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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논설위원의 ‘온 리버티(on liberty)’] 조선시대로 돌아간 여권의 ‘뉴트로 정치’ 

수신(修身)은 없고 군신(君臣)만 있는 ‘변종 성리학’ 

전 정권에 맞섰던 ‘촛불 검사’ 현 정권에 맞서자 ‘제왕적 총장’ 비난
잇따른 성추문엔 침묵… ‘민주주의=다수의 통치’식 힘의 논리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6차 공정사회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쪽을 보며 발언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문재인=태종, 조국=조광조·조식, 박원순=이순신’.

현 정부에선 유난히 조선시대의 위인들이 자주 소환됩니다. 지난 5월 이광재 당시 국회의원 당선자(더불어민주당 의원)는 유튜브 방송에서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과제를 만드는 ‘태종’과 같다, 이제는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고 했습니다. 문 대통령을 건국 후 나라의 기틀을 닦은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에 비유한 것이죠.

태종 이방원은 잘 알려진 대로 건국 직전 ‘최후의 고려인’ 정몽주를 암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형제들과 외척들을 죽이며 왕권을 강화했죠.

이광재 의원이 이런 잔혹한 이방원의 모습을 대통령에 비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많은 것들이 참여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 이어졌다, 이 흐름은 문재인 정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강물처럼 물결이 긴 기간 이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과거의 폐습을 딛고 새 시대를 여는 마중물이 되리라는 뜻이죠.

앞서 지난 3월 황희석 당시 열린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 최고위원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조광조에 비유해 논란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조 전 장관을 수사하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외척 세력의 거두인 윤원형에 비유했죠. 그러나 조광조의 후손인 한양 조씨 대종회가 즉각 망언을 사죄하라며 반박했습니다.

얼마 후 황희석 최고위원은 다시 조 전 장관을 조식에 비유했습니다. 조식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퇴계 이황 못지않은 대학자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이번에도 조식의 직계후손이 나서 조 전 장관은 자신들과 전혀 관계없고 억지로 연결하려는 것 자체가 모독이라고 발끈했습니다.

지난 7월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사건 때는 친여 성향의 네티즌이 ‘이순신 장군도 관노(官奴)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려 논란이 됐습니다. 이순신의 후예인 덕수 이씨 종친회가 법적 대응 등의 입장을 밝히자 이 네티즌은 오히려 “소송이 있다면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박원순은 이순신이 아니고, 피해 여성은 관노가 아니다, 이걸 말이라고 하냐”며 비판했습니다. 여성단체와 다수 언론도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고 박 전 시장 사건에서 이순신을 끌어들인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내놨고요.

성리학의 유토피아 ‘정교일치’


▎7월 29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인근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현재 여권의 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 사이에선 조선의 위인들을 소환하는 ‘뉴트로(New-tro, 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과거의 어느 정권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자는 그 원인이 현재의 집권세력이 꿈꾸는 사회의 본질이 성리학적 세계관을 가졌던 조선시대와 모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하나씩 따져보도록 하죠.

정치사상으로서 성리학의 핵심 가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말에 모두 압축돼 있습니다.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 사상은 사서로 일컬어지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삼경으로 불리는 [시경] [서경] [역경]에 자세히 설명돼 있죠. 그중 위 구절은 [대학]에 다음과 같이 표현돼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후에야 깨닫게 된다. 깨닫게 되면 그 뜻이 성실해진다. 성실해진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된다.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 몸이 닦인다. 몸이 닦인 후에야 집안이 바르게 선다. 집안이 바르게 서야 나라가 다스려진다. 나라가 다스려진다면 비로소 천하가 태평해진다. 일개 서민부터 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을 닦는 것이 근본인 이유다.’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송·명나라 학자들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조선에 이르러 더욱 굳건한 통치철학으로 자리잡습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가 명분으로 삼은 것이 유가의 애민 사상과 역성혁명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권문세족이 부와 권력을 모두 갖고 있던 고려 말기엔 성리학이 마치 ‘민주화 운동’과 같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으로 여겨졌죠.

성리학에서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선한 국가’처럼 통치자의 역량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국가의 목적은 인간의 선한 생활이며, 정치사회는 고결한 행동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시민 각자의 행복은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국가 권력은 개인의 권리에 우선합니다.

