시루봉 보루’, 2012년에 복원됐다.
“나는 고구려의 태자라오. 귀국하면 대군을 이끌고 이 땅을 취한 뒤 그대를 맞이하리다.”(신채호, [조선상고사] ‘해상잡록(海上雜錄)’ 인용부)

임금이 된 흥안은 때를 기다렸다. 523년 백제 무령왕이 죽자 안장왕은 군사를 일으켰다.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니, 백제는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보내 막았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 원년’). 성왕은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안장왕의 ‘연애 전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백마 탄 임금의 속은 타들어갔다.

안장왕이 안달하는 사이 개백에는 신임 성주가 왔다. 한주가 절세 미녀라는 소문을 듣자 성주는 결혼을 청했다. 한씨 미녀는 정인이 있다며 거절했다. 성주는 벌컥 화를 냈다. “정인이 누구냐? 듣기로는 고구려 첩자가 집에 숨어 있었다는데 사실이냐?”

태수는 간첩 혐의로 한씨 미녀를 옥에 가뒀다. 한편으론 으르고 한편으론 어르며 협박과 회유를 반복한 것이다. 그럴수록 한주의 일편단심은 깊어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 백골이 흙먼지 되어 넋이야 있든 없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흩어질 줄 있으랴.”(신채호, [조선상고사] ‘해상잡록(海上雜錄)’ 인용부)

한주의 ‘단심가(丹心歌)’는 심금을 울렸다. 노래는 입소문을 타고 패수를 건너 안장왕의 귀에 들어갔다. 죄책감과 안타까움에 심장이 뻐근했다. 고구려 왕은 곧 장수들을 소집했다.

“개백을 취하고 한주를 구하는 사람에게 천금과 만호후(萬戶侯)를 상으로 내리겠다.” 사실상 한강 유역을 재탈환하라는 얘기다. 상이 탐나도 쉽사리 공언할 일이 아니다. 장수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는데 한 인물이 성큼 나섰다. 을밀이었다.

“신이 목숨 걸고 해내겠습니다. 재물이나 제후는 탐하지 않습니다. 제 소원은 안학 공주와 연을 이루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그 여인을 사랑하듯 신은 공주를 사랑합니다.”(신채호, [조선상고사] ‘해상잡록(海上雜錄)’ 인용부)

안학 공주는 임금의 여동생이었다. 을밀은 임무를 완수하면 공주와 결혼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공주도 을밀과 맺어주기를 바랐다. 안장왕은 청을 받아들이고 하늘에 맹세했다.

을밀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 그는 물길을 이용하자고 했다. 패수(浿水, 예성강)에 수군을 띄워 호로하(瓠瀘河, 임진강)와 아리수(阿利水, 한강)로 치고 들어가는 작전이었다. 을밀의 수군이 연안의 거점들을 빠르게 타격하면, 안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육로의 백제 고을들을 접수한다. 개백·혈성(穴城) 등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요충지들도 정했다.

529년 10월 을밀은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배를 나눠 호로하와 아리수의 거점들을 확보하고 개백에 모이기로 했다. 을밀은 20명의 결사대를 뽑아 미리 개백으로 들어갔다. 개백 성주는 생일잔치를 열고 있었다. 그는 한주를 불러내 마지막 기회라며 수청을 들라고 겁박했다. 미녀가 눈썹도 까딱하지 않자 화가 난 성주는 처형하려고 했다. 이때,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 10만 명이 들이닥쳤다!”

을밀의 부하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들고 일어났다. 잔치는 아수라장이 됐고 을밀은 한주를 구출했다. 성주는 허둥지둥 방비하려고 했으나 이미 고구려 수군이 성을 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안장왕도 혈성(穴城, 강화)을 쳐서 함락시켰다. 인근의 백제 고을들도 모두 고구려에 항복했다. 한강 유역의 주인이 또 다시 바뀐 것이다.

백제 성왕은 맞불 작전을 펼쳤다. 임금의 특명에 보병과 기병 3만 명이 오곡(五谷, 황해도 서흥)으로 출정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성왕 7년’)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들에서 적병 20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안장왕 11년’).

