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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8)] 패션, 창조와 파괴의 아이콘 

디자인 장인의 예술혼, 세계인 지갑을 열다 

워스, 샤넬, 이브 생로랑 등 혁신가들 프랑스 파리 중심 럭셔리 명품 제국 이뤄
LVMH·커링 등 ‘공룡 자본화’ 가속… 미국은 청바지로 상징되는 패션 민주화 발전


▎파리의 루이뷔통 재단 건물, 현대 예술과 명품 산업의 융합을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새로운 상품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물건은 무용지물이 되고, 그 자리를 신제품이 대신하는 현상을 정확하게 지적한 셈이다. 일례로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끊임없이 새 옷을 산다. 옷장이 꽉 차면 헌 옷을 버린다. 옷이 헐거나 바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저 유행이 지났기 때문에, 또는 더 둘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유행이란 대체 누가, 어디서 만들어 내는 것일까. 시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대부분 그렇듯이 유행이란 수요와 공급의 만남이다. 인류의 패션을 지배하는 공급의 메카는 단연 프랑스 파리다. 적어도 18세기부터 파리는 유럽 패션을 주도해왔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 패션의 수도로 부족함이 없다. 수요는 조금 더 복합적이고 대중적인 현상이다. 전통적으로 유행을 주도한 수요의 주인공은 왕실과 귀족이었다. 패션이라는 분야가 만들어진 19세기에 수요의 중심은 부르주아라 불리는 부자들이었다. 그러다 20세기를 거쳐 현재까지 대중의 시대가 점차 확산하면서 다양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유행이 전개됐다. 이제는 사회 구조나 현상을 반영하는 문화가 수요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현재 인류는 매년 800억 벌의 옷을 구매한다. 1인 당 10벌에 해당하는 수치인데, 산 옷은 평균 35일씩 입는 셈이다. 예전처럼 옷을 대대로 물려주지는 못하더라도 멀쩡한 옷이 쓰레기로 돌변하는 소비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게다가 의류는 제조 과정에서 지구의 물을 많이 소비하는 산업이며 세탁하는 데 쓰이는 물의 양을 고려하면 엄청난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상황이다. 21세기 세계적 자본주의는 대량 소비의 시대이자 획일적 패션으로 지구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는 이제 세계인의 유니폼이 되었다. 물론 나라마다 지역마다 전통 복장이 여전히 존재하고 계층이나 직업에 따라 옷의 문화도 다르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만들어진 패션의 기준이 세계를 명령하며 지구촌을 지배하는 구조가 존재하게 됐다.

패션 전통, 왜 프랑스 파리인가?


▎여성 화가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브랭의 1787년 작품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로즈 베르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 사진:위키피디아
남성, 여성을 불문하고 양복 상의의 소매에는 단추가 여러 개 달려있다. 와이셔츠라면 소매를 여닫는 기능이라도 있으나 겉옷은 그런 용도도 없다. 옷에 있는 단추는 중세시대 갑옷의 유산이다. 원래 소매의 단추는 손을 보호하는 장갑을 전사들의 상의에 연결하는 장치였다. 중세 이후 이 기능은 사라졌지만 1000년이 지나도 소매 단추는 여전히 살아남았으니 대단한 생존력이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번 만들어진 전통은 질긴 관성을 갖게 된다. 처음 전통을 만드는 과정은 어렵더라도 일단 전문성과 명성을 통해 우뚝 서는 데 성공하면 그때부터는 많은 기득권을 누리기도 한다. 유럽 역사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중세 시기 가장 먼저 강한 국가를 세웠고 런던과 파리라고 하는 수도에 권력과 부를 집중한 나라다.

특히 프랑스는 루이14세 시기 파리 근교 베르사유에 당대 최고의 궁전을 건립하여 전국의 귀족을 모아놓고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삶의 패턴을 만들었다. 원나라 수도에 고려의 왕자가 인질로 잡혀있듯 프랑스 각지의 봉건 귀족은 베르사유에 묶인 인질인 셈이었다. 연회는 일상적으로 열렸고 자존심이 강한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복장과 치장으로 경쟁했다. 18세기부터 베르사유는 자연스레 유럽 각지 왕실과 귀족의 유행을 만들어내는 실험실로 부상했다. 물론 영국도 중앙 권력의 형성은 프랑스 못지않았다. 런던이 파리와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런던은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달랐다. 우선 영국은 1689년 명예혁명 이후 의회가 예산을 통제하는 민주적 제도가 강화되면서 왕실이 프랑스처럼 사치할 수 없는 구조로 변했다. 게다가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문화가 뿌리를 내리면서 사치를 죄악시하는 의식도 강했다. 민주 제도와 개신교 문화가 영국 런던의 사치를 향한 에너지를 차단시켰고, 패션의 발전도 제약을 받게 됐다.

