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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메조소프라노 김수정의 노래와 꿈 

“세상사람들에게 희망을 심고 싶어요” 

15년 전 입양 아동들과의 만남 계기로 입양어린이합창단 이끌며 ‘동분서주’
올여름 서귀포 오페라페스티벌 예술감독으로 국내 첫 오페라 온라인 공연 선보여


▎김수정 글로벌오페라단장은 한국입양어린이합창단과 제주 서귀포 오페라 페스티벌 예술감독 등 다양한 사회 참여 활동으로 클래식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무대 조명 가운데에서 한 사내가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부른다. ‘새벽이 오면, 승리하리라(All’alba vincero)’. 사내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다. 얼음처럼 차갑고 잔혹한 공주 투란도트와의 목숨 건 내기에서 이긴 타타르 왕자 칼라프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Nessun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다. 칼라프 역을 맡은 가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감동은 배가 된다.

지난 8월 7일 선보인 제5회 서귀포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는 서귀포 예술의전당 무대의 감동을 안방으로 고스란히 전달했다. 이번 페스티벌에는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예년과 다르게 처음으로 유튜브를 통해 [투란도트] 공연 실황을 중계했다. 카메라 여섯대가 배우들의 표정까지 잡아내 몰입감을 더했다. 11월 9일 현재까지 조회수가 7200건을 넘는다. 수백 명의 관객이 찾았을 현장 공연과 비교하면 대히트다.

이 온라인 공연을 기획한 사람은 서귀포 오페라 페스티벌의 예술감독 김수정 글로벌오페라단장이다. 김 단장은 첫 페스티벌이 열린 2016년부터 줄곧 이 무대의 예술감독을 맡아 [나비부인] [리골레토] [마술피리] 등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을 공연해 왔다. 매번 호평을 받았지만, 올해 공연은 김 단장에게도 의미가 남다르다.

“[투란도트]는 절망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를 들려줘요.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면 이 어려움도 머지않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어요.” [투란도트]를 무대에 올린 의미에 대한 김 단장의 설명이다.

김 단장은 1995년 한국인 최초로 폴란드 바르샤바 오페라 극장에서 메조소프라노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글로벌오페라단장, 서귀포 오페라 페스티벌 예술감독, 여기에 더해 한국에서 유일한 ‘입양어린이합창단’ 단장도 맡고 있다. 가수 본연의 활동과 기획자, 사회 공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중견 성악가로 좀 더 편한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엇이 그를 이토록 왕성한 활동으로 이끄는지 궁금했다. 11월 9일 이태원 경리단길의 한 카페에서 김 단장을 만났다. 그는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좇다 보니 여러 미션을 맡게 됐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음악가는 곧 혁명가였어요. 모차르트의[피가로의 결혼]은 귀족이 아닌 하인들의 결혼 이야기예요. 봉건제가 굳건한 당시로선 부조리를 고발하는 혁명적인 이야기를 했던 거죠. 베토벤은 늘 시대에 반항적이었어요. 바그너 또한 히틀러에 의해 악용되긴 했지만, 시대를 바꾸는 도구로 쓰였죠. 음악이어서 더 빠르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게 음악의 힘인 거죠.”

국내 첫 ‘온라인 오페라’ 7000여 명 감상


▎한국입양어린이합창단은 올해로 창단 10년을 맞았다. 국내·외 각지를 돌며 입양에 관한 편견을 깨는 데 앞장선다. / 사진:한국입양어린이합창단
김 단장은 지재(智才)를 겸비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작곡과 성악을 복수 전공했고, 폴란드 쇼팽국립음악원에서 오페라 성악(석사)을 수학했다. 가수로서 정상급 메조소프라노의 기량을 인정받는다. 대개 그와 같은 경력을 가진 이들은 메이저 무대에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경로를 걷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몇몇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할 뿐 ‘성공’에 뜻을 두지 않는다. 대신 일찌감치 사회 참여로 눈을 돌렸다. 김 단장이 오래전부터 결코 손에서 놓지 않는 일이 있다. 바로 입양어린이합창단을 꾸려가는 일이다.

