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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21)] ‘악바리’ 박정태 한국클럽야구연맹 이사장 

“정석 야구는 재미없어, 막가야 관중 열광” 

“어머니 위해 독하게 운동, 나보다 연습 많이 한 선수 없을 것”
버스 기사 폭행으로 추락, 자살 충동 이기고 밀양서 새 도전


▎박정태 이사장이 밀양 동강중 선수들에게 타격 폼을 지도하고 있다. 박 이사장은 “가장 중요한 건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태(51)는 그냥 레전드가 아니다.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의 혼(魂)이자 부산 야구의 상징이다. 그는 1991년 입단해 2004년까지 롯데에서만 뛴 ‘원 클럽 맨’이다. 붙박이 2루수로서 91, 92, 96, 98, 99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고, 통산 1167경기에 출장해 1141안타, 85홈런, 638타점을 기록했다. 1999시즌에는 31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해 단일 시즌 연속 안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박정태는 92년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 99년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의 주역이었다. 30년이 다 되도록 우승이 없는 롯데의 흑역사 속에서 그나마 잠깐 반짝했던 융성기를 이끌었다. ‘악바리’ ‘탱크’ ‘또라이’ 같은 별명은 박정태가 얼마나 투혼과 근성을 갖춘 선수인지를 말해준다. 어려운 가정 형편, 왜소한 체격, 야구 비주류 학맥(동래고-경성대) 등 온갖 핸디캡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메이저리거 추신수(38·텍사스 레인저스)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도 박정태는 롯데 2군 감독, 1군 타격코치 등을 역임하며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장애인, 비행 청소년, 다문화 가정 등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레인보우희망재단 이사장으로서 봉사활동도 꾸준히 했다.

그랬던 그가 2019년 1월 ‘버스 기사 폭행 사건’에 휘말리면서 크게 흔들렸다. 음주운전을 하고, 버스 기사와 시비 끝에 운전석 핸들을 이리저리 흔든 게 CCTV에 찍혔다. 그는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고, 불구속 수사와 재판 끝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 사건의 충격으로 한때 죽음을 생각했던 박정태는 지금 경남 밀양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국내 최초로 야구 회사(아이엠제이티)를 만들어 클럽 시스템 안에서 초-중-고-대로 이어지는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클럽야구연맹 이사장도 맡고 있다.

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볕이 좋았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박정태 이사장을 밀양에서 만났다.

초등학교 돌면서 “흔들 타법 하지 마라”


▎박정태가 3년 동안 가다듬어 완성했다는 특유의 ‘흔들 타법’.
싸움 잘해서 야구선수 됐다면서요?

“그렇죠. 하하. 어릴 적 우리 집이 어려웠는데 어머님이 야구 장비를 사 주셔서 그걸로 동네야구팀에서 시합하면서 용돈을 벌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초에 대연초등학교 야구부와 시합을 했는데 우리가 한 이닝 수비만 끝내면 이기는 상황에서 5∼6학년 선도부들이 빨리 나가라며 훼방을 놓는 겁니다. 그 바람에 패싸움이 붙었어요. 대연초등학교 최병주 감독님이 싸움하던 나를 번쩍 들면서 ‘너 뭐야’ 하셨어요. 내가 ‘왜요?’ 하면서 반항했더니 웃으면서 놔주셨어요. 잽싸게 도망을 쳤는데 다음 날 집에 그분이 찾아와서 어머니와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어머니가 ‘튀김하고 막걸리 파는 신세라 애를 먹일 형편도 안되고 회비도 못 냅니다’ 하니까 감독님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정태는 저한테 맡기십시오.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로 키우겠습니다’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대연초 야구부에 들어가게 된 거죠.”

오늘의 박정태를 만든 원동력은?

“어려움이죠. 저는 너무 많은 한과 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입니다. 어머니 호강시켜 드려야겠다는 마음, 그 하나만으로 오늘의 박정태가 된 겁니다. 현역 프로야구 선수를 포함해 대한민국 야구에서 저보다 연습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는 정말 가진 게 없었어요. 키도 작고, 손가락도 짧고, 형편도 어렵고…. 그런데 사람들은 쟤는 야구의 신이라 했어요. 저는 남들 보는 앞에서 연습 안 했습니다. 해가 지면 연습 시작해서 해가 뜰 때쯤 끝냈어요. 매일매일. 그러니 야구를 못할 수가 없죠. 지금 우리 아이들에겐 주입시키지 않는 창의적인 야구, 기다려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주는 게 전부입니다. 얘들은 사인 없이 자기들이 알아서 모든 것을 풀어나갑니다.”