19세기 자본주의와 패션의 탄생


▎피에르 데지레 기유메의 1856년 작품 [유제니 황후]. 찰스 프레더릭 워스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 사진:위키피디아
프로테스탄트 문화가 유럽 각국의 전통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는 스위스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스위스 제네바 지역은 원래 보석 세공으로 명성을 떨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종파 가운데도 극단적 성향을 보인 칼뱅주의가 제네바를 지배하게 되면서 사치를 의미하는 보석 치장은 금지됐다. 시장을 잃은 제네바 보석 장인들이 기존의 능력을 살려 시계 제작으로 돌아선 이유다. 종교 혁명의 우여곡절로 시계 산업의 메카로 부상한 스위스는 수백 년째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이 한때 스위스에 도전장을 내민 적이 있으나 알프스 시계 산업의 전통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스위스 메이드’(Swiss Made)는 여전히 시계 품질의 보증수표로 세계 각지에서 통할 정도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100년 뒤인 1789년 대혁명을 경험했다. 프랑스도 왕족과 귀족의 특권을 철폐하는 민주주의의 바람이 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파리가 이미 유럽의 유행과 패션을 좌우하는 중심지로 부상한 이후다. 게다가 19세기 나폴레옹의 제국과 왕정의 복귀로 사치의 전통은 계속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1세의 부인 조제핀이나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외제니는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국과 유럽 전역의 유행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활약했다.

영어는 패션(fashion)과 패드(fad)를 구분한다. 둘 다 유행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패션이 따라 할만한 가치를 지닌 고상한 스타일을 지칭한다. 패드는 금방 떠올랐다 사라지는 변덕에 가깝다. 반면 프랑스어에서 모드(mode)는 이 두 의미를 다 포함한다. 시대에 따라 유행이 변하고, 사람들이 그 유행을 따르는 일이 무척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혁신의 일상화를 품고 있는 개념인 셈이다.

슘페터의 기업가가 창조적 파괴의 주인공이라면 패션을 주도하는 것은 디자이너다. 아마 역사가 기억하는 디자이너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비운의 프랑스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상을 담당했던 로즈 베르탱(1747~1813)이라는 여인을 찾을 수 있다. 베르탱은 왕족의 취향에 맞춰 의상을 제작하는 재봉사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파리에 의상실을 열었다. 1770~1780년대에 베르탱의 옷은 파리를 유럽 왕실과 귀족들이 즐겨 입는 대륙 차원의 패션을 만들어 냈다. 손님이 옷 가격을 흥정하려 들면 베르탱은 “당신은 그림을 파는 화가에게 캔버스와 물감값만 내냐”고 따지곤 했다. 디자이너의 예술적 부가가치를 주장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공주로 태어나 프랑스 왕실로 시집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의 패션을 유럽에 널리 퍼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마찬가지로 파리를 패션의 수도로 정착시킨 것은 찰스 프레더릭 워스(1825~1895)라는 영국인이었다. 그는 1860년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외제니의 옷을 만들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화가가 작품에 이름을 써넣는 것처럼 워스는 옷에 상표를 붙인 최초의 디자이너다. 프랑스어로 옷에 붙이는 브랜드는 그리프(Griffe)라고 하는데 야수의 발톱을 의미한다. 사자가 먹이를 할퀴듯 디자이너는 작품에 흔적을 남긴다는 뜻이리라. 워스는 또 죽은 인형인 마네킹을 거부하고 살아서 활보하는 모델을 처음으로 패션계에 도입했다. 연극처럼 관객이 구경하는 패션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대 여성의 약진과 샤넬의 시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 천으로 만든 샤넬의 드레스. / 사진:위키피디아
무엇보다 워스는 패션을 혁신의 장으로 규정했다. 매년 두 차례에 걸쳐 패션쇼를 열어 새로운 유행을 제시하고 나선 것이다. 19세기 유럽은 산업혁명이 한창이었지만, 어느 산업도 계절마다 새로운 상품을 시장에 내놓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패션이야말로 ‘가차 없는 자본주의’ 시대의 서막이었다고 할 수 있다. 1년에 두 번 찾아오는 패션쇼의 시즌은 20세기 마이크로칩의 밀도가 정기적으로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연상케 한다. 또 쉴 새 없이 ‘신상’을 내놓아야 하는 21세기 스마트폰 모델의 경쟁을 떠올리게도 한다.

