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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의 평양리포트] ‘일본 안의 작은 북한’ 조총련의 실체 

‘지상낙원’이라며 동포 등 떠민 대민족 사기극 잊었나 

해방 후 재일동포 북송 앞장, 해외 자금줄 역할도 자처
조총련 행사 무단 참석은 법 무시한 재야 영웅주의일 뿐


▎1959년 12월 14일 북송 제1진 233가구 975명을 태우고 일본 신석항을 떠나는 최초의 북송선인 소련 선박 트보르스크호.
2010년 5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자격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사학 명문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에서 ‘최근 북한 동향과 한반도 정세분석’을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다. 반한(反韓) 성향이 강한 서승(徐承) 교수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원으로 있는 등 평화학을 강조하며 진보적인 대학이라 강연 수락에 고심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국제관계학과 나카토 사치오(中戸祐夫) 교수가 직접 방한해 강연을 요청했다. 나카토 교수가 1년에 한 번 정도는 평양을 방문함에 따라 관련 사정을 파악하고, 일본의 대북정책 연구 실태 등을 논의하기 위해 3박 4일 일정으로 교토를 방문했다.

예정된 강연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순조롭게 진행됐다. 소동은 90분에 걸친 강연을 마치고 추가 질의 응답시간에 벌어졌다. 일반 학생들의 단순한 질문이 끝나고 60대로 보이는 인물 둘이 자기소개도 없이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고 장황하게 친북 성향의 질문을 했다. 예를 들어 북핵 개발은 미국의 공격에 대응한 정당한 자위권의 발동이며, 북한의 주체사상은 최고의 이념이고,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미제의 속국으로 정통성이 없다며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문의했다.

20여 분에 걸쳐 요점 정리식으로 답변했으나 그들의 질문은 계속됐고 사회자인 문경수(文京洙) 교수가 마감 시한을 이유로 두 시간에 걸친 강연회를 종료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반발은 세미나 이후에도 계속됐다. 학교 만찬장은 물론 저녁에 호텔 숙소 앞에서 기다렸다가 필자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등 광신도처럼 집요하게 접근했다. 나카토 교수는 조총련 교토 지부 소속 조직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의 집착은 사상범 수준이었다. 교토 체류 3일간은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필자의 주장은 처음 들어보는 논리로서, 자신들은 김일성의 항일정신과 김정일을 추앙한다며 지속해서 논쟁을 걸어왔다. 그들이 평양을 가본적이 있다고 하길래 언제 기회가 되면 서울을 방문해서 비교하고 다른 시각을 갖고 한반도 정세를 보기 바란다는 말로 매듭지었다. 하루 이틀간의 대화로 의식을 수정할 단계가 아니었다.

조총련이 세운 초·중·고·대학까지 주체사상 주입


▎재일교포였던 문세광은 1972년 조총련에 포섭된 뒤 주체사상에 심취했다가 2년 뒤인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려다 육영수 여사를 살해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문세광은 “나는 바보였다”는 말을 남겼다.
일본에서 태어나 심한 민족차별과 멸시를 받다가 조총련이 세운 조선학교에 입학해서 편향된 교육을 받은 굴곡진 재일교포의 어두운 단면이다. 초·중·고 및 조선대학교로 이어지는 조총련의 교육 기관이 2,3세대 재일교포들에게 잘못된 역사의식과 세계관을 주입한 결과였다. 이들 조총련계 학교의 학습조 조직은 민족교육이라는 명분으로 김씨 일가의 주체사상 등을 가르치고 한국의 발전을 미제 종속이라고 비판했다.

오사카, 교토 등 일본 관서(關西)지방은 재일교포가 다수 거주해 과거부터 조총련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필자의 강연을 방해하라고 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으나 리쓰메이칸 대학에서 사전에 행사방해 금지에 대한 경고를 해 항의성 질문을 하는 선에서 끝난 것이라고 일본 교수에게 후문을 들었다.

조총련의 전신은 1945년 세워진 재일본조선인연맹이다. 이후 1955년 북한의 ‘해외 공민단체’로 조총련이 출범했다. 조총련은 결성 이후 일본의 북한 대표부 역할을 대행해 북한 방문자의 비자 발급 등을 처리하며 동시에 대남공작기관 기능을 수행한다. 평양은 한덕수 전 의장, 허종만 현 의장 등 지도부를 원격조종해 조총련을 조선노동당 일본 지부로 만들었다. 역대 조총련 의장과 부의장은 사망 후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매장됐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도 조총련에 포섭됐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구를 겨누다 실패해 육 여사를 숨지게 한 문세광은 당시 23세였다. 신장 180㎝, 몸무게 80㎏의 거구에 지독한 근시이며 권총 사격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였고 1972년 조총련에 포섭됐다.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서적에 심취했다. 1974년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선고를 받은 문세광은 법정에서 “사형이 진행되는 겁니까”라고 묻더니 1~2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알겠다”는 말과 함께 흐느꼈다고 한다.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서대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되는 날 입회했던 이들이 전한 그의 마지막 말은 “와타시와 바가데시다(나는 바보였습니다)”였다.