독특한 ‘흔들 타법’이 화제였죠.

“프로 와서 3년 동안 연구하고 다듬은 타법입니다. 3년 뒤에 보니까 썩 좋은 폼은 아닌 게 됐지만 그 폼으로 인해 박정태가 살 수 있었어요. 장기 레이스를 하다 보니 체중을 실어서 공을 치는 힘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체력을 세이브하기 위해 그런 타법을 고안한 겁니다. 그 타법이 타이밍 맞추기가 정말 어려워요. 내일 상대 팀 선발투수가 예고되면 그 투수의 투구 비디오를 한 시간 정도 보면서 타이밍 맞추는 훈련을 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맞지 않고, 슬럼프에도 자주 빠집니다. 그런데도 잘 치니까 팬들도 ‘천재다’ ‘신기하다’ 하셨죠.”

어린 선수들이 그 폼을 많이 따라 했는데요.

“당시 부산의 초등학교 선수 중에서 제폼을 따라 하는 애들이 3분의 1이 넘었어요. 아이들은 유행을 좋아하니까 자기 팀 감독 얘기도 안 통하는 겁니다. 기본기도 없으면서 그렇게 하면 분명히 실패하는데 말입니다. 급기야 부산시 야구협회에서 ‘학교 돌면서 설명 좀 해 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면서 내가 왜 이렇게 치게 됐는지를 설명하고 ‘기본기를 먼저 닦아라. 나중에 큰 선수가 되면 니가 알아서 바꿔도 되는데 지금은 아니다’고 설득했죠.”

박정태 이사장은 일주일 내내 밀양에 틀어박혀 산다. [국제신문]에서 박호걸 기자와 함께 롯데 편파 중계인 ‘아, 넘어가나요’를 진행하는 화요일에만 잠깐 부산을 다녀온다. 박 이사장은 “밀양에서 사과 농사하시는 분 아이의 상담을 맡다가 이쪽과 연결됐어요. 중학교(동강중) 팀을 만들게 되고, 초등학교에 이어 이번에 고등학교(밀성고) 팀까지 만들게 됐어요. 내년에 2년제 대학팀이 만들어지면 제가 꿈꾸던 박정태 라인이 완성되는 거죠. 저는 어릴 적 야구 하면서 어른들의 부정부패, 학부모와의 유착 관계로 인한 불이익 등을 너무 많이 겪어서 한이 맺혀 있어요. 그걸 없애기 위해 여기 오자마자 야구부 학부모회장과 총무를 없앴죠. 학부모를 상대할 프런트 직원을 구했고요. 감독은 부모들과 말도 섞지 않습니다. 아이들 가르치는 데 집중하는 거죠. 지금은 모든 분이 행복해하고 만족도가 높습니다”고 소개했다.

야구 회사에서 지도자만 학교에 파견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마지막 우승 당시 모습.
대한민국 야구계에 획기적인 시스템인데요.

“그렇죠. 한국에서 야구 회사는 처음입니다. 우리는 싹수가 보이는 아이들을 발굴해 키우면서 관리까지 합니다. 매월 초등학생 50만원, 중학생 60만원의 회비 외에 다른 비용은 받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지도자를 파견해 야구부를 지도하는 시스템입니다. 밀양시에서도 많이 도와주고 있고, 동네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나니 어르신들도 좋아하십니다. 처음에 3명으로 시작했는데 학부모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올해만 초등학교에 15명이 들어왔고, 내년에 19명이 들어올 예정입니다.”

그렇지만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할 텐데요?

