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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3)] 참요(讖謠), 왕조를 바꾸는 예언의 노래 

십팔자(十八子)와 목자(木子), 이씨 역성혁명 부른 루머 

“아비 잃고 눈물 흘리는 완산 아이”… 후백제의 멸망을 암시하다
고려 무신정변 예고한 참요… 하찮은 유언비어 아닌 백성의 열망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 세력은 이씨의 창업을 정당화하기 위해 각종 참요에 각별히 공을 들였다. 하지만 조선개국은 특정 세력의 주술만으로 이뤄진 일이 아닌 백성들의 염원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개벽(開闢)이었다. 사진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의 모습. / 사진:SBS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을 지어두고 /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옛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여럿이 함께 부르면 노래는 기도가 된다. 세상을 바꾸는 특별한 힘이 깃든다. 백제에서 마를 캐던 소년, 서동(薯童)은 머리를 깎고 신라에 들어가 망측한 노래를 퍼뜨렸다. 선화공주님이 은밀히 서방을 두고 밤마다 정을 통한다니 이럴 수가! 왕가의 스캔들을 흥미로운 노래에 담은 것이다. 귀에 쏙 들어오고 입에 착 달라붙는다. ‘서동요(薯童謠)’는 떠도는 바람을 타고 동네방네 퍼져 나갔다.

뭇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힘이 세다. 신라 귀족들은 선화공주를 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랫말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백성들이 망측한 노래를 부르고 왕실을 비웃는다는 게 문제다. 지배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선화공주는 느닷없이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길목에 서동이 나타나 공주를 백제로 업어 갔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수록된 백제 무왕의 즉위담이다. 서동은 ‘연못용’, 곧 백제 왕족의 핏줄이지만 평범한 과부의 아들이라 왕이 될 신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진평왕에게 존중받은 덕분에 인심을 얻어 즉위했다고 한다.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워낙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삼국유사>다. 역사적 사실도 일부 투영돼 있겠지만 어른거리는 그림자만으로 실체를 잡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서동이 노래를 지어 공주에게 정치적 주술을 걸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옛사람들이 세간에 나도는 노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뤘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동요’는 요(謠)다. 마을이나 들판에서 흥얼거리는 백성의 노래다. 그런데 요(謠)는 풍문이나 유언비어를 뜻하기도 한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 지배층에 대한 불만 등이 짧고 간결한 음악적 언어에 담겨 퍼져 나간 것이다. 역사의 행간에 가득 찬 백성의 소리였다. 민심의 바로미터였기에 위정자는 요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이런 노래를 옛 서책에서는 동요(童謠)라고 일컬었다. 그것은 아이들만의 노래가 아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동요가 강구(康衢, 길거리)에서 비롯됐다고 했다([성호사설] 제22권). 고대 중국의 성군 요 임금이 민심을 살피기 위해 길거리에 나갔다가 아이들이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아이들이 부른 노래지만 길거리 민심으로 받아들였다.

자식의 패륜으로 멸망한 후백제의 노래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삼한의 판도를 쥐고 흔든 후백제왕 견훤. / 사진:KBS
백성의 노래가 민심을 교란하거나 선동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서동은 거리에서 마를 나눠주며 아이들의 환심을 산 뒤에 자신이 지은 노래를 퍼뜨리도록 했다. 동요에서 하늘의 뜻을 찾는 게 옛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민심은 곧 천심(天心)이기 때문이다. 그 틈을 비집고 누군가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주술이 걸린다. 대표적인 것이 상징과 은유로 앞날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노래, 참요(讖謠)다. 동요가 민심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면, 참요는 민심을 요리하는 메뉴였다.

“가련하구나 완산 아이(可憐完山兒) / 아비 잃고 눈물 줄줄 흘리네(失父涕連洏)”

935년 후백제왕 견훤이 맏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금산사에 유폐되자 세간에 동요가 나돌았다. 아비 잃고 우는 아이에 빗대어 후백제의 멸망을 암시하는 참요였다. 후백제는 어쩌다 망국의 문턱에 서게 됐을까? [삼국유사] 기이 편 ‘후백제 견훤’ 조에 내막이 실려 있다.

