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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17)] 박인숙 화백이 말하는 ‘내 아버지 박수근’ 

“맑고 순수했던 아버지, 사람이 반가운 세상 그렸지요” 

교직 은퇴 뒤 작가 겸 시니어 모델 활동, 아버지 삶 추억하는 책도 내
“작품 놓고 싸우는 세태 가슴 아파, 영혼의 빨래터서 세상 정화됐으면…”


▎박수근어린이미술관 내부에 있는 아버지의 작품 앞에 선 박인숙 선생. 칠순을 지난 할머니로 보기엔 너무나 세련되고 당당한 모습이다.
박수근(1914~1965)은 우리나라에서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다.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유화 작품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은 2019년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23억 원에 팔렸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최근 발표한 ‘KYS 미술품가격지수’에 따르면 2019년 거래된 박수근 작품의 호당(22.7×15.8㎝) 가격은 전년(2억1000만원)보다 16% 오른 2억3851만원으로 압도적인 1위였다. 2위 김환기(3490만원)와는 한참 차이가 난다.

작품이 워낙 고가다 보니 위작 시비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2007년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에 팔린 직후 미술 전문지[아트레이드]가 ‘빨래터’의 위작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옥션 측은 이 잡지사를 상대로 30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3심까지 가는 법정 공방 끝에 2009년 11월 대법원은 “그림은 진품으로 추정된다”라면서도 “잡지사의 배상 의무는 없다”라는 묘한 판결을 내렸다.

박수근 화백의 장녀인 박인숙 선생(76)은 이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아버지의 정신을 지키고 기리는 일에 정성을 쏟아왔다. 그는 최근 [내 아버지 박수근](삼인)이라는 책을 냈다. 아버지가 헤쳐왔던 신산한 시대상과 어머니와의 순애보, 끝없는 가난과 혼란 속에서 예술혼을 지켜온 박수근의 일생이 촘촘히 담겨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 근대화 시기를 살아낸 사람들이 공감할 이야기들이 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맞물리면서 독자를 웃기고 울린다.

지난 6월 5일 박수근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에서 박인숙 선생을 만났다. 이날은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 부설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개관식이 열렸다. 박 선생은 수도여사대(현 세종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미술 교사와 중학교 교장을 거쳤다. 은퇴 후엔 작품 활동과 함께 시니어 모델 일을 시작해 제2 인생을 힘차게 열어가고 있다. 이날 박 선생은 칠순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의상과 매너로 연단에 섰다. 그는 “아버지의 정신을 잇는 일에 힘을 합쳐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리고, 남은 생애를 박수근 정신을 널리 알리는데 바치겠다”라고 했다.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교육실에서 박 선생을 만났다. 인터뷰는 딸의 입을 통해 ‘레전드 박수근’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개관, 아버지 기뻐하실 것


▎서울 창신동 시절 부모님과 즐거운 한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서울 더쇼프로젝트에서 워킹을 배웠고, 우리나라 톱 디자이너인 이상봉·양일 선생의 패션쇼 무대에도 섰죠. 대왕대비마마 옷도 입어보고, 미니 바지에 웨딩드레스까지 소화했어요. 젊은 남성 모델이 드레스를 입은 나한테 꽃을 바치는 장면도 있었어요. 이런 걸 해 보면 세포가 살아나는 느낌이 들어요. (웃음)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교감-교장을 하는 동안 늘 투피스만 입고 교회 여전도사님처럼 하고 다녔거든요. 막내아들과 패션쇼를 같이 한 건 여성잡지에도 나왔어요. 이래저래 바쁘게 삽니다.”

아버지를 닮아 키가 상당히 크신데요.

“168㎝였는데 요즘 스트레칭을 열심히 했더니 170㎝까지 나와요. 어릴 땐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농구 선생님께 잡혀서 농구 선수를 했어요. 저한테 ‘제2의 박신자’가 될 선수라고 사람들이 기대했는데 저는 농구보다는 예쁜 옷 입고 공주처럼 사는 게 좋았어요. 거친 몸싸움하고 힘들게 운동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중2 때 운동을 그만뒀죠. 그 뒤로 미술을 전공했고, 지금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요. 경북 경주에 나우갤러리라고 전속 갤러리가 있어요. 화실은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집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개관에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그럼요. 저기 뒷동산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가 보시면 너무 행복해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말이 없어도 다정다감하셨어요. 어린 우리를 위해 동화책을 만들고, 신문 오려서 소설책, 그림 오려서 미술책을 만들어 주신 분이죠. 우리도 자식을 키우지만,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직접 몸으로 하기가 힘들잖아요. 전시된 내용도 제 취향에 잘 맞아서 제가 어린이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양구에 우리 전시관이 생기는데 그러면 여기 내려와 지내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어려운 아이들, 그림 배우고 싶은 어른들 대상으로 재능기부도 하고 싶어요.”