이때 국가, 즉 통치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통치자의 탁월한 역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국가는 ‘선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고 그 권력은 통치자에게 집중되는데, 만일 통치자의 철학과 생각이 잘못되면 권력은 흉포해지고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절제’ 같은 정치가의 공적 역량이 시민보다 월등해야만 국가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성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잘 나타내듯,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대로 닦은 군자만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관료들은 왕세자를 어릴 때부터 경연을 통해 성군으로 길러내려고 했습니다. 성군이 된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되는 백성들의 어버이였습니다. (君師父一體, 군사부일체)

일상 속에서 성리학은 ‘유교(儒敎)’라는 표현에서 보듯 관혼상제와 같은 집단의식을 관장하는 종교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특히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고려시대에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던 불교를 배척했습니다. 물론 전국의 수많은 사찰과 백성들의 믿음까지 빼앗을 순 없었지만, 명실상부한 조선의 국교 역할을 한 것은 유교, 즉 성리학이었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성리학은 한 국가의 정치철학이자 국교로서 종교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임금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진 통치자일 뿐 아니라 최고의 종교 지도자이기도 했죠.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초기와 같은 강력한 왕권을 발휘하긴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조선의 성리학은 통치 철학이자 국교로서 기능했습니다.

함재봉 전 아산정책연구원장은 “한국의 좌파는 유교적 이념과 민족주의가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그룹”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장과 돈을 천시하고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기며, 가난하지만 평등하게 서로 나누는 작은 공동체를 좋아하는 건 주자학적 이상을 내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지적처럼 현 집권세력의 주축인 586 정치인들은 민족주의적 성향과 유교적 습성이 뼛속 깊이 내재돼 있죠. 다만 시장과 돈을 천시한다는 그의 진단은 틀렸습니다. 조국·윤미향 등 최근 논란이 된 586 정치인들의 모습과 부동산 투기로 수십억원씩 이익을 챙긴 청와대·여권 인사들의 재테크 솜씨를 볼 때 이들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586 정치인들이 유교적 습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조선의 선비들처럼 ‘수신제가’에 힘썼다는 뜻이 아닙니다. 학문으로서의 성리학보다는, 교조적 이념으로서 유교를 받아들였다는 뜻이죠. 겉으론 평등해 보이지만 운동권 내부에선 군신 관계와 같은 엄격한 권력 질서를 형성하고, 여성과 소수자 인권 등의 이슈는 언제나 ‘반미’ ‘통일’ 같은 대의에 밀려 가려집니다.

유교적 습성 내재된 586 운동권


▎지난 7월 11일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서 한 이용자가 박원순 전 시장의 죽음을 두고 이순신과 비교하며 옹호하는 글을 남겼다. / 사진:연합뉴스
고 박 전 시장 사건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잊히고, 박 전 시장에 대한 업적을 내세우며 2차 가해를 벌이는 일들은 586 정치인들의 비뚤어진 세계관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오히려 성추행 가해자인 그를 일컬어 “맑은 분이라 세상을 하직”(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 “너무 도덕적으로 살려 하면 사고나”(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 같은 미화 발언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청와대입니다. 고 장자연 사건이나 김학의 전 차관 사건에서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강력한 의견표명으로 수사를 독려했습니다. 그 때문에 마치 엄청난 게이트라도 터질 것처럼 온 사회가 떠들썩했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지금 보면 용두사미로 끝났습니다. 일례로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던 윤지오씨는 해외로 출국한 이후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 때는 언제고, 고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대한 청와대와 정부의 대응은 미지근하기만 합니다. 대통령은 피해자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고요. 오히려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이 유감을 표명했다가 청와대가 나서 공식 의견이 아닌 개인 의견이라고 정정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의당은 “피해자는 용기 내 고발했으나 또다시 위력과의 싸움을 마주하고 있다. 2차 가해가 난무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누구 곁에 설 것인지 명확히 입장을 낼 것을 촉구한다. 외면과 회피는 대통령의 책임 있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고 비판했습니다.

평소 청와대가 즐겨 인용하던 외신들도 대통령의 오랜 침묵을 지적했습니다. 7월 16일 미국의 CNN은 “한국 대통령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그의 세 정치적 동반자는 성범죄로 고발됐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이 박 시장의 죽음과 피해자, 심지어 좀 더 넓은 의미의 젠더 이슈에 대해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세 명의 유력 정치인 고발 사건에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결국 586 집권세력이 생각하는 ‘정의’는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으로서 도덕적 준칙이 아니라, 오로지 내 편에 유리하느냐 아니냐가 기준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원칙과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조국 사태가 그랬고 윤미향 사건이 그랬습니다.

