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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공개] 늘 배우고 익혔던 시대의 승부사 백선엽 

“참고, 또 참는 사람이 이겨… 자신을 누르지 못하면 남도 이기지 못해” 

언제, 어디서든 온화함 잃지 않은 6·25 한국전쟁의 영웅
가슴 따뜻한 군인, 끊임없는 탐색과 궁리로 늘 승리 일궈


▎1950년 8월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격렬한 전투를 마친 뒤 사단을 방문한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유광종
가만히 들어보면 목소리가 깔리는 수준이 심상찮다. 평소에도 과묵하기로 소문이 났지만, 무엇인가 진지한 설명에 들 때 그 목소리는 낮게, 깊이 깔린다. 외모도 그렇다. 평소에 마음을 놓고 있을 때 그의 입술은 두텁다.

그러나 뭔가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결심을 할 때 그 입술은 굳게 다물려 아주 견고한 ‘일자(一字)’를 그린다. 그 굳고 단단함이 역시 비범(非凡)하다는 형용을 크게 넘어선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온화함을 절대 잃지 않는다. 2020년 7월 10일 만 99세의 나이로 서거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인상이다.

필자는 2009년 10월 중앙일보 6·25 전쟁 60주년 기념 특집을 위해 기자의 신분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진행한 6·25 전쟁 이야기가 중앙일보에 1년 2개월 실렸다. 대개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들을 뒤에 살아남은 누군가가 옮길 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무용담이 많이 섞인다.


▎인천상륙작전 뒤 평양으로 곧장 북진한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이 당시 상관이었던 프랭크 밀번 미 1군장과 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 사진:유광종
그래서 전쟁터 이야기는 반드시 ‘한 수’ 접어가며 들어야 좋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6·25 전쟁의 최고 영웅이라고 알려진 백선엽 장군이라고 해서 그 점을 피해가기 쉽지 않다고 봤다.

1. 인내와 끈기의 승부사


▎평양 진입 직전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이 미군 참모와 작전을 논의 중이다. / 사진:유광종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터뷰 시작과 함께 꼬였다. 백 장군이 자랑을 늘어놓는 적이 없어 “자랑 좀 해주시라”고 요청해야 하는 일이 바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무용담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아주 과묵했고, 때로는 이야기가 자주 끊겨 인터뷰 동안 침묵이 대신 자리를 이끌 때가 많았다.

그의 공적과 수훈을 여기서 다 풀어놓는 일은 번거롭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6·25 전쟁의 각 전투에서 그의 명망은 정말 높았다. 그래도 공적을 일별(一別)하자면 이렇다.

우선 대한민국의 명운이 그야말로 ‘초읽기’라고 해도 좋을 위기에 놓였던 1950년 8월의 대구 북방 22㎞의 다부동 전투, 그 뒤에 벌어진 낙동강 전선의 북상, 평양 점령, 중공군 참전에 이은 결정적인 후퇴작전, 1·4 후퇴 뒤 서울 재탈환, 동부전선을 고성 이북까지 밀어 올린 작전, 휴전회담 첫 한국 대표, 지리산 빨치산 대규모 토벌, 한국군 2군단 재창설(이는 한국군 현대화의 첫걸음이었다), 휴전 직후 병력 40만 명의 거대한 1야전군 창설 등이다.


▎1951년 4월 강릉의 1군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 장군(오른쪽)이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 둘째), 이기붕 국방장관 등과 함께 있다. / 사진:유광종
나중에 중앙일보 연재가 다 끝나갈 무렵 필자는 장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전쟁터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집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백 장군은 이렇게 답했다. “참고, 또 참는 사람이 이깁니다. 자신을 누르지 못하면 남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 뒤 필자는 백 장군이 세상을 뜰 때까지 약 10년 동안 일주일에 많게는 두 번, 적어도 한 번은 꼭 만났다. 백 장군의 사무실이나 오찬을 겸한 식당에서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노(老)장군으로부터 들은 ‘참고 또 참고’의 실체를 탐색하고자 했다.