20세기 들어 워스의 패션쇼 리듬은 점차 배가됐다. 고급 패션을 의미하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에 1970년대부터 기성복(Prêt-à-porter) 쇼까지 늘어났고, 파리를 넘어 적어도 런던, 뉴욕, 밀라노까지 쇼를 벌여야 하는 지옥의 행군이 됐다. 1년에 두 번씩 강제됐던 창작의 리듬은 이제 디자이너들을 불도저처럼 압박하는 메커니즘으로 돌변했다.

베르탱이나 워스는 패션의 역사가들이나 기리는 개척자들이다. 하지만 샤넬은 2021년 현재까지 여전히 세계인을 꿈꾸게 하는 살아있는 ‘발톱’(상표)이다. 코코 샤넬(1883~1971)은 남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자신의 길을 개척한 강한 여성 디자이너로 성공한 것은 물론 현대 여성을 상징하는 디자인을 보편적으로 확산시켰다. 샤넬은 20세기 구조적 변화의 쓰나미에 영리하게 편승한 천재 디자이너다. 그녀가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교묘하게 겹친다. 남성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여성이 공장과 사회를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남성이 바라보고 감상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활동하고 일하는 여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급 패션에서 주로 사용하는 천은 실크나 벨벳 등 비싼 제품이었다. 그러나 전쟁 통에 고급 천을 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임기응변으로 샤넬은 저렴한 저지(Jersey) 천을 사용해 드레스를 만들었다. 게다가 샤넬이 처음으로 부티크를 연 곳은 파리가 아니라 해변 휴양지 도빌(1913년)과 비아리츠(1915년)였다. 정장 차림의 파티 대신 해변은 산책과 스포츠를 즐기는 환경이었다. 당연히 육체 활동에 편리한 옷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한 샤넬 패션은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해 준 것으로 유명하다. 치마를 치켜 올려주는 거추장스러운 장치는 모두 사라지고 치마의 길이도 발목 위로 올라가 활동하기 좋게 짧아졌으며 디자인도 단순하게 변화시켰다. 이처럼 현대 여성의 복장 스타일은 샤넬과 함께 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시대 만들어진 사회 변화의 물결은 1920년대 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깎고 남녀 구분이 사라지는 ‘갸르손느(Garçonne)’의 유행이 이 시대를 지배했다. 갸르송(Garçon)은 소년을 뜻하며 갸르손느란 ‘소년 같은 소녀’라는 말이다. 1922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빅토르 마르그리트의 소설 [갸르손느]는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80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였지만, 가톨릭 교회가 금지 서적으로 지정할 만큼 당시 윤리관에는 적합하지 않은 여성 해방의 깃발이었다.

샤넬은 1921년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향수 ‘샤넬 No. 5’를 개발했다. 장미나 은방울꽃 등 전통적인 꽃향기를 품는 향수가 아니라 여러 향을 조합해 독특한 향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아직도 절찬리에 판매되는 ‘샤넬 No. 5’는 향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성공작이다. 의상 디자이너의 ‘발톱’이 향수와 핸드백 등의 장식품 분야까지 진출함으로써 종합적인 스타일 예술가로 발전하는 길이 열린 셈이다.

민관 합작의 패션 세계


▎패션과 향수를 하나의 브랜드로 연결한 ‘샤넬 No. 5’. / 사진:위키피디아
패션의 수도 파리가 유럽 문명의 별처럼 빛나자 천 년의 제국을 세우고 세계의 새로운 중심을 자처한 나치 독일이 시기한 것은 당연하다. 1940년 파리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나치 독일은 패션 산업을 베를린이나 빈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프랑스 오트 쿠튀르 조합은 파리에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전략을 동원해 설득에 나섰다. 우선 패션 산업은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기에 회사와 디자이너가 옮겨가도 수천, 수만에 달하는 장인들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논리다. 천의 공급부터 재단, 재봉, 장식, 액세서리 등 패션의 네트워크는 단기 정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파리라는 공간과 분위기는 지구촌에서 유일하며 파리의 정신과 기운이 없이 패션을 꽃피우기는 어렵다는 문화적 설득도 동원됐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나치 독재의 분위기에서 창의적인 패션이 만개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20세기 파리 패션의 중심으로 활동했던 스페인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1930년대 조국의 프랑코 독재를 피해 파리로 망명 와서 정착했다. 이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들이 나치 베를린이나 빈으로 갈 리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파리의 패션계는 크게 위축됐으나 명맥은 유지할 수 있었다. 파리의 여인들은 천이 부족해 스타킹을 신을 수 없게 되자 다리에 스타킹을 그려 거리를 활보할 정도로 패션을 중시했고, 이런 정신은 패션의 수도 파리를 지탱해줬다.

