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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기자가 간다] 출구 보이지 않는 ‘장애인 지하철 시위’ 해법 없나 

‘갈등 조정자’ 역할 맡은 정부·국회가 중재 나서야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출근길 지하철 시위, 장애인 단체 간 충돌로 비화되며 해결 난망
“장애인 편의시설 많이 갖춰졌지만 이동 인프라 부족한 것은 사실”


▎전장연 회원들이 2일 오전 서울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승강장에서 지하철 탑승을 시도하는 가운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장애인을 망신시키지 말라.” 지난 1월 2일 오전, 서울 지하철 4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삼각지역 승강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회원들이 새해 첫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나서자 또 다른 장애인 단체인 ‘지하철 운행 정상화를 위한 장애인 연대(이하 정상화연대)’ 회원들이 막아서며 외친 말이다. 정상화연대 회원들이 이날 오전 8시쯤부터 삼각지역 승강장으로 내려가려는 전장연 회원들을 막아서면서 급기야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상화연대 회원 한 명이 넘어져 부상을 입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두 장애인 단체의 충돌에 서울교통공사 직원은 물론 경찰까지 출동하면서 삼각지역 승강장은 더 혼잡해졌다.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가 끝난 뒤 삼각지역에서 정상화연대 대표를 맡고 있는 김민수 시흥장애인복지연합회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전국 장애인의 0.1%도 안 되는 회원을 가진 전장연이 마치 전국의 장애인을 대표하듯이 행세한다”며 “그들의 잘못된 투쟁 방식이 우리 장애인들의 인식을 망치고 있어 이렇게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정상화연대는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시흥장애인복지연합회 등 전국의 장애인 단체가 연합해 만들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전장연에 지하철 시위와 관련해 지속적으로 대화를 요청했으나 공식적인 응답을 해주지 않고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며 전장연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출근길 지하철 시위와 관련한 장애인 단체들의 충돌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4월에도 한국교통장애인협회, 한국장애인연맹 등 12개 장애인 단체가 소속된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이하 장총련)가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벌이는 전장연에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전장연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명분인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는 동의하지만, 시민을 대상으로 한 지하철 출퇴근 시위 때문에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쌓여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전장연은 정상화연대 등 자신들에게 비우호적인 단체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다. 김필순 전장연 기획실장은 “우리는 장애인 인권 운동을 위해 모인 조직이지만, 그쪽(정상화연대)은 정치적이든, 사적이든 특수한 이익을 얻기 위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며 이들 단체들과 대화할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실제 지난해 12월 정상화연대가 전장연에 TV 공개토론회 참석을 요구했지만 전장연은 아무런 입장 표명 없이 묵살했다.

장애인들 요구 예산 0.8% 반영한 기재부


▎정상화연대 회원들이 서울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승강장에 진입하려는 전장연 회원들을 막기 위해 승강기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출근길 지하철 시위가 장애인 단체들의 충돌로 비화되고 있지만 해결은 여전히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다. 우선 전장연 소속 장애인들이 바라고 있는 교통 인프라 구축이 장애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12월 기획재정부는 전장연이 요구한 장애인 예산 1조3000억원 중 0.8%(106여억원)만 올해 예산에 반영했다. 기재부는 “한정된 나라 전체 예산을 고려했을 때 전장연이 요구하는 장애인 예산은 과도하다”란 입장만 냈을 뿐 0.8%로 감액한 이유나 향후 예산 확충 계획 등은 내놓지 않았다.

서울시 입장도 여전히 강경하다. 전장연이 먼저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포기하지 않는 한 타협은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법원이 내놓은 강제 조정안도 거부하면서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여론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KBS와 한국리서치가 함께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56%였다.