견훤은 신라 말의 난세에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내고 가장 큰 세력을 거느렸던 인물이다. 900년 완산(전주)을 도읍 삼아 후백제를 세운 그는 고려 태조 왕건과 삼한의 주도권을 다퉜다. 공산(대구), 고창(안동) 등지에서 왕건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견훤은 늙어갔다. 후사를 도모한 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뒤였다.

고려 무신 멸시하는 문신의 씨를 말려라!


▎고려 시대 문벌귀족의 이상적 삶을 그린 [아집도 대련] 부분. 문신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을 담았다. / 사진:호암미술관
그는 10여 명의 아들 가운데 넷째 금강을 총애했다. 풍채가 좋고 지혜가 많아 내심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난 맏아들 신검은 절치부심했다. 이를 눈치챈 이찬 능환이 일을 꾸몄다. 둘째 양검, 셋째 용검과 모의해 신검을 보좌에 앉히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늙은 임금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거사는 935년 3월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신검을 옹립한 군사들이 새벽에 궁궐을 장악했고 견훤은 금산사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후계자로 낙점된 금강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자식의 패륜에 민심은 흉흉했다. 신검은 대왕을 자처하며 수습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후백제는 여전히 견훤의 나라였다. 백성의 마음은 금산사로 향했다.

그해 6월 견훤은 어린 자식들과 첩을 데리고 고려에 속해 있던 나주로 도망쳤다. 장사 30여 명이 지키고 있었지만 국부(國父)의 행보를 막지 못했다. 나주에서 견훤은 고려에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왕건은 상보(尙父)의 예우를 갖춰 늙은 영웅을 맞이했다. (신검 대신) 아버지로 존경하고 받들겠다는 뜻이었다.

견훤의 투항으로 후백제는 고려와의 경쟁에서 명분을 잃고 말았다. 삼한의 판도가 왕건에게 기울었다.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마저 항복하며 대세는 굳어졌다. 후백제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는 낌새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예감은 동요가 돼 길거리에 떠돌았다.

아비 잃고 눈물 줄줄 흘리는 가련한 완산 아이는 누굴까? 전주 호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금강일 수도 있다. 아버지의 실권은 후계자의 죽음을 의미했다. 어쩌면 새로 완산궁의 주인이 된 신검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쫓아낸 패륜아는 민심을 잃고 추락했다. 완산 아이는 결국 견훤이 낳은 후백제로 귀결됐다. 국부를 잃은 나라는 백성의 눈물을 뿌리며 이듬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어느 곳이 보현찰인가(何處是普賢刹) / 이 선을 따라가면 같이 칼에 맞아 죽으리라(隨此畫同刀殺)”

[고려사]에 실린 이 참요는 1170년에 터진 무신정변을 예고하고 있다. 보현찰은 곧 보현원으로 장단(파주) 남쪽의 사원이자 행궁이었다.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고려 제18대 왕 의종(재위 1146~1170)은 황음(荒淫)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문신들과 어울려 무시로 나들이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게 일이었다. 임금을 호종하느라 장수와 군사들은 나날이 지쳐갔다. 불만이 쌓이고 응어리가 맺혔다. 왕이 총애한 문신들은 대개 문벌귀족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내시(시종), 승선(비서), 기거주(기록관) 같은 관직을 얻어 국왕을 수행하며 위세를 부렸다. 문신들은 가문이 변변치 못한 무신들을 멸시했다. 나이 많고 직급 높은 장수들도 놀리거나 약 올리기 일쑤였다.

1170년 4월 28일 화평재 행차 도중에 대장군 정중부가 소변을 보러 가자 견룡군 무관 이의방과 이고가 따라나섰다. 이날따라 문신들은 배불리 먹으며 술판을 벌이는데, 장수와 군사들은 음식이 모자란다고 쫄쫄 굶고 있었다. 무관들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대장군에게 거사의 뜻을 밝혔다. 임금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문신들을 도륙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중부도 지난날 젊은 문신의 고약한 장난으로 수염에 불이 붙는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원로대신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었다. 화가 나서 욕했다가 오히려 명망 높은 문신의 노여움을 사 매를 맞을 뻔했다. 그는 무관들의 심정을 십분 헤아렸다. 단, 분통 터진다고 함부로 움직이다간 개죽음이다. 대장군은 그들을 다독이며 기회를 엿봤다.