사실 미술은 준비물이 많이 필요한 과목이잖아요.

“미술 시간에 준비물 안 가져오면 구박받는 경우가 많았죠. 저는 그런 아이들한테 종이 주고 연필 주고 그려 보라고 했지 야단칠 수는 없었어요. 제물포고 교사로 있을 때 아이들이 그렇게 숙제들을 잘 해와요. 학부모님이 학교 오셔서 저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미술 선생님이 굉장히 험악한 줄 알았어요. 아이들이 밤새워서 그림 숙제를 하거든요’ 그래요. 저는 잘 그렸다고 막 칭찬하고 교실 뒤에 전시해 주고 하니까 아이들이 동기부여가 돼 열심히 한 것 같다고 했죠.”

자녀들에게 만들어 주신 고구려 역사책에 그림은 아버님이 그리셨고 글은 어머님이 쓰셨잖아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똑똑했어요. 하하. 아버지는 융통성이 없었고 남들 상처 줄까 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스타일이셨죠. 어머니는 야무져서 ‘이건 아니고 이건 이거고’라고 똑 부러지게 말씀을 하셨어요. 글을 잘 쓰시고 노래도 잘하셨지요. 생활력이 강해서 내조를 잘하신 덕에 오늘날 아버지가 계신 거죠. 그림 하나 팔리면 어머니는 쌀 사 와서 2층 다락에 저장하셨어요. 그림 팔린 그 날 하루만 쌀밥 먹고 보통 땐 맨날 수제비만 먹었죠. 지금도 밀가루가 싫고 그래서 빵도 잘 안 먹습니다.(웃음)”

[내 아버지 박수근] 책을 낸 계기가 있었나요?

“어머니가 [박수근 아내의 일기]라는 책을 냈는데 쓰기로 한 내용의 3분의 1만 쓰고는 중단됐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못다 하신 얘기들을 언젠간 내가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주위 분들도 자꾸 권하셨는데 마침 작년에 출판사에서 제안이 왔어요. 제 구술을 녹음하고 실력 있는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좋은 책이 나온 것 같습니다.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여기저기 찾는 분들도 많고 신문·방송 인터뷰도 많이 했어요. 박수근미술관 관장님 말씀으로는 벌써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어갔다고 하네요.”

아버지와 어머니 순애보는 영화나 드라마 같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있는 아버지 동상 앞에 선 박인숙 선생.
책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연’이라고 생각해요. 거짓도 없고 늘 그 자리에 있고…. 아버지가 그린 새를 보면 너무나 이뻐요. 근데 지금 세상은 얼마나 살벌한가요. 사람이 무섭지요. 언제 돌변할지도 모르고, 컴컴한 데서 사람 보면 화들짝 놀라게 되고요. 저는 박수근미술관과 이 책을 통해 우리 영혼이 빨래터처럼 세탁이 되고, 새처럼 아이처럼 되어서 사람 보면 반가운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옛날 초가집에서 이웃끼리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서 같이 나눠 먹던 그런 정이 흐르고 맥이 정화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연필 살 돈이 없어 뽕나무 가지를 꺾어다 태워 목탄을 만든 뒤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일제 사상검열에 걸려 집안이 풍비박산 난 뒤 박수근은 26세까지 5년간 춘천·포천·서울 일대를 떠돌며 홀몸으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그림쟁이로 살았다. 1936년 강원도 금성(현재 북한 지역)에 다시 모인 박수근 가족의 바로 윗집이 천생연분으로 맺어지게 되는 김복순의 집이었다.

