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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책과 사람’(9)] 80만 부 팔린 '과학 콘서트' 저자 정재승 

믿고 싶은 것만 믿는 2만 년 전의 뇌 한국 사회, 아직도 쓴다 

‘일상’과 ‘복잡계’ 내세워 대중 과학서 붐 … 출간 20년 개정판 펴내
“자기 직관과 다르더라도 증거 있으면 받아들이는 게 과학적 태도”


▎정재승 KAIST 교수의 2001년 저서 [과학 콘서트]는 국내 대중 과학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저자들이 속속 생겨나 과학서 시장이 활기를 띠었다. / 사진:임안나
우리의 대중 과학서 역사는 정재승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아직도 싱싱한 그의 대표 저서 [과학 콘서트]는 그만큼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2001년 여름 KAIST를 다니던 스물아홉의 젊은 물리학도 정재승이 이 책을 냈을 때만 해도 국내 대중 과학서 시장은 번역서 일색이었다. 해외의 저명 과학자 책이라야 통했다. ‘일상에 숨은 과학’과 ‘복잡계’라는 두 키워드를 앞세운 [과학 콘서트]가 서서히 지형을 바꿨다. 공중파 TV의 책 소개 프로그램([!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소개된 게 방아쇠 역할을 했지만 책 자체의 가능성과 생명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2020년 8월까지 무려 80만 부나 팔렸다. 후발 과학책 저자들이 생겨났고, 과학서 시장에 활기가 돌았다. 저자 정재승에게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고려대를 거쳐 모교인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정 교수는 최근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에 이어 융합기초학부장을 맡았다. 연구와 교육이라는 본업에서도 거침없는 모양새다.

동아시아 출판사에 이어 책을 내고 있는 출판사 어크로스는 책 출간 20년을 맞아 개정 증보 2판을 냈다. 첫 출간 당시 생소하던 복잡계 과학이 인간 두뇌 안에서 벌어지는 창의성의 비밀에 접근하는 최신 사정을 소개하는 200자 원고지 100쪽 분량의 글을 ‘두 번째 커튼콜’이라는 제목을 붙여 추가했다. 또다시 10년 후 세 번째 커튼콜, 그 이후 네 번째, 다섯 번째 커튼콜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자리를 비워둔 것이다.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8월 11일 빅데이터 회사인 서울 독서당로 바이브 사옥에서 정재승 교수를 만났다. 빅데이터는 사물인터넷·인공지능과 함께 초연결·초융합을 추구하는 미래사회 구현에 필수적인데, 그런 사회가 일종의 복잡계라는 점에서 정 교수의 연구 분야와도 관련이 없지 않다.

무척 바쁠 것 같다. 한국의 과학자 가운데 가장 바쁜 한 사람 아닌가?

“학기 중에는 수업이나 연구 미팅, 논문 지도로 주중 일과시간을 주로 보낸다. 내가 맡고 있는 연구실의 연구 주제들이 흥미로워 학생이 많은 편이다. 주중 저녁이나 주말에는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데 한 달 평균 1200건 정도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그중 8건 정도를 골라 배치하고 나머지는 정중히 거절하고, 시간이 남으면 좋아하는 영화나 연극을 관람한다. 무척 바쁜데 다행히 내가 술·담배·당구·골프를 안 한다. 술은 분해를 못하는데 꼭 마셔야 한다면 소주나 맥주 반 잔 정도? 골프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고 하고, 골프장이 산림 훼손 주범 중 하나여서 치기 꺼려진다.”

한 달 강연 요청이 1200건이나 들어오나?

“코로나 때문에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온라인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요청을 수락하는 8건의 강연은 어떤 기준으로?

“김영란법이 허용하는 최대치를 받는다 해도 많지 않다. 강연료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의미나 보람을 따져 선정한다.”

[과학 콘서트]의 저자 정재승이 정작 어떤 연구를 하는지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의사결정을 할 때 두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연구한다. 두뇌 촬영을 하고 브레인 다이내믹스(두뇌 동역학)를 기술하는 일을 주로 하는데 응용을 많이 할 수 있다. 가령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하려 하거나 담배·마약 중독자들이 나쁜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나쁜 선택을 할 때 두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연구하는 게 큰 흐름 중 하나고, 또 다른 흐름은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의 뇌를 이해해 사람처럼 의사결정을 내리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이다.”

한 달에 강연 요청 1200건, 그중 8건 골라 강연


▎정재승 교수는 물리학에서 출발해 뇌과학자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의사결정을 할 때 두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연구해 중독자 치료를 돕거나 인공 지능 개발에 도움을 준다. / 사진:임안나
학자로서 출발이 물리학이었는데 지금은 뇌공학을 연구한다. 이런 변신은 더러 벌어지는 일인가?