실제 전장연 시위로 피해를 보는 이들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이다. 1년 넘게 이어진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취재 결과 시위 기간 동안 민원 접수만 1만여 건에 달했다. 서울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 이준영(28)씨는 “전장연의 시위로 인해 세 번이나 지각해 회사에서 곤욕을 치렀다”며 “(시위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불편과 불안함으로 내모는 이런 시위 방식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물론 전장연도 시민들의 출근길 불편을 인식하고 있다. 김필순 전장연 기획실장은 “우리의 시위 방식으로 인해 국민적 여론 역시 우리한테 안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정부든, 언론이든 우리의 몸부림을 알아봐준다. 정부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회 갈등, 법과 원칙으로만 해결할 수 없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에서 전장연 박경석 공동대표(오른쪽)와 서울교통공사 김석호 영업본부장(왼쪽)이 면담하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해법이 있을까?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행정당국과 전장연 사이 불통과 불신을 지목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필요한 대중교통 인프라 구축과 각종 장애인 복지 비용은 사회적인 조정이 필수적인 사안인데도 예산을 집행하는 정부와 이해당사자인 장애인 집단 모두 1년이 넘도록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정부와 서울시가) 전장연이 왜 시위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고, 시위 행위 자체의 적절성만 판단한다면 전장연 지하철 시위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가 먼저 전장연에게 소통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 전체의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할 의무가 있는 정부와 지자체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갈등을 중재하고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또 “사회 갈등은 법과 원칙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며 “정부와 서울시의 강경 대응 기조는 결국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취재 결과 정부가 장애인 복지 선진국들처럼 장애인이 비장애인 삶에 녹아들 수 있는 복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정책과 제도 마련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내 개별 건물이나 시설물 내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비율은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다. 현재 서울 시내 275개 지하철 역사(驛舍) 가운데 엘리베이터 동선이 확보돼있지 않은 역사는 19개뿐이다. 나아가 2018년 기준, 국내 조사 대상 건물 18만5947개 중 장애인 편의시설 적정 설치율(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도 93.3%로 높은 수준이다.

다만 사회 전반의 장애인 이동권은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외부와 건축물을 연계하는 접근로, 주출입구 등을 의미하는 매개시설 적정 설치율은 74.8% 수준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들이 인프라가 갖춰진 건물을 쓰고 싶어도, 건물까지 이동할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해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반면 선진국은 장애인 시설을 비장애인과 따로 구분하기보다 누구나 이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를 도시계획, 건설, 건축 등 다양한 정책에 반영하는 추세다.

시위 당사자인 전장연의 변화 촉구하는 목소리 많아

때문에 행정당국뿐만 아니라 국회가 사회적 갈등 조정자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인 만큼 입법권과 예산심의권을 가진 국회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중심으로 장애인 이동권에 제약이 없도록 법규를 정비하거나 예산을 확충해 갈등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며 “이런 문제는 국회가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중재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속한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시위 당사자인 전장연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정재훈 교수는 “국민 여론이 어느 정도 돌아선 이상, 전장연은 지하철 시위에 대한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며 “정부가 강경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지속되고 있는 전장연 시위로 인한 민심 이반임을 인정하고,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이판사판식 지하철 시위가 오히려 장애인 인권 개선을 위한 논의의 장을 지하철 이동권 문제로 협소화해 근본적 처방을 방해한다는 지적도 했다.

그렇다면 장애인 단체들 사이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앞서 정상화연대와 같은 여러 장애인 단체들이 전장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전장연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지만 서로 대화하기를 거부하면서 갈등만 커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전체 장애인을 대변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준상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인 단체 간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 기구인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통해 이해당사자끼리 (장애인 인권 증진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 장애인 복지정책의 기본 틀을 확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여러 장애인단체들끼리 지속적인 교류와 대화를 나눠 전체 장애인들의 의견이 폭넓게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장연은 1월 19일까지 일시적으로 시위를 멈췄지만 시위를 재개할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전장연 시위와 관련해 법원이 2차 강제 조정안을 내놨는데, 전장연 입장에서는 더 불리해진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1차 조정안에는 전장연이 시위 때 지하철 탑승을 5분 내에 완료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2차 조정안은 5분 제한 조항을 없애 전장연이 지하철 시위를 아예 하지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커졌다.

시민들도 행정당국과 전장연이 대화를 통해 갈등을 조속히 해소하기를 바란다는 의견이 많았다. 서울도시철도 2호선과 4호선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는 대학생 박혜민(25)씨는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요구하는 이번 시위가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번 시위를 계기로 사회적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shinetosky@naver.com

202302호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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