윗집 처자를 빨래터와 담벼락 사이에서 몰래 훔쳐본 순간 사랑에 빠진 박수근은 절절한 연모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낸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부자인 데다 이미 괜찮은 혼처를 봐 놨던 김복순의 아버지는 ‘편지 사건’을 알아챈 뒤 딸을 흠씬 매질한다. 그 장면을 담 너머로 지켜보던 박수근은 고통과 좌절로 인해 병을 앓게 된다. 이에 박수근의 아버지가 윗집에 들이닥쳐 “내 아들 살려내라. 당신네 집안이 얼마나 잘났기에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냐. 우리 아들이 아니면 당신 딸을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며 소리소리 지른 뒤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린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평양과 금성을 오가며 살던 중에 한국전쟁이 터졌고, 박수근이 먼저 남쪽으로 피신하면서 기약 없는 생이별을 하게 된다. 김복순은 어린 것들과 젖먹이를 업고 걸리며 피난길에 오르고,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해 2년 만에 창신동에서 박수근과 극적으로 상봉한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서럽고 아픈 시간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순애보를 들으면 두 분이 어떤 인연이었을까 싶습니다.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을 들으면 ‘쾅~’ 하고 클라이맥스가 지난 뒤 잔잔한 여운이 남잖아요. 두 분은 운명적으로 만났고, 아름다운 음악 연주처럼 사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6·25 때 목숨 걸고 식구들 데리고 월남해 기적적으로 아버지를 만났잖아요. 운명의 이끌림이 없으면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울에 정착해 생활이 좀 안정된 뒤에 어머니가 머리도 좀 손질하고 퍼머도 하고 싶었대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늘 머리를 쪽지고 춘향이처럼 화장도 안 한 맨얼굴로 지내는 걸 좋아하셨어요. 외출 나가서 전차를 타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맨 구석으로 몰고 가서 주위에 아무도 접근 못 하게 그 긴 팔로 어머니를 꽉 막아섰대요. 아버지는 키가 180㎝가 넘고 얼굴도 이국적이라 동네 사람들 사이에 미국 사람과 산다고 소문이 났죠.”

창신동 옛집, 담벼락만 조금 남고 흔적 없어


▎맏아들 성남(왼쪽) 맏딸 인숙과 함께한 박수근 선생.
만년에는 바가지도 긁고 싫은 소리도 하고 그러시지 않았나요?


▎박인숙 선생이 낸 책 [내 아버지 박수근].
“제가 학교에서 공납금을 못 내서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어머니가 ‘인숙이 공납금 못 내면 학교 관둬야 한대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래? 걱정하지 마’ 하셨어요. 아버지는 말이 느리고 급한 게 없었지요. 그러고는 책장에서 아끼고 아끼시던 조선시대 도록 몇 권 싸서 나가시던 뒷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그걸 팔아서 공납금을 냈는데 그때 엄마가 ‘왜 그러셨어요’ 하신 게 유일한 잔소리였어요. 두 분이 크게 싸우시는 법이 없었죠. 여자가 자꾸 바가지 긁고 살림타령 하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었겠어요?”

아버님 그림 제목을 보면 형용사나 부사가 없고, 단순 명료한 명사로만 돼 있어요.

“아버지는 따뜻한 마음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애정어린 눈으로 보신 거 같아요. 내가 책을 보고 있으면 그걸 쓱쓱 그리시고, 엄마가 절구질하는 걸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다가 그걸 또 그리시고. 일부러 절구질하라 그러지 않았어요. 동네 나가실 때마다 스케치북을 들고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을 그리셨어요. 아버지 그림에는 체에 거르고 거른 색들이 모여 있어요. 색깔들이 겹치고 겹쳐서 오래 묵은 된장 같은 색이 나타나는 겁니다. 고향의 흙냄새를 맡는 기분이죠. 아버지 그림 앞에 서면 그림 속 아이들에게 ‘얘들아 지금 뭐 하냐’ 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런 소재·색깔·심성이 숨 쉬니까 누가 돈을 들여 선전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끌고 공감하는 힘이 나온 겁니다.”

서울 창신동 살던 때가 가장 좋았다고 하셨는데요.