▎중공군 참전으로 평양을 내준 뒤 후퇴하면서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왼쪽)이 장병들에게 훈시하고 있다. / 사진:유광종
결국 나는 그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그가 전쟁 중에, 그리고 은퇴 뒤에 쌓은 공적들을 서로 견주고, 깎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서다. 그리고 국방부가 펴낸 11권의 ‘6·25 전쟁사’ 등 공적인 자료와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기록과 증언, 한국군 동료 장군들의 회고록 등을 섭렵했다. 이 글에서는 그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쳐, 어떤 실력과 품격을 지니고서 그 격렬했던 전장에서 승리를 이뤘는지,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은퇴 뒤의 삶은 어땠는지를 간단하게 적는다.

2. 배움과 익힘, 그리고 탐색


▎1951년 3월 중공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군하던 무렵 당시 국방부 신성모 장관과 자리를 함께한 백선엽 준장(오른쪽). / 사진:유광종
1920년 11월 23일 평양 인근 강서군에서 태어난 그는 몹시 가난했다. 아버지는 일찍 집을 나갔다. 처음에는 “일찍 세상을 떴다”라고만 해서 그러리라 생각했으나, 그 발언에는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은 부친에 대한 원망(怨望)이 깃들어 있었다.

나중에 장군의 맏딸인 백남희(73)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만주로 떠났다고 했는데, 이후 행적이 알려진 게 없다. 단지 나라를 잃은 울분에 아무래도 만주에서 민족운동 등에 종사했으리라 짐작한다”고 했다.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부친인 백선엽 장군은 아버지의 ‘무책임한 출가’를 원망·분노·슬픔 등으로 새겼다고 한다.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이 어린 백선엽은 가장이 떠나고 없는 가정의 맏아들이었다. 부친의 가출 뒤 생활이 더 어려워진 나이 7세 무렵의 백선엽은 모친, 다섯 살 위인 누이 복엽, 세 살 아래인 동생 인엽과 함께 평양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모친이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고 대동강 철교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미안하다만 이제 엄마를 따라 여기서 뛰어내리자”고 했다. 목숨을 끊자는 말이었다. 이때 누이 복엽이 “나무도 3년이 지나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한 번 더 참자”고 울며 매달렸고, 결국 어머니의 서글펐던 자진(自盡) 시도는 모두의 통곡과 함께 멈췄다고 한다.

그 후의 생활이 어린 백선엽을 아주 특이한 침묵으로 키웠다. 오래 생각하며, 오래 버티는 습성이었다. 그는 늘 학교가 파한 뒤 당시의 평양 부립(府立) 도서관을 갔다. 지금의 초등학생 4~6학년 시절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각종 신문을 비롯해 성인들이나 읽는 어려운 평론 잡지들을 읽었다.

나중에도 그렇게 읽고 생각하는 과정은 늘 멈추지 않았다. 그로써 그가 키운 버릇이 있다. 남으로부터 늘 배우고, 익히며, 더 나은 방향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굳이 한자 개념으로 적자면 학(學)과 습(習), 모색(摸索)의 과정이었다.

좀 어려운 개념을 덧붙이자면 이 전체의 과정은 ‘명실(名實)’의 따짐이다. ‘명분’과 ‘실제’ 사이에 놓인 여러 요소를 섞어 조화시키는 복잡한 변증법적 사고다. 명분을 앞세우다 실제를 놓치는 경우, 실제만 노리다 큰 틀의 명분을 잃는 상황을 피하는 일이다.