지난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을 그렇게 비판해 놓고 자신들은 위성정당을 2개나 만들어 의석수를 많이 가져간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 2중대라는 수모까지 들어가며 여당에 보조를 맞췄던 정의당은 팽을 당하고 맙니다. 심지어 이인영 당시 원내대표로부터 “심상정은 안 된다. 정의당이나 민생당이랑 같이하는 순간, X물에서 같이 뒹구는 것”이라는 모욕을 들어가면서까지 말이죠.

그렇다면 현재 586 집권세력이 ‘내로남불 정의’에 빠진 이유는 뭘까요. 취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했던 평등·공정·정의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레토릭뿐이었던 걸까요. 권력을 향유하면서 전엔 안 그랬던 사람들이 ‘내로남불 정의’에 물든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것인지 헷갈립니다.

확실한 것은 이들의 마음속엔 왜곡된 정의관, 또는 위험한 국가관이 내재돼 있다는 것입니다. 586 정치인들이 정치적 코호트로 형성됐던 1980년대의 특수성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던 나연준(중앙대 박사과정)씨는 “(586세대는) 자신이 경험한 군사정권을 가해자로, 이를 다시 근현대사 전체로 확대해버렸다”며 “친일·독재·기업은 항상 가해자이고 항일·민주화·노동은 언제나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역사관 위에 자신을 피해자로 정체화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피해자의 한풀이를 자신의 역사적 소명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586의 기본적 세계관”이라고 지적합니다.

‘내로남불 정의’의 본질적 이유


▎지난 7월 10일 문재인 대통령 조화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1980년대는 ‘군사독재’라는 절대악이 존재했습니다. 학생운동과 국가권력의 갈등은 선과 악의 싸움이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였습니다. 총칼을 앞세운 공권력 앞에서 힘없는 학생들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유토피아를 향한 이상과 혈기뿐이었죠. 이를 위해 운동권 스스로, 혹은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역사적 소명과 같은 ‘선민의식’을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에게 불어넣거나 세뇌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가 정권 초기부터 왜 그렇게 적폐 청산을 내세우고 집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과 문제가 생겼을 때는 반일이 아니면 모두 친일로 몰아세우며 한국 사회를 둘로 쪼개놨죠. 특히 적폐청산은 말로는 과거의 못된 폐습을 바로잡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자신의 원한을 갚는다는 측면도 컸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여권의 태도 변화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조국 전 장관은 서울대 교수 시절이던 2013년 SNS에서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열 검사의 오늘 발언, 두고두고 내 마음속에 남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윤 총장에게 “더럽고 치사해도 버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외의 많은 여권 인사들도 윤 총장 임명 당시 귀가 간지러울 만큼 칭찬과 찬양을 늘어놨습니다.

그러나 윤 총장의 검찰이 조 전 장관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여권에 칼날을 겨누자 입장이 싹 바뀝니다. 윤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에도 엄정하게 수사해 달라’는 대통령의 말을 실천했을 뿐인데 졸지에 적폐로 몰렸습니다.

조 전 장관의 후임으로 추미애 장관이 법무부 수장이 되면서 이 같은 이율배반적 태도는 더욱 노골적이 됩니다. 얼마 전에는 현 정권이 만든 수사심의위가 한동훈 검사의 편을 들어줬다는 이유로 무용론을 제기합니다. 급기야 추 장관은 윤 총장을 향해 ‘제왕적 검찰총장’이라는 망상에 가까운 공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의회정치의 무력화


▎2007년 5월 3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이 청와대 본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국정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586 집권세력이 추구하는 정치의 모습은 어떤 걸까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화를 주도했던 운동세력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이 고대 그리스의 어원처럼 ‘인민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대의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이론의 기반인 시민 개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권리의 평등에 힘입어 선거를 통한 대표 체계라는 점을 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의회정치인데 이를 무시하고 통치자와 국민이 직거래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좇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의든 직접이든 같은 민주주의인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고요. 그 이유는 최 교수의 지적대로 “다원적 통치체제로서 대의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인민을 다수 인민의 ‘총의(總意)’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틀은 전체주의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나치 정권 치하에서 의회는 국민의 대표 역할을 하기보다는 히틀러를 뒤치다꺼리하는 껍데기에 불과했죠. 히틀러는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제멋대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이처럼 전체주의에선 인민의 총의라는 허상을 내세우고 통치자가 제멋대로 정치를 펴기 쉽습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국민의 뜻’을 내세우면서 야당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게 됩니다.

최 교수는 현 집권세력에도 비슷한 비판을 가합니다. “운동론적 민주주의관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의제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의회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정당의 역할을 폄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은 히틀러의 제3 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수기 역할만 할 뿐입니다.