박 대통령은 문세광 배후에 대한 일본의 소극적인 수사에 분노했다. 한·일 관계가 수교 10년 만에 단절되기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는 정황이 2005년 1월 20일 공개된 사건 관련 외교 문서에서 드러났다. 일본 정부는 ‘문세광은 김대중 납치에 분개해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리려 했다’며 문세광을 두둔하는 듯한 묘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측의 사건 공동정범에 대한 수사 부진과 조총련에 대한 단속 미흡으로 한·일 간에 외교적인 갈등이 심화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측 수사 협조를 위해 미국에까지 협조를 요청했었다. 당시 시나 에쓰사부로 자민당 부총재가 총리 특사로 방한해 박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박 대통령은 특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일본 측 태도는 한국을 너무나 무시한 태도”라며 “만약 불행하게도 이런 사건이 재발할 시 양국의 우호 관계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조총련에 대한 단속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끝내 조총련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육영수 여사 저격한 문세광도 조총련에 포섭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북한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 조선의 어머님’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의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그의 어머니로 알려진 고영희의 모습. 일본에서 태어난 고영희는 1962년 만경봉호를 타고 부친과 함께 북한에 들어갔다. / 사진:연합뉴스
조총련의 가장 큰 과오는 재일교포의 북송사업이다. 북송사업은 평양 정보기관에 의해 기획 및 진행됐으며, 일본에서 북송사업 실행은 조총련을 통해 이뤄졌다. 조총련은 평양의 지령을 받아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했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됐다.

북송은 북·일 양측의 이해가 일치한 사업이었다. 6·25전쟁 이후 노동력이 부족했던 북한은 재일교포 송환으로 인력을 보충하고자 했고, 일본은 부담스러운 재일한국인을 강제 퇴거시키는 방법으로 북송사업에 합의했다. 초기에는 다른 배를 이용했지만 1971년 3500t 규모의 화객선 만경봉호가 취항하면서 재일교포의 북송을 전담했다.

김정은의 친모인 재일교포 출신 고용희(일명 고영희)도 이 배로 북한에 들어갔다. 고용희는 평양에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눈에 들었다. 그가 낳은 아이들이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이다. 북한이 고용희 띄우기에 나서지 못하는 건 북송 재일교포에 대한 주민들의 편견 때문이다. 북한에선 북송 재일교포를 ‘째포’라며 비하해 왔다.

1952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용희는 10살 때인 1962년 만경봉호를 타고 부친과 함께 북한에 들어갔다. 제주 출신 아버지 고경택(1913~1999)은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 중간 간부가 됐다. 이런 배경에서 일부 북한 간부층과 주민 사이에서는 김정은의 출생과 관련해 “원수님(김정은)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 줄기와 한라산 핏줄”이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고용희의 아버지 고경택이 일제강점기 육군성이 관할하는 히로타 군복공장 간부로 일한 경력도 껄끄러운 대목이다. 조총련 등이 고용희와 관련한 일본 행적 지우기에 나섰지만 군수공장의 비공개 자료가 몇 해 전 공개되면서 관심이 쏠리게 됐다. ‘수령의 항일투쟁’을 선전하는 북한의 논리대로라면 김일성과 빨치산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나선 일본군의 군복을 만들어준 게 고용희의 부친이란 얘기가 된다.

1984년까지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원산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에는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만경봉호는 1992년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맞아 조총련이 소속 상공인들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건조한 만경봉 92호로 대체됐다. 9700t급으로 커지고 탑승 인원도 350명에 달한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북한예술단을 싣고 입항했고, 일본과 북한을 오가며 조총련계 현금과 물자를 북한에 전달했다.

25년간 만경봉호에 재일교포 실어 북송 주도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 9월 2일 일본어판에 전날 도쿄에서 열린 조총련 주최 간토대지진 100주년 행사 기사와 사진을 게재했다. 무소속 윤미향(붉은 원)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 사진:연합뉴스
조총련은 ‘북조선은 차별이 없는 지상낙원’이라고 재일교포들을 선동하는 행동대장이었다. 재일교포 북송은 1937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자행했던 연해주 동포 17만 명의 대규모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와 유사했다. 재일교포 북송은 조총련이 앞장섰고, 스탈린의 강제이주는 소련공산당의 만행이었다.