어렸을 적 일찍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부친에 대한 원망이 어린 시절의 백선엽으로 하여금 이런 ‘명분’과 ‘실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적 시각을 키우도록 했다고 필자는 짐작한다. 그 이후의 행보도 늘 마찬가지였다. 조선 말 신식 군대의 평안남도 주재 부참령(현 중령 계급에 해당)을 지낸 외조부의 영향으로 그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음에도 군문(軍門)으로 발걸음을 향해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군에서 복무한다. 그가 활동했던 간도특설대의 ‘악명’ 때문에 그 또한 이곳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고 일부가 지적하지만, 그 점은 오해다. 그가 특설대에 있던 1943년의 훨씬 전부터 만주 지역 무장독립운동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 첫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 소장. / 사진:유광종
만주군에서 그가 활동했던 지역 범위는 오히려 베이징(北京) 근처의 열하(熱河)에 미쳤다. 그곳에서 그는 ‘독립군’이 아닌 중국 공산당 계열의 홍군(紅軍)의 뒤를 쫓으며 정보 수집, 그 지역 주민의 선무(宣撫)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 과정 역시 배우고 익혀, 사색을 거친 뒤 모든 역량을 제힘으로 체화(體化)하는 과정이었다.

3. 미군과의 가장 커다란 접점(接點)


▎1952년 6월쯤 한국군 2군단 재창설 기념식에서 백선엽 신임 2군단장이 군단기를 건네 받으려 하고 있다. / 사진:유광종
해방,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까지 3년 동안 그는 결국 또 많은 일을 준비했다. 우선 나중 건국과 함께 대한민국 국방부 모태로 이어지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부산의 5연대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한다. 당시 미군정 통제 아래에 전국에는 5개 연대가 있었을 때다.

그곳에서 그는 1000쪽이 넘는 미군의 군사 교범을 탐독한다. 그 교범을 통해 과거 미군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그들이 지닌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궁리한다. 이는 나중에 전쟁이 벌어져 백 장군이 이 땅에 대거 상륙한 미군과 아주 순탄하게 ‘화학적 결합’을 이루는 견고한 토대다.

부산 5연대에서 재직한 기간은 2년 2개월. 나중에 대한민국 국방의 엘리트 그룹을 이뤘던 다른 장교들이 대개 한 곳에 몇 개월씩 있다가 다른 곳으로 분주하게 자리를 옮겼던 경우와는 매우 다르다. 그는 그곳에서 세계 최강 미군의 힘과 기능, 그 싸움의 철학을 배우고 익혀 자신의 역량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했던 셈이다.

이후 전쟁이 벌어진 뒤 부산을 통해 대한민국에 올라선 대규모의 미군과 그는 놀라울 정도의 큰 접점(接點)을 이룬다. 미군은 자신의 전쟁 방식과 기능, 철학적 토대까지 샅샅이 이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 젊은 장교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울러 ‘가장 신뢰할 파트너’로 인정해 다부동 전투 뒤 평양 탈환, 중공군 참전 뒤의 서울 탈환 작전, 제2군단 재창설, 지리산 빨치산 대규모 토벌 등의 중요한 작전을 모두 맡긴다.


▎1958년 두 번째로 육군참모총장에 재직하던 시절 백선엽 장군(앞줄 가운데)이 그로부터 6년 전인 1952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 때 생겨난 고아들을 모아 키웠던 ‘백선 바오로 고아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 사진:유광종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대목은 2군단 재창설이다. 한국군 2군단은 1950년 11월 북진 때 중공군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다. 1년여 뒤 춘천 북방 소토고미에서 이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이 미군의 주도로 이뤄졌다. 당시 한국군이 보유할 수 없었던 155㎜ 야포를 미군의 수준과 동일하게 한국군에 배치하는 일이었다. 즉, 가장 현대적인 포병 전력을 갖춘 한국 군대의 출범이었다. 이는 결국 한국군 현대화의 첫 포석이었다.

이 중차대한 작업을 미군은 백선엽 장군에게 일임했다. 한국군 포병전력을 지탱할 포병 장교의 육성, 각 사단의 무기체계 완비, 그에 따른 부대 운영의 노하우 등이 이 과정에서 전면적으로 옮겨졌다. 이를 모두 이끈 사람이 바로 백선엽이다. 한 치의 방만함도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아울러 무기와 장비와 막대한 보급 물품 등이 군의 부정과 비리로 얼룩지는 ‘일탈’도 있어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휴전 뒤 벌어지는 한국군 1야전군 창설 작업도 마찬가지다. 미군은 병력 40만 명을 이끄는 이 야전군 창설 작업 또한 백선엽에게 일임한다. 이는 미군 주력이 한국에서 철수한 뒤 155마일(문산과 파주 일대 제외)의 휴전선을 한국군이 단독 방어할 수 있도록 첨단의 무장을 이양하는 대단한 작업이었다.