1170년 8월 29일 의종이 연복정에서 흥왕사로 나갔다. 국왕은 궁에 돌아가지 않고 보현원으로 행차할 조짐을 보였다. 때가 왔다!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에게 보현원에서 결행하자는 뜻을 전했다. 행동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복두(幞頭, 관)를 벗는다. 그러지 않은 자는 모두 죽인다.”([고려사] 열전 ‘정중부’)

특권과 폐정 없애려는 백성의 열망을 노래


▎권신 이자겸은 십팔자위왕설을 내세워 사위이자 외손자인 인종의 왕좌를 넘봤다. / 사진:KBS
이튿날 의종은 보현원으로 가는 길에 오문(五門)에서 술판을 벌였다. 왕은 좌우에 술잔을 돌리고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펼치게 했다. 무예 겨루기로 주흥을 돋운 것이다. 그 자리에서 기거주 한뢰가 사고를 쳤다. 늙은 대장군 이소응이 상대를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한뢰는 쫓아가서 뺨을 때렸다. 노장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고, 국왕과 문신들은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승선 임종식과 지어사대사 이복기는 이소응에게 욕까지 했다. 무신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얼굴을 붉혔다. 정중부가 한뢰를 꾸짖었다. “이소응은 무부지만 관직이 3품인데 어찌 이리 욕보이는가.”([고려사] 열전 ‘정중부’) 의종은 정중부의 손을 잡고 달랬다. 어수선한 하루였다.

날이 저물어 왕이 보현원에 당도하고 신하들이 물러나는 틈을 노려 거사가 실행됐다. 임종식과 이복기는 문에서 맞아 죽었다. 한뢰는 기겁해 왕의 침상 밑에 숨었다가 끌려 나와 살해됐다. 야차로 돌변한 무신들은 문신들을 도륙했다. 보현원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장수와 군사들은 도성으로 향했다. 궁궐, 태자궁, 왕의 사저에서 숙직하던 신하들을 베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중신들을 처단했다. 개경 거리에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서리라 할지라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려라!”([고려사] 열전 ‘정중부’)

십팔자도참(十八子圖讖)과 이씨 역성혁명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최후를 맞는 무신 권력자 이의민. / 사진:KBS
우발적인 병란이 아니었다. 정중부는 64세의 노련한 장수였다. 사전에 치밀하게 거사 장소를 고르고 동선과 방침을 짜뒀을 것이다. 보현원은 장단에서 남쪽으로 25리 지점에 있었다. 한밤중에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거사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궁궐에서 즉각 파악하고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성에 들어갈 때도 그는 먼저 염탐하고 움직였다.

위의 참요는 거사에 앞서 민간에 나돌았다고 한다. 보현원에 따라가면 칼 맞아 죽는다는 풍문이 노래로 퍼져 나갔다. 신통한 예언일 수도 있지만, 누설된 정보일지도 모른다. 4월부터 거사를 모의했다면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새어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시대 중종반정과 인조반정도 거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소문이 파다했고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고려 시대 무신들의 정변이라면 더욱 허술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백성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것 같다. 하찮은 유언비어라고 무시했을까? 민심과 동떨어진 지배층의 태도가 엿보인다.