“밀양시에서 도와주고 있지만 회비만 갖고는 아이들 먹이는 데 충당하기도 빠듯합니다. 야구장과 훈련장, 각종 장비 마련에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기숙사도 지어야 하고요. 지금도 저희 트레이너가 대한체육회에서 지원하는 공모사업 신청 자료를 만들고 있습니다. 유소년 스포츠 지도자에게 연 8000만원씩 5년간 지원하는 사업이거든요.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 초-중-고 팀을 창단하면 지원금을 줬는데 우리가 클럽으로 전환하면서 그게 끊겼어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수익모델을 찾고 있습니다. 올겨울 10개 팀 정도 밀양에 전지훈련을 유치하고 각종 대회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중에 학교 수업을 마친 동강중 야구부 아이들이 왁자지껄 몰려왔다.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권영진 감독도 인사를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야구장에 가보니 권 감독이 수비 훈련을 위한 펑고(타구를 날려주는 것)를 쳐주고 있었다. 권 감독은 농담과 꾸지람, 칭찬을 적절히 섞어서 아이들을 이끌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고 진지했다. 박 이사장은 “지금은 무조건 기본기를 탄탄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중학교가 전국 최강이 될 겁니다. 한국 야구를 책임질 스타들도 여기서 나올 거고요”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프로 4년 차에 큰 상처를 입으셨죠?

“제 야구인생이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어요. 왼발목이 으스러져서 그야말로 다리가 가루가 됐으니까요. 그해 겨울 연습했던 게 너무 아깝고, 낙망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부산 팬들이 롯데 시합만 마치면 사직야구장에서 동래역 대동병원까지 개미군단처럼 줄지어 오는 겁니다. 제 병실에 팬들이 보내주신 과일과 음료수, 선물로 가득 찼어요. 재활이 참 어렵고 아프더라고요. 꼭 일어나서 팬들에게 내 빚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으면 못 일어났을 겁니다. 복귀 첫 경기에서 4타수 3안타를 치면서 빚을 갚았죠.”

수술을 네 번이나 했다면서요?

“첫 수술 마치자마자 침대 밑에 커튼을 쳐서 운동 기구를 숨겨놓고 저녁마다 몰래 웨이트를 했어요. 다음 날 다리가 퉁퉁 붓더라고요. 그래서 세 번을 더 하게 됐죠. 네 번째는 병원장이 직접 집도를 했어요. 그때는 뼈가 곪아서 골수암까지 진행됐고 마지막 수술이 잘못되면 발을 자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발 올리고 계속 관리하니까 나아졌어요. 수술이 잘못된 게 아니라 제가 관리를 잘못한 거죠. 세 번째까지 수술한 의사가 동래고 선배인데 저 때문에 엄청나게 욕을 먹고 퇴출 위기까지 겪었어요.”

버스 기사와는 형-동생으로 잘 지내


▎박정태의 인생을 바꿔놓은 버스기사 폭행 사건 당시 CCTV 화면.
버스 기사 폭행 사건이 지난해 1월이었죠?

“그날 고등학교 동창들과 골프 하고, 저녁 먹으면서 반주를 좀 했어요. 차 안에서 대리운전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도로 폭이 좁아지는 곳이라 버스 기사가 ‘못 지나가겠다. 차를 좀 빼 달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볼 때는 이만큼(1m 정도) 여유가 있어서 5분 정도 실랑이를 했어요. 내가 ‘술 먹었으니까 못 뺀다. 지금 대리운전 오고 있다’고 했는데도 경적을 계속 울리면서 ‘차 머리만 살짝 빼 달라’고 해서 차를 좀 움직였죠. 내 차 옆을 통과하던 기사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타봐라’ 하더라고요. 난 ‘내가 왜 타노’ 하면서도 속으로 무슨 할 말이 있는갑다 싶어서 탔더니 문을 닫고 급출발하는 겁니다. 그 바람에 뒤로 넘어져서 차 앞문 계단으로 굴렀어요.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두 정류장 정도를 더 달리기에 내가 ‘왜 이러노 지금. 내려주라. 틀어라 임마’ 하면서 핸들을 잡았더니 그제야 차를 대는데 거기 신고를 받은 경찰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잘못했으니 진술서 다 쓰고,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겠다고 했어요. 변호사도 국선(國選)을 썼죠. 버스 기사도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써줬습니다. 지금은 형-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죠(웃음).”

많은 걸 잃었지만 얻은 것도 있죠?

“그 사건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그동안 너무 인기를 먹고 교만했구나’ 자각하고 박정태를 내렸습니다. 지금은 그냥 한 야구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야구인으로서 소망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팬들 앞에서 (롯데) 우승을 한 번 시켜보고 싶다는 것. 또 하나는 박정태라는 야구인이 이런 거 하나 남기고 갔구나 하는 걸 만드는 겁니다. 그중 하나가 아이들 스포츠 클럽이죠. 롯데 팬이 300만 명이라는데 어릴 때 야구 접해본 사람 얼마나 될까요. 지금 야구 선수는 공부가 부족하고, 공부하는 아이들은 스포츠가 부족한 편식 상태입니다. 공부 잘하고 사회생활 되는 야구 선수 키우는 게 제 꿈입니다.”

