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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취재]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끊이지 않는 눈물 

“정순신 아들 사례는 빙산의 일각… 자식 죽고 가족까지 해체당했다”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집단 따돌림 당한 여중생 극단적 선택, 죄책감이 부부 갈등으로 이어져 이혼
신체적 폭력 넘어 ‘사이버 폭력’으로 진화… 성인 되어서도 가정폭력 악순환


▎3월 4일 서울 중구 숭례문 앞 대로에서 촛불행동 주최로 열린 29차 촛불대행진에서 한 참가자가 아들의 학교폭력 전력이 드러난 정순신 변호사를 규탄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학교폭력’이라는 우리 사회 어두운 그늘이 집중 조명되면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등장했다. 월간중앙 취재에 따르면 학교폭력(학폭)은 더는 ‘애들 싸움’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넘어 피해자의 가정까지 해체시키는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여겨진다. 최근 학폭 문제가 공론화된 데는 피해자의 처절한 복수를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흥행이 도화선이 됐다. 여기에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내정됐던 정순신 변호사 아들 정모군의 학폭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공정성 논란으로 번졌다.

정순신 내정자는 자진 사퇴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더 커져갔다. 월간중앙 취재에 따르면 고등학교 동급생인 정군으로부터 “좌파 빨갱이”, “제주도에서 온 돼지”, “더러우니까 꺼져라” 등의 지속적인 언어폭력을 당했던 피해자 A군은 학교 생활 내내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2018년 3월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 회의에서 A군 학부모는 “아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해졌으며 특히 밤에 공황증세를 보인다”며 괴로워했다. 당시 담당 의사는 A군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견서를 제출했다. “트라우마로 인한 무기력, 재경험, 회피 반응, 과각성(감각 예민도가 고양된 상태) 등의 증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자살 사고(思考)까지 나타나고 있다. 향후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학폭에 대한 학교 당국의 대응도 부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군과 A군이 학교에서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빠르고 철저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 변호사는 아들 정군이 학폭위로부터 강제전학 처분을 받자 끝내 행정소송으로 끌고 갔고, 학교 당국은 소송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사실상 수수방관했다. 이 때문에 2018년 3월 강제전학 처분을 받은 정 군이 실제 전학을 간 건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뒤였다. 이 기간 A군은 가해자인 정군과 함께 학교생활을 해야 했고, 2차 가해에 노출되면서 결국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 학폭이 한 사람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불행을 남긴 사례다.

한창 자라날 피해자에게 학교는 창살 없는 감옥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한 장면. / 사진:넷플릭스
학폭은 이처럼 피해자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여기 또 하나의 학폭 사례가 있다. 2020년 9월, 경기도 시흥시 한 아파트에서 같은 반 학생들로부터 지속적인 따돌림을 당한 여학생 B양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당시 B양의 나이는 16살, 따돌림이 시작된 건 15살이던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고 한다. 1년여의 집단 따돌림에 괴로워하던 B양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피해자에게 학교는 창살 없는 감옥과 다름없다.

B양 어머니는 교육청 등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다. 학교 당국은 유족들에게 위로를 전하면서도 “피해자에게 전문상담교사를 붙여주는 등 학폭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남편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갔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당시 학폭위 소속으로 이 사건을 잘 알고 있다는 박종경 변호사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부모가 괴로워하며 서로에게 화살을 돌리면서 갈등이 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며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시작됐던 시점이 딸의 죽음 이후이기 때문에 (학폭이 이혼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폭 피해로 가정이 심각한 상황에 내몰리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기도 용인시의 한 고등학교를 다니던 피해자 C군은 1학년이던 2019년 7월부터 같은 반 학생 15명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가해자는 C군이 앉는 자리에 쓰레기를 버려놓기도 하고, ‘게이(남성 동성애자)’라는 등 성적 수치심이 드는 말도 했다. 그런데도 C군은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1년을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2학년으로 올라가서도 가해자들 중 3명과 같은 반을 배정받자 견디다 못해 부모에게 학폭 사실을 털어놨다. 2020년 6월, C군의 어머니는 학교 당국을 찾아갔다. 아들이 당한 일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고, 가해자와 아들의 즉각적인 분리와 함께 가해자가 응당한 처분을 받길 원했다. 하지만 C군의 아버지는 달랐다. 아들 문제에 대한 아내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피해자인 C군에게 “왜 그런 일을 당하고 다니느냐”며 타박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입장 차이는 부부 갈등으로 이어졌다.

월간중앙이 만난 다수의 이혼 전문 변호사와 교육청 장학사들은 자녀의 학폭 피해로 갈등을 빚는 부모 대부분이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보통 피해자 어머니는 국민신문고 등에 민원을 제기하고, 아버지는 반대로 피해자인 자녀를 부모의 권위로 교정(矯正)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이 죄책감에 빠져 우울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학폭 가해자가 피해자의 가족을 해치겠다고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한 소송 판결문에 따르면, 서울 금천구 소재 초등학교 학생이던 피해자 D군은 2017년 9월부터 2018년 9월까지 가해자들로부터 지속해서 금전적 요구와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D군에게 PC방에서 게임을 할 때 쓸 ‘게임머니’를 충전해 오라며 보호자인 할머니의 돈을 훔치거나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려 오라고 강요했다. D군은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할머니와 살고 있었다.