당론에 반하는 투표를 했다고 해서 금태섭 전 의원을 징계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대통령의 뜻이 결정되면, 여당은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다른 목소리는 대통령에 대한 불경죄로 인식돼 이미 낙선한 인사조차 징계해야만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습니다. 방송에서 마이크가 꺼진 줄 모르고 부동산 관련 발언을 했다가 친여 지지자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진경준 의원도 비슷한 사례고요.

현 집권세력은 여당이 거수기 역할만 하는 것도 모자라 야당의 존재까지 무력화시키려 합니다. 여당이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한 게 대표적인 예죠. 그러면서 책임 있는 국회 운영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합니다. 그동안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일하지 못했으므로 상임위원장 독식은 합리적인 일이라고 자신과 지지자들을 세뇌합니다. 민주당 식 ‘비정상의 정상화’였던 셈이죠.

유명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에서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민주주의를 구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행위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자기만이 절대선이라고 믿는 독선가들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라는 뜻입니다.

로마가 제국으로 발돋움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왕과 교황의 권력을 분리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삼권분립까지는 아니지만, 정치와 종교를 구분해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견제장치를 마련한 것이죠. 교황과 수도사, 왕과 영주는 서로의 반대편에서 상대의 독주를 방지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한 몸이 되는 순간 절대 권력이 탄생하고 그 위험이 얼마나 큰지 인류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집니다. 앞서 설명했듯 조선의 유교는 통치 철학이자 국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다만 이슬람의 칼리프, 술탄 등과 달리 한 명의 군주가 절대 권력을 독점하진 않았습니다. 반대로 조선은 정교일치 사회였지만, 그 권력을 왕과 신하가 분점한 형태였죠. 오히려 건국 초기 태종과 세종 등 일부 기간을 제외하면 임금의 왕권보다 사대부의 신권이 더욱 센 나라였습니다.

종교가 돼버린 팬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떨까요. 헌법에 명시된 대로 한국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공화국이지만, 여전히 정교 일치의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권리를 문프께 양도”하고 “우리 이니 하고싶은 것 다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달빛 소나타가 대통령의 성정을 닮았다”며 ‘월광’을 피아노로 연주한 정치인은 총선에서 낙선 후 청와대에 입성했습니다. 현직 검사는 유명 소프라노가 부른 ‘달님에게 보내는 노래’를 대통령에게 바치는 것인 양 SNS에 올려 큰 호응을 얻었고요. 조선시대에나 볼 법한 개인숭배와 우상화의 모습입니다.

좋아하는 정치인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맹목적 애정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그 정도가 종교적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는 물론 극우 진영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그 규모와 영향력 측면에서 친여 지지자들을 따라갈 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과 여권의 정치인들은 지지자를 등에 업고 자신의 지지층이 아닌 사람들이 반대하는 정책들을 고민 없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7월 여당이 야당 없이 부동산 등 법안을 본회의에서 일사천리로 통과시킨 일처럼 말이죠.

왕을 내세우고 그 뒤에서 좌지우지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처럼 586 집권세력도 팬덤이 강한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우고 실제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국정을 주무르는 모습도 보입니다. 북한 인권과 핵 문제엔 눈감으면서 무조건 퍼주기만 하려는 이중적 태도, 부동산 세제 소급적용처럼 자유주의 헌법을 무시하는 정책까지 586 정치인들이 80년대 꿈꿨던 이상 국가를 21세기 세우려 하고 합니다.

적어도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한 게 맞는다면, 생전의 그가 꿈꿨던 새로운 진보의 가치, 즉 자유주의와 실용주의를 이렇게 내팽개치진 않을 것입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추진처럼 지지층의 욕을 들어먹으면서도 현실정치에서 실용을 택했고, 지역주의와 반공에 물든 수구세력에 대항해 자유주의를 무기로 싸웠습니다. 노 전 대통령과 지지자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지금과 같은 맹목적 팬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제일 먼저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이 지역주의와 반공주의 같은 종교화된 권력이었기 때문이죠.

꽃이 지고 나서야 그때가 봄인 줄 알았다는 말처럼 ‘바보 노무현’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되는 요즘입니다. 그것도 그를 계승했다고 말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친노 반문’ 세력까지 등장하며 노무현의 정치철학이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에게 묻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요?”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지금 거여(巨與)의 폭주가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할까요.

※ 윤석만 논설위원/중앙일보 -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202009호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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