버스 사건 이후 극단적 생각도 했다면서요?

“나는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방을 잡고 모든 준비를 다 했어요. 사흘 만에 웃으면서 나왔습니다. ‘죽을 각오로 살면 못할 게 뭐 있나’ 한다는데 저는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부럽더라고요. ‘내가 가면 팬들과 가족에게 진 이 큰 빚을 어떻게 감당하나’ 싶어서 죽을 수도 없더라고요. ‘그래, 갈 때 가더라도 갚고 가자’ 하는 마음을 먹었죠. 참 미안한 얘기지만 밀양에는 도망 온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너지를 받게 됐어요. ‘우리가 뒤에 있으니 힘내라’고 격려한 회사 직원들, 저를 믿고 아이 맡긴 부모님들 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초-중-고 야구팀이 만들어지고 또 다른 일들이 펼쳐지는 걸 보면서 모두 놀라요.”

1992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빙그레 마지막 타자의 공을 잡아 2루 베이스를 태그한 게 박정태였다. 그는 우승 공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했다. 1999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도 혈전이었다. 3승 3패로 맞선 마지막 7차전에서 홈런을 친 ‘검은 갈매기’ 호세가 베이스를 돌고 있을 때 삼성 팬들이 맥주 캔, 물병 등을 집어 던졌다. 흥분한 호세가 관중석을 향해 배트를 던졌고, 주심이 호세에게 퇴장을 명령하자 주장 박정태는 선수들을 이끌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20분 이상 중단됐던 경기가 속개되자 롯데 마해영이 2-2 동점을 만드는 홈런을 터뜨린다. 3-5로 패색이 짙었던 9회 초에 임수혁이 투런 홈런을 날려 경기를 연장으로 이끌었다. 결국 연장 11회 혈투 끝에 롯데가 6-5로 이기고 한국시리즈에 오른다.

‘호세 방망이 투척’ 때 같은 눈빛 살아나야


▎박정태 이사장은 “껍데기 박정태는 이제 없다.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할 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땐 우승할 수밖에 없었어요. 1번부터 5번(전준호-이종운-박정태-김민호-김응국)까지가 3할 타자였잖아요. 1992년에는 간절함이 있었고, 선배가 무서워서도 이기려고 했어요(웃음). 찬스 놓치고 본헤드 플레이하면 선배한테 혼이 났죠. 그러면서 이기는 방법을 배워나간 겁니다. 요즘 선수들을 보면서 아쉬운 건 아이들이 주입식 교육을 받다 보니 스스로 풀어내는 게 좀 부족한 겁니다. 야구는 상황마다 순간 변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속에서 그날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룰이랄까 방식이 있어요. 그게 근성이 될 수도 있고 지혜로움이 될 수도 있어요. 매번 이길 수는 없지만 ‘승리의 방식’을 찾아낼 줄 아는 야구관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1999년 호세 방망이 투척 사건은요?

“그때 생각이 제 인생관에 꽉 차 있습니다. 당시 대구 팬이 던진 음료수병에 매니저 선배님이 이마를 맞아 피가 철철 났어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노 싶었어요. 우리 플레이를 보려고 온 사람들이 우리 죽으라고 병 던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경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야, 다 끝내자. 나와’ 하니까 다들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는 겁니다. 로커룸 유리창을 깨고 난리를 치니까 그제야 따라 나왔어요. 경기장 빠져나가기 직전에 코치들한테 질질 끌려 들어왔죠. 김명성 감독님과 권두조 코치님이 와서 ‘마지막이다. 시합은 하자’고 사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오너가 아니고 감독도 아닌데 좀 과했나? 감독님이 서운했겠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죄송합니다. 시합할게요’라고 했습니다. 선수들 모아서 ‘오늘 꼭 이기자, 지면 안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가 지면 어디 들어갈 구멍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그때 선수들 눈빛을 봤어요. 꼭 이겨야 한다는 눈빛이었죠. 이기겠구나 싶었어요. 지금도 그 눈빛을 떠올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롯데도 그 눈빛이 살아나면 우승할 겁니다. 그리고 코칭스태프는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야 돼요. ‘반(半)도사’가 된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하도록 선수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롯데에서 주목하고 있는 선수가 있나요?