“지금도 그 집 풍경이 그림처럼 필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마루가 아버지 화실인데 그 위 전깃줄에 제비집이 있었고, 가끔 마루에 똥을 싸곤 했지요. 아버지는 음치인데 하모니카 부는 걸 좋아하셨어요. ‘뻐꾹뻐꾹 뻐꾸기의 노래가’로 시작하는 뻐꾸기 왈츠를 하모니카로 연주하면 어머니가 거기 맞춰 노래를 부르시고 우리도 함께 불렀지요. ‘다뉴브강의 잔 물결’도 자주 부르던 노래였어요. 우리는 노래 부르는 것, 아버지 그림 보는 것이 참 좋았어요. 우리 집 뒤에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미군들이 초콜릿도 주고 껌도 주고 했어요. 어느 날 동생이 미군이 줬다고 신문지에 싼 걸 들고 왔어요. 기대감에 열어봤더니 똥이 들어 있는 겁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지금 그 생가는 담벼락만 조금 남아 있고 흔적을 찾기도 어려워요. 그 자리에 순댓집이 들어섰더라고요. 예술가의 생가가 복원되면 참 좋을 텐데, 우리는 뿌리를 남기는 데 대해 아직도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림 실력보다 공감 능력이 더 발달한 분일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는데요.

“아버지는 굉장히 창의적인 분이셨어요. 회백색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질감(마티에르)을 사용한 화가는 세계적으로 아버지밖에 없는 것 같아요. 캔버스에 물감을 바른 뒤 나이프로 물감을 긁어내고 또다시 붓질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면 소 혓바닥같이 오돌도돌한 질감이 나타났어요. 거친 게 아니라 굉장히 부드럽고 예뻤어요. 경주의 돌과 흙담, 화강암 속 마애불과 석탑에서 영감을 얻으신 것 같아요.”

말년에는 눈이 많이 안 좋아지셨는데요.

“작품이 작품 자체로 인정받고 대접받지 못하는 미술계 풍토에 대해 절망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저녁때 나가셔서 친구분들과 안주도 없이 술을 많이 드셨어요. 집에서도 식사를 잘 못 하셨고요. 어느 날 백내장이 왔다고 했는데 동네 싸구려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잘못해서 실명이 된 겁니다. 한쪽 눈으로만 그림을 그리시다 보니 후기 작품엔 윤곽이 흐려진 게 좀 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미완성이었던 세 작품이 있었어요. 그걸 완성하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그게 누구한테 가 있는지도 몰라요. 아버지 작품은 거의 대부분 어떤 사람의 금고에 들어가 있어요. 그림이 아니라 돈인 거죠.”

아버님 작품을 다 모은다면 몇 점 정도 될까요?

“400여 점 되지 않을까요. 박수근미술관에 십몇 점 있고, 삼성 리움미술관에도 좀 있을 겁니다. 아버지 작품은 미국으로 제일 많이 갔어요. 아버지의 가장 큰 후원인이었던 마가렛 밀러 여사는 창신동 집에 와서 그림을 사 가곤 했어요. 미국에 돌아가서도 물감이나 화구를 보내주고, 그림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요. 그 편지를 번역해 주신 분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셨어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림을 그냥 줘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수준이 많이 올라왔죠. 우리 뒷집에 사시던 군 부대장 사모님이 저를 예뻐하셔서 중학교 때 수학여행비도 내주시고 대학 들어갔을 때 구두도 사 주시고 했거든요. 그게 고마워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린 수채화나 유화를 갖다 줬는데 훗날 그 자녀들이 그걸 팔아서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해요.”

가짜 그림 들고 와서 “감정 좀 해 달라” 졸라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유족들은 박수근 화백 그림을 얼마나 갖고 있나요?

“저희는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엄마도 우물 안 개구리였고 우리도 다 학생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앞이 깜깜했죠. 친지분들이 아버지 그림을 모아 유작전이라 해서 열어줬어요. 유가족 돕기 차원에서 다들 싸게 작품들을 사 가셨죠. 그분들도 순수한 마음에서 한 거였고, 저희들도 고마웠죠. 그런 전시회가 몇 번 있었으니 저희 수중에는 아버지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았어요. 한번은 엄마가 미국 갔다가 밀러 여사한테서 아버지 그림을 몇 점 받아오셨어요. 저는 시집갈 때 아무것도 해 간 게 없어 엄마가 그중 한 점을 제게 주셨어요. 잘 보관하고 있는데 하루는 남편이 팔자고 해요.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내가 너 시집갈 때 아무것도 못 해줬으니까 남편 하자는 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6호짜리 그림을 20년도 훨씬 전에 3000만 원에 팔았어요. 그걸로 인천에 150평짜리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그때부터 우리 집 살림이 좀 펴졌어요. 그렇지만 지금도 저는 그걸 안 팔아야 했는데, 괜히 팔았다 하는 마음에 속상할 때가 많아요.”