고려는 제8대 왕 현종(재위 1009~1031)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문벌귀족 사회로 접어들었다. 개경을 중심으로 문벌 세력이 형성됐다. 가문의 음덕으로 관직을 보장받고(음서), 토지를 세습하며(공음전) 온갖 특혜를 누리는 귀족 신분이었다. 대대손손 부와 지위를 향유하는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문벌귀족에게 둘러싸인 왕들은 나랏일에 흥미를 잃고 향락에 취해갔다. 끝없는 탐욕은 혼란을 불러왔고 갈등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인종 4년(1126)에 고려를 뒤흔든 이자겸의 난은 무소불위의 문벌 외척이 왕좌를 넘본 정변이었다. 반면 1135년 묘청의 난은 개경 문벌을 타도하고 고려를 갈아엎으려 한 서경 세력의 반란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무신정변이 터졌다. 참요에 담긴 백성의 간절한 마음을 음미해볼 일이다. 어느 곳이 보현원인가? 문벌귀족의 특혜와 국정 문란을 모조리 베어버리는 곳이다. 백성은 참요에 그들의 열망을 담았다. 여럿이 함께 부르면 노래는 기도가 된다. 하찮은 유언비어가 아니다. 본질은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참요는 흔히 도참(圖讖)을 끌어들여 왕조의 흥망과 시대의 급변을 노래한다. 도참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비기(祕記)나 비결(祕訣)을 지칭한다. 고려 시대에는 풍수지리에 관한 도참이 크게 유행했다. 도선국사가 고려 태조 왕건의 집터를 보고 삼한의 임금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송도기쇠(松都氣衰)’와 ‘연기순주(延基巡駐)’의 도참은 고려를 관통했다. 개경의 지기(地氣)가 쇠퇴할 테니 기업(基業)을 연장하여 왕이 순회하라는 것이다. 고려 왕들이 평양을 서경, 한양을 남경, 경주를 동경으로 삼고 여러 곳에 이궁(離宮)을 지어 머물렀던 이유다.

왕조의 변혁기에는 항상 참요가 성행


▎국보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 사진:문화재청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은 원래 중국 남북조시대에 당나라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참설이다. 십팔자(十八子)는 이(李)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이씨가 임금이 된다는 강력한 암시다. 이 참설은 고려에서 각종 비기와 결합해 이씨 역성혁명의 계시가 담긴 도참과 참요를 낳았다. 고려 예종·인종의 장인 이자겸은 십팔자도참(十八子圖讖)을 내세워 왕좌를 넘봤다. 사위이자 외손자인 인종을 독살하고 임금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 무렵 참요가 나돌았다. 평장사 김인존이 출근하다가 길에서 동요를 듣고는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누웠다([고려사] 열전 ‘김인존’). 이자겸이 어린 인종을 끼고 권력을 휘두를 때였다. 김인존은 조정에서 화를 입을까 봐 사직을 간청했다. 그가 들은 건 아마 십팔자도참의 노래였을 것이다.

이자겸의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은 명종 대의 무신 권력자 이의민이었다. 1193년 김사미, 효심 등이 경상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의민은 토벌군 장수인 아들을 통해 적과 손잡았다. 경주 출신인 그는 신라 부흥을 꿈꾸었다. 그러려면 민심을 움직여야 했다. “용손 열둘이 다한 뒤에(龍孫十二盡) / 다시 십팔자(更有十八子)”라는 옛 참요가 퍼져나갔다. 고려 왕 12명이 죽고 이씨가 국왕이 돼 신라를 다시 일으킨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의민을 가리켰다.

이자겸과 이의민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종과 최충헌의 손에 제거됐다. 그러나 이성계는 달랐다. 우왕 14년(1388) 어떤 동요에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군인과 백성, 젊은이와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고려사> 지 ‘요언’). 목자(木子), 곧 이(李)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해에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해 고려의 실권을 틀어쥐었다. 같은 이씨라도 십팔자(十八子)는 반역자로 전락했지만, 목자(木子)는 마침내 새 왕조를 열었다.

정도전, 권근 등 조선 건국 세력은 목자도참(木子圖讖)에 각별히 공을 들였다. 고려 서운관의 오래된 비기나 지리산 바윗돌에서 얻은 비결 등을 거론하며 이씨의 창업을 정당화하려 했다. 하지만 백성이 목자득국을 노래하고 역성혁명을 받아들인 것은 비기나 비결 때문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외적을 물리쳐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토지개혁으로 ‘이(李) 밥’ 먹도록 해준 백성의 은인이었다. 인심을 얻고 세력을 이뤘기에 백성의 노래가 널리 퍼져나가고 끝내 하늘을 움직여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왕조의 변혁기에는 항상 참요가 성행했다. 오늘날 정치적 격변기에 유언비어나 루머가 난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치가와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 온갖 말들을 지어내 세상에 주술을 건다.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은 힘이 세다. 그러나 인심을 얻는 힘은 결국 삶에서 우러나온다. 거짓 없이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이가 세상을 바꾼다.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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