“(한참을 생각하다) 오윤석? 정도가 앞으로 괜찮지 않겠나 싶어요. 기본기가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종범 선배 아들 이정후(22·키움)나 강백호(21·kt) 정도는 돼야 팬들이 즐거워하지 않겠어요? 그 고등학교 막 졸업한 애가 타석에서의 자세와 스윙하는 모습 보세요. 당차죠. 아주 못됐어요(웃음). 그걸 보면서 팬들이 즐거워하는 거죠. 팬들이 박정태를 왜 좋아하겠어요. 막가니까 좋아하는 거죠. 2루에서 박종호하고 격투해서 턱 돌아가고, 찬스에서 못 치면 쇠기둥에 머리 처박고…. 이런 것들 말입니다.”

너무 하드코어 아닙니까?

“나성범(31·NC) 같은 선수들 잘하고 있지만 팬들이 원하는 건 또 다른 겁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팬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야구장에 오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치이고 상사한테 야단맞고도 한마디 못하는 소시민이 많습니다. 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대리만족을 줘야죠. 저는 경기 앞두고 양말 신을 때부터 살살 돕니다. 약 먹은 사람처럼 흥분이 차고 올라오는 거죠. 여기는 전쟁터니까 안 죽이면 내가 죽는다. 대연초 최병주 감독님한테 그런 걸 배웠어요. 동계훈련 땐 감독님이 권투만 시켰어요. 선배와 후배를 맞붙여서 맞으면 죽는 겁니다.”

추신수는 2년 정도 롯데서 뛰어줬으면


▎박정태 누나의 아들인 메이저리거 추신수(왼쪽). 박정태가 외삼촌이다.
롯데가 우승하려면 뭘 해야 할까요?

“성민규 단장은 야구단이 나가야 할 방향을 잡는 전문가잖아요. 허문회 감독도 잘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건 장기 플랜을 짜는 겁니다. 1-2-3군 선수끼리 격차가 크지 않아야 합니다. 이 사람 없으면 저 사람 바로 쓸 수 있게 돼야 하는데 그게 1~2년 만에 되지는 않겠죠. 3-4-5년 플랜을 짜 실행하면서 팬들에게 이기는 야구를 보여줘야 합니다. 팀 리빌딩과 팬 서비스가 같이 가야 한다는 뜻인데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단장 역량을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서로 대화하며 소통해야겠죠.”

추신수는 롯데로 돌아오겠죠?

“(몸이) 좋을 때 한 2년 정도 국내에서 뛰고 은퇴하는 게 좋지 않겠나 생각하는데 본인은 1~2년 정도 더 하고 메이저리그를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롯데로 와서 메이저리그 선수가 국내 무대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와서 못하면 안 온만 못하니 돈을 떠나서 만약 한국에서 뛰려면 조금 더 성적이 나도록 하면 좋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아이들이 야구를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야구를 통해 꿈을 심어주는 레인보우 희망재단 발대식.
박정태도 언젠가는 롯데로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죠. 저도 준비를 합니다. 언젠가는 구단도 팬들도 박정태도 한번은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니폼 입고요. 나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습니다.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우승해야지’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기(氣)라는 게 있습니다. 기는 지구 어느 곳에도 갈 수 있습니다. 서울·북한·미국 어디에 있더라도 ‘그래 너거들 다 모여 봐. 기 갖고 와 봐 전부. 내가 중간에서 모아볼게’ 그렇게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 질문. 레전드가 되려면?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왜 레전드가 돼야 하는지, 이유가 명확해야죠. 선수들에게 계기를 찾아주고 싶습니다. 스스로 계기를 깨달아야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으니까요. 저는 단순하게 어머니를 위해서 성공해야겠다고 했지만 이 계기는 가면서 바뀝니다. 가족·직원, 나중에는 팬. 그렇게 확장되는 겁니다. 지금 나를 위한 삶은 없어요. 그 어떤 분, 나를 위한 분들을 위해 사는 거죠. 마음은 좀 허하죠. 삶의 형태가 바뀌었으니까. 옛날에는 3만 관중 앞에서 내가 박정태라는 걸 보여주는 재미로 살았지요.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위하는 게 진정한 레전드 아닐까요.”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11호 (20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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