정순신 아들 학폭위 회의록에 “권력” 언급


▎2020년 12월 9일 학교폭력피해자 가족협의회 관계자들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학교폭력 피해 학생 전담기관 교육부 직접 운영, 피해 학생과 가해자의 분리된 공간에서의 회복 지원, 피해 학생 전담시설은 치유에 특화된 전문기관 위탁 운영’ 등을 촉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가해 학생들은 D군이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했다. PC방·주차장·학교·놀이터 등지에서 주먹·빗자루로 때리거나 바늘로 찔렀다. 가해 수위는 점점 심해져 갔다. D군의 뺨을 때려 안경테를 부러뜨리는가 하면 칼로 위협하며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이 사실은 학폭위 조사를 통해 드러났고, 가해자들에게는 전학 처분이 내려졌다.

학폭은 이처럼 피해자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 피해자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자신을 사회와 격리한다. 김소열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사무국장은 “학폭 피해가 발생하면 가족 구성원은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다. 학폭 피해로 부부 갈등, 부모와 자녀 갈등이 심화되는 건 사실”이라며 “사춘기와 학폭 피해가 겹치면 피해자는 마음의 문을 더욱 굳게 닫아버린다. 등교를 거부한다든지, 게임에만 빠져 지내며 자신을 고립시킨다”고 말했다.

앞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정군으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한 A군도 마찬가지였다. 2018년 3월 22일 자 학폭위 회의록에서 A군 학부모는 A군의 상태에 대해 “자신감이 없으며, 부정적인 생각만 한다”며 “학폭을 잊으려고 게임을 계속하고 있으며, 책을 사서 읽어도 계속 생각이 나서 다른 일을 못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깊은 상처로 학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던 A군은 2020년 2월 고교를 졸업한 뒤 2년간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A군 다음으로 정군의 타깃이 된 또 다른 학생 피해자는 트라우마로 고생하다 고교를 자퇴한 뒤 해외에 이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서울에 있는 명문고로 강제전학 처분을 받은 정군은 졸업 후 서울대에 입학했다. 가해자는 성공가도를, 피해자는 고통의 삶을 산 현실은 특히 ‘공정’에 민감한 20·30세대를 분노케 했다. 일각에서는 ‘아빠 찬스’가 없었다면 정군이 과연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 변호사는 정군의 강제전학 처분에 불복해 소송에 들어갔을 당시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현실판 ‘더 글로리’로 불린다. 여론의 공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 이유도 권력형 학폭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군에 대한 학폭위 회의록에는 학폭 사건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권력’이라는 단어가 두 차례 나온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담당교사는 한 피해자 어머니와의 통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자기 아들에게 ‘혹시 정군에게 뭐라고 말을 하면 또 권력 얘기가 나오는데, 권력을 통해 해코지할 것 같아서 그냥 정군에게 아무 말 말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은 ‘정군을 보면 진짜 기분이 좋지 않은데 계속 찾아와서 너무너무 힘들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당시 정군의 학폭 관련 회의록에 ‘권력’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담당교사의 말에 그 단서가 있다. 그는 “정군은 본인보다 급이 높다고 판단하면 굉장히 잘해주고, 급이 낮다고 생각하는 학생에게는 모멸감을 주는 식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밝혔다.

제2, 제3의 정순신 사태는 막아야

학폭은 신체적 폭력을 넘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해 더 교묘하고 집요하게 진화하고 있다. 증거가 남지 않아 피해자들이 신고조차 하기 어려운 ‘사이버 폭력’이 늘어나는 점이 그 증거다. 푸른나무재단이 전국의 초·중·고교생 6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2 전국 학교폭력·사이버 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사이버 폭력 경험률은 2020년 16.3%보다 2배 높아진 31.6%로 집계됐다. 뒤를 이은 언어폭력(19.2%), 신체폭력(11.9%), 따돌림(11.8%) 등의 응답을 크게 웃돈다. 사이버 폭력 피해 유형은 사이버 언어폭력 28.4%, 사이버 따돌림 15.4%, 사이버 명예훼손 14.3% 순으로 집계됐다. 박종경 변호사는 “SNS상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거나, 집단에서 배제해버리는 방식으로 피해자가 어떻게 할 수도 없도록 관계를 고립시켜버린다”며 “특히 여학생이 또래 학우와의 관계성에 더욱 민감하다는 측면에서 피해 정도를 훨씬 심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이른바 ‘정순신 사태’는 학폭이 가해자와 그 부모에게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 사회에 여실히 드러냈다. 연예계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학폭 미투’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MBN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불타는 트롯맨’의 참가자 황영웅씨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지만 학폭 논란과 상해전과 사실이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중도에 하차했다. 필리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자신의 여자친구를 조롱한 하급생들을 폭행한 사실을 뒤늦게 인정한 [더 글로리] 안길호 PD는 자신의 명성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

학폭 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온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가해자가 학폭으로 자신은 물론 본인의 가족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학폭은 성인이 되어서도 가정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9년 경력의 이소정 이혼·가사 전문 변호사는 “재판에 의한 이혼 중에는 가정폭력이 많다”며 “과거의 폭력적 성향이 나이가 든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학폭 전과가 있는 사람은 결혼 후 배우자를 겁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 가정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1학기 전국 초·중·고교에서 발생한 학폭위 심의는 9796건으로, 2학기까지 포함하면 지난해 2만 건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원격으로 진행되던 수업이 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학폭 신고는 이전보다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자녀들 누구나 학폭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제2, 제3의 정순신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 당국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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