교포들은 원산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지옥에 도착했다고 탄식을 했지만 이미 배는 일본으로 출항했다. 편지 검열 등 일본과의 연락이 금지됨에 따라 조총련의 허언에 속아 지속적으로 교포들이 생지옥으로 들어갔다. 일본에 남아 있는 교포들은 북한 땅에서 고생하는 친척들에게 매년 상당액을 송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많은 당사자가 북한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고, 일부는 탈북해서 북한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재일교포 양영희(59) 씨가 쓴 <북한에서 오빠는 죽었다(北朝鮮でオッパは死んだ)]는 만경봉호를 탔던 일가족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다. 조총련 열성 간부였던 양씨의 부모는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말만 믿고 10대 아들 셋을 만경봉호에 태웠고 평생을 자책했다. 조총련은 조선학교와 지역별 기관 등을 총동원해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보장되고 차별 없는 공화국으로 가자”고 집요하게 교민들을 설득했다.

복잡한 서류 절차를 조총련이 모두 대리해 줬기에 까막눈 동포들도 대거 만경봉호를 탔다. 북송 교포는 인질이 됐고, 일본에 남은 가족들은 조총련에 거액 충성 헌금을 내야 했다. 양씨의 부모도 30년간 북한의 아들들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뒷바라지했다. 밥은 굶어도 베토벤 없이는 못 산다던 장남은 끝내 우울증으로 죽었고, 차남과 삼남은 뭘 하든 “김일성, 김정일 만세”를 외치게 됐다.

북송 재일교포 중에서 약 200명만이 탈북했다. 가난과 차별에 질려 일본을 떠났는데, 북한에선 차원이 다른 빈곤과 박해가 그들을 괴롭혔다. 식량난, 물자난은 예사였고 평생 ‘쪽발이’ ‘째포’ 등의 소리를 들으며 숨죽이고 살았다. 조총련의 북송사업은 현대판 노예무역이었으나 조총련은 북송 64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사과한 적 없다.

(사)통일아카데미는 지난 2016년 한국과 일본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북송 재일교포 출신 탈북자 40명을 대상으로 북송 과정과 북송 후 북한에서 겪은 인권 실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북한과 일본 정부는 북송사업에 대해 재일교포들이 자발적으로 고향을 찾은 인도적 사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실제 북한으로 송환된 당사자들은 조총련의 거짓 선전과 설득으로 빚어진 유인·납치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겪은 소수자 생활과 교육, 취업 등 분야에서 겪은 차별이 만연한 상황에서 북한의 선전에 속아 북송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특히 북송된 재일교포들은 재일교포라는 이유만으로 북한에서 일상적인 차별과 불이익을 받아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대상자 가운데 33명(82.5%)이 차별과 불이익을 겪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이들은 당국의 감시, 결혼, 직장 배치, 승진 및 거주지 이동에서의 불이익을 겪었다고 답했다.

북송 교포들 맞이한 건 지상낙원 아닌 차별과 감시


▎1959년 12월 첫 북송선 출항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의 기사에는 ‘희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도쿄의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전시물.
북송자들이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조총련의 선전 및 권유’(30명, 75%)가 가장 많았다. ‘북한의 선전’(14명, 35%)과 일본을 거주하면서 느낀 ‘민족적 차별’(10명, 25%)이 그 뒤를 이었다. 북한 당국은 자유체제를 경험한 북송 재일교포들이 간부급으로 지위가 높아질 경우 체제 불안정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일반 주민들과 북송 교포들을 차별대우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차별 사례도 발표했다.

“와세다 대학에 예비합격한 아버지가 조총련으로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을 약속받아서 북한에 들어갔는데, 학교에는 못 들어가고 회령 탄광기계공장에 배치돼 용접공으로 근무했어요. 아버지께서 일본 귀국 의사와 생활 비관 등으로 전거리 교화소에 수감되기도 했는데 ‘간첩’, ‘종파분자’ 등의 욕설과 모욕을 받으셨어요.”(김순희 씨, 2003년 탈북)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안 조총련에서 저희 집에 찾아와 북한에 알몸으로 가도 잘살 수 있다고 선전했어요. 급식비를 못 내던 상황이었고 어머니도 아파서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북한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시고 6년 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1년도 안 돼 정신병에 걸리셨어요.”(김소자 씨, 2003년 탈북)

모 야당 국회의원은 지난 9월 1일 조총련이 주관한 간토 대학살 100주년 행사에 보란 듯이 참석했다. 그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행사는 무시하고 반인권적 참사인 북송사업을 조직적으로 진행한 조총련을 마치 평범한 시민단체인 듯 호도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거나 무지한 것이다. 간토 대학살 추도식에서 조총련 간부는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을 입에 올리면서 북한체제를 옹호하고 한국은 ‘남조선 괴뢰도당’이라고 비난하더니 행사에 참석한 야당 국회의원 등에게 ‘이남의 미더운 겨레들’이라고 칭했다.