4. 예편 뒤의 백선엽


▎1953년 초 한국군 최초로 별 넷의 대장에 오른 백선엽 장군. / 사진:유광종
1960년 4·19가 일어나면서 백 장군은 예편한다. 이어 중화민국(당시 대만의 정식 호칭) 대사 1년여, 다시 프랑스 대사(서구 5개국, 아프리카 13개국 겸임)를 거쳐 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뒤 5·16으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교통부 장관을 지낸다. 1969년 말에서 1971년 3월까지 재임한다. 이때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하지만,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 하나가 바로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이다.

1970년 3월에 일본 적군파가 JAL 기를 납치한 ‘요도호 사건’이 벌어졌다. 납치 뒤 평양으로 향하는 JAL 기를 서울로 유도해 결국 적군파가 일본 차관 1명과 기장 및 부기장 등만 싣고 평양으로 가게끔 설득한 일이다. 그를 중재했던 당시 백선엽 교통부 장관에 일본 정부가 고마움을 표하면서 “나중에 꼭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했고, 백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일본으로부터 장기 저리의 차관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대규모 차관과 함께 20여 명의 기술진을 보내 서울 지하철 1호선 착공에 관한 각종 노하우를 전수했고, 당시 2~4호선까지 선로를 설계했다.

그 뒤 백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한국종합화학’ 초대 사장을 맡아 국내 14개 석유화학 플랜트를 세운다. 우리 제철(製鐵) 산업에 박태준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면, 한국석유화학의 토대를 확실하게 새운 사람은 바로 백선엽이다.

그러나 이런 공적은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질 않아 일반인에게는 생소하다. 서울 지하철 착공은 다른 이들의 공적으로 순식간에 탈바꿈했을 뿐 아니라, 우리 중공업 산업의 다른 축이었던 석유화학산업 또한 그를 설계했던 최고위 경제 관료들의 공적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백선엽 장군은 1971년부터 10년 정도 한국종합화학 사장으로 재임하며 한국 석유화학시설 14개 단지를 세웠다. 사진은 동해펄프 기공식 모습. / 사진:유광종
그런데도 이 침묵과 배움, 그리고 익힘의 놀라운 승부사 백선엽은 자신의 공적을 제대로 내세운 적이 없었다. 그의 정말 큰 공적은 70여 년 전의 전장(戰場)에서 이미 하늘과 땅을 가리고 덮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늘 “나는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말로 그런 감회를 정리하곤 했다.

마지막 하나. 그는 1951년 12월에 시작해 이듬해 3월까지 벌어진 지리산 일대 대규모 빨치산 토벌 작업에서 뜻깊은 일 하나를 벌인다. 빨치산의 고아들을 돌보는 ‘백선 바오로 육아원’ 건립이다. 이곳을 통해 부모를 잃은 수백 명의 고아들이 자라났다. 고등학교 교육까지 무조건 마치는 게 큰 목표였고, 먹고 입는 일도 이곳에서 순탄하게 이뤄졌다.

2012년 ‘어버이날’을 맞아 이미 70줄에 들어선 고아들이 백 장군 사무실을 찾아온 때를 취재했다. “대장 아버지…”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 점 하나만 두고 봐도, 백선엽이라는 인물이 가슴 따뜻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명분과 실제라는 복잡한 전쟁터와 생활현장에서 배움과 익힘, 끊임없는 탐색과 궁리로 늘 승리를 이뤘던 백선엽의 면모에 이 ‘따뜻한 가슴’ 하나 추가하지 않으면 결정적으로 뭔가 빠지는 듯해서 꼭 적는다.

-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전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 jkj3353@naver.com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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