나치와의 전쟁에서 해방된 후 1945~1947년, 프랑스 정부는 패션 산업을 법으로 보호하며 민관 합작의 틀 안으로 끌어들였다. ‘오트 쿠튀르’라는 라벨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창작품이 수작업을 통해 외주 없이 내부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1년에 최소한 두 번 이상 25개 이상의 모델을 소개하는 패션쇼를 열어야 한다. 또 일반 패션쇼도 4년 이상 계속한 뒤 다른 회원사의 추천을 받아야만 오트 쿠튀르의 세계에 진입할 자격이 생긴다. 나치 독일의 위협이 패션 산업의 중요성을 국가에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그때까지 오트 쿠튀르 조합이 자율적으로 관리하던 패션계가 드디어 국가를 통해 법적인 보호막을 확보했다. 물론 그렇다고 파리의 패션이 관료적으로 변하진 않았다. 파리 패션계는 여전히 유럽을 넘어 세계의 재능을 유혹하고 젊은 탤런트에게 기회를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패션의 아버지 워스는 주머니에 단돈 5파운드를 넣고 파리로 와서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1960년대 일본의 겐조는 60만 엔을 들고 동아시아에서 배를 타고 마르세유 항에 도착한 뒤 파리에서 패션의 야망을 펼쳤다. 1950년대 18세의 이브생로랑은 크리스티앙 디오르 사에 들어갔고, 창립자 디오르가 갑자기 사망하자 21살에 디오르사의 대표 디자이너가 됐다.

20세기 후반 패션계는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하나는 패션이 예술의 장르로 자율성을 확보하는 경향이다. 역사적으로 패션이란 권력자나 부자 등 지배계층이 입는 옷을 만드는 작업에서 출발했다. 워스가 19세기 모델의 행진이라는 패션쇼를 발명했을 때도 초대받은 부자 손님들은 모델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천을 만져 보거나 가격을 물어볼 수 있었다. 패션쇼란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의 의미를 가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20세기에 패션쇼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지닌 디자이너를 위한 예술 무대로 돌변했다. 모델과 관객의 거리는 멀어졌고, 관람객이 쇼를 중단한다는 일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 소개되는 옷은 일상에서 입기 어려운 디자인을 선보인다. 최고 수준의 디자이너가 의상의 새로운 컨셉을 만드는 예술가의 경지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예술과 돈이 공존하는 패러독스


▎2017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레이 가와쿠보의 전시. / 사진:위키피디아
디자이너 예술가의 대표적인 상징은 이브 생로랑이다. 그는 1971년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나체로 광고를 찍었다. 슈퍼스타 예술가의 면모를 아낌없이 드러냈던 셈이다. 이브 생로랑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생전에 회고전을 준비할 정도로 세상의 인정을 받는 디자이너가 됐다. 이어 2008년에는 꼼데가르송의 창립자로 유명한 일본인 레이 가와쿠보가 메트로폴리탄의 초청을 받는 디자이너로 부상했다. 이제 패션은 미술이나 조각처럼 어엿한 예술의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에서 패션의 예술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역설적으로 패션의 산업화가 빠르게 확산했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강화되고 매출액으로 표출되는 시장의 논리가 패션의 세계를 쥐고 흔들게 됐다. 예술화와 산업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공존하는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적 자본’이라는 개념은 이런 패러독스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상징적 자본이란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 명예, 특권 등을 지칭하는데 돈 보기를 돌처럼 하고 작품에 목숨까지 바치는 예술가의 열정과 희생정신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더더욱 보석처럼 빛난다. 돈벌이에 충혈된 눈을 가진 예술가는 좀 천박해 보이지 않는가. 소비자들은 순수한 열정에 감동하므로 패션 산업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예술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술화와 산업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현재 대표 디자이너가 창립하여 운영하는 패션 회사는 거의 사라졌다. 자본주의 금융의 논리에 따라 인수·합병이 꾸준히 진행됐기 때문이다. 21세기 세계 명품 시장을 지배하는 프랑스의 LVMH와 커링 그룹은 각각 건설업과 목재업에서 성장한 기업가들이 1980년대부터 패션을 비롯한 명품 기업을 사들여 형성한 자본주의의 공룡들이다. 패션은 이제 시계나 보석, 샴페인이나 와인 등과 함께 거대한 럭셔리 산업의 한 조각이 됐다. 파리에 솟아오른 루이뷔통 재단이나 커링의 회장 피노가 추진하는 현대미술관은 예술과 산업의 연결고리를 상징한다.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패션 회사들은 하나둘씩 자본주의 공룡의 품에 안겼다. 디오르가나 겐조·지방시 등은 LVMH, 그리고 발렌시아가·이브 생로랑·구찌 등은 커링에 속한다. 그나마 샤넬이나 에르메스 정도가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1세기의 패션계는 유명 디자이너들이 용병처럼 회사를 옮겨 다니는 시대를 열었다. 프로 축구의 감독과 선수들이 능력과 성적에 따라 팀을 이적해 다니듯 말이다.