2006년 입양 어린이들과 첫 인연을 맺었다. 사회의 편견 앞에서 아이들이 당당해지길 바랐다.

“‘너희는 행복한 아이들이야. 낳아준 분이 아닐 뿐이지, 부모님도 있고 가족이 있잖아. 주눅 들 것 없단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입양에 대한 편견을 깨고 공개 입양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에 합창단을 시작했죠.”

야심차게 합창단을 꾸렸지만 한때는 너무 힘이 들어 도망치다시피 미국의 한 대학 교환교수로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미국인 교수가 자폐증을 가진 한국인 입양아를 헌신적으로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왔단다.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도망간 곳에서 다시 입양어린이와 인연을 맺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 길이 숙명이구나 생각했어요. 그 뒤론 오로지 입양어린이 합창단 일에 몰두했어요.”

2010년에 정식 창단해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를 다니며 공연을 하기도 한다. 창단 당시 10여 명이었던 단원이 이제 30명을 넘어 어엿한 합창단의 면모를 갖췄다. 올해 서귀포 오페라 페스티벌에 오른 [투란도트]에서도 아이들의 목소리가 연주되기도 했다. 지난 2017년에는 클래식 음악인들에게 꿈의 무대로 알려진 세계 3대 오페라 페스티벌 중 하나, 이탈리아의 ‘토레 델 라고 오페라 축제’ 무대에 오른 오페라 [선덕여왕]에 출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꼿꼿이 서서 노래만 하는 합창단은 매력이 없잖아요? 아이들다운 생기발랄함이 관객에게 오롯이 전해지는 합창단으로 키우고 싶었어요. 특히 오페라는 그런 바람과 딱 떨어져요.”

입양어린이합창단은 오로지 기부자들의 협찬으로 운영된다. 마당발 인맥을 자랑하는 김 단장이지만, 10년간 합창단을 이끌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해외 공연을 갔을 때 후원품으로 들어온 햇반에 김가루만 뿌려서 삼시 세끼를 때운 적도 있어요. 기업가들의 도움이 컸는데 최근 들어서는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겪다 보니 전처럼 흔쾌히 나서주질 못하는 게 아쉽긴 해요. 그래도 우린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있어서 행복해요.”

김 단장은 노래의 주인공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한다. 관객에게 가장 진정성 있는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입양이 불행한 게 아니란 것을 웃으며 노래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백 마디 화려한 수사로도 포장 못 할 진심이 녹아 있다.

“극장이 공연 수준 정하는 시대 지났다”


▎10월 1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계단 광장에서 열린 ‘클래식과 함께 하는 패션쇼’에서 김수정 글로벌오페라단장이 사회를 보고 직접 출연했다. / 사진:김수정
7년 전부터 또 다른 재능기부 형식의 활동을 시작했다. 다문화여성 쉼터인 ‘유니게의 집’을 후원하기 위해 시작한 다문화여성 합창단이다. 매년 ‘유니게의 노래’라는 콘서트를 연다. 유니게는 신약성서에 등장한다. 사도 바울의 수제자였던 디모데의 어머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자녀를 키운 경건한 어머니의 표상이다. 이름에는 ‘선한 승리’란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김 단장의 바람과 닮았다. 김 단장은 “음악회를 준비할 때 가장 콘텐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누굴 위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늘 고민한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공연예술계의 걱정이 유독 컸다. 많은 공연이 취소됐고, 그나마 열린 공연도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예술인에게 관객 없는 무대에서 배역에 집중하는 건 고역이나 다름없다. 혹자는 코로나 상황의 장기화를 ‘공연 예술계의 암흑시대’라고도 한다. 하지만 김 단장의 생각은 전혀 딴판이다.

“관객과 직접 만날 기회는 줄어든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온라인을 통해 무대의 생명은 전보다 길어졌어요. 수많은 사람의 땀방울과 큰돈이 들어가는 오페라 무대는 고작 며칠 공연이 끝나면 사라졌지만, 이젠 온라인을 통해 언제든 그 감동을 재생할 수 있으니까요. 대신 국경 없는 세상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경쟁해야 할 테니 적당히 넘어가는 공연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무대는 더 프로페셔널해질 거예요.”