구름 위로 날아간 내 사랑… 최후의 승자는?


▎관악산 정상부에 위치한 통일신라 시대 성벽.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529년 고구려는 국원(國原, 충주)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친김에 내륙 최대의 요충지를 틀어쥔 것이다. 언제든 백제와 신라를 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그것은 백마 탄 고구려 임금의 ‘연애 대첩’이었다. 일등공신 을밀과 안학 공주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백제가 패퇴하는 동안 신라는 조용히 국력을 길렀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해 내부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금관가야 등을 병합함으로써 인구와 영토를 늘려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한강 유역의 새 주인이 무대에 등장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세종’)

신라 화랑 사다함이 대가야로 출정할 때 색공지신(色供之臣) 미실은 향가 ‘풍랑가(風浪歌, 정연찬 해독)’를 지어 연인을 응원하고 위로했다. 진흥왕이 다스린 신라는 사랑과 전쟁이 일상인 나라였다.

진흥왕은 즉위 직후 백제 성왕의 화친 요청을 받아들여 나제동맹을 복원했다. 하지만 백제와의 화친보다 우선인 것은 국익이었다. 기회가 오면 주저 없이 동맹을 저버렸다. 553년 7월 신라는 백제를 기습해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진흥왕은 냉큼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군주로 아찬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을 파견했다. 그것은 통찰력 있는 승부수였다. 475년 장수왕의 한성 대침공 이래 이곳은 통치 공백 지대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공방전이 펼쳐지면서 군사 거점을 중심으로 일시적 점령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백성들로선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는 뜻이다.

뒤통수를 맞은 성왕은 분노했다. 554년 7월 백제 태자 창이 이끄는 3만 대군이 관산성(管山城, 옥천)을 깨뜨렸다. 김무력이 신주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러 갔는데 뜻밖의 대어를 잡게 된다. 백제 성왕이 달랑 군사 50명의 호위를 받으며 진영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린 것이다. 성왕의 목이 달아났고 백제군은 참패했다. 최고위직 좌평 4명과 병사 2만9600명이 전사했으며 돌아간 말은 한 마리도 없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돌아오니 미실은 세종의 아내로…

그 성취와 자신감을 밑거름 삼아 삼국통일의 꿈이 영글어갔다. 선봉에는 신라 화랑이 나섰다. 사다함은 진흥왕이 총애한 화랑이었다. 562년 대가야 정벌전에서 선봉장이 된 그는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적의 성문을 돌파하는 공을 세웠다. 임금은 사다함에게 상으로 밭과 포로들을 내려줬다. 하지만 그는 밭을 부하들에게 나눠 주고 포로들은 풀어줬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화랑의 귀감이었다.

하지만 사다함의 심중에는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미실과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미실은 사도 왕후의 조카였는데 대대로 궁에서 ‘색공(色供)’을 하는 집안 출신이었다. 태후가 왕비를 내치려 하자 시녀 미실은 사도 왕후에게 고해화를 면하게 해줬다. 그 바람에 태후의 미움을 받아 궁에서 쫓겨났고 사다함과 운명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미실은 최고의 화랑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궁에서 추방된 아픔을 치유했다. 사다함은 신라 제일 미색이 불러준 ‘풍랑가’를 가슴에 품고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 미실은 세종의 아내가 돼 있었다. 상사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태후가 다시 입궁시킨 것이다.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 정연찬 해독)’를 지어 아픔을 달래다가 회한 속에 요절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밭의 파랑새야 /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세종’)

구름 위로 날아간 파랑새, 미실은 성골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진흥왕도 푹 빠지고 말았다. 임금이 색공에서 헤어나온 것은 572년 동륜 태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였다. 말년에 왕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삶을 마쳤다(576년). 승명은 ‘법운(法雲)’, 무상한 구름이었다. 한강 삼국지, 그 100년의 사랑과 전쟁도 구름처럼 덧없이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005호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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