왕실과 귀족에서 시작된 패션의 개념은 19세기에 이미 부르주아 계층까지 확산하면서 민주화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역사적으로 워스가 고급 의류를 만들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당시 패션이란 여전히 극소수의 사치였다. 특히 파리 패션쇼의 부유한 고객들은 옷을 구매해 한 번만 입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중고가 되어버린 의류는 다시 포장해 미국으로 수출되곤 했다. 또 부유한 가정의 여성은 하루에 일고여덟 번씩 옷을 갈아입곤 했다. 아침, 오후, 손님맞이, 연극이나 오페라 극장용, 파티, 만찬, 실내, 잠옷 등 용도가 다른 드레스가 각각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옷을 입고 벗는데 하루를 거의 다 소모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고객의 수는 적더라도 판매할 수 있는 옷의 양은 많았다.

새로 열린 중국 시장, 패션 지각변동 예고

19세기 말이 되자 엘리트를 위한 패션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기성복의 대량생산이 이미 시작됐다. 군복이나 학생복 등 각종 유니폼은 기성복의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처음 기성복은 저렴한 가격에 팔렸고 품질도 들쑥날쑥했다. 게다가 옷의 크기도 대충 맞추는 수준이었다. 20세기는 패션과 기성복이 서서히 접합 지점을 넓혀가는 패션 민주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음식 분야에서 미식의 프랑스와 맥도널드의 미국이 대립하듯 의복에서도 선도적 패션의 프랑스와 대중적 미국은 각각 다른 모델을 제시했다. 1960~70년대 청바지는 미국을 대표하는 새로운 복장으로 세계로 퍼져나갔다. 간편하게 남녀가 모두 입을 수 있는 진은 미국의 번영을 상징했고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사회에 반항하는 청년의 이미지를 반영했다. 스포츠의 대중화에 따라 나이키, 아디다스, 퓨마 등도 세계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운동화와 복장의 거대 브랜드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의 오트 쿠튀르도 기성복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부터는 기성복도 자신만의 패션 발표 시즌을 갖게 됐다. 패션의 범위도 캐주얼로 넓혀지면서 무대는 파리에서 밀라노나 런던, 뉴욕 등으로 확산하였다. 파리에서 겐조, 소니아 리키엘, 에마뉘엘 칸 등이 새롭게 등장했고 미국의 랄프 로렌과 캘빈 클라인, 이탈리아의 아르마니와 베르사체와 구찌, 영국의 비비안 웨스트우드, 독일의 질 샌더, 벨기에의 마틴 마르지 엘라 등 다양성이 한층 강화됐다.

21세기에 돌입하면서 패션의 민주화는 한 번 더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오트 쿠튀르부터 의류 회사를 통해 소비자까지 연결되던 피라미드 형식의 일방적인 소통 체인은 인터넷을 통해 쌍방향으로 바뀌었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깅을 통해 거리의 문화와 소비하는 대중의 취향이 패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 자라(Zara), H&M, 유니클로, 망고 등으로 대변되는 대형매장들이 지구촌 각지의 대도시를 점령하며 패션의 세계화를 주도하는 시대가 됐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패션 산업에도 매우 희한한 효과를 연출해 냈다. 21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고급 패션과 명품 기업은 사실 대중적 소비의 부상과 경쟁으로 커다란 어려움에 처했다. 이들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중국의 신흥부자 계층이다. 공산주의 중국의 자본주의적 탈바꿈이 시들어가는 유럽 패션에 새로운 피를 공급해 준 모양새다. 이제 상하이와 베이징은 물론 선전과 시안, 충칭과 하얼빈 등 중국의 수십 개 대도시의 중심가에는 유럽의 패션 역사를 장식했던 유명 디자이너 이름으로 가득 찬 신생 매장들이 화려함으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과 한국에 이어 중국으로 확산하는 패션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지각변동을 상징하는 듯하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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