“그런 변화가 적지 않다. KAIST 물리학과에서 석사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천체물리학 연구실에서 장차 블랙홀이 될 별을 시뮬레이션하는 연구를 했는데 내가 가보지도 못할 테고 관심 있는 지구인이 200~300명도 안 되는 연구를 왜 하고 있나 생각할 무렵 복잡계 물리학의 대가인 예일대 수학과 브누아 망델브로 교수의 강연을 우연히 듣게 됐다. 인간의 지문이나 해안선, 나뭇가지의 뻗은 모양 같은 자연의 패턴에는 전체와 비슷한 구조를 갖춘 부분들이 되풀이되는 프랙털(fractal)적 특성이 있다는 강연이었는데 너무 놀라워서 복잡계 물리학으로 옮겨가게 됐다. 선배들 가운데 복잡계의 정수라고 할 만한 주식시장이나 날씨 예측 시뮬레이션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인간의 뇌야말로 가장 복잡한 시스템 중 하나고 인간의 뇌세포가 어떻게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정신이라는 걸 만드는지 탐구하는 것도 물리학적으로 굉장히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다. 천체물리학을 연구할 때, 우주가 어떻게 탄생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됐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탐구했다면, 지금 하는 연구는 그런 우주의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우주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인식론적 질문으로 옮겨온 거다.”

두뇌 건강이나 기능은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가령 오후보다 오전에 업무 효율이 높은 사이클 같은 게 있나?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 중에 어떤 게 더 좋다는 건 없다.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대학원 다닐 때까지는 밤에 집중이 잘됐는데 최근 한 10년간은 새벽 시간을 많이 활용한다.”

복잡계 과학 접하고 물리학에서 뇌과학 연구로 전환


▎왼쪽부터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1999년, [과학 콘서트] 2001년, [눈먼 시계공] 2010년, [열두 발자국] 2018년.
젊어서는 암기력, 나이 들면 이해력이 뛰어나다, 이런 통념은?

“미국에서 열 살 이하부터 팔십 넘은 어르신까지 전 나이대에 걸쳐 10가지가 넘는 뇌 기능 평가를 해서 나이 듦에 따라 뇌의 기능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연구했다. 마흔이 넘어가면 기억력이 크게 감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면 20대까지는 특별히 어떤 단어를 외운다는 의식 없이도 매일 두세 단어꼴로 습득한다. 그러다 마흔 넘어서 끊임없이 알던 단어를 잊어버리는 거다. 나무의 디테일은 기억 못하는 대신 숲을 보는 능력은 현저히 좋아져서 마흔 이후부터는 아주 복잡한 상황에서 핵심 이슈가 뭔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디를 건드려야 하는 건지, 숲이나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이 생긴다.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좋아진다. 사실 나무의 디테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숲을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변화가 생기는 이유는?

“뇌의 자연스러운 발달과 노화의 결과다. 뇌 사진을 찍어본 결과 해마라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넘기는 영역의 크기가 어느 나이까지는 굉장히 커지고 연결도 복잡해지다가 어느 시기부터는 연결이 줄어든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이라는 존재의 생물학적 한계가 느껴진다.

“인간의 위대한 정신활동이 생물학적인 뇌에 기반을 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과정을 통해 얻은 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해서 인간이 하찮다거나 단백질 덩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귀한 인간 정신을 만들어내는 물질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게 과학자의 책무다. 한낱 물질이 아니라 굉장히 위대하고 경이로운 물질에 대한 연구다.”

책 이야기를 해보자. 과학자 정재승, 인간 정재승의 행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한때 [과학 콘서트]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성취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네이처] 같은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해도 알아주지 않고 [과학 콘서트]의 저자로만 여겨 안타까운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책이 매 순간 내 삶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했던 것 같다. 처음 쓸 때만 해도 복잡계 과학이라는 분야는 생소했는데 젊은 국내 과학자 책이라고 주목하고 추천해줘 고마웠고, 열심히 해보겠다는 패기도 생겼다. 출간 10주년 무렵에는 더 이상 젊은 과학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연구 결과를 책 안에 집어넣으려 했고, 이번 20년 개정판에는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좀 더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성찰적인 내용을 담으려 했다. 그러고 보면 책은 온전히 내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썼다고 해서 떠나보낸 게 아니라 책에 탑승해 책과 함께 세상을 항해하고 있었구나, [과학 콘서트]호의 선장으로 학문이라는 세계를 탐험할 때 굉장히 큰 도움이 됐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가령 모르는 학자들과 교류할 때 그들이 쉽게 마음을 열고 공동 연구를 해주기도 했고, 어떤 성과가 나오면 논문을 쓰는 데만 그치지 않고 세상에 알리는 일에도 함께 관심을 가져줬다.”