그는 코로나 위기를 오히려 기회라고 확신했다. 고질적으로 지적돼 온 공연예술계의 부익부 빈익빈을 극복할 새로운 플랫폼이 열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에는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과 같은 메이저급 무대에 올라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좋은 공연이라고 평가를 받았어요. 지방에서 열리는 공연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편견도 있었죠. 하지만 코로나가 부른 ‘온택트(ontact)’ 환경에선 달라졌어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해졌어요. 완성도 높은 지방 공연들이 무대나 장소가 아닌 공연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거예요. 극장의 명성이 공연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가 지난 겁니다.”

김 단장은 클래식의 강한 생명력을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적으로도 전쟁과 질병 등의 수많은 암흑기를 거치면서도 클래식은 더 정제됐고, 시대정신의 총아로 살아남았다.

“클래식이 수 세기에 걸쳐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탈피 과정을 겪으면서 고도로 농축된 예술로 승화했어요. 코로나 시대는 클래식이 오래된 껍데기를 다시 한번 벗는 변곡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중에서도 오페라는 음악과 공연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예술이에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온라인 시대에 걸맞은 장르가 아닐까요.”

“제주도를 클래식의 메카 만드는 게 꿈”


▎메조소프라노 가수인 김수정 글로벌오페라단장이 11월 중순 제주도의 오름에서 열린 비대면 연주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사진:김수정
공적인 일에 매달리다 보면 자신의 무대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무대 욕심을 버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김 단장은 “얇고 길게 가라는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며 웃었다.

“제 활동들을 좀 줄이면서 절제해야 하는 점이 분명히 있어요. 저도 티켓 많이 팔고 싶고, 큰 무대에도 자주 오르고 싶죠. 하지만 거창한 명분보다 제가 공인으로의 모양새를 갖춰야 사람들도 제가 하는 일에 관심 갖고 도움을 주지 않겠어요. 고향에서 좋은 오페라 만드는 것이나, 입양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걸 제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활동의 의미를 되새기면 그 의미들이 저를 더 고무시키는 것 같아요. 또 여전히 노래하고 있고, 노래할 크고 작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 단장은 여전히 현역 싱어다. 오페라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입양 어린이와 다문화 여성들이 노래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도 가수로서 자신의 무대 활동에도 열정적이다. 오는 12월 10일에 그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베세토오페라단과 소리얼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아듀 2020 콘서트’ 무대에 선다.

가수로서 김 단장은 “오래전부터 꿈이 있다”고 했다. 공연장의 무대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노래하고 싶은 갈망이었다.

“노래를 하려면 실내든 실외든 당연히 무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무대도, 객석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서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요.”

역설적이게도 무관중 공연이 일상이 된 코로나 이후의 비대면, 그리고 온택트 문화 덕분에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지난 11월 중순에는 억새풀이 무성한 제주도 오름에서 ‘오름음악회’를 열었다. 음악회는 지역 방송을 통해 녹화해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다. 김 단장은 “시대가 만든 무대”라고 했다. 최근에는 서울의 예술의전당 계단광장에서 열린 패션쇼 음악회에서 아리아를 열창하기도 했다. 무대랄 것도 없었지만, 김 단장은 오히려 “열린 공간이란 점이 좋았고, 울림도 좋은 무대였다”고 했다.

세계적인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는 매년 7월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 라야티코에서 콘서트를 연다. 토스카나 지방의 땅과 하늘을 배경 삼아 울려 퍼지는 보첼리의 공연을 보려고 1만3000명이 이 작은 마을을 찾는다고 한다. 제주도가 보첼리의 토스카나와 같은 클래식 문화의 메카가 되길 바라는 게 김 단장의 오랜 꿈이다. 그는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대학에 가기 전까지 줄곧 제주에서 자랐다.

“코로나 이후 제주도를 찾는 여행객이 더 많아졌어요. 온라인 공연 이후 서귀포 오페라페스티벌을 아는 분들도 꽤 늘었고요. 서귀포의 밤하늘에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면, 이보다 낭만적인 장면이 또 있을까요?”

- 글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202012호 (202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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