어떤 야당 최고위원은 방송에서 1970년 대법원이 반국가단체라고 판결한 조총련을 “‘약간 다소 친북’ 성향이 있다. 이 정도인데 그걸 가지고 문제 삼느냐”고 언급했다. 해당 조총련 사이트에 자신들을 홍보하는 문구가 있으니 꼭 읽어보기를 제안한다. 조총련 강령 제1조는 “우리들은 모든 재일 조선동포들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주위에 총 결집해 조국 남북 동포와의 연계와 단결을 긴밀하고 강고하게 한다”라고 명기돼 있다. 조총련 사이트는 ‘북한의 국가적, 법적 보호를 받는 해외동포 단체’라는 설명으로 평양의 해외 공작기관임을 자인하고 있다. “북한을 열렬히 사랑하고 옹호하며 합병 합작과 교류 사업을 강화해 나라의 부강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등 평양을 흠모하는 문구로 가득한 강령은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우리 국회의원 격인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687석 가운데 5석을 조총련이 차지하고 있다. 역대 조총련 의장들은 김정은을 원수님, 김일성과 김정일을 대원수님이라고 부르며 충성을 맹세한다. 허종만 조총련 의장은 2020년 2월 국기훈장 1급과 로력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조총련은 한때 ‘일본 안의 작은 북한’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가 대단했었다. 전성기에는 조직원이 53만 명을 넘기도 했다. 조총련은 재일교포들이 파친코, 주류 판매 등으로 어렵게 번 돈을 설립 초기부터 북한에 지원해왔다. 그러다 북한 핵실험 이후 일본 정부의 대북제재로 조직이 크게 위축됐다. 특히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북한 국적자 입국 금지, 북한 선박 상륙 금지 등 추가 제재가 실시되면서 조총련의 입지도 좁아졌다. 50만 명이 넘었던 조총련 회원 수는 현재 8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총무성 통계에 따르면 이 가운데 북한 국적(조선적)은 2015년 말 3만3939명에서 2022년 말 2만5358명으로 9000명 가까이 줄었다. 북한 국적이 아닌 나머지는 일본 국적이거나 대한민국 국적이다.

전성기에 조직원 53만 명… 현재는 8만 명 추산


▎2022년 5월 28일 조총련 제25차 전체대회에서 도쿄조선문화회관 연단에 인공기와 김일성·김정일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조총련 간부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낸 서한을 대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우리 국민이 조총련과 무단 접촉하는 것은 남북교류협력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인 조총련의 구성원을 접촉하려면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른 사전 접촉신고가 필요하다. 굳이 50년 전 판결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남북교류협력법 제30조에는 ‘북한의 노선을 따르는 국외단체 구성원은 북한 주민으로 본다’고 돼 있다. 사실상 조총련을 염두에 두고 만든 조항이다. 조총련이 북한과 동일한 노선의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총련 인사가 한국에 올 때도 남북교류협력법 절차에 따라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북한사람이 한국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래도 조총련이 야당 최고위원의 말대로 “약간 친북 성향이 있는 단체”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야당 의원은 “이번 방일 행사와 관련해 일본에서 조총련 관계자를 만날 의도나 계획이 없었고, 정보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접촉을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별도 접촉신고 대상도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궁색한 변명이다. 야당 의원의 조총련 행사 참석은 헌법 위반으로 잘못된 국가관에서 비롯됐다. 속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국회의원 자격으로 최초로 조총련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기록을 세운 것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평양의 통일전선전술에 동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해외 반국가단체 행사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회의원이 대사관의 각종 지원을 받아 참석하는 행태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용인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9년 문익환, 1988년 서경원의 평양 밀입국 사건을 재야(在野) 영웅주의라고 회고록에서 폄하했다. 통제되지 않는 친북 운동권 인사들의 무분별한 위법 행태는 분명 실정법 위반이라고 평가했다. 조총련 행사에 무단 참석하는 국회의원의 행태는 재야 영웅주의의 복사판으로, 반복해서는 안 될 국기 문란행위다.

※ 남성욱 -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고려대 북한학연구소장을 지냈다. 201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뒤 후학 양성과 북한 문제 연구에 전념해오고 있다. [김정은의 핵과 경제](2022, 박영사), [북한 여성과 코스메틱](2017, 한울아카데미), [한반도 상생프로젝트](2009, 나남) 등 북한 문제에 관한 다수의 책을 펴냈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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