책이 가져다준 가장 큰 혜택은 무엇인가. 인세 수입? 명성?

“그런 것들도 있겠지만 제일 큰 거는 과학을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낯선 사람들이 쉽게 말 건네는 사람이 됐다는 점이다. 책 잘 읽었어요, 당신 책 읽고 과학자를 꿈꾸게 됐어요, 책에 있는 이 계산은 이런 걸 고려했어야 하는데 틀린 것 같아요, 이런 e메일을 보내거나 말을 건넨다.”

책의 성공 비결을 꼽는다면?

“물리학 하면 우주와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인간 사회의 현상을 설명하는 일에도 유용하다는 점을 독자들이 굉장히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과학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고, 우주나 자연에 관한 과학책들과 함께 일상 속의 과학을 보여주는 책으로 많은 추천을 받은 것 같다.”

정 교수는 “과학은 하나의 태도”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쓰게 됐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대하는 방식인데, 어떤 대상은 과학적으로 대하고 어떤 대상은 과학적으로 대하지 않고 이런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상을 대하는 과학적 자세 같은 게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런 책을 쓰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과학적인 태도라면 한국 사회에 필요한 덕목이다.

멀리 있지 않은 일상의 과학이 책 인기 비결


▎사진:임안나
과학적 태도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나 한국인의 점수는? 가령 한국인은 얼마나 과학적인가, 혹은 비과학적인가?

“한국 사람들이 어떻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원래 충분히 과학적이지는 않다. 그렇다 보니 가령 미신인 줄 알면서도 지키는 것들이 있다. 빨간색으로 이름 쓰지 않는다거나 밤에 휘파람 불지 않기도 하고 명백하게 과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혈액형과 성격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궁합이나 사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주저하기도 한다. 굉장히 중요한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정책이나 공약보다 관련된 어떤 사람이 무슨 무슨 감이다 혹은 아니다는 식으로 결정을 하기도 하고 음모론을 쉽게 믿기도 한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그렇다. 그런 것들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일을 하는 게 과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해 기회 있을 때마다 조금씩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비과학적인 사람이 과학적 태도를 가지려면?

“어떤 것을 쉽게 믿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증거가 있다면 받아들이는 태도도 있어야 한다. 열려 있으면서도 비판적인, 양립하기 어려운 두 태도가 모두 필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쉽게 믿지 않지만 직관과 다르더라도 증거를 대하면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였다가도 반증이 될 만한 증거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기존 믿음이 폐기될 수 있다는 게 과학의 매력이다.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지만 어떤 것도 절대적인 진리로 가는 과정이지 그 자체는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 역학이 학계에서 인정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과학의 그런 태도를 각자의 삶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뭔가를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이 있나?

“너무 쉽게 믿는 경향, 믿지 않는 경향, 둘 다 있다. 확증편향이 있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에 따라 증거를 선택해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원래 믿음은 더 공고히 하고 뒤에 오는 반대되지만 중요한 주장은 굉장히 쉽게 거부한다. 옛날에는 그런 태도가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할 때 유리했겠지만 지금은 훨씬 더 합리적인 사회가 됐는데 우리는 2만 년 전에 쓰던 뇌를 아직도 쓴다. 그러다 보니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들을 많이 한다.”

그런 확증편향 극복이 쉽지는 않다.

“가장 극단적인 확증편향의 사례가 진영논리일 텐데 남들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해 자신들의 가치가 옳다고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우리 집단 내에서도 얼마든지 잘못된 행동이 나올 수 있지 않나. 그럴 때 진영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신뢰를 받을 거고. 어떤 사안들은 칼로 물 베듯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건 그냥 가치의 문제야, 추구하는 생각이 달라서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안이 있고, 이거는 진짜 잘못됐고 잘됐고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안이 있다고 했을 때 두 사안 사이의 경계는 흐릿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편이기 때문에 좀 더 긍정적으로 보려는 태도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좀 중립적으로 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실천할 수 있는 행동요령 같은 게 있을까?

“평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말하기 전에 의심해보는 것, 그게 첫 번째 걸음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이 말이 맞나, 내가 무슨 근거로 이런 얘기 하는 건가, 내가 근거라고 믿었던 것들이 정말 믿을 만한 건가,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 왔지, 이런 것들을 따져 묻는 태도가 출발점일 것 같다. 그런 태도만 있어도 누군가에게 쉽게 미혹되지 않고 반대로 누군가를 쉽게 현혹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는 게 과학적 태도 첫걸음

화제를 바꿔 글쓰기 얘기를 해보자. 당신이 쓴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과학 콘서트] 역시 잘 썼다, 스토리텔링이 정말 좋다는 느낌이 드는데 비결이 있다면?