아버지 그림으로 덕 본 건 없고 오히려 그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하셨죠.

“저는 아버지 그늘 밑에서 그 뜻을 이어 행복하게 사는 게 좋았는데 남동생(박성남 씨)은 위작 시비와 그로 인한 송사에 휘말려서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고서학회 회장이라는 분이 가짜 그림을 갖고 몇 점 줄 테니까 전시회를 하재요. 흰 장갑을 끼고 국보라도 모셔오는 것처럼 조심조심 그림을 꺼내 와서 하얀 종이 위에 놓는데 중학생이 그린 것만도 못한 걸 아버지 그림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이가 없었죠. 그쪽 사람 중에 존경받는 시인의 사위가 있어서 그분에게 ‘아버지 그림 보셨어요?’ 했더니 책에서 봤다고 해요. ‘이 그림이 아버지 그림 맞나요?’ 했더니 맞다는 겁니다. ‘저 아낙네들이 신고 있는 신발을 보세요. 무슨 말괄량이 삐삐 신발 같은 걸 신고 있는데 신발만 비교하면 정답이 나올 거예요’라고 한 뒤에 중간에 나와버렸어요. 그랬더니 제 등에 대고 ‘지 애비 그림도 몰라본다’라고 욕을 해요. 위작 논란으로 재판정까지 갔는데 저쪽에서는 변호사를 세 명이나 써서 진짜라고 또 그래요. 제가 그분을 보고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세요. 왜 가짜 그림을 진짜라고 그래요’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휴정 때 그쪽 변호사들한테도 ‘제가 학교에 있지만 아이들이 법조인 꿈을 꾸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그 제자들에게 뭐라고 해야 합니까’ 하고 소리쳤더니 ‘저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죄송합니다’ 하더라고요.”

“이건 몇 억…” 돈으로 말하는 예술혼 서글퍼


▎1. 홍콩 경매에서 약 23억원에 팔린 ‘공기놀이 하는 아이들’. / 2. 2008년 1월 위작 시비로 감정을 받고 있는 작품 ‘빨래터’. / 3. 박수근이 딸 박인숙을 모델로 그린 작품 ‘책 읽는 소녀’.
박 선생은 요즘은 아주 친한 사람 아니면 감정을 잘 안 해준다고 했다. “아버지 그림 좀 감정해 달라”고 가져오는 사람들 보면 ‘진품이라고 얘기만 해 주면 최하 몇억’이라는 생각에 눈이 희망에 차 있다고 한다. 박 선생은 무서워서 위작이라는 말은 못 하고 “저는 이 그림이 좀 낯설어요. 감정협회 가셔서 여러분들한테 감정을 받아 보세요”라고 말한다는 거다.

“저한테 감정해 달라고 가져오는 건 다 가짜라고 보면 돼요. 진짜면 들고 올 이유가 없죠. 양구 사시는 아버지 친구분이 아버지한테서 받았다면서 그림을 들고 온 적도 있었어요. ‘이건 아버지가 주셨든 하나님이 주셨든 제가 볼 때는 아버지 그림이 아닙니다’ 했더니 ‘사실은 아닌 거 알고 있다’며 미안하다고 해요.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아버지 그림이 사람들의 탐욕 때문에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게 가슴 아팠어요. 아버지 100주기 전시회 때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작품의 가치와 박수근 정신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얼마짜리, 이건 몇 억짜리’라는 얘길 하는데 참 서글펐어요.”

헤어지기 전 “박수근 정신을 계승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었다. 박 선생은 교육자의 마음으로 말했다. “아이들의 가치관이 많이 변했어요. 내가 좋으면 좋고 내가 안 좋으면 안 좋은 겁니다. 모든 게 내가 기준이 되는 거죠. 배려도 없고 참 무서워요. 지식 위주로만 자녀 교육을 시키지 말고, 인성·감성·지식 교육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하는 말이 교육이고, 사회가 교실입니다. 서로 믿음이 오가는 사회를, 아버지 그림과 제 책을 통해 만들고 싶습니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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