“말 잘하는 것과 글 잘 쓰는 방법은 사실 하나다. 생각이 잘 정리돼 있으면 누구나 말 잘하고 글 잘 쓸 수 있다. 내가 글을 잘 못 쓴다는 얘기는 지금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돼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생각이 잘 정리돼 있으면 어떤 글을 쓰더라도 잘 정리된 생각들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잘 정리돼 있다면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데에는 경험도 좀 필요한데, 과학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많이 얘기한다. 선행 개념을 알아야 그다음 개념을 이해할 수 있고, 머릿속으로 논리적인 내용을 잘 따져야 한다. 그런 내용을 전달할 때 적절한 사례나 비유를 들면 머릿속에서 상상하거나 시각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럼 쉽게 받아들인다. 또 추상적인 개념을 그냥 나열하기보다는 이야기 안에 배치할 때 사람들이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려 하고 사례나 비유를 들려고 애쓴다. 그리고 내가 백 마디 하는 것보다 아인슈타인이나 파인만의 한마디가 더 강력하다. 적절하게 인용하면 좋다. 이런 것들에 신경 쓰면서 글을 쓰는 편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고 쉬운 개념을 배운 것처럼 느끼는데 이럴 때 과학책이 해줄 수 있는 80% 정도는 한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과학책들과 달리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식을 알기 쉽게 전하는 것까지는 모든 과학책 저자가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은 세상이 어떻게 달리 보이느냐에 관한 통찰이랄까. 그런 걸 책에서 원하는 것 같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이해시키려는 게 아니라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하는 질문에 답하려 노력하는 게 쓰는 입장에서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머피의 법칙이 과학적으로 이런 원리야.’ 이렇게 설명했을 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이런 의구심을 보이는 경우 ‘그래서 세상은 이렇다는 거야’ 하는 통찰을 얘기해줬을 때 책을 읽기 전후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럴 때 의미 있는 글이 되는 것 같고 그런 내용을 담으려고 애쓴다.”

그렇게 쓰려면 작지 않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

“에세이건 다른 어떤 산문이건 세상의 모든 글은 시(詩)라서 읽는 맛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번에 쭉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리듬이 중요하다. 그래서 여러 차례 읽으면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스무 번쯤 읽고 퇴고를 했던 것 같다. 내가 어디서도 막히지 않고 계속 리듬을 타며 읽을 수 있으면 사람들이 술술 읽게 되니까.”

독서 폭이 굉장히 넓을 것 같다.

“한 책을 읽으면 읽고 싶거나 읽어야겠다고 생각되는 책들이 열 배쯤 늘어나지 않나. 독서가 화학적 연쇄 반응을 항상 일으키기 때문에 더 읽고 싶거나 읽어야 할 책들이 늘어나고, 훨씬 더 광범위한 분야로 도미노가 진행된다. 가령 처음 출발은 [자살의 사회학]이라는 책이었는데 심리학, 정신의학, 자살과 관련된 소설, 이렇게 굉장히 다양한 분야로 이어지는 식이다 보니까 독서 편식이 적은 편이다. 읽고 싶은 책들을 계속 쌓아두다가 가금씩 집어서 틈날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읽는다. 책이라는 물건은 늘 주변에 있어야 읽는다. 안 그러면 스마트폰에 시간을 뺏기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독서에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내 경우 어려서 과도하게 책에 질식하지 않았던 경험이 오히려 도움 된 것 같다. 누구도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습관을 들이겠다고 억지로 나를 앉혀놓지 않았다. 그래서 뛰어놀다가 자연스럽고 즐겁게 책을 접하게 됐는데,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책 읽기가 시험 시간에 읽는 책 읽기다. 그걸 한번 접하면 책 읽기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다. 지금도 나는 백화점 명품 숍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커다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가슴이 뛰고 흥분돼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 책을 처음에 어떻게 접했느냐가 책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정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과학책 안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 들어 있어

좋은 책은 이런 거다.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읽기 전과 후에 세상이 달라 보이는 책, 내 인식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렇다면 좋은 글은?

“그렇게 세상을 확장시키는 시발점이 되는 글?”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한다면?

“과학출판 시장이 점점 어려운데,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돈의 흐름은 어디로 향하고 미래의 기운이 어디에 있나를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그런 길을 포기하고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내 삶의 질에 집중하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리스트를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주와 자연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걸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발견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려주는 책들을 읽으면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생 한 번도 서점의 과학책 코너에 가본 적 없는 분들이 과학의 흥미로운 질문들에 관한 좋은 책들을 읽어보면 좋겠다. 물론 [과학 콘서트]가 그중 한 권이면 좋겠고.”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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